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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9 물질 현상학 북 리뷰-이택광 교수

 

미셸 앙리라는 낯선 철학자의 책 한 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제목은 <물질 현상학>. 범상하지 않다. 저자만이 아니라, 현상학이라는 학문도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현상학 관련 주저들도 한국어로 접하기 어려운 마당에 다양한 현상학자들에 대해 논한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을 때이르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인 것이고, 다소 부족한 상황이지만 앙리의 입장을 통해 현상학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일에 무슨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물질 현상학’을 ‘삶의 현상학’이라고 바꾸어보면, 이 책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처럼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앙리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현상학을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삶에 대한 해명을 둘러싸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경합을 벌였고, 앙리도 이 밥상에 숟가락 하나를 얹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앙리와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삶의 문제를 파고 들어간 철학자라고 한다면 들뢰즈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고 파악한 앙리는 무한한 내재성으로 삶을 파악한 들뢰즈와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들뢰즈와 달리 앙리는 현상학자이다. 현상학이라는 철학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현상’이라고 불리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은 말 그대로 ‘나타남’이다. 이런 특징에 근거해서 현상학이라는 학문을 요약해서 정의하자면 경험에 대한 기술과 이에 대한 종합을 통해 앎을 획득하는 사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엇보다도 앙리에게 현상학은 삶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인문학의 중심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이기에 가장 널리 퍼진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해 다만 외적인 관점만을 제시했던 구조주의가 붕괴하면서, 현상학은 점점 더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사유의 운동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한다. 앙리의 입장은 명확하다. 구조주의라는 외적인 방식을 통해 삶에 접근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현상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상학도 20세기에 속하는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조주의라는 이론 이후에 현상학이 과연 적절한 사유운동의 방법인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앙리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고, 현상학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이 사유운동의 전제와 원천을 옹호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었다. 따라서 앙리의 임무는 현상학을 갱신하는 것이고, 이런 시도는 곧바로 “현상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질문, 그 철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질문 자체가 갱신된다는 조건”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앙리가 삶이라는 범주를 현상학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앙리에게 삶은 “존재의 중심에서 본래적인 현상화이며 존재를 존재하는 것”이다. 정말 탁월한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는 명제를 이렇게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도 재주다. 이런 까닭에 삶이 존재해야 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것을 다만 존재의 한 영역”에 국한하는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전복해야 하는 것이다.

앙리의 결론은 무엇인가? 현상에 대한 그의 진술이 암시해준다. 현상은 “특수한 내용, 특별한 본성, 즉 현상학적 물질성이 순수한 현상성에 부여하는 물질적 해석에 의해 덮인다”는 개념화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현상이라는 말은 형식적인 의미에서 물질적인 의미로 빠르게 이행하고, 이것이 현상학의 근본 개념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현상학의 과제여야 한다는 것이 앙리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과연 앙리의 기획은 성공했는가? 책을 읽고 각자 판단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택광 교수<경희대·문화평론가>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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