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모두 123쌍의 커플들


‘눈에 보이는 것을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 
이것은 정미도가 오랫동안 주거할 집을 고를 때 고수한 생활 철칙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보일러나 싱크대의 수도꼭지, 화장실 배수구 등은 반드시 작동시켜야 한다. 물을 틀고, 잠그고, 물을 다시 틀어 흘려보내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며 한밤중에 마트에서 ‘뚫어펑’을 사느라 낭패를 보기 싫다면 말이다. 작은 냉장고가 있다면 당연히 열어봐야 한다. 고무 패킹이 떨어져 나간 냉장고는 전기를 잡아먹는 하마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확인하지 않아 집을 계약해버리면 집주인은 고장 난 것을 고치는 데 인색해진다. 장인어른이 생일이라거나, 장모님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없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일 따위를 들먹이며 곰팡이 핀 천장이나 터진 보일러를 방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입자를 나 몰라라 하는 막가파 주인을 대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입안에 백 년 묵은 걸레를 문 것처럼 쌍욕을 해대고, 반복적으로 행패를 부림으로써 주인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사이코를 만났군!”이라고 분명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 시원한 해결 방법엔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 결국, 주변보다 싼 시세의 재계약은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한 가지는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순응주의는 막 서울로 올라온 스무 살 정미도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
하수구는 막힌 채로,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싱크대는 졸졸 흘러나오는 채로, 터진 보일러는 “돈 아끼는 셈 치지!”라고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돌리지 않는 것. 그렇게 미도는 FM 91.9 주파수만 잘 나오는 라디오를 고장 난 채 사용했고, 막힌 하수구 역시 막힌 채 사용했다. 그녀는 한 번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2구 가스레인지를 한 번에 서른 번 넘게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통 사람들에게 없는 비범한 인내심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장시간 웅크리고 앉아 부패한 음식물 찌꺼기 냄새를 풍기는 하수구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펜치로 자른 철제 옷걸이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집어내는 일이나, 배고픔을 참아가며 가스레인지를 수십 번씩 돌리는 일이나,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방에서 영하 10도의 겨울을 나는 일은 모두 극기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장 난 것투성이인 집에서 살다 보니, 스스로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도가 순응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삶의 노선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불평 없이 고장 난 걸 ‘참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착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년은 정말 머리가 고장 난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친절함을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착각하는 인간들을 미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계약하기 전에 친절히 구는 집주인은 더 의심해야 마땅했고, ‘전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고객일수록 더 유심히 주목해야 하며, ‘난 뒤끝 없어!’라고 주장하는 상사들에겐 절대 속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이라고 집이 빠졌는데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그물거리는 악덕 주인에게는 나이와 별개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도리다.
“돈 내놔! 이 개 호로 새끼야! 당장 성추행범으로 형사 고소해버리기 전에!”
그게 미도가 살아온 삶이었다.
 
미도는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이벤트기획부와 웨딩사업부 합동 프레젠테이션에 사용할 자신의 안테나를 챙겼다. 안테나는 그녀의 첫 번째 집주인이 선심 쓰듯 내어준 텔레비전 위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훗날 그녀의 동생 정미우가 ‘1995년에 생긴 태양계의 급격한 변화’라는 제목의 썰렁한 농담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태양계에서 금성이 사라진 거, 정말 놀라운 일 아냐?”
농담의 실체는 이러했다.
1995년에 금성이 LG로 바뀐 것이다.
집주인의 오래된 텔레비전은 1995년산으로, 지금은 황학동 고물상에서조차 찾기 힘든 ‘골드스타’ 마크가 붙어 있었다. 주인은 그 텔레비전을 사고 전세를 탈출해 이곳 은평구 불광동에 첫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는 좁아터진 서울 바닥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텔레비전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이런 선행은 절대로 없을 것이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미도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아저씨가 가져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학생 생각해서 텔레비전도 거저 줬으니 불편하겠지만 싱크대는 그냥 쓰는 게 좋겠어.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라고 말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는 탐욕스런 주인이었다.
골드스타.
한때 우리가 ‘금성’이라 불렀던 전자회사의 텔레비전 광고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

미도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골드스타 텔레비전을 ‘발로 차’ 일부러 고장 낸 것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기념품을 찾다가 텔레비전에 꽂혀 있던 그 안테나를 뽑아왔다. 어차피 고장 나면 절대 고칠 수 없는 옛날 물건이었다. 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그 안테나를 사용했다. 길이도 볼륨감도 적당했다.
순간의 선택은 정말로 정미도의 십 년을 좌우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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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나 같은 남자를 생물학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많지 않다. 현정은 딱히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도, 호감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조 있는 여자라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오래된 연인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자학하듯 최악의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 것이다. 현정은 딜레마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 밖에 이별을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귀결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것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훈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놈일까? 아는 인간일까? 사내 연애? 학교 동창인 걸까? 당장 다음 달에 결혼 청첩장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빌어먹을, 어떤 얼굴로 청첩장의 신랑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들에게 쏟아질 동정과 위로의 시선들은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의문의 꼬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그에게 남겨졌다.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글자 없이 하얀 백지만 있는 책장을 펼쳐 든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는 외팔이 검객이 나오는 옛날 홍콩 영화를 보다가 맥주 얼룩이 남아 있는 패브릭 소파에서 졸았다. 낮에 꾸벅거리다 보니 밤에는 잠이 더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다가,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없는 휑한 사무실에 출근했다.
딱히 먹을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훈은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주말엔 파자마를 입은 채 세 가지 종류의 라면을 점심과 저녁으로 끓이고, 먹고, 설거지하고, 냄비와 그릇을 일일이 마른행주로 닦고, 냉장고 속을 정리해도 시간이 남았다. 일요일엔 짜파게티를 먹는 광고 속 모범 시민 같은 삶이 그에겐 전혀 즐겁지 않았다. 
라면 봉지를 버리려다가 지훈은 넘치기 직전인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그는 쓰레기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봉지 하나를 꺼냈다. 쓰레기통이 집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먹을 걸 찾는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 뒤에 적혀 있는 매뉴얼을 큰 소리로 읽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뻥끗하지 않은 입에선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순간 면을 먼저 넣어야 할지,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할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몇 시간 동안 온갖 라면카페를 뒤졌다. 그는 ‘365일 라면만 먹고 살고 싶은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긴 이름의 카페 회원으로 가입했다.
머릿속이 쓰레기통 속처럼 가득 차올랐다. 
지훈은 쓰레기통 속의 라면 봉지를 전부 꺼내, 쓰레기통 앞에 앉아 라면 봉지를 겹겹이 접기 시작했다. 그는 라면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스프 봉투 속에 작게 접은 라면 봉지를 집어넣었다. 네 개의 라면 봉지를 이렇게 처리하자 넘칠 것 같았던 쓰레기통의 부피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부피가 큰 라면 봉지는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건 현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럴 땐 혼자 있지 말고 무조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도 빌어먹을 현정이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 한 달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28일과 31일이 낀 달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헤어진 지 삼십 일째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지훈은 평소보다 자주 시계를 봤다.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남자가 멍청해 보인다는 평소 현정의 주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긴 했지만 깨어보면 꿈과 현실이 또렷이 분간되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일상을 두들겼다. 
“새로 나온 벤틀리 엔진 소리 들어봤어? 그 소릴 들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령 늦은 점심을 먹다가 지훈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현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정이 꼭 식판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네가 환장하는 폴 오스터가 이 제품으로 『뉴욕 3부작』의 초고를 썼대. 1974년에 친구한테 40달러를 주고 산 타자기라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니? 소리 한번 들어볼래? 권총 장전할 때 나는 상쾌한 소리가 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현정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잠시 자신의 청각에 진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고민했다.
“이 시계, 태엽 감는 소리 한번 들어봐.”
현정의 관심을 끈 것은 대부분 기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니콘이나 콘탁스의 카메라 셔터 소리나 막 출시된 스마트폰의 다이얼 터치 동작음, 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산 올림피아 타자기에서 나는 차갑고 묵직한 자판음 같은 것들로, 지훈에겐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 시끄러운 ‘소음들’이었다.
현정과 헤어진 지 백 일째 되던 날, 지훈은 박스 안에서 두꺼운 앨범 한 권을 꺼냈다. 앨범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앨범 속 사진을 매일 바라보았다.
사진을 태우는 건 대부분 버림받은 쪽이다.
사진을 태우기 위해 그것을 모으고, 라이터를 켜고, 쓰레기통 속에서 타들어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을 소각시키는 건 심장과 연결된 기억의 일부분을 잿더미로 덮어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지훈은 앨범 속 사진을 바라봤다. 새 롤러코스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에버랜드의 튤립 축제, 광릉의 수목원의 전나무 앞에서 찍은 B컷, 일산의 호수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타며 찍은 사진과 일본으로 떠났던 여행 사진들이 있었다. ‘현정 7세. 현정 12세. 현정 18세. 현정 23세. 현정 27세’로 기록된 사진 속의 현정은 볼이 빵빵한 꼬마 여자아이의 성장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성장 다큐멘터리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입사 첫날, 회사 앞에서 현정과 어깨동무를 하며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의 감정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가지고 있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앨범 속의 사진들을 한 장씩 빼냈다. 그것을 하나씩 태워 없애는 것으로 지나간 일들을 재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훈은 사진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현정의 이마와 볼과 어깨가 서서히 불길 아래로 스러져갔다. 시간을 들여 한 장씩 태워버리면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는 사진을 태우고 남은 극소량의 재를 작은 유리병에 모아두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뼈와 살을 수습해 화장하고 남은 흔적 같았다. 잿가루를 모아둔 유리병을 보며 그는 매일 현정의 죽음을 애도했다.

*

지훈이 트위터에서 우연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본 건 그즈음이었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내일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처음에 지훈은 트위터를 무시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는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 일곱 시부터 아침을 먹는다는 발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바쁜 출근길, 회사 앞 단골 노점상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계란토스트 하나를 서서 먹는 정도였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그의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는 가게

그는 충동적으로 ‘기념품’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지훈은 이제 노트북을 바짝 끌어당기고 ‘서로의 상처를 교환한다’는 문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사진을 태우고 남은 재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현정이 준 첫 번째 선물을 떠올렸다.
여름방학 MT,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밤, 그들이 함께 바라보았던 강변의 밤하늘. 지훈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던 그 밤의 정적을 기억해냈다. 모든 것이 잠든 밤, 그런 정적의 와중에 소름같이 돋아나던 귀뚜라미 소리가 정적을 더 두꺼운 장막처럼 만들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과 나무는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어둠 속에서 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연인들의 손은 터질 듯한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사랑해’란 말을 하기엔 모든 게 희미한 때였다. 지금의 현정이라면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라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사랑의 감정이 도파민과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호통치듯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몸이 간질거리는 수줍음 때문에 그들은 ‘사랑해’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스물 몇 살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었다. 
그는 옷장 속에 넣어뒀던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버릴 수도, 태울 수도, 누군가를 줘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한다는 건, 그것의 세세한 내막을 모를 때에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것이 실연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없는 물건을 골라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실제 주인에게 그 물건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게 더 의미 없는 물건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만약 그것이 반지라면 끼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라면?
목에 걸지 않을 것이다.
음반이라면?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스턴트 참치 캔이라면 평생도록 먹지 않고 보관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런 식의 연상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만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는 가족처럼, 그저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훈은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는 옷장과 누군가의 반지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가지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최초의 선물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현정과의 일을 고통에서 추억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실연을 빙자해 새벽까지 친구들을 붙잡아놓고 술을 퍼마시며 하소연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밤새 먹은 음식을 토해내며 스스로의 배설물을 확인하는 자학적인 방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형편없는 스토커로 떨어져 경찰 신세를 지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실연 때문에 여기저기 곯아 터진 상처가 전시된 갤러리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처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어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참가하고 싶습니다

지훈은 어느새 참가 의사를 밝히는 쪽지를 쓰고 있었다.

 

 

(1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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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13일.
 지훈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자동차 클랙슨을 연달아 누르며 C 전자 경주 연수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직진으로 곧장 뻗어 있던 고속도로는 이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IC를 건너뛰고 직진해 달리면 서울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고 복잡해질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유턴은 불가능하다. 그저 앞으로 가거나, 멀리 다른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이대로 연수원까지 달려가 일 년 동안 지속됐던 C 전자의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내 교육 담당자와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다음 교육 일정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방향을 틀어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다. 서울로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C 전자와는 영원히 등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 때문인지 재채기가 났다. 코를 풀고 버린 휴지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볍게 날아갔다.
 지훈은 시계를 보다가 방향을 틀어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황당할 정도로 멍청한 결정이었는데, 그날은 갖은 방법을 써도 사람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 C 전자 연수원장과의 독대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 중 중요한 일부분 역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이라고 적힌 표지판 위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

 

 “이지훈! 오늘 연수원장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우린 주말에 통화하기로 했잖아. 나 오늘 선생님들하고 회식이야. 들어가봐야 돼.”
 그가 전속력으로 연수원이 아닌 현정의 학교로 달려가 그녀를 만났을 때, 현정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삶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지훈에겐 불행히도 그 순간이 바로 그때 찾아왔다. 현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줄게”라고 말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입술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현정이 긴 침묵을 깼다.  
 지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말 헤어지고 싶어?”라고 질문하는 게 정현정이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그녀는 대답 대신 ‘반드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결혼하자고 말하면 “결혼하고 싶어?”라고 질문할 것이었고,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뭔데?”라고 반문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현정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현정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현정 사이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오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훈련된 협상 전문가처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곳까지 달려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고마워”란 얘길 듣는 순간, 그는 현정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의 한숨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겨울바람과는 다른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았다.

 

 겨우 오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현정은 질문을 포기했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을 무시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랑이란 끊임없는 질문’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아포리즘은 실종됐다. 현정은 대화의 문을 닫았다. 지훈은 대화를 이어나갈 어떤 구실도 찾지 못했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눈비가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속도 그대로 온몸으로 그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운전 조심해.”
 그는 현정의 손등을 바라봤다. 벌에 쏘여 삼각형 모양의 흉터로 남은 손등에서 추억들이 윙윙대며 쏟아져 날렸다. 지훈의 얼굴 위로 잘 갈린 얼음 알갱이가 달라붙었다. 누군가 티스푼으로 얼음 빙수를 떠 자신의 뜨거운 눈동자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다.
 길을 달려오는 동안 마주쳤던 풍경들이 거꾸로 되돌아와 그를 흔들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12월에 개나리나 목련이 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려오던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지훈은 그녀에게 경부고속도로에서 본 길가의 꽃들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2월에 핀 벚꽃을 보았다고 얘기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어준단 말인가. 그것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 현정이란 자각이 지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것은 지훈이 생각했던 이별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도 가끔, 아주 가끔은, 현정과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차 안에서, 호텔에서, 그들이 숱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익숙한 침대 위에서. 이별의 장면 속엔 늘 축축한 눈물이 있었다. 짱짱한 하늘에 느닷없이 비구름이 몰려오고, 바짝 마른 빨래 위에 비가 떨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무표정했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이별엔 생략되어 있었다.
 두 시간 후, 서울 도심에 폭설이 내렸다.
 눈발이 점점 더 몰아치더니 무거운 몸체를 이기지 못한 듯 수직으로 낙하했다. 버스와 대중교통은 마비되었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걷기를 멈추었고, 고개를 수그린 채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하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차들은 운행을 포기했다. 정지된 자동차들의 무덤. 도시를 뒤덮던 날카로운 소음들은 진공의 눈 속에 파묻혀 가라앉고 있었다. 12월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고요한 밤이었지만 지훈의 심장은 시속 150킬로미터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나’의 연속적인 타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길고 날렵한 총구를 정확히 겨누었다. 눈이 쏟아지는 도심의 네온 광고판에서 여름만 존재하는 괌 관광청의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그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신의 심장이 와장창, 유리처럼 깨지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 드류 베리모어는 모두 일곱 가지 통신 장비로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전화번호가 하나이던 시절이 그리워! 응답기 하나에 테이프도 하나!” 이 영화는 지훈이 현정과 함께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지훈이 현정에게 처음 이별을 통보받은 건 일주일 전, 월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네 번이나 들어야 했는데, ‘미안해. 잘 살아’로 끝나는 네 가지 종류의 이별 메시지였다.
 만약 어느 날, 각각의 통신 장비에 접속할 때마다 ‘헤어지자!’, ‘잘 살아!’,  ‘건강해야 돼!’, ‘행복하길 빌게!’, ‘넌 진짜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따위의 일곱 가지 버전의 이별 고해사를 듣는다면, 그가 누구라도 21세기적인 이별의 방식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묵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이 전송 방식과 전송음이 제각각인 네 가지 버전의 통신 기계들로 이별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곤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네 번 놀랐고, 네 번 분노했다. 네 번이라고 했지만 그건 매번 그에게 그전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 현정은 제일 먼저 이메일로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2. 현정은 페이스북에 그 사실을 올려놓았다.
3. 현정은 지훈의 트위터에도 이별 사실을 알렸다.
4. 그러고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이별의 메시지는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도착해 있었다.
 사실 현정의 이별 메시지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과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마우스로 긁어서 복사해 올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현정은 네 번이나 같은 얘길 반복했다. 분명히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은 이 불길한 냄새가 결국 테스토스테론과 관련된 것이며, 그녀가 남긴 일관된 이별 메시지가 남긴 유일한 의미는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다른 남자가 생겼어!’라거나 ‘다른 놈이랑 잤어!’ 같은 고백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자명한 이유를 이제껏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현정은 실언한 게 아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1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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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시속 150킬로미터

 

  12월 13일.
 이지훈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C 전자의 천안 연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막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지훈은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12월에 부는 시베리아 북서풍에도 흰색 면봉 같은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목련과 활짝 핀 개나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차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훈의 검은색 중고 소나타 뒷좌석 왼쪽에는 강의 때 갈아입을 양복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두 장의 화이트 셔츠가 걸려 있었다. 모두 현정이 백화점 세일 기간에 산 것이었다. 차 트렁크에는 오랫동안 신어 뒤꿈치가 닳은 뉴발란스 운동화가 있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이세이 미야키의 검정색 터틀넥 풀오버,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의 그레이 992, 어디선가 익숙한 듯 보이는 이 조합은 1998년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이었다. 지훈은 그것이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전의를 불사르기 위해 그가 입는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H 그룹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롤 모델’ 교육을 하다가 지훈은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을 흉내 냈다. 그의 왼쪽 시력은 1.5에 가까웠지만 그는 가끔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안경은 잡스가 착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도쿄 출장길에 오모테산도힐즈의 한 안경점에서 산 것이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다가 발동한 특유의 장난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실제로 종종 지훈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점점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도 못 말릴 신경질과 강박적인 식습관, 췌장암에 걸린 것만 빼면 잡스는 여러모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를 벗어 던지자 다소 차갑게 생긴 그는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는 엉뚱한 천재 타입의 남자처럼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Y 마트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 교육에선 캔 커피와 초콜릿 쿠키 상자를 가득 넣은 커다란 마트용 쇼핑카트를 끌고 나왔고, 점심 후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며 근무 환경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강의할 장소의 화장실에서 얻는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도 금세 알아챘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 바퀴가 달린 여행용 플라이트백, 등산용 배낭과 가발 등은 그의 강의 소품이 되었다.
 이지훈은 기업 강연계의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 환경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딱딱한 강의에 적절히 유머를 섞었고, 쉬운 비유와 많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선 늘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을 받았다.
 “애인 있으세요?”
 “결혼하신 건 아니죠?”
 그때마다 지훈은 웃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주실 겁니까?”라고 가볍게 질문을 피하며 되물었다. 서비스센터 직원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첫 번째 고정 매뉴얼 같은 말이었다.

 

 

 지훈이 다니는 회사의 남녀 성비율은 7 대 3 정도로 남자들이 많았다. 회사 내의 연애가 전적으로 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20년이 되면 여자가 없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걸?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별로 해소되고 있지 않잖아? 한민족 단일국가설은 이제 끝났어. 철저한 부익부 빈익빈이야. 정글이야, 정글! 우리 회사만 해도 절대적으로 그렇고.”
 마흔넷이 넘도록 미혼인 최 부장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엉뚱하게 비꼬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여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태어난 최 부장이 막 딸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대신 계절마다 머리를 염색하고 ‘소녀시대’나 ‘빅뱅’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별난 중년이었다. 
 그가 ‘싱싱한 난자’나 ‘젖’ 같은 단어를 들먹일 때마다 지훈은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나 정육 코너에 진열된 젓갈들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최고급 젓갈 세트를 선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훈은 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커다란 명란젓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가,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생선알도 못 먹는 거야? 난 명란젓 진짜 좋아하는데. 명란젓은 좋은 참기름을 뿌려 먹는 게 최고야!”
 지훈은 젓갈 세트를 몽땅 들고 현정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압력밥솥에 밥을 뜸 들였다. 그리고 금방 한 뜨거운 밥 위에 가위로 자른 명란젓을 올려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 천천히 밥과 섞기 시작했다. 곧 부풀어 있던 밥 알갱이가 오톨도톨한 명란과 섞여 보기 좋은 핑크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몇 번이나 “네 인생이 식도락과 거리가 먼 건 진짜 비극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훈을 놀렸다.
 요리를 좋아하는 현정은 지훈을 위한 음식도 만들었다. 명란젓과 신선한 올리브와 파프리카를 넣은 샐러드, 그리고 지훈을 위해 명란을 익혀서 만든 오므라이스였다.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뿌리며 지훈이 말했다. 
 “싱싱한 난자를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싱싱한 정자를 먹는 맛이 어떤지는 내가 좀 아는데.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까?”
 현정이 명란젓을 포크로 콕 찍어 올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좋아”라고 말하다가 참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현정의 입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훈이 설거지를 했다. 현정이 함께 볼 DVD를 고르는 동안 지훈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지훈과 현정은 <위기의 주부들>의 6시즌 7화를 보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정자의 맛을 음미하는 섹스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현정은 침대에, 지훈은 구부러진 소파의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지훈은 현정의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침 자국을 바라보았고, 현정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느라 쿠션의 격자무늬 자국이 잔뜩 찍힌 지훈의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위기의 주부들> 1, 2, 3, 4, 5시즌을 함께 본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풍경이었다.
 <위기의 주부들> 2시즌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시즌이나 4시즌의 절반이 지나갔을 때쯤, 그것이 현정에겐 엄마 이야기이고, 지훈에겐 형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의도적으로 엄마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각자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졌다. 현정은 오이를 먹지 못했고, 지훈은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생선회를 가장 좋아했던 현정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지만, 지훈은 눈에 보이는 족족 우유를 마셔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칼슘을 우유로 섭취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는 법을 영리하게 터득해나갔으므로 이들의 연애 전선에 끼는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지 않고 근처에 머물다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 날 저녁, 지훈과 현정은 친구들을 불러 프라이드치킨과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맛 나초를 먹으며 포커를 쳤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닭 뼈다귀들 속에서도 이들은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봤다. 베드신과 키스신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섹스는 이미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지훈은 잠들어 있던 현정을 껴안았다. 현정은 간지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릴 때조차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고요히 사정했다. 현정은 익숙한 듯 그의 목덜미에 달큰한 침을 발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훈은 콘돔을 크리넥스에 싸서 버리고, 출근을 하며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갈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맨이었다. 기업 강연과 대중 강연을 병행하는 컨설턴트 강사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다. 그럴수록 비공식인 일에 대해선 그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지금 이 속도로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면 아직 퇴근 전인 현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한 턱이 날카로운 바람에 따끔거렸다. 수염이 면도로 약해진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1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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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봄>이 절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강은 하얀 도자기 접시 위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손수건은 방금 전 다림질을 끝낸 것처럼 보드라웠고 아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강은 뺨 위에 손수건을 댄 채, 이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위로와 격려일 리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로.
따뜻한 음식으로 구성된 세심한 식단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위무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실연을 선언하는 모임이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해요. 제 자리는 저쪽이에요.”
미도가 사강에게 인사하며 뒤돌아섰다.
사강은 미도가 걸어가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 남자 쪽으로 가볍게 몸을 틀더니 세 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곧 주최 측으로 보이는 사람이 미도를 남자 옆에 안내했다. 사강은 미도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안경을 쓴 남자와 사강은 세 번,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럴 땐 상대가 누구든 최대한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사강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꼬고 있던 긴 다리를 자연스레 바꾸어가며 들고 온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외국계 경제신문이고, 주식과 환율 관련 섹션이라는 걸 사강은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주식 계좌 수를 자랑하던 여의도 증권가 남자가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의 시차 때문에 룸살롱에서 술을 마셔도 주식 장이 파하는 세 시부터 마시고 오후 여덟 시면 술자리를 파하고 퇴근한 후,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한다는 남자였다. 이 남자의 시간이 다른 사람과 달리 거꾸로 뒤집혀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한두 번 더 그를 만났었다.
남자는 무엇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열세 시간의 비행 동안 단 한 순간도 잠자지 않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비즈니스석 승객 같았다. 끝도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게 그런 비즈니스맨들의 특징인데, 마실 때마다 기내에서 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는 얼굴인 것도 비슷했다. 남자의 두 눈은 열두 시간 동안 컴퓨터만 들여다본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뺨은 윤기 없이 건조했지만 그것은 실연의 흔적이라기보단 전날 야근을 하거나 숙취로 피곤한 얼굴처럼 보였다. 남자가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얼룩 없이 반짝였다. 유일하게 실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면도하지 않은 까칠한 남자의 턱뿐이었다.   
뭐가 바빠서 실연당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런 곳에 와서까지 신문을 보고 있었던 걸까. 혹시 이런 이상한 풍경 스케치가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인터넷 신문 기자라도 되는 걸까.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뭔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사강은 남자에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실연당한 날 아침에도 남자들은 경제신문을 읽으며 그날의 주가 동향을 파악하고 주식 투자를 하는 걸까. 그럴 지도……. 이혼 서류가 접수된 다음 날에도, 여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위해 아침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수의 얼굴을 보면 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강은 그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이길 원했다.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노래한 건 김광석이었다. 그러나 청바지와 오래된 통기타가 그토록 잘 어울렸던 서른둘의 남자는 청춘의 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정수에게 샤넬 스카프를 생일 선물로 받던 날, 사강은 그것을 목이 아닌 오래된 가방 끈 위에 묶었다. 목에 매고 있으면 어느 날 그것이 이사도라 덩컨의 스카프처럼 자기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올 이유는 한 가지다. 사강은 이제 남자가 실연당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이곳에 온 스물한 명 중에는 미도의 말처럼 자신이 미래의 커플이 될지도 모른단 은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텅 빈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응시했다.
회칠한 하얀색 벽 위에는 커다란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거울은 사강이 볼 수 없는 창 너머 반대편 거리를 그림처럼 비추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정류장의 빨간색 지붕이 삼분의 일쯤 잘려 그녀의 동공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거울 안으로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사강의 눈빛이 거울에 채 머무르기 전에, 남자는 그림 안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사강은 남자가 걸어갈, 그러나 거울 속에선 보이지 않는 거울 밖 잘려 나간 길들을 상상했다. 
빈 의자 너머, 거울에 담긴 거리 풍경을 사강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나가고, 여자가 지나가고, 다시 남자가,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지나갔다. 손을 꼭 잡은 연인이 느릿하게 거울 속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댄 여자의 뺨이 햇빛 속에 반짝거렸다.
사강은 행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길 원했다. 그녀는 상냥한 얼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사강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맞은편 빈 의자에 살아 있던 과거의 정수와 죽어버린 미래의 정수가 있었다. 사강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빈 의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모던한 레스토랑의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빅토리아풍의 벨벳 의자. 누구도 쉽게 기억해낼 수 없는 오래된 시대를 재현한 모조품 위에 지나간 한 세월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부재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마지막 식사였다.
사강은 미역국을 수저에 가득 담았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을 입술에 대자 정수와 함께했던 기억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이 고통스런 재판의 피고이자 배심원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맞은편의 빈 의자가 말하는 바를 묵상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먹고, 밥알을 씹으며. 그것은 불행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둘로 분리되는 것을 조용히 사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강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국을 뜨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자꾸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코는 만취한 남자의 그것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눈물만큼 전염성이 강한 건 없다. 누군가 울음을 참고 있었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두 번째 메뉴가 나왔다.
그때,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를 끄는 날카로운 소음 때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미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지훈 씨! 잠깐만! 잠깐만요!”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동요한 몇몇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미도는 곧장 일어나 달리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한 여자가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강은 그녀에게 말없이 들고 있던 구겨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1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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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로 영화제를 알렸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할 공간을 대신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편의상 그것을 ‘실연의 기념품 가게’라고 불렀다. 사강은 레스토랑 입구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바라봤다. 바로 저 상자에 사람들이 가져온 실연의 흔적들이 버려질 것이었다.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있을까.
한낮의 눈부신 태양 속에도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
연애가 끝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긴다. 서로를 기념해주었던 반지와 이니셜이 박힌 목걸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구입한 싸구려 액세서리들, 여행 중 면세점에서 충동적으로 사들인 고가의 실크 스카프와 가방, 책, 음반…… 그는 좋아하지만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던 뮤지션의 공연 티켓과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시폰 프릴이 달린 스커트, 진분홍색 메리제인 슈즈, 브래지어 끈이 살짝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 같은 옷들, 혹은…… 원하지 않는 아기, ‘러브 차일드’라 부르는 아이들이 남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연애가 끝나고 사랑이 죽고 나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범죄 현장의 유류품처럼 남는다. 
실연 후 남게 되는 이런 물건들의 공통점은 버리기도 힘들고, 가지고 있기는 더더욱 힘들다는 것이다. 실연이 남긴 이런 얼룩을 클리닝하는 세탁소가 환영받는 건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만약 그런 세탁소가 존재한다면 지우기 힘든 얼룩이 가득한 세탁물을 든 손님들로 가득찰 것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누군가에게서 받은 상처의 기념품들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있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고 치자. 처리하기 힘든 이런 기념품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교환의 방식은 실용주의자들의 발상이다. ‘실연의 기념품 가게’는 일 주년 기념 반지를 종로의 금은방에 팔아치우는 것보다 한결 품위 있었다.  
집단적인 상처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풍경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누군가의 상처가 자신에게 돌아오고, 자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되돌아가며 상처의 모서리는 무뎌지고 치유되어 가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들은 실연의 기념품에 묻은 슬픔이나 분노,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치유는 이곳에서 가장 큰 희망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영화제의 이름조차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가 아닌가.
사강은 그저 웃고 싶어서 보는 예능프로그램에서조차 치유를 이유로 고해성사하며 우는 연예인들을 보는 게 불편했다.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도, 염색을 하지 않으면 온통 백발인 한물간 액션 배우도,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전성기 때와 완전히 얼굴이 달라진 여배우도,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유명세를 치르며 겪었던 고통을 얘기했다. 눈물로 가득한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한결같은 메시지가 주는 압박감에 사강은 피로감을 느꼈다. 저렇게 눈시울을 붉히는 대가로 얼마를 받고 있을까. 우는 사람보다 그것을 보는 사람 쪽이 훨씬 더 힘들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연 이후, 그녀는 자신이 필요 이상 시니컬해진다는 것도 잘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만졌다.
사강은 자신이 왜 이곳에 나와 있는지를 상기하려고 애썼다. 혼자 맞는 아침이 두려워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더구나 사람들이 말하는 위로나 치유의 문제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치유받는다는 게 대체 가능한 일일까. 치유도, 용서도, 결국 자신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강은 제일 먼저 가방 속의 이 물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가방 속에 든 이 지긋지긋한 물건과 헤어지는 행위만이 그녀에게 중요했다.

                                         

                                                                    *

 

레스토랑의 좌석 배치가 이루어졌다.
영화제 주최 측에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평온하던 공기가 일순간 변하며 어수선해졌다. 레스토랑 안에는 이제 비발디의 <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봄에 봄의 음악을 틀어놓는 것만큼 따분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선 어쩐지 따뜻한 환대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사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수록 그녀는 점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곧 다른 곳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강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스물한 개의 의자가 그녀의 맞은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사강과 사람들이 일렬로 나란히 앉았다.
누군가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사강의 목덜미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맞은편에 놓인 스물한 개의 빈 의자가 의미하는 건 너무 자명해서, 이곳에 있는 누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커플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 의자는 실연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때때로 차가운 손을 잡아주고 웃으며 함께 밥을 먹던 애인은 사라졌다. 맞은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빈 의자는 “이제부터 넌 혼자 밥 먹는 연습을 해야만 해!”라고 열창하는 중이었다. “혼자 먹는 밥도 괜찮아! 맛있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검정색 스웨터를 입은 안내자들은 만찬이 시작될 좌석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의자에 이름표가 붙어 있진 않았지만 그들은 의자에 누가 앉아야 할지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안내자들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규정을 지키듯 약속된 동선 위를 조용히 움직였다. 대신 미소 지은 얼굴들은 이곳에 온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듯 온화했다. 그러나 그런 상냥함 때문에 방석이 놓인 폭신하고 따뜻한 의자에 앉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더 절실하게 인식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소화 장애에 시달렸고, 수면제로는 해결되지 않는 불면증 때문에 심한 수면 부족 상태였다. 눈동자가 충혈되더니 귓불과 목덜미까지 붉게 상기되는 사람도 있었다. 맞은편의 텅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리는 여자도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긴 나무 테이블 위에는 진열장에서 막 꺼낸 듯 보이는 흰 도자기 그릇과 손수건 스물한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아침 식사를 위한 것인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손수건 위에 행운을 의미하는 네잎클로버가 수놓아져 있다는 것으로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9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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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건 사강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정수였다.

 바로 그 점이 사강을 지옥 같은 혼란스러움에 빠트렸다.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이별을 선언한 사강 쪽이었다. 정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관된 표정으로 공항과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관제탑에서 군대 행진곡이라도 틀어주면 그가 한때 전투기를 몰던 공군 조종사였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사강의 주위엔 아무렇지도 않은 것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심장의 정중앙에 구멍이 뻥 뚫려버리는 기분이었다. 몸 전체가 거대한 링 도넛처럼 느껴졌고, 누군가 부주의하게 눈물 한 방울만 튀어도 잔뜩 설탕을 바른 도넛처럼 온몸이 차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있잖아요, 전 밤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는데, 아무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걸 느낄 때 정말 외로워져요. 휴지도 다 떨어져서 며칠 전 신문지로 그걸 딱 때려잡았을 때. 등껍질이 탁 터지면서 왜 노란 진물 같은 게 막 흘러나올 때.”
 미도는 사강의 얘기를 오해한 게 분명했다. ‘찼다’를 ‘차였다’로 말이다. 얼핏 들으면 비슷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사강은 미도의 오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이제야 찾아냈다는 듯 끊임없이 말했다.
 “바퀴벌레 지능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바퀴벌레한테 지능이랄 게 있나요?”
 “어머! 무슨 소릴! 바퀴벌레는 자기 동료나 가족을 죽인 인간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한대요. 그래서 그 인간한테 반드시 복수한다는 거예요. 밤에 자다가 마셨던 물컵 안에 바퀴벌레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해봐요. 복수할거야, 라는 얼굴로 물컵 안을 수영하면서 온갖 바이러스를 왕창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
 “그쪽, 안 믿는 눈치지만 저도 첨엔 정말로 안 믿었어요. 근데 맹세코 정말이래요. 내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그 얘기 해준 것도 남자친군데. 사실 바퀴벌레 보다가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하는 거, 정말 짜증나고 화나요.” 
 갑자기 나타난 바퀴벌레나 지네, 거미를 보고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건, 그 사람이 대책 없는 사랑에 빠졌단 증거다. 징그러운 벌레를 본 여자는 여지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런 것은 당연히 남자가 나서서 잡아줘야 하는 호들갑스럽고 의존적인 세계에 즉각 편입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벌레든 뭐든 혼자서 때려잡을 독립심과 용기를 말하는 건 사강이 아는 연애가 아니었다.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 같은 곳에 늘 가고 싶었지만, 도무지 멀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트위터 안 했으면 여기 절대 오지 않았겠죠?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전 그게 제일 궁금해요.”
 미도가 반복해서 말한 영화제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역시 본인도 실연당한 사람이겠죠?”
 사강은 자신이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클릭했던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트위터에 영화제의 공고가 난 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글이 뜬 건, 새벽 세 시 사십삼 분이었다. 
 트위터에 접속하는 순간, 사강은 국제공항의 커다란 전광판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세계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비행기들을 떠올렸다. 비행기가 내는 엔진 소음이 밝은 빛을 내는 혜성처럼 긴 꼬리를 흔들며 지구의 밤하늘로 서서히 사라져 끝내 소멸하는 아득한 풍경을.
 실시간으로 수천, 수만 개의 글이 올라가는 트위터는 인천공항터미널 3층에 서 있는 전광판 같았다. 난수표처럼 복잡한 문자의 행렬들, KE925, AA290, OZ579, NH6954, TK8092, CO4414, AE630, UA737…… 언뜻 의미를 알 수 없는 약호들은 마드리드와 헬싱키, 방콕과 울란바토르, 도쿄의 이륙과 착륙을 알리는 비행기들의 집합으로 고속도로를 맹렬히 달리는 심야고속버스의 고장 난 점멸등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전광판에 그려지는 비행기의 도착과 출발과 출발의 지연을 알리는 기표들…… 국제공항의 전광판은 실시간으로 140자의 글자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트위터와 비슷해 보였다.  

 아침 일곱 시부터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자는 건 이상한 제안이었다.  
 아침을 먹고 연달아 영화 네 편을 함께 보자는 아이디어는 조금 더 이상했다.
 가장 이상한 건 마지막 제안이었다.
 그러나 의미 없이 밀려오는 수백 개의 맨션 중, 이 문장만은 유독 사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정수와 헤어진 후, 그녀의 주변은 정말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너무나.

 

 그런데 그런 일을 체험하고 있는 복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사강은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이란 말에 조용히 밑줄을 그었다. 그것이, 더구나, 농담일리 없었다.
 그런 햇빛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강은 트위터의 프로필을 살펴봤다.
 트위터의 본인 성명 란의 이름 역시 트위터였다. 트위터의 이력 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버려진 매몰지처럼 보이는 이곳도 한때 빛나는 사건과 순간 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그가 누구든, 그녀가 누구이든 이 문장의 화자는 실연의 기억을 잊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극복되지 못한 실연에 낮과 밤이 뒤바뀌고, 오전과 오후가 뒤섞이고, 폭식과 절식 사이를 헤매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달력의 한 계절이 통째로 찢어져 사라진 후의 일임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봄인 줄 알았는데 가을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이제 막 개나리가 진 줄 알았는데 물에 젖은 낙엽이 신발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목격했을 때, 그때의 마음을, 머리와 빗장뼈가 동시에 울릴 때 나는 그 진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원망하다 진동으로, 무음으로, 다시 벨 소리를 끝까지 올리던 반복의 반복들. 불현듯 잘못 누른 버튼 때문에 신호음이 울릴 때, 복음 같은 그 소리에 주저앉아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독백하던 날들, 사강은 그런 아침을 자신이 어떻게 견뎠는지 어렵지 않게 기억했다.
 사강은 타인에게 이해받기 힘든 이별을 겪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정수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윤사강에겐 한동안 소년도 남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남성 혐오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정수가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세계에 남자라는 신인류가 새롭게 편입됐다. 그녀에게 그것은 봄의 폭설과 늦가을의 더위 같은 이상기후를 용케 피한 다행스런 연애였다.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아이가 기적처럼 자라났고,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나 깊은 안도감 뒤에는 훨씬 더 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 같은, 무엇보다 개인적이어야 할 연애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강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받지도 못했다.

 

 

(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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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게 되리라곤 전 생각지도 못했어요. 창피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여기 온 건 잘한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겠죠? 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사강은 미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과거와 작별하고 커플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한 번의 사랑만으로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사랑 때문에 새벽녘 손목을 긋거나, 선물 받은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도 씨 말처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왜요?”
 미도가 사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부정적인 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미도는 동의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그런 거 아닌가? 긴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고 아이가 태어나고 그렇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헤어질 걸 알면서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니까.”
 “헤어질 걸 알고도 사랑한다?”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그럼요. 우린 죽을 걸 알고도 살아가잖아요.”
 “사람들이 정말 그런 걸 알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요. 저도 죽을 거고, 사강 씨도 죽을 거고. 누구나 다 죽잖아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사강은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듯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 입구의 문은 열려 있지만 처음부터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터널이었다. 환한 빛 속에 있다가 빨려들어가듯 짙은 어둠 속으로 따라 걸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상한 터널. 사강은 그 터널을 떠올리며 그 속을 걷듯 느릿느릿 말했다.
 “미도 씨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말은 쓰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하루하루 죽어간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치의 삶을 덜어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실패한 친구에게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 전 믿지 않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같은 말이 대체 그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니었다고 털고 일어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넘어져 무릎이 깨진 사람 앞에서 ‘힘내라. 당신의 잠재력을 믿어라.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못해요.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를 얘기하면서 위로하는 게 무슨 소용이죠? 그럴 땐 그저 손을 내밀어주고 어깨를 안아주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죠.”
 사강의 목소리는 어조 없이 담담했다.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맛있는 커피를 권해주거나, 따뜻한 국을 끓여주는 쪽이 전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따뜻한 음식을 권유하는 이런 영화제가 나쁘진 않은 거네요. 그렇죠?”
 “제 생각에는요.”
 “재밌는 영화제에요. 누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걸까요?”
 “그쪽, 실연당한 건가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제가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봐요? 그런 거죠?”
 미도는 굳이 자신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사강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을 상대로 뭔가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곧 사라져버렸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팔십칠 일째예요. 팔십칠 일하고 열세 시간 지났네요.”
 손목에 찬 커다란 전자시계를 바라보던 미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강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격히 내려가는 그녀의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덧니가 그녀의 입안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미안해요. 힘들겠군요.”
 “아뇨. 안 힘들어요. 저 말짱해요. 헤어지고도 잊지 못하는 사랑, 전 그런 거 수지타산 안 맞아서 못 해요.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하자, 이게 제 신조예요.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자. 물론 잘되는 것 같진 않지만.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지, 복잡하게 이런저런 이유 대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정말 질색이거든요. 죽어도 나쁜 역할은 맡지 않겠다는 못된 심보잖아요? 연애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힘든 걸 극복하는 방법은 다르니까, 곧 괜찮아지겠죠. 사실 홧김에 사표 낸 지는 일주일 됐어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덜미가 조금 발개져 있었다.
 사강은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육 년 동안 같은 직장을 다녔다. 매달 25일이면 월급을 받고, 그 돈을 한 푼도 저축하지 않고 대부분 써버린 것 역시 육 년째였다. 이 사람들은 어떨까. 사강은 아침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외롭다’와 ‘괴롭다’ 사이를 형상화한 조각품들 같았다. 그 조각품에 이름을 붙이면 아마도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롭다’가 되지 않을까. 
 “세상에 얼마나 나쁜 자식들이 많은지 알고 나면 정말 연애라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어른들이 왜 연애보다 중매를 좋아하는지도 알겠고.”
 이상할 만큼 친화력이 있는 여자였다. 사강은 어느새 이 낯선 여자와 의미 없는 숫자들, 가령 기르다가 부러뜨린 손톱, 택시에서 분실한 휴대전화와 딱 한쪽만 잃어버려 착용 불가능한 귀걸이의 숫자 같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영화제 프로그램 봤어요? 영화가 네 편이던데. 전부 다 볼 거예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전 네 개 전부 다 볼 거예요. 프로그램이 정말 맘에 들어요. <화양연화>랑 <봄날은 간다>, <러브레터>하고…… 나머진 뭐였죠?”
 “<500일의 썸머>.”
 “전 그 영화는 못 봤는데. 실연당한 사람들 얘기인가 보죠?”
 “500일 동안 한 여자에 빠져 있던 남자가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졸업>을 본 후, 좋아하는 팬케이크 가게에서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얘기예요. 저도 줄거리만 읽었어요.”
 “여기 온 사람들, 전부 애인한테 차인 사람들 아닐까요? 설마, 양심이 있다면 애인을 찬 인간이 여기까지 기어오진 않았겠죠? 재수 없는 인간들!”
 미도는 잠시 분노한 표정을 짓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사강을 향해 말했다.
 “전 일 년 정도 사귀다 차였어요.”
 미도가 “그쪽은 얼마나 사귀었어요?”라고 묻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미도는 곧장 사강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쪽도 차인 거죠?”
 미도가 확신에 차 사강을 바라봤다.
 “아뇨.”
 사강이 고개를 들고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비발디의 <겨울>이 흘러 나왔다.

 

 

(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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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던 레스토랑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사강 쪽으로 걸어왔다. 
 “반가워요. 전 정미도예요.”
 여자가 활짝 웃자 작은 덧니가 드러났다.
 스무 살은 넘었을까. 어쩌면 어깨에 멘 저 배낭 속에 수학이나 영어 교과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어깨가 강조된 검정색 파워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구겨지기 쉬운 얇은 린넨 소재의 블라우스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런 초봄엔 어울리지 않았다. 발목과 복사뼈가 전부 드러난 밑단이 짧은 팬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윤사강입니다.”
 사강의 경우, 자신의 이름은 대부분 제복의 왼쪽 가슴에 매달린 명찰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름을 얘기하며 밝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네”라고 짧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우리 직업 맞추기 할래요?”
 사강은 당황스런 얼굴로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도는 모두가 우울한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어디에서나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이 무표정이나 절망 이외의 표정이 엿보였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과 왼쪽 뺨에 팬 보조개는 가벼운 흥분 때문인지 더 빛나 보였다. 그러나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그들과 무엇이든 얘기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선 실연 후 생길 수 있는 조울증의 기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지금 조증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미소와 활기를 무장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가.
 “백화점에서 일하지 않으세요? 자동차 판매 영업을 한다거나. 제약회사 영업 직원이거나 보험일 수도 있겠구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저 학교 다닐 때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알바 한 적 있어요. 취직하려고 속성 메이크업도 배우고 그랬었는데. 그쪽은…… 비서 아니세요? 회장님 비서.”
 “제가 비서처럼 보여요?”
 “네. 적어도 저랑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같이 짧게 자른 미도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저런 스타일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귀 전체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 덕분에 그녀의 귀에 달린 여러 개의 피어싱과 별 모양의 금속 귀걸이가 더 크고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사강의 눈에 들어온 건 너무 말라서 얇은 빗자루만 한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몸이었다.
 “추우세요?”
 사강이 미도에게 물었다.
 “원하면 제 재킷을 벗어드릴 수도 있어요. 전 좀 덥거든요.” 
 “안 추워요. 괜찮아요.”
 미도가 웃었다.
 “이 재킷, 안감이 두툼해서 꽤 따뜻해요. 사양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추워요!”
 미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미도는 틀림없이 추워 보였다. 떨고 있진 않았지만 입술이 파랗게 질린 걸 보면 곧 추위를 느낄 것이다. 특히 맨다리에 얇은 바지를 입었으니 그 속으로 3월 아침의 찬 공기가 잔뜩 들어와 앉았을 것이다.
 사강은 오 분이나 십 분 후, ‘춥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신체적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질문을 던진 건 타고난 예민함 때문이라기보단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다. 사강은 기내에서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마른기침을 하고, 오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사강이 미도에게 질문을 던진 건 천성적인 마음씀씀이 때문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녀의 직업병이었다.
 “아…… 이제야 알겠어요. 제 옷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도가 그제야 이해한단 얼굴로 사강을 바라보았다.
 “이 옷, 하나도 춥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전혀 춥지 않으니까. 말짱해요. 보기보단 통뼈에요, 저! 그나저나 참 특이한 모임이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게 놀랍지 않아요? 전 저만 나오면 어쩌나 되게 걱정했었거든요. 혼자서 밥 먹는 거, 처량 맞잖아요. 근데 여기 와보니 너무 안심이 돼요. 대성황이잖아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대체로 조용했다. 게다가 빈 의자를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상황에서 대성황이란 단어를 떠올린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도는 이곳의 분위기를 꽤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이 톤의 목소리가 이곳과 엇박자로 계속 어긋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생각하면 전 엄청 위로가 돼요. 적어도 나만 슬퍼할 일은 아닌 거잖아요? 왜 아픈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위로받고,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요? 안 그런가? 끼리끼리 동병상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나중에 다시 모두  커플이 되겠지만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 뜻밖에 잘생기고 예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미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저 남자, 어떤 것 같아요? 아까부터 눈에 띄던데.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미도가 남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는 레스토랑에 있던 신문을 들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사강은 남자들의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꽤나 단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명찰도 제복도 없는 사적인 공간이었고,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해져 있었다.
 쌍꺼풀 없는 남자의 눈매는 차갑지만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테 없는 동그란 안경은 남자의 차가운 느낌을 적절히 교정해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성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옅은 주름들이 보였다. 자주 웃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양쪽 입가의 옅은 세로 주름과 눈 옆에 자연스레 생긴 가로 주름들. 그러나 세 번째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강은 고개를 단호히 돌렸다. 
 하얀색 치노 팬츠와 검정색 캐시미어 터틀넥은 그와 꽤 잘 어울렸다.
 여간해서 흰색 바지를 입지 않는 보수적인 한국 남자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패턴이었다. 디자이너일까?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옷을 좋아하고, 차려입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을 줄 아는 능력은 의외로 희귀하다.
 하지만 사강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애써 무시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해,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강은 가방에 든 물건을 생각했다. 처리하기 힘든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처리해줄 전문가를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람을 전문 용어로 ‘킬러’라 부른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에선 사람을 죽이는 전문가만 존재하지 않는다. 물건, 추억, 시간을 죽이는 전문가도 필요해지는 법이다. 사강은 그것이 결국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이 결성된 것도 누군가의 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5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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