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이 영문학을 전공한 건 법대나 경영대에 가길 원했던 조부모를 향한 반항기 어린 낭만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트루먼 카포티나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자신의 문학적인 취향과 별개로 그는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었다. 그가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인 콜드 불러드』 같은 작품을 몇 번씩 반복해 읽는다고 해서, 그의 영업 전략이 은유적이거나 문학적으로 바뀌는 일 따윈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일찍이 삶의 어두운 이면과 짙은 그림자가 있음을 알려준 건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세 번씩 읽은 아이가 그것을 전혀 읽지 않은 아이와 똑같을 리 없었다. 

 만약 장사를 시작했다면 그는 분명 전자 제품이나 휴대전화 대신 꽃이나 책을 팔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네 꽃집이나 서점이 망해가는 현실과 달리, 그가 열었을 꽃집이나 서점은 발상을 뒤집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어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다. 현정은 지훈의 비범함과 상상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가장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지훈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소속되면서부터 지훈은 자신이 생각과 다르게 매우 잔인하거나, 더할 나위 없이 비열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사기꾼들의 언어이며 ‘내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전형적인 의미에서 이지훈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C 전자를 비롯해서 G 마트, L 생명보험, H 화학, L 항공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은행이나 증권예탁원 같은 곳에서도 다양한 강의를 맡아 사원들을 교육하는 현장에 파견됐다.
 지훈은 ‘강사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중앙 고위 공무원들을 위한 ‘다양성 매니지먼트’ 강의에도 투입되었고, 강성 노조로 유명한 한 제철 회사의 다문화 가족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도 참석했다. 다양성이 중요시되는 시기였다. 정부에서도, 기업 소속의 전문 기관에서도 다문화 가정과 지방의 인구분포도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양성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을 때, 최 부장이 갑작스레 관리팀으로 발령 났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인사였다. 최 부장이 커다란 계산기를 두들기며 사원들의 비품 관리나 회계장부를 들여다본다는 건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사팀에서 그의 컴퓨터 기록, SNS를 체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회사 정보를 이직하기로 한 다른 회사에 빼돌렸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기 시작할 무렵 조금 더 수상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일명 ‘최 부장 스캔들’은 마흔이 훌쩍 넘은 배 나온 대머리 남자가 사내에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쇼킹한 섹스 스캔들이었다.
 최 부장은 유부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회사 안에서 벌어진 사소한 연애 사건이었다. 그것이 여타의 연애 사건과 달랐던 건 상대가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뿐이었다. 평소 젖통이니 유방이니 소젖이니 하는 음담패설에 불편함을 느꼈던 여직원들은 그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숨기고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수군댔다.   
 연애 스캔들이 섹스 스캔들로 발화되는 과정은 사람들의 흥미를 폭발시켰다. 사람들은 음탕한 섹스 체위를 동원해 게이들의 혼음 파티의 한 장면을 상상했고, 회사가 강조했던 다양성을 중시하는 글로벌한 사내 문화 따윈 즉시 망각되었다. 뉴욕에서 온 디자인 팀장 마이클, 필라델피아 법인의 컨설팅 본부장인 앨런 역시 ‘커밍아웃한 게이’라는 사실 역시 그의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걸 조심하라고 경고한 건 부장님이었어요. 회사가 비열하고 치사하다는 건 말줄임표였고.”
 지훈은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은 안전하다는 안도감에서 시작된 불순한 감정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멍청해지는 지름길이 뭔 줄 알아? 사랑에 빠지는 거야.”
 최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퍽이나 낭만적이시네요.” 
 “그런 얼굴로 비꼬지 마!”
 “비꼬는 게 제 매력이라고 한 건 부장님이에요!”
 “그래서 널 보면 때때로 가슴이 두근거렸어!”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가장 기분 더러운 게 뭔지 알아? 해고당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이 회사를 나갈 수 없다는 거야. 네가 치사하고 비열하다고 말하는 이 회사가 대한민국에선 가장 자유분방한 곳 중 하나야. 별명이 문어대가리인 중년의 게이를 받아줄 회사 같은 건 대한민국에 없어.”
 최 부장이 사표를 내고 회사에서 나가던 날, 지훈은 사라진 그의 책상을 떠올렸다. 단지 책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때 최 부장이 점거하고 있던 공간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빈 공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딱 한 시간뿐이었다.
 그날 오후, 사라진 그 공간에 커다란 벤자민 화분이 들어섰다. 십일 년 근속자의 사표가 처리되는 방식은 너무 즉각적이라 모두가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그의 자리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던 어느 날, 지훈은 충동적으로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꽉 막힌 실내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기계 트랙을 반복적으로 달리는 일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책상에 앉아 있다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근육을 키운다는 건 힘을 키운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 년 동안 키워온 영문학에 대한 열정들, 가령 존 어빙이나 존 치버,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으며 이 세계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분석해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적인 단련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보스의 책상을 바라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퇴출, 해고, 구조조정이나 계약 종료 같은 구체적인 지옥의 언어들과 음모, 배신, 물 타기 같은 추상적인 지옥의 언어들은 늘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모 없이 외로운 소년기를 보내며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읽고 지냈던 소년에게 이 세계는 불친절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 위한 쓸모 있는 몇 가지 지혜를 전수했다.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콧등이 내려앉아야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심약한 육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훈은 피트니스 센터의 바벨 무게를 늘려나갔다.
 근육이 찢어지고 상처받으며 조금씩 두꺼워지고 부풀어갈 때마다 그는 가학적인 위로를 받았다. 수컷들이 과시적으로 만드는 근육들이 스스로의 근육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이러니를 그는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권투 선수의 가장 큰 미덕은 상대방을 잘 때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를 잘 가격하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잘 얻어맞는 것이다. 권투 선수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도 죽지 않는 건, 강펀치와 정확한 타격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총알이 쏟아지는 전시 상태에 몰아넣는 것. 그런 과정을 반복하며 맷집을 키우는 건 백 퍼센트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살다 보면 이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살 때가 더 많다. 맞아도 덜 아프기 위한 최선에 대해 몸서리치면서.
 외할아버지가 말했었다.
 사람은 역사와 경험에서 삶을 배운다고.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반대파들에게 독살 당할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것은 생에 대한 본능을 강렬히 자극했다. 삶을 체험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일견 독창적인 것이었다. 일부 귀족들은 매일 미량의 독을 섭취하며 여러 가지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웠다. 그리고 그 비결을 은밀히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지훈은 조용히 바벨을 내려놓았다.
 피트니스 센터의 처음과 마지막 손님은 늘 자신이었다. 그는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했고, 밤이 되면 자신의 손때가 묻은 그 바벨을 다시 잡고 한 시간 동안 운동한 후, 어두운 복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선 현정에게 습관적으로 안부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날은 그녀의 전화기가 꺼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현정의 전화기는 꽤 긴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문자를 보내면 ‘미안. 자느라 전화 소리를 못 들었어’라는 답장이 왔다. 딱히 걱정이 되거나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런 일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이었다.

 

*

 

 이지훈은 둔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이별을 ‘전혀’ 예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내뱉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지훈의 삶을 채우고 있던 많은 것들,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갖게 되는 자신만의 ‘조사’와 ‘접속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훈의 삶에 ‘하지만’이나 ‘그러나’ 같은 접속사는 없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열심히 하는 척하거나, 애인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지훈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지훈은 자기 인생에 ‘사랑하지만 떠난다’ 같은 말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고, 사랑이 여기까지이기 때문에 헤어지고 갈라서는 것이다. 솔직할 용기가 없어서 내뱉는 애매모호한 말들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뿐이다.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네가 미워서도 싫어서도 아니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겠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현정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현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훈의 일상은 온통 ‘그러나’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접속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차라리 이것이 자신의 비밀 연애를 알아챈 회사의 음모라고 믿는 쪽이 나았다. 한국 여자와 연애 금지. 어느 날, 뜬금없이 인도의 뭄바이로 발령이 나고, 힌두어를 배우라는 지시가 떨어지는 쪽이 현실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동차에 뜬 유류 경고등을 지켜보며 지훈이 생각한 건 그러나 역시 현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이렇게 있는 것은 더 힘들었다. 지겨울 정도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질문의 연속들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1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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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이 입사한 A 컨설팅 회사는 다국적 기업으로 다양한 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상 활력팀’이란 괴상한 이름의 부서도 있었는데, 지훈이 원한 건 바로 크리에이티브한 일과 관련된 그 부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업 교육’이라는 뜻밖의 업무가 맡겨졌을 때, 지훈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를 가르친 경험이라면 대학생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잠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했던 게 전부였다. 수영이라면 개헤엄밖에 칠 줄 모르는데, 뭔가 대단한 행정 착오로 특별 해양구조대의 일원으로 차출돼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며칠 동안 결국 사표를 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매달 집세를 내야 했고, 대출받았던 대학 등록금도 상환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양원에 있는 형을 위해 저금을 해두어야 했다. 물론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건 간단치 않았다.
 그는 결국 회사의 선택을 증명하는 쪽으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저녁을 간단히 김밥이나 피자 같은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일도 잦아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유명 강사들의 동영상 파일을 보며 특유의 몸짓이나 강의 스타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컨설팅 교육 팀에서 받은 다양한 해외 자료들을 읽어보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야근이 계속됐지만 이런 생활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너, 네가 담당하고 있는 기업 교육이 얼마나 심층적인 건지 모르지? 그냥 자료 찾아 리포트 나눠주고, 강연하고 그런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교육이야말로 컨설팅의 기본이야.”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날, 최 부장이 술자리에서 지훈에게 말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게 저랑 잘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말은, 그러니까 모르는 걸 직접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초등학생이랑 대학생이 같은 문제를 두고 같은 판단을 내릴 것 같아?”
 “회사가 대학생이란 얘기예요?”
 “네가 초딩이란 얘기지. 회사가 사원의 사적인 경험까지 설계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고민을 회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길 절대 원치 않는 건 오히려 회사 쪽 입장이었다.
 “이봐, 이지훈. 회사는 괴물이야. 빅브라더라구. 누가 날 자르는지 누가 내 진로를 결정하는지 아무도 몰라. 널 내 라인에 집어넣기로 결심했으니 내가 재밌는 얘길 하나 해주지.”
 최 부장은 500시시 생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켜며 연달아 트림을 해댔다. 콧잔등 위엔 하얀 맥주 거품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느 기업이 특정 사원을 뽑아놓았을 땐, 다 그만 한 이유가 있으며 그의 미래는 어느 순간, 회사에 의해 정해진다는 건 최 부장의 논리였다. 아시아 시장을 성장의 동력으로 보고 그것에 주력하고 있는 모 선박 회사의 경우, 미래에 인도 법인을 키우기 위해 인도 전문가를 뽑았다. 흥미로운 건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이 인도 전문가로 키워질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남자는 계속 외국을 떠돌며 실질적인 업무 경험을 쌓는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영국, 다시 인도. 짧은 파견 기간이 끝나자 그는 인도의 델리나 뭄바이에 있는 현지 공장을 돌며 다시 일을 배운다. 석회질이 가득한 인도 현지 물을 마셔가며 설사와 배앓이를 하던 초창기와 다르게 그는 점점 인도의 물과 흙과 공기에 적응해간다. 물론 어떤 말을 하던,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일수록, “NO PROBLEM!”이라 외치는 인도인 특유의 정서에도 적응한다.
 계속해서 척박한 풍토의 나라를 떠돌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진력이 날 즈음, 남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나 독일의 베를린 같은 곳에서 회사가 제시한 파격적인 교육 연수의 혜택을 받기도 한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드는 회사 연수의 대가로 그가 지불해야 하는 건, 몇 년 동안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불허하겠다는 회사 측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청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회사의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흘러간다. 스물네 살 청년은 서른이 되고 곧 삼십 초반을 넘어서게 된다.
 “너,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외국으로 뺑이 돌리듯 돌려대는 거.”
 최 부장은 이제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심호흡을 하며 지훈을 바라봤다. 술을 들이켜며 계속 코를 벌름거리느라 그의 콧구멍에는 더 많은 공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봐봐. 일단 남자의 동선을 잘 살펴보면 회사가 그 남자를 잠시도 서울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단 공통점이 나와. 이유가 뭐겠어?”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서울 본사에서 일할 만큼 능력이 없어서?”
 “당신도 그런 생각이 들지? 근데 아니야. 그건 서울에서 한국 여자를 사귀지 말라는 소리야.”
 “얘기가 이상하게 튀는데요?”
 “왜냐!”
 최 부장은 잠시 지훈을 바라보더니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말 설고 물 설은 인도에서 뿌리박고 평생 살겠단 여자는 별로 없 거든. 인도가 뉴욕이나 파리도 아니고, 폼 안 나잖아? 게다가 한국 여자 뒤에는 한국 엄마들이 버티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딸 가진 엄마들이 좀 극성이야. 딸내미 인도 가서 산다면 카레 해 먹이면서 버선발로 반대하겠지. 카레는 내가 평생 질리게 해주마. 넌 인도 가지 마라! 걔랑 당장 찢어져!”
 “그러다 독신으로 늙어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설마 회사가 독신주의를 원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 회사는 나 같은 독신남을 정말로 싫어해. 외로워서 술 처마시고, 룸살롱 가서 헛돈 쓰고 지랄하는 애들을 회사라고 좋아하겠어? 돈 벌어오라고 꽥꽥 소리 지르는 와이프도 있고, 학교 보낼 애들도 주렁주렁 매달려야 홧김에 사표도 안 집어던지고 충성 복무하면서 암에 걸리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할 거 아냐?”
 “그러니까, 부장님 말의 요지가 뭐예요?”
 “아직도 모르겠어?”
 답답하다는 듯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인도 여자 사귀란 소리지 뭐야! 현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면 인도 문화를 깊숙이 알게 되고, 그럼 그 여자의 오랜 경험이 이 남자에게 이식되겠지. 힌두나 이슬람 문화를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부인이 인도인인 이 남자는 외국인이지만 인도 법인에서 벌어지는 직원들 사이의 갈등을 조율할 때도 인도적인 마인드로 접근할 수 있는 거야. 황당한 이유로 파업을 하거나, 더 황당한 이유로 배 째라고 웃통 벗고 사표 던지는 미치광이 인도 직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인도 시장을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제품을 만드는 데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거야. 한마디로 인도인 부인이 그 남자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는 거지. 이거야말로 완벽한 현지화 전략이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남자는 애초에 인도 법인의 사장으로 키워질 인재였다는 거야. 회사가 그 남자가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미리 다 설계해놨던 거라고. 어릴 적 잠시 뭄바이에서 살았다는 게 회사가 그를 선택한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거 소설 같은데? 정말이에요?”
 “초딩이 머리 굴리지 말고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소리야!”
 “근데 회사가 개인 메일을 체크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겨우 이메일만? 모르는 게 약이야.”
 “언젠 아는 게 힘이라더니.”
 “귀걸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야, 끝!”
 최 부장의 불콰한 얼굴을 보며 지훈은 앞에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거나한 그의 트림 소리는 시끄러운 가요에 묻혀 사라졌다. 
 그날 이후, 지훈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메일은 회사 랩톱 컴퓨터가 아닌 개인 노트북으로 썼다. 

 회사에선 컴퓨터로 개인적인 메신저나 쪽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공식적인 일과 비공식적인 것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회사에 입사한 지 삼 년 후,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이건 그저 비즈니스적인 판단일 뿐이에요”라고 잘라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놀랍고 급격한 변화였다.

 

 

(1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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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시속 150킬로미터

 

  12월 13일.
 이지훈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C 전자의 천안 연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막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지훈은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12월에 부는 시베리아 북서풍에도 흰색 면봉 같은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목련과 활짝 핀 개나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차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훈의 검은색 중고 소나타 뒷좌석 왼쪽에는 강의 때 갈아입을 양복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두 장의 화이트 셔츠가 걸려 있었다. 모두 현정이 백화점 세일 기간에 산 것이었다. 차 트렁크에는 오랫동안 신어 뒤꿈치가 닳은 뉴발란스 운동화가 있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이세이 미야키의 검정색 터틀넥 풀오버,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의 그레이 992, 어디선가 익숙한 듯 보이는 이 조합은 1998년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이었다. 지훈은 그것이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전의를 불사르기 위해 그가 입는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H 그룹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롤 모델’ 교육을 하다가 지훈은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을 흉내 냈다. 그의 왼쪽 시력은 1.5에 가까웠지만 그는 가끔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안경은 잡스가 착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도쿄 출장길에 오모테산도힐즈의 한 안경점에서 산 것이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다가 발동한 특유의 장난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실제로 종종 지훈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점점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도 못 말릴 신경질과 강박적인 식습관, 췌장암에 걸린 것만 빼면 잡스는 여러모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를 벗어 던지자 다소 차갑게 생긴 그는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는 엉뚱한 천재 타입의 남자처럼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Y 마트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 교육에선 캔 커피와 초콜릿 쿠키 상자를 가득 넣은 커다란 마트용 쇼핑카트를 끌고 나왔고, 점심 후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며 근무 환경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강의할 장소의 화장실에서 얻는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도 금세 알아챘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 바퀴가 달린 여행용 플라이트백, 등산용 배낭과 가발 등은 그의 강의 소품이 되었다.
 이지훈은 기업 강연계의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 환경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딱딱한 강의에 적절히 유머를 섞었고, 쉬운 비유와 많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선 늘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을 받았다.
 “애인 있으세요?”
 “결혼하신 건 아니죠?”
 그때마다 지훈은 웃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주실 겁니까?”라고 가볍게 질문을 피하며 되물었다. 서비스센터 직원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첫 번째 고정 매뉴얼 같은 말이었다.

 

 

 지훈이 다니는 회사의 남녀 성비율은 7 대 3 정도로 남자들이 많았다. 회사 내의 연애가 전적으로 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20년이 되면 여자가 없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걸?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별로 해소되고 있지 않잖아? 한민족 단일국가설은 이제 끝났어. 철저한 부익부 빈익빈이야. 정글이야, 정글! 우리 회사만 해도 절대적으로 그렇고.”
 마흔넷이 넘도록 미혼인 최 부장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엉뚱하게 비꼬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여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태어난 최 부장이 막 딸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대신 계절마다 머리를 염색하고 ‘소녀시대’나 ‘빅뱅’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별난 중년이었다. 
 그가 ‘싱싱한 난자’나 ‘젖’ 같은 단어를 들먹일 때마다 지훈은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나 정육 코너에 진열된 젓갈들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최고급 젓갈 세트를 선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훈은 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커다란 명란젓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가,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생선알도 못 먹는 거야? 난 명란젓 진짜 좋아하는데. 명란젓은 좋은 참기름을 뿌려 먹는 게 최고야!”
 지훈은 젓갈 세트를 몽땅 들고 현정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압력밥솥에 밥을 뜸 들였다. 그리고 금방 한 뜨거운 밥 위에 가위로 자른 명란젓을 올려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 천천히 밥과 섞기 시작했다. 곧 부풀어 있던 밥 알갱이가 오톨도톨한 명란과 섞여 보기 좋은 핑크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몇 번이나 “네 인생이 식도락과 거리가 먼 건 진짜 비극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훈을 놀렸다.
 요리를 좋아하는 현정은 지훈을 위한 음식도 만들었다. 명란젓과 신선한 올리브와 파프리카를 넣은 샐러드, 그리고 지훈을 위해 명란을 익혀서 만든 오므라이스였다.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뿌리며 지훈이 말했다. 
 “싱싱한 난자를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싱싱한 정자를 먹는 맛이 어떤지는 내가 좀 아는데.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까?”
 현정이 명란젓을 포크로 콕 찍어 올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좋아”라고 말하다가 참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현정의 입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훈이 설거지를 했다. 현정이 함께 볼 DVD를 고르는 동안 지훈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지훈과 현정은 <위기의 주부들>의 6시즌 7화를 보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정자의 맛을 음미하는 섹스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현정은 침대에, 지훈은 구부러진 소파의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지훈은 현정의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침 자국을 바라보았고, 현정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느라 쿠션의 격자무늬 자국이 잔뜩 찍힌 지훈의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위기의 주부들> 1, 2, 3, 4, 5시즌을 함께 본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풍경이었다.
 <위기의 주부들> 2시즌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시즌이나 4시즌의 절반이 지나갔을 때쯤, 그것이 현정에겐 엄마 이야기이고, 지훈에겐 형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의도적으로 엄마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각자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졌다. 현정은 오이를 먹지 못했고, 지훈은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생선회를 가장 좋아했던 현정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지만, 지훈은 눈에 보이는 족족 우유를 마셔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칼슘을 우유로 섭취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는 법을 영리하게 터득해나갔으므로 이들의 연애 전선에 끼는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지 않고 근처에 머물다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 날 저녁, 지훈과 현정은 친구들을 불러 프라이드치킨과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맛 나초를 먹으며 포커를 쳤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닭 뼈다귀들 속에서도 이들은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봤다. 베드신과 키스신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섹스는 이미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지훈은 잠들어 있던 현정을 껴안았다. 현정은 간지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릴 때조차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고요히 사정했다. 현정은 익숙한 듯 그의 목덜미에 달큰한 침을 발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훈은 콘돔을 크리넥스에 싸서 버리고, 출근을 하며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갈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맨이었다. 기업 강연과 대중 강연을 병행하는 컨설턴트 강사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다. 그럴수록 비공식인 일에 대해선 그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지금 이 속도로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면 아직 퇴근 전인 현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한 턱이 날카로운 바람에 따끔거렸다. 수염이 면도로 약해진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1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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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봄>이 절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강은 하얀 도자기 접시 위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손수건은 방금 전 다림질을 끝낸 것처럼 보드라웠고 아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강은 뺨 위에 손수건을 댄 채, 이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위로와 격려일 리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로.
따뜻한 음식으로 구성된 세심한 식단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위무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실연을 선언하는 모임이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해요. 제 자리는 저쪽이에요.”
미도가 사강에게 인사하며 뒤돌아섰다.
사강은 미도가 걸어가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 남자 쪽으로 가볍게 몸을 틀더니 세 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곧 주최 측으로 보이는 사람이 미도를 남자 옆에 안내했다. 사강은 미도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안경을 쓴 남자와 사강은 세 번,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럴 땐 상대가 누구든 최대한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사강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꼬고 있던 긴 다리를 자연스레 바꾸어가며 들고 온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외국계 경제신문이고, 주식과 환율 관련 섹션이라는 걸 사강은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주식 계좌 수를 자랑하던 여의도 증권가 남자가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의 시차 때문에 룸살롱에서 술을 마셔도 주식 장이 파하는 세 시부터 마시고 오후 여덟 시면 술자리를 파하고 퇴근한 후,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한다는 남자였다. 이 남자의 시간이 다른 사람과 달리 거꾸로 뒤집혀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한두 번 더 그를 만났었다.
남자는 무엇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열세 시간의 비행 동안 단 한 순간도 잠자지 않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비즈니스석 승객 같았다. 끝도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게 그런 비즈니스맨들의 특징인데, 마실 때마다 기내에서 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는 얼굴인 것도 비슷했다. 남자의 두 눈은 열두 시간 동안 컴퓨터만 들여다본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뺨은 윤기 없이 건조했지만 그것은 실연의 흔적이라기보단 전날 야근을 하거나 숙취로 피곤한 얼굴처럼 보였다. 남자가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얼룩 없이 반짝였다. 유일하게 실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면도하지 않은 까칠한 남자의 턱뿐이었다.   
뭐가 바빠서 실연당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런 곳에 와서까지 신문을 보고 있었던 걸까. 혹시 이런 이상한 풍경 스케치가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인터넷 신문 기자라도 되는 걸까.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뭔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사강은 남자에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실연당한 날 아침에도 남자들은 경제신문을 읽으며 그날의 주가 동향을 파악하고 주식 투자를 하는 걸까. 그럴 지도……. 이혼 서류가 접수된 다음 날에도, 여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위해 아침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수의 얼굴을 보면 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강은 그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이길 원했다.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노래한 건 김광석이었다. 그러나 청바지와 오래된 통기타가 그토록 잘 어울렸던 서른둘의 남자는 청춘의 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정수에게 샤넬 스카프를 생일 선물로 받던 날, 사강은 그것을 목이 아닌 오래된 가방 끈 위에 묶었다. 목에 매고 있으면 어느 날 그것이 이사도라 덩컨의 스카프처럼 자기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올 이유는 한 가지다. 사강은 이제 남자가 실연당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이곳에 온 스물한 명 중에는 미도의 말처럼 자신이 미래의 커플이 될지도 모른단 은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텅 빈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응시했다.
회칠한 하얀색 벽 위에는 커다란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거울은 사강이 볼 수 없는 창 너머 반대편 거리를 그림처럼 비추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정류장의 빨간색 지붕이 삼분의 일쯤 잘려 그녀의 동공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거울 안으로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사강의 눈빛이 거울에 채 머무르기 전에, 남자는 그림 안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사강은 남자가 걸어갈, 그러나 거울 속에선 보이지 않는 거울 밖 잘려 나간 길들을 상상했다. 
빈 의자 너머, 거울에 담긴 거리 풍경을 사강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나가고, 여자가 지나가고, 다시 남자가,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지나갔다. 손을 꼭 잡은 연인이 느릿하게 거울 속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댄 여자의 뺨이 햇빛 속에 반짝거렸다.
사강은 행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길 원했다. 그녀는 상냥한 얼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사강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맞은편 빈 의자에 살아 있던 과거의 정수와 죽어버린 미래의 정수가 있었다. 사강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빈 의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모던한 레스토랑의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빅토리아풍의 벨벳 의자. 누구도 쉽게 기억해낼 수 없는 오래된 시대를 재현한 모조품 위에 지나간 한 세월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부재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마지막 식사였다.
사강은 미역국을 수저에 가득 담았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을 입술에 대자 정수와 함께했던 기억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이 고통스런 재판의 피고이자 배심원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맞은편의 빈 의자가 말하는 바를 묵상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먹고, 밥알을 씹으며. 그것은 불행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둘로 분리되는 것을 조용히 사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강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국을 뜨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자꾸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코는 만취한 남자의 그것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눈물만큼 전염성이 강한 건 없다. 누군가 울음을 참고 있었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두 번째 메뉴가 나왔다.
그때,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를 끄는 날카로운 소음 때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미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지훈 씨! 잠깐만! 잠깐만요!”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동요한 몇몇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미도는 곧장 일어나 달리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한 여자가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강은 그녀에게 말없이 들고 있던 구겨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1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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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로 영화제를 알렸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할 공간을 대신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편의상 그것을 ‘실연의 기념품 가게’라고 불렀다. 사강은 레스토랑 입구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바라봤다. 바로 저 상자에 사람들이 가져온 실연의 흔적들이 버려질 것이었다.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있을까.
한낮의 눈부신 태양 속에도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
연애가 끝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긴다. 서로를 기념해주었던 반지와 이니셜이 박힌 목걸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구입한 싸구려 액세서리들, 여행 중 면세점에서 충동적으로 사들인 고가의 실크 스카프와 가방, 책, 음반…… 그는 좋아하지만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던 뮤지션의 공연 티켓과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시폰 프릴이 달린 스커트, 진분홍색 메리제인 슈즈, 브래지어 끈이 살짝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 같은 옷들, 혹은…… 원하지 않는 아기, ‘러브 차일드’라 부르는 아이들이 남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연애가 끝나고 사랑이 죽고 나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범죄 현장의 유류품처럼 남는다. 
실연 후 남게 되는 이런 물건들의 공통점은 버리기도 힘들고, 가지고 있기는 더더욱 힘들다는 것이다. 실연이 남긴 이런 얼룩을 클리닝하는 세탁소가 환영받는 건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만약 그런 세탁소가 존재한다면 지우기 힘든 얼룩이 가득한 세탁물을 든 손님들로 가득찰 것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누군가에게서 받은 상처의 기념품들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있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고 치자. 처리하기 힘든 이런 기념품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교환의 방식은 실용주의자들의 발상이다. ‘실연의 기념품 가게’는 일 주년 기념 반지를 종로의 금은방에 팔아치우는 것보다 한결 품위 있었다.  
집단적인 상처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풍경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누군가의 상처가 자신에게 돌아오고, 자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되돌아가며 상처의 모서리는 무뎌지고 치유되어 가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들은 실연의 기념품에 묻은 슬픔이나 분노,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치유는 이곳에서 가장 큰 희망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영화제의 이름조차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가 아닌가.
사강은 그저 웃고 싶어서 보는 예능프로그램에서조차 치유를 이유로 고해성사하며 우는 연예인들을 보는 게 불편했다.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도, 염색을 하지 않으면 온통 백발인 한물간 액션 배우도,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전성기 때와 완전히 얼굴이 달라진 여배우도,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유명세를 치르며 겪었던 고통을 얘기했다. 눈물로 가득한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한결같은 메시지가 주는 압박감에 사강은 피로감을 느꼈다. 저렇게 눈시울을 붉히는 대가로 얼마를 받고 있을까. 우는 사람보다 그것을 보는 사람 쪽이 훨씬 더 힘들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연 이후, 그녀는 자신이 필요 이상 시니컬해진다는 것도 잘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만졌다.
사강은 자신이 왜 이곳에 나와 있는지를 상기하려고 애썼다. 혼자 맞는 아침이 두려워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더구나 사람들이 말하는 위로나 치유의 문제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치유받는다는 게 대체 가능한 일일까. 치유도, 용서도, 결국 자신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강은 제일 먼저 가방 속의 이 물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가방 속에 든 이 지긋지긋한 물건과 헤어지는 행위만이 그녀에게 중요했다.

                                         

                                                                    *

 

레스토랑의 좌석 배치가 이루어졌다.
영화제 주최 측에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평온하던 공기가 일순간 변하며 어수선해졌다. 레스토랑 안에는 이제 비발디의 <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봄에 봄의 음악을 틀어놓는 것만큼 따분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선 어쩐지 따뜻한 환대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사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수록 그녀는 점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곧 다른 곳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강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스물한 개의 의자가 그녀의 맞은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사강과 사람들이 일렬로 나란히 앉았다.
누군가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사강의 목덜미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맞은편에 놓인 스물한 개의 빈 의자가 의미하는 건 너무 자명해서, 이곳에 있는 누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커플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 의자는 실연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때때로 차가운 손을 잡아주고 웃으며 함께 밥을 먹던 애인은 사라졌다. 맞은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빈 의자는 “이제부터 넌 혼자 밥 먹는 연습을 해야만 해!”라고 열창하는 중이었다. “혼자 먹는 밥도 괜찮아! 맛있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검정색 스웨터를 입은 안내자들은 만찬이 시작될 좌석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의자에 이름표가 붙어 있진 않았지만 그들은 의자에 누가 앉아야 할지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안내자들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규정을 지키듯 약속된 동선 위를 조용히 움직였다. 대신 미소 지은 얼굴들은 이곳에 온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듯 온화했다. 그러나 그런 상냥함 때문에 방석이 놓인 폭신하고 따뜻한 의자에 앉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더 절실하게 인식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소화 장애에 시달렸고, 수면제로는 해결되지 않는 불면증 때문에 심한 수면 부족 상태였다. 눈동자가 충혈되더니 귓불과 목덜미까지 붉게 상기되는 사람도 있었다. 맞은편의 텅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리는 여자도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긴 나무 테이블 위에는 진열장에서 막 꺼낸 듯 보이는 흰 도자기 그릇과 손수건 스물한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아침 식사를 위한 것인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손수건 위에 행운을 의미하는 네잎클로버가 수놓아져 있다는 것으로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9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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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의 이별은 거의 일 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주 충혈됐다. 그녀는 밭은 재채기를 종종 내뱉었다. 가혹한 봄날이었다. 손수건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손수건마저 정수가 사강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와 연결되지 않은 물건을 찾는 게 불가능해질 즈음, 사강은 실연이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듯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사물을 그와의 기억 쪽으로 되돌리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걷던 길에 이런 나무가 서 있었어.
그와 함께 먹던 음식에 이런 토끼 귀 모양의 은빛 스푼이 놓여 있었지.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지.
그와 함께 보던 영화에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흘러나왔어,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헤어지길 잘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별이 진짜 이별일 수는 없다. 아흔아홉 살에 죽음에 이른 노인의 자연사를 절규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강에게 실연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 칼날을 겨눈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칼날을 목 위에 대기 전 자신의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던 날 밤, 사강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뜬 문장을 읽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그녀는 잠들지 못한 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를 클릭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

 

사강은 손가락으로 실연이나 치유 같은 단어들을 쓸어내렸다. 각각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클릭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설명되어 있는 몇 개의 카테고리가 나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치유’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영화제라는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00일의 썸머>
<러브레터>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

 

사강은 세로로 정렬된 영화 제목을 하나씩 클릭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와 촬영 스텝에 관한 정보들이 떴다. 모두 실연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사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에서 ‘실연’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그리고 탈칵, 소리와 함께 새롭게 넘어가는 화면을 지켜보았다. 

 

       실연은 오래  

 

화면이 부유하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문장을 밀어내고 있었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사강은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다가 눈을 감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눈물이 동공 위로 서서히 차올랐다. 눈을 뜨면 곧 낙하할 뜨거운 웅덩이를 사강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이별은 ‘하는’ 것이지만 실연은 ‘당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별 당하다’라고 말하거나, ‘실연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일시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  
실연 후, 사강의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 쪽으로만 회귀했다. 과거가 그 모든 시간과 가능성을 빨아들였다. 실연은 기쁨과 슬픔, 회한과 쓸쓸함, 분노 같은 모든 감각들을 거대한 분화구의 화산재처럼 덮어버렸다. 미래 역시 과거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치도 나아가지 않은 너무나 익숙한 미래. 실연은 그렇게 사강에게 오래된 미래가 되었다. 
사강은 트위터를 보며 ‘미래’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곧이어 ‘저랑 함께 아침 드실래요?’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실연이 미래를 낳고, 미래가 아침 식사를 낳고, 아침 식사가 치유를, 치유란 단어가 다시 기념품이란 단어를 밀어 올리며 상처란 명사로까지 옮아가고 있었다. 
실연을 어루만지는 단어들이 겨우 아가미를 내밀고 흘러와 ‘외로움’이란 이름의 호수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그것을 간증했다. 자신의 실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회한이 이 조찬 모임에 처연한 색채를 덧씌웠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새벽기도회를 연상시켰다. 사강은 가방 속의 물건들 역시 성경책만큼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너무 무거운 얼굴들이에요.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기분이 들구요.”
미도가 말했다.
“헤어진 애인의 상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거겠죠.”
“이런 분위기면 전 밥 먹다 체할 것 같아요. 소화제 가져올 걸 그랬어요. 꼭 <최후의 만찬> 같지 않아요?”
“예수님 제자는 열 두 명뿐이에요.”
“그런가? 제가 한번 몇 명인가 세어볼까요? 눈치 못 채게 셀 수 있어요.”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미도는 사람들을 나지막이 세어보며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몇몇이 사강과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마침내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 만족스런 얼굴로 사강에게 “스무 명이네요”라고 속삭였다.
사강은 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미도를 포함해 모두 스물한 명이었지만 사강은 고쳐 말하지 않았다.

 

 

(8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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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건 사강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정수였다.

 바로 그 점이 사강을 지옥 같은 혼란스러움에 빠트렸다.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이별을 선언한 사강 쪽이었다. 정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관된 표정으로 공항과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관제탑에서 군대 행진곡이라도 틀어주면 그가 한때 전투기를 몰던 공군 조종사였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사강의 주위엔 아무렇지도 않은 것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심장의 정중앙에 구멍이 뻥 뚫려버리는 기분이었다. 몸 전체가 거대한 링 도넛처럼 느껴졌고, 누군가 부주의하게 눈물 한 방울만 튀어도 잔뜩 설탕을 바른 도넛처럼 온몸이 차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있잖아요, 전 밤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는데, 아무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걸 느낄 때 정말 외로워져요. 휴지도 다 떨어져서 며칠 전 신문지로 그걸 딱 때려잡았을 때. 등껍질이 탁 터지면서 왜 노란 진물 같은 게 막 흘러나올 때.”
 미도는 사강의 얘기를 오해한 게 분명했다. ‘찼다’를 ‘차였다’로 말이다. 얼핏 들으면 비슷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사강은 미도의 오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듯 끊임없이 말했다.
 “바퀴벌레 지능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바퀴벌레한테 지능이랄 게 있나요?”
 “어머! 무슨 소릴! 바퀴벌레는 자기 동료나 가족을 죽인 인간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한대요. 그래서 그 인간한테 반드시 복수한다는 거예요. 밤에 자다가 마셨던 물컵 안에 바퀴벌레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해봐요. 복수할거야, 라는 얼굴로 물컵 안을 수영하면서 온갖 바이러스를 왕창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
 “그쪽, 안 믿는 눈치지만 저도 첨엔 정말로 안 믿었어요. 근데 맹세코 정말이래요. 내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그 얘기 해준 것도 남자친군데. 사실 바퀴벌레 보다가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하는 거, 정말 짜증나고 화나요.” 
 갑자기 나타난 바퀴벌레나 지네, 거미를 보고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건, 그 사람이 대책 없는 사랑에 빠졌단 증거다. 징그러운 벌레를 본 여자는 여지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런 것은 당연히 남자가 나서서 잡아줘야 하는 호들갑스럽고 의존적인 세계에 즉각 편입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벌레든 뭐든 혼자서 때려잡을 독립심과 용기를 말하는 건 사강이 아는 연애가 아니었다.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 같은 곳에 늘 가고 싶었지만, 도무지 멀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트위터 안 했으면 여기 절대 오지 않았겠죠?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전 그게 제일 궁금해요.”
 미도가 반복해서 말한 영화제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역시 본인도 실연당한 사람이겠죠?”
 사강은 자신이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클릭했던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트위터에 영화제의 공고가 난 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글이 뜬 건, 새벽 세 시 사십삼 분이었다. 
 트위터에 접속하는 순간, 사강은 국제공항의 커다란 전광판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세계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비행기들을 떠올렸다. 비행기가 내는 엔진 소음이 밝은 빛을 내는 혜성처럼 긴 꼬리를 흔들며 지구의 밤하늘로 서서히 사라져 끝내 소멸하는 아득한 풍경을.
 실시간으로 수천, 수만 개의 글이 올라가는 트위터는 인천공항터미널 3층에 서 있는 전광판 같았다. 난수표처럼 복잡한 문자의 행렬들, KE925, AA290, OZ579, NH6954, TK8092, CO4414, AE630, UA737…… 언뜻 의미를 알 수 없는 약호들은 마드리드와 헬싱키, 방콕과 울란바토르, 도쿄의 이륙과 착륙을 알리는 비행기들의 집합으로 고속도로를 맹렬히 달리는 심야고속버스의 고장 난 점멸등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전광판에 그려지는 비행기의 도착과 출발과 출발의 지연을 알리는 기표들…… 국제공항의 전광판은 실시간으로 140자의 글자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트위터와 비슷해 보였다.  

 아침 일곱 시부터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자는 건 이상한 제안이었다.  
 아침을 먹고 연달아 영화 네 편을 함께 보자는 아이디어는 조금 더 이상했다.
 가장 이상한 건 마지막 제안이었다.
 그러나 의미 없이 밀려오는 수백 개의 맨션 중, 이 문장만은 유독 사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정수와 헤어진 후, 그녀의 주변은 정말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너무나.

 

 그런데 그런 일을 체험하고 있는 복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사강은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이란 말에 조용히 밑줄을 그었다. 그것이, 더구나, 농담일리 없었다.
 그런 햇빛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강은 트위터의 프로필을 살펴봤다.
 트위터의 본인 성명 란의 이름 역시 트위터였다. 트위터의 이력 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버려진 매몰지처럼 보이는 이곳도 한때 빛나는 사건과 순간 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그가 누구든, 그녀가 누구이든 이 문장의 화자는 실연의 기억을 잊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극복되지 못한 실연에 낮과 밤이 뒤바뀌고, 오전과 오후가 뒤섞이고, 폭식과 절식 사이를 헤매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달력의 한 계절이 통째로 찢어져 사라진 후의 일임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봄인 줄 알았는데 가을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이제 막 개나리가 진 줄 알았는데 물에 젖은 낙엽이 신발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목격했을 때, 그때의 마음을, 머리와 빗장뼈가 동시에 울릴 때 나는 그 진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원망하다 진동으로, 무음으로, 다시 벨 소리를 끝까지 올리던 반복의 반복들. 불현듯 잘못 누른 버튼 때문에 신호음이 울릴 때, 복음 같은 그 소리에 주저앉아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독백하던 날들, 사강은 그런 아침을 자신이 어떻게 견뎠는지 어렵지 않게 기억했다.
 사강은 타인에게 이해받기 힘든 이별을 겪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정수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윤사강에겐 한동안 소년도 남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남성 혐오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정수가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세계에 남자라는 신인류가 새롭게 편입됐다. 그녀에게 그것은 봄의 폭설과 늦가을의 더위 같은 이상기후를 용케 피한 다행스런 연애였다.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아이가 기적처럼 자라났고,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나 깊은 안도감 뒤에는 훨씬 더 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 같은, 무엇보다 개인적이어야 할 연애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강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받지도 못했다.

 

 

(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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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게 되리라곤 전 생각지도 못했어요. 창피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여기 온 건 잘한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겠죠? 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사강은 미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과거와 작별하고 커플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한 번의 사랑만으로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사랑 때문에 새벽녘 손목을 긋거나, 선물 받은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도 씨 말처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왜요?”
 미도가 사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부정적인 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미도는 동의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그런 거 아닌가? 긴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고 아이가 태어나고 그렇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헤어질 걸 알면서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니까.”
 “헤어질 걸 알고도 사랑한다?”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그럼요. 우린 죽을 걸 알고도 살아가잖아요.”
 “사람들이 정말 그런 걸 알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요. 저도 죽을 거고, 사강 씨도 죽을 거고. 누구나 다 죽잖아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사강은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듯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 입구의 문은 열려 있지만 처음부터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터널이었다. 환한 빛 속에 있다가 빨려들어가듯 짙은 어둠 속으로 따라 걸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상한 터널. 사강은 그 터널을 떠올리며 그 속을 걷듯 느릿느릿 말했다.
 “미도 씨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말은 쓰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하루하루 죽어간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치의 삶을 덜어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실패한 친구에게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 전 믿지 않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같은 말이 대체 그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니었다고 털고 일어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넘어져 무릎이 깨진 사람 앞에서 ‘힘내라. 당신의 잠재력을 믿어라.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못해요.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를 얘기하면서 위로하는 게 무슨 소용이죠? 그럴 땐 그저 손을 내밀어주고 어깨를 안아주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죠.”
 사강의 목소리는 어조 없이 담담했다.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맛있는 커피를 권해주거나, 따뜻한 국을 끓여주는 쪽이 전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따뜻한 음식을 권유하는 이런 영화제가 나쁘진 않은 거네요. 그렇죠?”
 “제 생각에는요.”
 “재밌는 영화제에요. 누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걸까요?”
 “그쪽, 실연당한 건가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제가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봐요? 그런 거죠?”
 미도는 굳이 자신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사강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을 상대로 뭔가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곧 사라져버렸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팔십칠 일째예요. 팔십칠 일하고 열세 시간 지났네요.”
 손목에 찬 커다란 전자시계를 바라보던 미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강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격히 내려가는 그녀의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덧니가 그녀의 입안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미안해요. 힘들겠군요.”
 “아뇨. 안 힘들어요. 저 말짱해요. 헤어지고도 잊지 못하는 사랑, 전 그런 거 수지타산 안 맞아서 못 해요.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하자, 이게 제 신조예요.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자. 물론 잘되는 것 같진 않지만.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지, 복잡하게 이런저런 이유 대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정말 질색이거든요. 죽어도 나쁜 역할은 맡지 않겠다는 못된 심보잖아요? 연애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힘든 걸 극복하는 방법은 다르니까, 곧 괜찮아지겠죠. 사실 홧김에 사표 낸 지는 일주일 됐어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덜미가 조금 발개져 있었다.
 사강은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육 년 동안 같은 직장을 다녔다. 매달 25일이면 월급을 받고, 그 돈을 한 푼도 저축하지 않고 대부분 써버린 것 역시 육 년째였다. 이 사람들은 어떨까. 사강은 아침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외롭다’와 ‘괴롭다’ 사이를 형상화한 조각품들 같았다. 그 조각품에 이름을 붙이면 아마도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롭다’가 되지 않을까. 
 “세상에 얼마나 나쁜 자식들이 많은지 알고 나면 정말 연애라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어른들이 왜 연애보다 중매를 좋아하는지도 알겠고.”
 이상할 만큼 친화력이 있는 여자였다. 사강은 어느새 이 낯선 여자와 의미 없는 숫자들, 가령 기르다가 부러뜨린 손톱, 택시에서 분실한 휴대전화와 딱 한쪽만 잃어버려 착용 불가능한 귀걸이의 숫자 같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영화제 프로그램 봤어요? 영화가 네 편이던데. 전부 다 볼 거예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전 네 개 전부 다 볼 거예요. 프로그램이 정말 맘에 들어요. <화양연화>랑 <봄날은 간다>, <러브레터>하고…… 나머진 뭐였죠?”
 “<500일의 썸머>.”
 “전 그 영화는 못 봤는데. 실연당한 사람들 얘기인가 보죠?”
 “500일 동안 한 여자에 빠져 있던 남자가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졸업>을 본 후, 좋아하는 팬케이크 가게에서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얘기예요. 저도 줄거리만 읽었어요.”
 “여기 온 사람들, 전부 애인한테 차인 사람들 아닐까요? 설마, 양심이 있다면 애인을 찬 인간이 여기까지 기어오진 않았겠죠? 재수 없는 인간들!”
 미도는 잠시 분노한 표정을 짓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사강을 향해 말했다.
 “전 일 년 정도 사귀다 차였어요.”
 미도가 “그쪽은 얼마나 사귀었어요?”라고 묻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미도는 곧장 사강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쪽도 차인 거죠?”
 미도가 확신에 차 사강을 바라봤다.
 “아뇨.”
 사강이 고개를 들고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비발디의 <겨울>이 흘러 나왔다.

 

 

(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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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던 레스토랑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사강 쪽으로 걸어왔다. 
 “반가워요. 전 정미도예요.”
 여자가 활짝 웃자 작은 덧니가 드러났다.
 스무 살은 넘었을까. 어쩌면 어깨에 멘 저 배낭 속에 수학이나 영어 교과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어깨가 강조된 검정색 파워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구겨지기 쉬운 얇은 린넨 소재의 블라우스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런 초봄엔 어울리지 않았다. 발목과 복사뼈가 전부 드러난 밑단이 짧은 팬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윤사강입니다.”
 사강의 경우, 자신의 이름은 대부분 제복의 왼쪽 가슴에 매달린 명찰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름을 얘기하며 밝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네”라고 짧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우리 직업 맞추기 할래요?”
 사강은 당황스런 얼굴로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도는 모두가 우울한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어디에서나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이 무표정이나 절망 이외의 표정이 엿보였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과 왼쪽 뺨에 팬 보조개는 가벼운 흥분 때문인지 더 빛나 보였다. 그러나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그들과 무엇이든 얘기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선 실연 후 생길 수 있는 조울증의 기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지금 조증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미소와 활기를 무장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가.
 “백화점에서 일하지 않으세요? 자동차 판매 영업을 한다거나. 제약회사 영업 직원이거나 보험일 수도 있겠구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저 학교 다닐 때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알바 한 적 있어요. 취직하려고 속성 메이크업도 배우고 그랬었는데. 그쪽은…… 비서 아니세요? 회장님 비서.”
 “제가 비서처럼 보여요?”
 “네. 적어도 저랑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같이 짧게 자른 미도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저런 스타일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귀 전체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 덕분에 그녀의 귀에 달린 여러 개의 피어싱과 별 모양의 금속 귀걸이가 더 크고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사강의 눈에 들어온 건 너무 말라서 얇은 빗자루만 한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몸이었다.
 “추우세요?”
 사강이 미도에게 물었다.
 “원하면 제 재킷을 벗어드릴 수도 있어요. 전 좀 덥거든요.” 
 “안 추워요. 괜찮아요.”
 미도가 웃었다.
 “이 재킷, 안감이 두툼해서 꽤 따뜻해요. 사양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추워요!”
 미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미도는 틀림없이 추워 보였다. 떨고 있진 않았지만 입술이 파랗게 질린 걸 보면 곧 추위를 느낄 것이다. 특히 맨다리에 얇은 바지를 입었으니 그 속으로 3월 아침의 찬 공기가 잔뜩 들어와 앉았을 것이다.
 사강은 오 분이나 십 분 후, ‘춥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신체적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질문을 던진 건 타고난 예민함 때문이라기보단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다. 사강은 기내에서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마른기침을 하고, 오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사강이 미도에게 질문을 던진 건 천성적인 마음씀씀이 때문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녀의 직업병이었다.
 “아…… 이제야 알겠어요. 제 옷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도가 그제야 이해한단 얼굴로 사강을 바라보았다.
 “이 옷, 하나도 춥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전혀 춥지 않으니까. 말짱해요. 보기보단 통뼈에요, 저! 그나저나 참 특이한 모임이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게 놀랍지 않아요? 전 저만 나오면 어쩌나 되게 걱정했었거든요. 혼자서 밥 먹는 거, 처량 맞잖아요. 근데 여기 와보니 너무 안심이 돼요. 대성황이잖아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대체로 조용했다. 게다가 빈 의자를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상황에서 대성황이란 단어를 떠올린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도는 이곳의 분위기를 꽤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이 톤의 목소리가 이곳과 엇박자로 계속 어긋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생각하면 전 엄청 위로가 돼요. 적어도 나만 슬퍼할 일은 아닌 거잖아요? 왜 아픈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위로받고,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요? 안 그런가? 끼리끼리 동병상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나중에 다시 모두  커플이 되겠지만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 뜻밖에 잘생기고 예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미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저 남자, 어떤 것 같아요? 아까부터 눈에 띄던데.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미도가 남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는 레스토랑에 있던 신문을 들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사강은 남자들의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꽤나 단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명찰도 제복도 없는 사적인 공간이었고,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해져 있었다.
 쌍꺼풀 없는 남자의 눈매는 차갑지만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테 없는 동그란 안경은 남자의 차가운 느낌을 적절히 교정해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성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옅은 주름들이 보였다. 자주 웃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양쪽 입가의 옅은 세로 주름과 눈 옆에 자연스레 생긴 가로 주름들. 그러나 세 번째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강은 고개를 단호히 돌렸다. 
 하얀색 치노 팬츠와 검정색 캐시미어 터틀넥은 그와 꽤 잘 어울렸다.
 여간해서 흰색 바지를 입지 않는 보수적인 한국 남자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패턴이었다. 디자이너일까?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옷을 좋아하고, 차려입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을 줄 아는 능력은 의외로 희귀하다.
 하지만 사강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애써 무시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해,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강은 가방에 든 물건을 생각했다. 처리하기 힘든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처리해줄 전문가를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람을 전문 용어로 ‘킬러’라 부른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에선 사람을 죽이는 전문가만 존재하지 않는다. 물건, 추억, 시간을 죽이는 전문가도 필요해지는 법이다. 사강은 그것이 결국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이 결성된 것도 누군가의 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5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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