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모두 123쌍의 커플들


‘눈에 보이는 것을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 
이것은 정미도가 오랫동안 주거할 집을 고를 때 고수한 생활 철칙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보일러나 싱크대의 수도꼭지, 화장실 배수구 등은 반드시 작동시켜야 한다. 물을 틀고, 잠그고, 물을 다시 틀어 흘려보내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며 한밤중에 마트에서 ‘뚫어펑’을 사느라 낭패를 보기 싫다면 말이다. 작은 냉장고가 있다면 당연히 열어봐야 한다. 고무 패킹이 떨어져 나간 냉장고는 전기를 잡아먹는 하마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확인하지 않아 집을 계약해버리면 집주인은 고장 난 것을 고치는 데 인색해진다. 장인어른이 생일이라거나, 장모님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없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일 따위를 들먹이며 곰팡이 핀 천장이나 터진 보일러를 방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입자를 나 몰라라 하는 막가파 주인을 대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입안에 백 년 묵은 걸레를 문 것처럼 쌍욕을 해대고, 반복적으로 행패를 부림으로써 주인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사이코를 만났군!”이라고 분명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 시원한 해결 방법엔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 결국, 주변보다 싼 시세의 재계약은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한 가지는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순응주의는 막 서울로 올라온 스무 살 정미도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
하수구는 막힌 채로,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싱크대는 졸졸 흘러나오는 채로, 터진 보일러는 “돈 아끼는 셈 치지!”라고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돌리지 않는 것. 그렇게 미도는 FM 91.9 주파수만 잘 나오는 라디오를 고장 난 채 사용했고, 막힌 하수구 역시 막힌 채 사용했다. 그녀는 한 번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2구 가스레인지를 한 번에 서른 번 넘게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통 사람들에게 없는 비범한 인내심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장시간 웅크리고 앉아 부패한 음식물 찌꺼기 냄새를 풍기는 하수구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펜치로 자른 철제 옷걸이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집어내는 일이나, 배고픔을 참아가며 가스레인지를 수십 번씩 돌리는 일이나,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방에서 영하 10도의 겨울을 나는 일은 모두 극기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장 난 것투성이인 집에서 살다 보니, 스스로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도가 순응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삶의 노선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불평 없이 고장 난 걸 ‘참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착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년은 정말 머리가 고장 난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친절함을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착각하는 인간들을 미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계약하기 전에 친절히 구는 집주인은 더 의심해야 마땅했고, ‘전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고객일수록 더 유심히 주목해야 하며, ‘난 뒤끝 없어!’라고 주장하는 상사들에겐 절대 속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이라고 집이 빠졌는데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그물거리는 악덕 주인에게는 나이와 별개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도리다.
“돈 내놔! 이 개 호로 새끼야! 당장 성추행범으로 형사 고소해버리기 전에!”
그게 미도가 살아온 삶이었다.
 
미도는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이벤트기획부와 웨딩사업부 합동 프레젠테이션에 사용할 자신의 안테나를 챙겼다. 안테나는 그녀의 첫 번째 집주인이 선심 쓰듯 내어준 텔레비전 위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훗날 그녀의 동생 정미우가 ‘1995년에 생긴 태양계의 급격한 변화’라는 제목의 썰렁한 농담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태양계에서 금성이 사라진 거, 정말 놀라운 일 아냐?”
농담의 실체는 이러했다.
1995년에 금성이 LG로 바뀐 것이다.
집주인의 오래된 텔레비전은 1995년산으로, 지금은 황학동 고물상에서조차 찾기 힘든 ‘골드스타’ 마크가 붙어 있었다. 주인은 그 텔레비전을 사고 전세를 탈출해 이곳 은평구 불광동에 첫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는 좁아터진 서울 바닥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텔레비전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이런 선행은 절대로 없을 것이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미도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아저씨가 가져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학생 생각해서 텔레비전도 거저 줬으니 불편하겠지만 싱크대는 그냥 쓰는 게 좋겠어.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라고 말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는 탐욕스런 주인이었다.
골드스타.
한때 우리가 ‘금성’이라 불렀던 전자회사의 텔레비전 광고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

미도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골드스타 텔레비전을 ‘발로 차’ 일부러 고장 낸 것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기념품을 찾다가 텔레비전에 꽂혀 있던 그 안테나를 뽑아왔다. 어차피 고장 나면 절대 고칠 수 없는 옛날 물건이었다. 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그 안테나를 사용했다. 길이도 볼륨감도 적당했다.
순간의 선택은 정말로 정미도의 십 년을 좌우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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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나 같은 남자를 생물학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많지 않다. 현정은 딱히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도, 호감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조 있는 여자라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오래된 연인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자학하듯 최악의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 것이다. 현정은 딜레마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 밖에 이별을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귀결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것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훈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놈일까? 아는 인간일까? 사내 연애? 학교 동창인 걸까? 당장 다음 달에 결혼 청첩장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빌어먹을, 어떤 얼굴로 청첩장의 신랑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들에게 쏟아질 동정과 위로의 시선들은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의문의 꼬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그에게 남겨졌다.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글자 없이 하얀 백지만 있는 책장을 펼쳐 든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는 외팔이 검객이 나오는 옛날 홍콩 영화를 보다가 맥주 얼룩이 남아 있는 패브릭 소파에서 졸았다. 낮에 꾸벅거리다 보니 밤에는 잠이 더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다가,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없는 휑한 사무실에 출근했다.
딱히 먹을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훈은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주말엔 파자마를 입은 채 세 가지 종류의 라면을 점심과 저녁으로 끓이고, 먹고, 설거지하고, 냄비와 그릇을 일일이 마른행주로 닦고, 냉장고 속을 정리해도 시간이 남았다. 일요일엔 짜파게티를 먹는 광고 속 모범 시민 같은 삶이 그에겐 전혀 즐겁지 않았다. 
라면 봉지를 버리려다가 지훈은 넘치기 직전인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그는 쓰레기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봉지 하나를 꺼냈다. 쓰레기통이 집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먹을 걸 찾는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 뒤에 적혀 있는 매뉴얼을 큰 소리로 읽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뻥끗하지 않은 입에선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순간 면을 먼저 넣어야 할지,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할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몇 시간 동안 온갖 라면카페를 뒤졌다. 그는 ‘365일 라면만 먹고 살고 싶은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긴 이름의 카페 회원으로 가입했다.
머릿속이 쓰레기통 속처럼 가득 차올랐다. 
지훈은 쓰레기통 속의 라면 봉지를 전부 꺼내, 쓰레기통 앞에 앉아 라면 봉지를 겹겹이 접기 시작했다. 그는 라면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스프 봉투 속에 작게 접은 라면 봉지를 집어넣었다. 네 개의 라면 봉지를 이렇게 처리하자 넘칠 것 같았던 쓰레기통의 부피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부피가 큰 라면 봉지는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건 현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럴 땐 혼자 있지 말고 무조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도 빌어먹을 현정이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 한 달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28일과 31일이 낀 달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헤어진 지 삼십 일째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지훈은 평소보다 자주 시계를 봤다.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남자가 멍청해 보인다는 평소 현정의 주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긴 했지만 깨어보면 꿈과 현실이 또렷이 분간되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일상을 두들겼다. 
“새로 나온 벤틀리 엔진 소리 들어봤어? 그 소릴 들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령 늦은 점심을 먹다가 지훈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현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정이 꼭 식판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네가 환장하는 폴 오스터가 이 제품으로 『뉴욕 3부작』의 초고를 썼대. 1974년에 친구한테 40달러를 주고 산 타자기라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니? 소리 한번 들어볼래? 권총 장전할 때 나는 상쾌한 소리가 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현정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잠시 자신의 청각에 진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고민했다.
“이 시계, 태엽 감는 소리 한번 들어봐.”
현정의 관심을 끈 것은 대부분 기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니콘이나 콘탁스의 카메라 셔터 소리나 막 출시된 스마트폰의 다이얼 터치 동작음, 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산 올림피아 타자기에서 나는 차갑고 묵직한 자판음 같은 것들로, 지훈에겐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 시끄러운 ‘소음들’이었다.
현정과 헤어진 지 백 일째 되던 날, 지훈은 박스 안에서 두꺼운 앨범 한 권을 꺼냈다. 앨범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앨범 속 사진을 매일 바라보았다.
사진을 태우는 건 대부분 버림받은 쪽이다.
사진을 태우기 위해 그것을 모으고, 라이터를 켜고, 쓰레기통 속에서 타들어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을 소각시키는 건 심장과 연결된 기억의 일부분을 잿더미로 덮어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지훈은 앨범 속 사진을 바라봤다. 새 롤러코스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에버랜드의 튤립 축제, 광릉의 수목원의 전나무 앞에서 찍은 B컷, 일산의 호수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타며 찍은 사진과 일본으로 떠났던 여행 사진들이 있었다. ‘현정 7세. 현정 12세. 현정 18세. 현정 23세. 현정 27세’로 기록된 사진 속의 현정은 볼이 빵빵한 꼬마 여자아이의 성장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성장 다큐멘터리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입사 첫날, 회사 앞에서 현정과 어깨동무를 하며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의 감정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가지고 있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앨범 속의 사진들을 한 장씩 빼냈다. 그것을 하나씩 태워 없애는 것으로 지나간 일들을 재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훈은 사진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현정의 이마와 볼과 어깨가 서서히 불길 아래로 스러져갔다. 시간을 들여 한 장씩 태워버리면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는 사진을 태우고 남은 극소량의 재를 작은 유리병에 모아두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뼈와 살을 수습해 화장하고 남은 흔적 같았다. 잿가루를 모아둔 유리병을 보며 그는 매일 현정의 죽음을 애도했다.

*

지훈이 트위터에서 우연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본 건 그즈음이었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내일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처음에 지훈은 트위터를 무시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는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 일곱 시부터 아침을 먹는다는 발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바쁜 출근길, 회사 앞 단골 노점상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계란토스트 하나를 서서 먹는 정도였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그의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는 가게

그는 충동적으로 ‘기념품’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지훈은 이제 노트북을 바짝 끌어당기고 ‘서로의 상처를 교환한다’는 문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사진을 태우고 남은 재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현정이 준 첫 번째 선물을 떠올렸다.
여름방학 MT,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밤, 그들이 함께 바라보았던 강변의 밤하늘. 지훈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던 그 밤의 정적을 기억해냈다. 모든 것이 잠든 밤, 그런 정적의 와중에 소름같이 돋아나던 귀뚜라미 소리가 정적을 더 두꺼운 장막처럼 만들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과 나무는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어둠 속에서 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연인들의 손은 터질 듯한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사랑해’란 말을 하기엔 모든 게 희미한 때였다. 지금의 현정이라면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라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사랑의 감정이 도파민과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호통치듯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몸이 간질거리는 수줍음 때문에 그들은 ‘사랑해’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스물 몇 살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었다. 
그는 옷장 속에 넣어뒀던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버릴 수도, 태울 수도, 누군가를 줘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한다는 건, 그것의 세세한 내막을 모를 때에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것이 실연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없는 물건을 골라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실제 주인에게 그 물건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게 더 의미 없는 물건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만약 그것이 반지라면 끼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라면?
목에 걸지 않을 것이다.
음반이라면?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스턴트 참치 캔이라면 평생도록 먹지 않고 보관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런 식의 연상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만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는 가족처럼, 그저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훈은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는 옷장과 누군가의 반지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가지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최초의 선물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현정과의 일을 고통에서 추억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실연을 빙자해 새벽까지 친구들을 붙잡아놓고 술을 퍼마시며 하소연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밤새 먹은 음식을 토해내며 스스로의 배설물을 확인하는 자학적인 방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형편없는 스토커로 떨어져 경찰 신세를 지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실연 때문에 여기저기 곯아 터진 상처가 전시된 갤러리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처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어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참가하고 싶습니다

지훈은 어느새 참가 의사를 밝히는 쪽지를 쓰고 있었다.

 

 

(1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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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13일.
 지훈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자동차 클랙슨을 연달아 누르며 C 전자 경주 연수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직진으로 곧장 뻗어 있던 고속도로는 이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IC를 건너뛰고 직진해 달리면 서울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고 복잡해질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유턴은 불가능하다. 그저 앞으로 가거나, 멀리 다른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이대로 연수원까지 달려가 일 년 동안 지속됐던 C 전자의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내 교육 담당자와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다음 교육 일정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방향을 틀어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다. 서울로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C 전자와는 영원히 등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 때문인지 재채기가 났다. 코를 풀고 버린 휴지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볍게 날아갔다.
 지훈은 시계를 보다가 방향을 틀어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황당할 정도로 멍청한 결정이었는데, 그날은 갖은 방법을 써도 사람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 C 전자 연수원장과의 독대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 중 중요한 일부분 역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이라고 적힌 표지판 위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

 

 “이지훈! 오늘 연수원장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우린 주말에 통화하기로 했잖아. 나 오늘 선생님들하고 회식이야. 들어가봐야 돼.”
 그가 전속력으로 연수원이 아닌 현정의 학교로 달려가 그녀를 만났을 때, 현정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삶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지훈에겐 불행히도 그 순간이 바로 그때 찾아왔다. 현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줄게”라고 말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입술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현정이 긴 침묵을 깼다.  
 지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말 헤어지고 싶어?”라고 질문하는 게 정현정이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그녀는 대답 대신 ‘반드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결혼하자고 말하면 “결혼하고 싶어?”라고 질문할 것이었고,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뭔데?”라고 반문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현정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현정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현정 사이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오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훈련된 협상 전문가처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곳까지 달려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고마워”란 얘길 듣는 순간, 그는 현정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의 한숨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겨울바람과는 다른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았다.

 

 겨우 오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현정은 질문을 포기했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을 무시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랑이란 끊임없는 질문’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아포리즘은 실종됐다. 현정은 대화의 문을 닫았다. 지훈은 대화를 이어나갈 어떤 구실도 찾지 못했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눈비가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속도 그대로 온몸으로 그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운전 조심해.”
 그는 현정의 손등을 바라봤다. 벌에 쏘여 삼각형 모양의 흉터로 남은 손등에서 추억들이 윙윙대며 쏟아져 날렸다. 지훈의 얼굴 위로 잘 갈린 얼음 알갱이가 달라붙었다. 누군가 티스푼으로 얼음 빙수를 떠 자신의 뜨거운 눈동자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다.
 길을 달려오는 동안 마주쳤던 풍경들이 거꾸로 되돌아와 그를 흔들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12월에 개나리나 목련이 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려오던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지훈은 그녀에게 경부고속도로에서 본 길가의 꽃들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2월에 핀 벚꽃을 보았다고 얘기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어준단 말인가. 그것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 현정이란 자각이 지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것은 지훈이 생각했던 이별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도 가끔, 아주 가끔은, 현정과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차 안에서, 호텔에서, 그들이 숱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익숙한 침대 위에서. 이별의 장면 속엔 늘 축축한 눈물이 있었다. 짱짱한 하늘에 느닷없이 비구름이 몰려오고, 바짝 마른 빨래 위에 비가 떨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무표정했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이별엔 생략되어 있었다.
 두 시간 후, 서울 도심에 폭설이 내렸다.
 눈발이 점점 더 몰아치더니 무거운 몸체를 이기지 못한 듯 수직으로 낙하했다. 버스와 대중교통은 마비되었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걷기를 멈추었고, 고개를 수그린 채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하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차들은 운행을 포기했다. 정지된 자동차들의 무덤. 도시를 뒤덮던 날카로운 소음들은 진공의 눈 속에 파묻혀 가라앉고 있었다. 12월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고요한 밤이었지만 지훈의 심장은 시속 150킬로미터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나’의 연속적인 타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길고 날렵한 총구를 정확히 겨누었다. 눈이 쏟아지는 도심의 네온 광고판에서 여름만 존재하는 괌 관광청의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그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신의 심장이 와장창, 유리처럼 깨지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 드류 베리모어는 모두 일곱 가지 통신 장비로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전화번호가 하나이던 시절이 그리워! 응답기 하나에 테이프도 하나!” 이 영화는 지훈이 현정과 함께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지훈이 현정에게 처음 이별을 통보받은 건 일주일 전, 월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네 번이나 들어야 했는데, ‘미안해. 잘 살아’로 끝나는 네 가지 종류의 이별 메시지였다.
 만약 어느 날, 각각의 통신 장비에 접속할 때마다 ‘헤어지자!’, ‘잘 살아!’,  ‘건강해야 돼!’, ‘행복하길 빌게!’, ‘넌 진짜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따위의 일곱 가지 버전의 이별 고해사를 듣는다면, 그가 누구라도 21세기적인 이별의 방식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묵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이 전송 방식과 전송음이 제각각인 네 가지 버전의 통신 기계들로 이별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곤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네 번 놀랐고, 네 번 분노했다. 네 번이라고 했지만 그건 매번 그에게 그전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 현정은 제일 먼저 이메일로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2. 현정은 페이스북에 그 사실을 올려놓았다.
3. 현정은 지훈의 트위터에도 이별 사실을 알렸다.
4. 그러고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이별의 메시지는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도착해 있었다.
 사실 현정의 이별 메시지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과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마우스로 긁어서 복사해 올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현정은 네 번이나 같은 얘길 반복했다. 분명히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은 이 불길한 냄새가 결국 테스토스테론과 관련된 것이며, 그녀가 남긴 일관된 이별 메시지가 남긴 유일한 의미는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다른 남자가 생겼어!’라거나 ‘다른 놈이랑 잤어!’ 같은 고백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자명한 이유를 이제껏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현정은 실언한 게 아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1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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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그만 헤어질까?”
 언젠가 휴가를 맞춰 함께 떠난 파리에서 현정은 지훈에게 불쑥 물었다. 그러나 지훈의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현정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입술에 잔뜩 묻힌 채 말했다.
 “아님 말고!”
 현정은 살짝 벌어진 앞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흰 구름이 카푸치노 위에 올려놓은 포근한 우유 거품처럼 느껴지던 날이었다.
 지훈과 현정은 다른 연인들처럼 퐁네프 다리나 에펠탑에서 사진을 찍고, 파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현정이 지하철역 근처 서점에서 산 잡지를 뒤지며 볼만한 공연의 리뷰를 찾는 동안 지훈은 걸어 다니며 바게트나 샌드위치를 바쁘게 먹는 파리지앵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지도를 들고 몽마르트르의 뒷골목을 걷다가 영화 <아멜리에>에서 나왔던 ‘카페 레드 뮬랭’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크림 브뤼레와 하트 모양의 다크 초콜릿이 토핑으로 올라간 레몬치즈 케이크를 먹었다. 계획 없이 걷고 또 걷는 건 파리를 여행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었다. 시차 때문에 너무 일찍 일어난 다음 날, 이들은 오페라 극장 앞에 앉아 해 뜨는 광경을 보다가, 이리저리 건물 내부의 뼈대가 튀어나와 기괴하게 보이던 퐁피두 센터의 영화 자료실에서 발음하기 힘든 이란 감독의 옛날 영화와 프랑수와 트뤼포의 <줄 앤 짐>을 봤다.
 그날 오후에 지훈과 현정은 리옹역에서 RER 티켓을 끊어 베르사유로 가는 이층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베르사유 궁궐의 아름다운 정원을 걸으며 현정은 지훈에게 말했었다.
 “베르사유는 원래 루이 13세가 사냥을 위해 머물던 여름 별장이었대. 주변이 온통 늪지대였고 쓸모없는 땅뿐이었는데 그걸 루이 14세가 아름다운 궁궐로 만든 거지. 절대왕권 시대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이곳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생각하면 너무 놀라워. 삼백 년이 넘은 건물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게 정말 신기하잖아. 넌 믿겨지니?”
 지훈이 고개를 젓자 현정은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가끔 우리가 사귄 지 십 년 가까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내 청춘이 너란 사람으로 채워진 거잖아. 테트리스로 치면 난 정사각형만 잔뜩 들어가 있는 블록 같아. 어떤 사람들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 가로가 긴 직사각형, 기역, 니은 모양의 도형처럼 다양한 블록들로 가득 차 있을 텐데.”
 직선처럼 부는 바람 때문에 나무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흔들렸다. 현정의 긴 머리도 같은 방향으로 흩날렸다.
 “지루해?”
 “가끔. 넌?”
 “글쎄.” 
 “…….”
 지훈은 바람에 날리는 현정의 긴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셔츠 사이로 볼록 튀어나온 그녀의 작은 젖꼭지를 바라봤다. 현정이 숨을 내리쉴 때마다 그것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국을 떠나면 현정은 늘 브래지어부터 풀어놓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이즈보다 늘 한 치수 큰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평균보다 작은 가슴에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언어와 공기가 달라지면 현정은 제일 먼저 자신의 가슴보다 큰 브래지어 사이즈를 불편해했다.
 이들은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농담으로 흘려버릴 정도로 그들의 시간은 함께 마모됐다. 지훈은 시간이 오래된 가죽처럼 부드럽게 낡아가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터질 듯한 열정과 섹스로 가득 찬다면 인류의 절반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자살했거나, 미쳤을 것이다. 열정이나 욕망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라는 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한 여자와의 지속적인 연애는 때때로 지훈을 발기 불능의 노인처럼 만들었다.
 “캠퍼스 커플이라는 게 운명적이라기보단 전형적이란 생각이 들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거나, 선을 보는 거나, 뭐가 다를까 생각도 들고. 너랑 난 너무 모범생들처럼 만났잖아. 우린 모범적으로 연애하고 결혼도 모범생들처럼 하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현정이 회한에 찬 듯 웃었다.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지 그래? 넌 고등학교 선생이라 최고 등급일걸?”
 “진담이니?”
 “농담 같아?”
 “나랑 헤어지면 어떨 것 같아?”
 “넌 어떨 것 같아?”
 “우리 말이야. 매일 이혼할까 말까, 이러면서 지지고 볶는 나이 든 부부 같지 않니?”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남 얘기하듯 늘어놓고 자주 웃었다.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오래된 영화 얘길 하듯 했던 말을 반복했고, 말이 나오기도 전에 뭘 물어볼지, 뭘 먹고 싶을지, 어디에 가고 싶을지 다 아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자.”
 “그래.”
 “내가 어디 가자고 하는지 알아?”
 “피곤하니까 호텔로 돌아가잔 얘기잖아.”
 “맞아.”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훈을 바라보다가 깔깔대며 웃었다.
 
 자동차를 렌트해 엑상프로방스와 아를에 가자고 한 건 현정이었다.
 니스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칸까지 기차를 타고 가자고 한 건 지훈이었다.
 ‘피터 메일’의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에세이 『나의 프로방스』를 연상시키는 남프랑스 여행은 그러나 그들이 함께했던 수많은 여행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렌터카 회사에서 장담한 고장 날 일 따윈 없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혼다 어코드’의 타이어는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도중 장렬한 소리와 함께 펑크 났다. 한 시간에 겨우 차 몇 대만 다니는 시골 바닥에 어째서 이런 날카로운 나사못이 뒹굴어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포도나무, 간혹 차를 멈추게 하며 소 떼가 지나가고, 낮은 하늘 위에 구름이 덮인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상상했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들이 마주친 남부 프랑스의 풍광은 축축한 비와 번개로 뭉개지며 질척거렸다.
 그날따라 마을 초입에 있던 오층짜리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있었다. 이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절염 환자의 무릎처럼 무너질 듯 삐걱대는 계단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파리 지하철의 낡아빠진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던 무시무시한 소리와 정말 비슷했다.
 “예전에 정형외과 다니는 친구가 어긋난 무릎뼈 맞추는 걸 본 적 있거든. 그때 뼈에서 나는 소리랑도 비슷해!”
 공짜라고 해도 묵고 싶지 않은 으스스한 호텔에서 지훈과 현정은 이틀을 보냈다. 히치콕 영화에서처럼 옆방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고 생각될 만한 음침한 방이었다. 욕실에선 필라멘트가 끊어지기 직전에 나는 아슬아슬한 소리가 들렸고, 온수가 찔끔거리며 나왔다 끊기길 반복했다.
 찬물로 머리를 감은 현정은 감기에 걸렸다.
 비상약을 먹었지만 상태가 쉽게 호전되진 않았다. 햇볕이 쨍쨍한 프랑스 남부의 목가적인 풍경은 창문 밖으로만 상영되었다.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이들은 침대에 누워 노트북에 받아 온 영화를 봤다. 지훈은 현정 곁에서 읽다 만 여행 잡지를 읽었다. 영화를 보며 현정은 종종 감기약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멍청아! 변하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이냐고, 변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결국 사랑일 수는 없는 거냐고 묻고 싶어지던 날 밤, 지훈 역시 감기에 걸렸다.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 후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비상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지훈은 코가 통째로 흘러나올 정도로 재채기를 해대고도 약국을 찾지 못해, 그날 밤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지훈은 그때 감기약에 취한 듯 내뱉던 현정의 말이 이별의 전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랬던 거였어,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사랑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깨달음은 항상 늦다.

 

 

(1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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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이 영문학을 전공한 건 법대나 경영대에 가길 원했던 조부모를 향한 반항기 어린 낭만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트루먼 카포티나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자신의 문학적인 취향과 별개로 그는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었다. 그가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인 콜드 불러드』 같은 작품을 몇 번씩 반복해 읽는다고 해서, 그의 영업 전략이 은유적이거나 문학적으로 바뀌는 일 따윈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일찍이 삶의 어두운 이면과 짙은 그림자가 있음을 알려준 건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세 번씩 읽은 아이가 그것을 전혀 읽지 않은 아이와 똑같을 리 없었다. 

 만약 장사를 시작했다면 그는 분명 전자 제품이나 휴대전화 대신 꽃이나 책을 팔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네 꽃집이나 서점이 망해가는 현실과 달리, 그가 열었을 꽃집이나 서점은 발상을 뒤집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어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다. 현정은 지훈의 비범함과 상상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가장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지훈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소속되면서부터 지훈은 자신이 생각과 다르게 매우 잔인하거나, 더할 나위 없이 비열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사기꾼들의 언어이며 ‘내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전형적인 의미에서 이지훈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C 전자를 비롯해서 G 마트, L 생명보험, H 화학, L 항공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은행이나 증권예탁원 같은 곳에서도 다양한 강의를 맡아 사원들을 교육하는 현장에 파견됐다.
 지훈은 ‘강사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중앙 고위 공무원들을 위한 ‘다양성 매니지먼트’ 강의에도 투입되었고, 강성 노조로 유명한 한 제철 회사의 다문화 가족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도 참석했다. 다양성이 중요시되는 시기였다. 정부에서도, 기업 소속의 전문 기관에서도 다문화 가정과 지방의 인구분포도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양성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을 때, 최 부장이 갑작스레 관리팀으로 발령 났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인사였다. 최 부장이 커다란 계산기를 두들기며 사원들의 비품 관리나 회계장부를 들여다본다는 건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사팀에서 그의 컴퓨터 기록, SNS를 체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회사 정보를 이직하기로 한 다른 회사에 빼돌렸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기 시작할 무렵 조금 더 수상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일명 ‘최 부장 스캔들’은 마흔이 훌쩍 넘은 배 나온 대머리 남자가 사내에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쇼킹한 섹스 스캔들이었다.
 최 부장은 유부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회사 안에서 벌어진 사소한 연애 사건이었다. 그것이 여타의 연애 사건과 달랐던 건 상대가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뿐이었다. 평소 젖통이니 유방이니 소젖이니 하는 음담패설에 불편함을 느꼈던 여직원들은 그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숨기고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수군댔다.   
 연애 스캔들이 섹스 스캔들로 발화되는 과정은 사람들의 흥미를 폭발시켰다. 사람들은 음탕한 섹스 체위를 동원해 게이들의 혼음 파티의 한 장면을 상상했고, 회사가 강조했던 다양성을 중시하는 글로벌한 사내 문화 따윈 즉시 망각되었다. 뉴욕에서 온 디자인 팀장 마이클, 필라델피아 법인의 컨설팅 본부장인 앨런 역시 ‘커밍아웃한 게이’라는 사실 역시 그의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걸 조심하라고 경고한 건 부장님이었어요. 회사가 비열하고 치사하다는 건 말줄임표였고.”
 지훈은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은 안전하다는 안도감에서 시작된 불순한 감정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멍청해지는 지름길이 뭔 줄 알아? 사랑에 빠지는 거야.”
 최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퍽이나 낭만적이시네요.” 
 “그런 얼굴로 비꼬지 마!”
 “비꼬는 게 제 매력이라고 한 건 부장님이에요!”
 “그래서 널 보면 때때로 가슴이 두근거렸어!”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가장 기분 더러운 게 뭔지 알아? 해고당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이 회사를 나갈 수 없다는 거야. 네가 치사하고 비열하다고 말하는 이 회사가 대한민국에선 가장 자유분방한 곳 중 하나야. 별명이 문어대가리인 중년의 게이를 받아줄 회사 같은 건 대한민국에 없어.”
 최 부장이 사표를 내고 회사에서 나가던 날, 지훈은 사라진 그의 책상을 떠올렸다. 단지 책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때 최 부장이 점거하고 있던 공간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빈 공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딱 한 시간뿐이었다.
 그날 오후, 사라진 그 공간에 커다란 벤자민 화분이 들어섰다. 십일 년 근속자의 사표가 처리되는 방식은 너무 즉각적이라 모두가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그의 자리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던 어느 날, 지훈은 충동적으로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꽉 막힌 실내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기계 트랙을 반복적으로 달리는 일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책상에 앉아 있다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근육을 키운다는 건 힘을 키운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 년 동안 키워온 영문학에 대한 열정들, 가령 존 어빙이나 존 치버,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으며 이 세계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분석해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적인 단련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보스의 책상을 바라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퇴출, 해고, 구조조정이나 계약 종료 같은 구체적인 지옥의 언어들과 음모, 배신, 물 타기 같은 추상적인 지옥의 언어들은 늘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모 없이 외로운 소년기를 보내며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읽고 지냈던 소년에게 이 세계는 불친절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 위한 쓸모 있는 몇 가지 지혜를 전수했다.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콧등이 내려앉아야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심약한 육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훈은 피트니스 센터의 바벨 무게를 늘려나갔다.
 근육이 찢어지고 상처받으며 조금씩 두꺼워지고 부풀어갈 때마다 그는 가학적인 위로를 받았다. 수컷들이 과시적으로 만드는 근육들이 스스로의 근육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이러니를 그는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권투 선수의 가장 큰 미덕은 상대방을 잘 때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를 잘 가격하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잘 얻어맞는 것이다. 권투 선수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도 죽지 않는 건, 강펀치와 정확한 타격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총알이 쏟아지는 전시 상태에 몰아넣는 것. 그런 과정을 반복하며 맷집을 키우는 건 백 퍼센트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살다 보면 이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살 때가 더 많다. 맞아도 덜 아프기 위한 최선에 대해 몸서리치면서.
 외할아버지가 말했었다.
 사람은 역사와 경험에서 삶을 배운다고.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반대파들에게 독살 당할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것은 생에 대한 본능을 강렬히 자극했다. 삶을 체험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일견 독창적인 것이었다. 일부 귀족들은 매일 미량의 독을 섭취하며 여러 가지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웠다. 그리고 그 비결을 은밀히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지훈은 조용히 바벨을 내려놓았다.
 피트니스 센터의 처음과 마지막 손님은 늘 자신이었다. 그는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했고, 밤이 되면 자신의 손때가 묻은 그 바벨을 다시 잡고 한 시간 동안 운동한 후, 어두운 복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선 현정에게 습관적으로 안부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날은 그녀의 전화기가 꺼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현정의 전화기는 꽤 긴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문자를 보내면 ‘미안. 자느라 전화 소리를 못 들었어’라는 답장이 왔다. 딱히 걱정이 되거나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런 일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이었다.

 

*

 

 이지훈은 둔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이별을 ‘전혀’ 예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내뱉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지훈의 삶을 채우고 있던 많은 것들,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갖게 되는 자신만의 ‘조사’와 ‘접속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훈의 삶에 ‘하지만’이나 ‘그러나’ 같은 접속사는 없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열심히 하는 척하거나, 애인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지훈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지훈은 자기 인생에 ‘사랑하지만 떠난다’ 같은 말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고, 사랑이 여기까지이기 때문에 헤어지고 갈라서는 것이다. 솔직할 용기가 없어서 내뱉는 애매모호한 말들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뿐이다.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네가 미워서도 싫어서도 아니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겠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현정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현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훈의 일상은 온통 ‘그러나’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접속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차라리 이것이 자신의 비밀 연애를 알아챈 회사의 음모라고 믿는 쪽이 나았다. 한국 여자와 연애 금지. 어느 날, 뜬금없이 인도의 뭄바이로 발령이 나고, 힌두어를 배우라는 지시가 떨어지는 쪽이 현실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동차에 뜬 유류 경고등을 지켜보며 지훈이 생각한 건 그러나 역시 현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이렇게 있는 것은 더 힘들었다. 지겨울 정도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질문의 연속들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1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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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시속 150킬로미터

 

  12월 13일.
 이지훈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C 전자의 천안 연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막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지훈은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12월에 부는 시베리아 북서풍에도 흰색 면봉 같은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목련과 활짝 핀 개나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차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훈의 검은색 중고 소나타 뒷좌석 왼쪽에는 강의 때 갈아입을 양복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두 장의 화이트 셔츠가 걸려 있었다. 모두 현정이 백화점 세일 기간에 산 것이었다. 차 트렁크에는 오랫동안 신어 뒤꿈치가 닳은 뉴발란스 운동화가 있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이세이 미야키의 검정색 터틀넥 풀오버,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의 그레이 992, 어디선가 익숙한 듯 보이는 이 조합은 1998년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이었다. 지훈은 그것이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전의를 불사르기 위해 그가 입는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H 그룹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롤 모델’ 교육을 하다가 지훈은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을 흉내 냈다. 그의 왼쪽 시력은 1.5에 가까웠지만 그는 가끔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안경은 잡스가 착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도쿄 출장길에 오모테산도힐즈의 한 안경점에서 산 것이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다가 발동한 특유의 장난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실제로 종종 지훈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점점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도 못 말릴 신경질과 강박적인 식습관, 췌장암에 걸린 것만 빼면 잡스는 여러모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를 벗어 던지자 다소 차갑게 생긴 그는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는 엉뚱한 천재 타입의 남자처럼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Y 마트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 교육에선 캔 커피와 초콜릿 쿠키 상자를 가득 넣은 커다란 마트용 쇼핑카트를 끌고 나왔고, 점심 후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며 근무 환경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강의할 장소의 화장실에서 얻는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도 금세 알아챘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 바퀴가 달린 여행용 플라이트백, 등산용 배낭과 가발 등은 그의 강의 소품이 되었다.
 이지훈은 기업 강연계의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 환경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딱딱한 강의에 적절히 유머를 섞었고, 쉬운 비유와 많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선 늘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을 받았다.
 “애인 있으세요?”
 “결혼하신 건 아니죠?”
 그때마다 지훈은 웃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주실 겁니까?”라고 가볍게 질문을 피하며 되물었다. 서비스센터 직원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첫 번째 고정 매뉴얼 같은 말이었다.

 

 

 지훈이 다니는 회사의 남녀 성비율은 7 대 3 정도로 남자들이 많았다. 회사 내의 연애가 전적으로 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20년이 되면 여자가 없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걸?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별로 해소되고 있지 않잖아? 한민족 단일국가설은 이제 끝났어. 철저한 부익부 빈익빈이야. 정글이야, 정글! 우리 회사만 해도 절대적으로 그렇고.”
 마흔넷이 넘도록 미혼인 최 부장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엉뚱하게 비꼬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여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태어난 최 부장이 막 딸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대신 계절마다 머리를 염색하고 ‘소녀시대’나 ‘빅뱅’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별난 중년이었다. 
 그가 ‘싱싱한 난자’나 ‘젖’ 같은 단어를 들먹일 때마다 지훈은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나 정육 코너에 진열된 젓갈들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최고급 젓갈 세트를 선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훈은 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커다란 명란젓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가,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생선알도 못 먹는 거야? 난 명란젓 진짜 좋아하는데. 명란젓은 좋은 참기름을 뿌려 먹는 게 최고야!”
 지훈은 젓갈 세트를 몽땅 들고 현정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압력밥솥에 밥을 뜸 들였다. 그리고 금방 한 뜨거운 밥 위에 가위로 자른 명란젓을 올려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 천천히 밥과 섞기 시작했다. 곧 부풀어 있던 밥 알갱이가 오톨도톨한 명란과 섞여 보기 좋은 핑크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몇 번이나 “네 인생이 식도락과 거리가 먼 건 진짜 비극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훈을 놀렸다.
 요리를 좋아하는 현정은 지훈을 위한 음식도 만들었다. 명란젓과 신선한 올리브와 파프리카를 넣은 샐러드, 그리고 지훈을 위해 명란을 익혀서 만든 오므라이스였다.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뿌리며 지훈이 말했다. 
 “싱싱한 난자를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싱싱한 정자를 먹는 맛이 어떤지는 내가 좀 아는데.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까?”
 현정이 명란젓을 포크로 콕 찍어 올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좋아”라고 말하다가 참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현정의 입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훈이 설거지를 했다. 현정이 함께 볼 DVD를 고르는 동안 지훈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지훈과 현정은 <위기의 주부들>의 6시즌 7화를 보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정자의 맛을 음미하는 섹스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현정은 침대에, 지훈은 구부러진 소파의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지훈은 현정의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침 자국을 바라보았고, 현정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느라 쿠션의 격자무늬 자국이 잔뜩 찍힌 지훈의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위기의 주부들> 1, 2, 3, 4, 5시즌을 함께 본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풍경이었다.
 <위기의 주부들> 2시즌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시즌이나 4시즌의 절반이 지나갔을 때쯤, 그것이 현정에겐 엄마 이야기이고, 지훈에겐 형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의도적으로 엄마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각자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졌다. 현정은 오이를 먹지 못했고, 지훈은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생선회를 가장 좋아했던 현정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지만, 지훈은 눈에 보이는 족족 우유를 마셔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칼슘을 우유로 섭취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는 법을 영리하게 터득해나갔으므로 이들의 연애 전선에 끼는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지 않고 근처에 머물다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 날 저녁, 지훈과 현정은 친구들을 불러 프라이드치킨과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맛 나초를 먹으며 포커를 쳤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닭 뼈다귀들 속에서도 이들은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봤다. 베드신과 키스신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섹스는 이미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지훈은 잠들어 있던 현정을 껴안았다. 현정은 간지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릴 때조차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고요히 사정했다. 현정은 익숙한 듯 그의 목덜미에 달큰한 침을 발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훈은 콘돔을 크리넥스에 싸서 버리고, 출근을 하며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갈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맨이었다. 기업 강연과 대중 강연을 병행하는 컨설턴트 강사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다. 그럴수록 비공식인 일에 대해선 그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지금 이 속도로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면 아직 퇴근 전인 현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한 턱이 날카로운 바람에 따끔거렸다. 수염이 면도로 약해진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12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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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봄>이 절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강은 하얀 도자기 접시 위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손수건은 방금 전 다림질을 끝낸 것처럼 보드라웠고 아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강은 뺨 위에 손수건을 댄 채, 이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위로와 격려일 리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로.
따뜻한 음식으로 구성된 세심한 식단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위무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실연을 선언하는 모임이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해요. 제 자리는 저쪽이에요.”
미도가 사강에게 인사하며 뒤돌아섰다.
사강은 미도가 걸어가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 남자 쪽으로 가볍게 몸을 틀더니 세 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곧 주최 측으로 보이는 사람이 미도를 남자 옆에 안내했다. 사강은 미도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안경을 쓴 남자와 사강은 세 번,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럴 땐 상대가 누구든 최대한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사강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꼬고 있던 긴 다리를 자연스레 바꾸어가며 들고 온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외국계 경제신문이고, 주식과 환율 관련 섹션이라는 걸 사강은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주식 계좌 수를 자랑하던 여의도 증권가 남자가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의 시차 때문에 룸살롱에서 술을 마셔도 주식 장이 파하는 세 시부터 마시고 오후 여덟 시면 술자리를 파하고 퇴근한 후,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한다는 남자였다. 이 남자의 시간이 다른 사람과 달리 거꾸로 뒤집혀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한두 번 더 그를 만났었다.
남자는 무엇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열세 시간의 비행 동안 단 한 순간도 잠자지 않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비즈니스석 승객 같았다. 끝도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게 그런 비즈니스맨들의 특징인데, 마실 때마다 기내에서 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는 얼굴인 것도 비슷했다. 남자의 두 눈은 열두 시간 동안 컴퓨터만 들여다본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뺨은 윤기 없이 건조했지만 그것은 실연의 흔적이라기보단 전날 야근을 하거나 숙취로 피곤한 얼굴처럼 보였다. 남자가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얼룩 없이 반짝였다. 유일하게 실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면도하지 않은 까칠한 남자의 턱뿐이었다.   
뭐가 바빠서 실연당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런 곳에 와서까지 신문을 보고 있었던 걸까. 혹시 이런 이상한 풍경 스케치가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인터넷 신문 기자라도 되는 걸까.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뭔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사강은 남자에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실연당한 날 아침에도 남자들은 경제신문을 읽으며 그날의 주가 동향을 파악하고 주식 투자를 하는 걸까. 그럴 지도……. 이혼 서류가 접수된 다음 날에도, 여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위해 아침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수의 얼굴을 보면 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강은 그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이길 원했다.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노래한 건 김광석이었다. 그러나 청바지와 오래된 통기타가 그토록 잘 어울렸던 서른둘의 남자는 청춘의 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정수에게 샤넬 스카프를 생일 선물로 받던 날, 사강은 그것을 목이 아닌 오래된 가방 끈 위에 묶었다. 목에 매고 있으면 어느 날 그것이 이사도라 덩컨의 스카프처럼 자기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올 이유는 한 가지다. 사강은 이제 남자가 실연당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이곳에 온 스물한 명 중에는 미도의 말처럼 자신이 미래의 커플이 될지도 모른단 은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텅 빈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응시했다.
회칠한 하얀색 벽 위에는 커다란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거울은 사강이 볼 수 없는 창 너머 반대편 거리를 그림처럼 비추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정류장의 빨간색 지붕이 삼분의 일쯤 잘려 그녀의 동공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거울 안으로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사강의 눈빛이 거울에 채 머무르기 전에, 남자는 그림 안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사강은 남자가 걸어갈, 그러나 거울 속에선 보이지 않는 거울 밖 잘려 나간 길들을 상상했다. 
빈 의자 너머, 거울에 담긴 거리 풍경을 사강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나가고, 여자가 지나가고, 다시 남자가,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지나갔다. 손을 꼭 잡은 연인이 느릿하게 거울 속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댄 여자의 뺨이 햇빛 속에 반짝거렸다.
사강은 행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길 원했다. 그녀는 상냥한 얼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사강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맞은편 빈 의자에 살아 있던 과거의 정수와 죽어버린 미래의 정수가 있었다. 사강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빈 의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모던한 레스토랑의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빅토리아풍의 벨벳 의자. 누구도 쉽게 기억해낼 수 없는 오래된 시대를 재현한 모조품 위에 지나간 한 세월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부재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마지막 식사였다.
사강은 미역국을 수저에 가득 담았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을 입술에 대자 정수와 함께했던 기억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이 고통스런 재판의 피고이자 배심원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맞은편의 빈 의자가 말하는 바를 묵상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먹고, 밥알을 씹으며. 그것은 불행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둘로 분리되는 것을 조용히 사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강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국을 뜨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자꾸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코는 만취한 남자의 그것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눈물만큼 전염성이 강한 건 없다. 누군가 울음을 참고 있었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두 번째 메뉴가 나왔다.
그때,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를 끄는 날카로운 소음 때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미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지훈 씨! 잠깐만! 잠깐만요!”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동요한 몇몇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미도는 곧장 일어나 달리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한 여자가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강은 그녀에게 말없이 들고 있던 구겨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10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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