주간조선 > 사회 > 스페셜리포트 > '진보 진영은 왜 지젝에 환호하는가' (박용준 국제인문학잡지 INDIG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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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13100005&ctcd=C04



- 지젝 방한과 강연에 초점을 맞춘 기사 마지막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본문 인용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20세기의 위험한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불가능해 보이는 가능성에 미래를 거는 위험 속에서만 희망은 가능하다.

희망을 계속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과제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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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났다? 그것도 병이다!


 

[프레시안 books]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는 예상과는 달리 나 같은 출판 시장의 자식은 아닌 듯 했다. 나와 비슷한 기대를 하고 던졌을 법한 "당신은 홀연히 나타났는데 지금까지 어디 뭘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살고 있었다"라고 답한다. 
....... 
어디에 딱히 쓰여 있지는 않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런 착각을 한 번 해 보았다. 사상가가 아무리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라며 이 주제 저 주제를 건드려도 그는 결국에는 책을 사고 읽고 쓰는 종류의 사람이다. 이런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섣불리 남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사사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는 삶과 앎의 불일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런 담론들이 줄곧 삶(현실)의 편을 드는 것과는 달리 앎(책)의 편에서 그리 말한다.

.......
간만에 책을 참 좋아하는 사람의 책을 보았다, 는. 그것도 생물학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내가 민망할 만큼 한참 후배이긴 하지만, 비슷한 무리의 책과 사고방식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이 쓴 책을.

프레시안 6월 22일
/안덕배 프레시안 books 애독자

원문 보기: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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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저자는 낯설고 제목은 오리무중이다(파울 첼란의 시 구절이라 한다). 하지만 무심하게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자르기는커녕 책을 집어든 손이 무척이나 대견하게 여겨지는 책, 오랜만에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대체 어떤 책인가. 그나마 단서가 되는 건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부제다. 하지만 넘겨보면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같은 책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과 혁명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책 읽기 자체의 혁명성을 다룬다. 저자의 주장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닷새 밤 동안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주장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책을 읽어버렸다는 것’으로 다시 새기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야 말았다!”는 느낌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광기와 함께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독서의 즐거움은 신조차도 선망하는 어떤 것이다. 최후 심판의 날에 책을 옆구리에 끼고 온 우리를 보고서 신은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상상한다.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곧 책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에겐 불멸의 영광도 필요치 않다!

책을 읽고 쓴다는 게 어째서 그토록 대단한가. 그 자체가 혁명이고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령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은 한 마디로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그가 한 일은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궁극에는 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세계가 그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가 미쳤거나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농민의 아들에 불과했던 루터지만 성서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교황의 방해자가 되었다. 자신이 읽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책을 읽은 이상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루터는 말했다. 대천사에게서 ‘읽어라’는 계시를 받았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그는 신에게 선택돼 읽으라는 절대명령을 받는다. 문맹이었던 무함마드가 결국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고 잉태한 것이 <코란>이고 그로써 이슬람 세계를 만들어낸다. 무함마드의 ‘혁명’이다. 저자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거듭 주장하는 근거다.

이러한 혁명의 ‘본체’로 저자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망각에 묻혀 있던 이 로마법을 바탕으로 교회법을 대대적으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렇게 해서 집성된 것이 12세기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우스의 교령집이다. 이 새로운 법을 기본으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립되고, 바로 이 교회가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근대국가만이 아니다. ‘준거를 명시하다’는 실증주의 역사학 또한 법학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다. 더 나아가 12세기 혁명으로 탄생한 법학이 유럽의 첫 ‘과학’이며 모든 과학의 원천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한 변화를 낳은 혁명의 실상은 사실 수수하다. 단지 중세의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들이 홀로 책장을 넘기며 법문을 고쳐 써나간 것이니까. 사사키 아타루는 그러한 혁명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철학이 끝났다거나 문학이 끝났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체온을 약간 상승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현우<서평가·필명 ‘로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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