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


정현정은 미도의 고객 리스트 중 단연 최고의 고객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 ‘올해의 개매너’라는 우스꽝스런 상이 있었다면, 단연 그녀가 반짝이는 트로피를 받고 영광의 우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현정의 사진을 봤을 때, 미도는 그녀가 남자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얻을 거라고 확신했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공무원 연금이라니! 남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직업이었다.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만큼 학벌도 부모 재력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던 남자들은 한결같이 당황한 목소리로 미도에게 불쾌함을 표현했다. 

“뭐, 이런 날라리 같은 여자를 봤나!” 

“소개팅에 자주색 망사 스타킹 신고 나온 거 알아요? 정말 교사 맞아요?”

미도는 고객의 불평 전화에 시달렸다. 회사 웹사이트 게시판에는 태도가 불량한 악성 고객으로 현정의 실명과 학교 이름이 등장해 회사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결혼정보회사 사람들은 그런 악성 고객들에게 제각각 암호 같은 이름을 붙였는데 현정의 별명은 ‘십 분’이었다. 그녀는 십 분 안에 자신이 만났던 모든 남자들을 퇴짜 놓았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문자메시지에 보낸 하트가 너무 많아서, 귓불이 작아서, 코가 커서, 입술이 두꺼워서, 구두 색깔이 불길해서 그녀는 남자를 퇴짜 놓았다. 귓불이 작으면서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데다가 구두 색깔까지 불길한 남자가 나타난 것도 기적이었지만, 모든 걸 기억하고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는 현정의 기억력에 미도는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그것은 정현정이 백 일 안에 성취한 결과물이자, 정미도가 몇 년 동안 구축했던 백 건이 훌쩍 넘는 커플 메이킹 성과들을 한낱 과거의 유물로 추락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미도가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었던 클레임은 들어온 지 오 분 만에 남자가 자신은 머릿속에 난 ‘가마’가 두 개라 결혼을 또 한 번 할 팔자라고 장담했던 대학병원 흉부외과 의사 한 사람뿐이었다. 현정은 그 얘길 하다가 “그 남자가 직접 머리를 까더니, 가마 두 개를 보여주더라구요, 글쎄. 너무 웃기고 황당하지 않아요?”라고 말해 미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 일 이후, 미도는 현정이 모든 일을 고의적으로 망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미도는 그제야 현정뿐만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실연 이후, 미도가 결심한 건 너무 일만 하느라 친구를 등한시하진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미도가 선택한 전략은 자신의 고객을 최고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일이 고객들의 이름과 취미를 기억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엔 손쉬운 집단 문자 대신 일일이 전화를 하거나 손으로 안부를 묻는 카드를 보냈다. 진심을 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절실할 때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미도의 친구들은 그러므로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해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좋은 성과와 인센티브로 돌아왔다.  


이 년 전, 정현정을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시킨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미도는 회사 신원확인팀의 막강한 정보력을 이용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던 현정의 어머니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이유로 이들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가히 무궁무진했다. 가령 아파트가 좋은지 빌라가 좋은지 오피스텔이 좋은지 같은 개인적인 주택 구입 성향과 어떤 회사의 어떤 차종을 좋아하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도 쉽게 밝혀낼 수 있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보석을 선택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온몸에 달고 있었던 그녀의 모친은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업자)였다. 무엇보다 미도의 눈에 확실히 띄는 대목이 하나 존재했다. 

그녀가 번 가장 큰 재산은 인상적이게도 고시원과 도시형 생활주택을 통해 나왔다. 교통이 좋고 상권이 발달한 역세권에는 종종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녀가 직접 개발한 전국 고시원과 원룸의 숫자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미도가 머물고 있던 ‘승리 고시원’의 건물주가 실은 현정의 엄마라는 사실 역시 현정과 미도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인맥을 중요시하는 정미도에게 그것은 아주 확실한 인증 마크였다. 게다가 결혼에 관련된 엄마와 딸의 갈등에 대한 논문이 있다면 미도는 꽤 훌륭한 발제자가 될 것이었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현정은 “안녕하세요. 커플매니저 정미도입니다”로 시작하는 미도의 전화를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통화 때문에 미도의 전화번호는 현정의 휴대전화에 스팸 번호로 즉각 분류되었다. 삭제가 아니라 스팸 번호로 등록함으로써 다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정현정은 주관이 명확한 단호한 여자였다. 

현정이 갑자기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전화한 건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예상 밖이었다. 

현정의 전화에 한동안 미도는 심란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현정이 그날, 이승철의 <네버 엔딩 스토리>가 울려 퍼지는 독일식 호프집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SOS’를 쳤을 때, 미도는 그녀를 도와 환상의 커플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꼭 직업윤리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전 제 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길 원해요.”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미도의 관심이 아니었다. 바람을 피웠건, 권태기 때문이었건, 남자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았건 개인 사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헤어진 남자를 어째서 다시 찾고 싶어 하는지 아는 건 중요했다. 미도는 결국 “왜 다시 만나고 싶어 하죠?”라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현정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야만 자신도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현정은 자신이 퇴짜 놓은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뻔뻔함과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다가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손수건이 부족할 정도였다. 실연 앞에서 그녀의 눈은 애처로울 정도로 충혈되었다. 미도는 현정에게 완벽히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상상력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드물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몰래카메라가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건, 그것이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 고객들에게 가장 먼저 심어주어야 할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종류의 속임수였다. 

‘이 사람은 돈을 내고 만난 사람이 아니라 기막힌 우연이 만들어낸 운명이다’라는 판타지. 그것이 상황을 컨트롤하는 사람에 의해 조작됐다 해도, 그 안에는 일정 정도의 우연이 개입한다. 드라마 작가는 그것을 방송에서 보여주지만, 미도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진짜로 만들어냈다.

“현정 씨는 운이 참 좋네요.” 

“네?”

“전 타고난 기획자거든요.” 

미도가 웃으며 현정을 바라봤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친구를 고객으로 둔 커플 매니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이승철의 목소리가 절절하던 그날, 현정과 함께 듣던 <네버 엔딩 스토리>는 그런 자신들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치는 응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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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그만둬. 무리야, 도저히 무리.”

미우가 말했다.

“미쳤니? 이게 어떤 기회인데. 돈 많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지휘자가 됐는데 내가 그걸 왜 포기해? 회사 돈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신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런 경험은 앞으로 내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언니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잖아. 모든 게 결혼정보회사 이벤트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 회사 잇속을 위해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는 거야. 부도덕해! 질이 나쁘다고!” 

“줄리아드 음대 기계공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사 빠졌니, 너? 부도덕이란 말이 뭔 줄이나 알고 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아직 징징대는 어린애라는 거야. 세상은 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전부 사기꾼에 악당들이야.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악당들이라고. 내가 하는 일은 최소한 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단 정당해. 돈을 뺏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야. 난 일시적인 장애를 돕고자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실연 때문에 엄청나게 멍청해진 사람들이라구!”

“언니!”

“그 사람들, 마음의 장애인이야. 정신적인 회로가 끊기거나 꼬였는데 사람이 멀쩡할 리 있니?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속이는 거고, 언니가 하는 짓은 양아치 짓이야. 결국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등쳐 먹겠다는 거잖아. 자기 합리화하지 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혹시 그걸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대로 된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면접관한테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면 그 사람이 감동받아 널 뽑아주겠어? 회사가 무슨 납골당이냐? 뼈는 묻길 왜 묻어!” 

“치사하게! 갑자기 면접 얘길 왜 하는 건데?”

미우가 발끈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면접에 스무 번 넘게 떨어졌으면 너도 느끼는 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백날 편의점 알바 해봐라, 거기서 등록금이 나오고, 용돈이 나오는지. 넌 모르면 가만있어. 이게 단지 내 잇속만을 위한 일은 아니라는 거야. 훨씬 더 고귀한 뜻이 담겨 있으니까.” 

미도는 미우가 이해하기 힘든 얘길 하며 조용히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옆에 있던 초록색 스탠드의 불을 켰다. 고객 리스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미우는 침대에 누워 읽고 있던 신문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나 내일 최종 면접이야.”

“알아.”

“잘하라고 말 안 해줄 거야?”

“말 안 해도 잘할 거잖아.”

“언젠 스무 번이나 떨어졌다고 비꼬더니!”

“그건 네가 네 스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사에만 지원했기 때문에 그래. 정신 차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실연당한 사람들 말고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을 위로해주는 건 불가능한 거냐?”

미우가 뭔가 억울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 게 위로라고.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이 진짜 위로를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위험성을 미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그래서 난장판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최초의 제안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분노에 차 회사를 상대로 고소라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다. 

미도는 회사 법무팀에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의했다. 보안상 그런 상황이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므로 준비는 해둬야 했다. 위험 요소가 많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갖는 열매도 크고 달다. 어떤 위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세상의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 점심 따위는 없으니까.

미도는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특별관리’라고 적혀 있는 컴퓨터의 작은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를 열자 몇 명의 고객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나타났다.  

정현정.

미도는 현정의 이름을 클릭했다. 증명사진과 함께 나이와 키, 학교와 주소 등을 기록한 구체적인 개인 정보들이 화면에 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거야.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미도가 열어놓았던 노트북의 창들을 닫으며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르네 마그리트의 화집을 넘겨보던 미우가 미도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그치?”

“응. 이번 회사엔 진짜 합격이야!”

“아님 백수가 되겠지.”

“너무하다.”

“비올라 들고 음대 들어갔던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갑자기 의대에 들어가고, 다시 적성에 안 맞는다고 천문학과에 들어가는 것만큼 나쁠 일이 또 어디 있겠니? 가장 나쁜 건 나처럼 그런 인간의 언니가 되는 일이야!”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미도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미도는 짜증스런 얼굴로 미우를 바라봤다. 건조하게 튼 입술 사이로 일어난 보풀들, 지문이 잔뜩 묻은 안경을 끼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폼이 고등학생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미도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우가 의대에 들어가면 앞으로 병실 잡을 걱정은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비올라든 깽깽이든 하기만 하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미우가 머리 하나는 타고나게 좋아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지역 수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화났냐? 미안.”

미우가 베개를 앞에 두고 넙죽 절을 하며 미도를 바라봤다. 앞으로 묶은 야자수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듯 앞뒤로 달랑거렸다.  

“미안하단 말은 어쩜 밥 먹듯 저렇게 잘하는지. 넌 자존심도 없냐?”

“응. 그게 얹혀사는 사람의 예의지.”

미도는 미우를 노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고시원은 너무 작아서 싸움을 하기에도, 애정을 나누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살려면 무조건 크기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도 작게, 기쁨도 작게, 희망도 좌절도 작게, 작게! 그것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안 하는 내 미래를 언니가 왜 걱정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언니는 발터 벤야민처럼 토성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느리게 공전해야 하는데, 밥벌이 때문에 타고난 기질을 누르고 빠르게 휘몰아치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야. 점점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지는 거지. 특히 얼굴 누렇게 뜨고 현기증 자주 나는 거. 오늘 너무 피곤해 보인다.”

천문학과를 나온 미우가 토성이며 화성 공전 자전 타령을 할 때마다 미도는 지구처럼 자기 몸도 10도쯤 기우뚱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토성은 무슨. 간 때문이야!” 

미우가 웃었다. 크게 웃으면 옆방에 사는 총무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들 자매는 리모컨 볼륨 1 정도로 소리를 조금씩 죽이며 히죽거렸다.  

미도는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번 프로젝트는 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이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정말 그런 모임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나올까. 며칠 후, 대표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참가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것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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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팀장들 모두가 일제히 대표를 바라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디서건 늘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덕분에 표정을 읽기 힘든 사장의 얼굴에 얼핏 미소 비슷한 것이 점처럼 찍혔다 사라졌다. 그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미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란 사람들은 원래 칭찬에 목말라 있고, 장점과 강점 같은 단어에 눈먼 존재들이라는 걸 미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위치한 회사라는 게 장점이죠. 그런 분위기 때문에 타사에 비해 회사라는 딱딱한 느낌이 덜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 준다는 강점이 있어요. 바빠서 잘 가진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의 지하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도 있더군요.”

회장은 처치 곤란이라며 당장 없애고 싶어 하지만 전직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아들이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풍문 속의 독립영화관이었다. 미도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표를 바라봤다.  

뉴욕의 NYU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관객이 거의 들지 않은 망한 영화 몇 편을 찍기도 했던 대표의 눈빛이 검정색 선글라스 속에서 반짝였다. 짙은 그림자처럼 늘 표정을 감추어주던 선글라스는 역설적으로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대표는 무심히 몸을 틀어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가 의자를 살짝 끌어당길 때마다 팀장들의 눈도 바쁘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미도는 잠시 테이블 옆에 있던 생수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했다. 

“생수가 800원짜리 생수통에 담겨 있으면 그냥 800원짜리 편의점 생수가 되겠죠. 하지만 아티스트가 특별히 디자인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이름의 병에 담는다면 그 가치가 얼마로 올라갈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고객에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제 ‘스토리’는 우리 업계 최고의 화두가 될 거예요.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나와서 비빔밥 한 그릇에도 이야기를 담자고 목 터지게 외치는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 팀들의 화합이 아주 중요해요. 분열되지 않고 서로 똘똘 뭉쳐서 이번 기회에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고객들을 확보하는 겁니다. 이런 기획이 아니라면 절대로 결혼정보회사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도도한 고객들 말이죠. 우리에게 열광하는 만큼 우릴 경멸하고 혐오하고 심지어 경박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미도는 조 부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기술에 접목되어야 할 것이 휴머니즘과 인문학이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매칭 계획서나 던져주고, 전화 몇 통 해대면서 우리 회사랑 제휴된 회사가 500개다 600개다 같은 광고 정도로 사람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는 결혼 비즈니스에 눈물이 넘쳐나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접목시키는 거예요. 이 감수성 넘치는 고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서비스를 받게 될 거고, 미래에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들이 될 겁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어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전 이렇게 되돌려 말하겠습니다. 행복한 커플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커플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우리의 타깃은 이미 헤어져서 불행한 커플들이에요. 제각각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미도는 마우스를 클릭해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 파일을 열기 시작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이것이 이번 비밀 프로젝트의 제목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가능하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제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L 결혼정보회사의 대표이사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망한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러나 세상에 망한 영화감독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치열한 영화계에서 입봉조차 못한 조감독 출신들이 즐비한 지금, 그가 말아먹은 영화가 중요해질 일 따윈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원 숫자만 400명이 넘는 이 거대한 회사 사람들에게는 ‘망한 영화감독 출신의 결혼정보회사 대표’라는 긴 이름만큼 부조리한 직함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표는 가끔씩 나타났지만 사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로 예의 발랐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뉴욕 양키tm 야구 모자를 쓴 채 양복을 입는 등 단번에 ‘워스트 드레서’에 등극할 괴상망측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물론 그가 누가 봐도 형편없는 야구 영화를 만들었다가 쫄딱 망해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도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야구 모자를 시도 때도 없이 쓴다거나, 번식욕이 유달리 강한 회장의 배다른 자식일 거란 루머는 막 입사한 신입사원들까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도의 이번 프로젝트는 ‘원탁의 기사’ 단 네 명만 참석해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원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진들에겐 무늬만 사장이라고 생각했던 대표가 회의 중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빅뉴스였다. 그런 대표가 한 번도 벗지 않던 선글라스를 벗고 박수까지 쳤다는 믿기 힘든 소식은 삽시간에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물론 회사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건 이 회의를 주재했던 사람이 정미도라는 사실이었다.   

미도가 한때 영화감독이었던 대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벤트로 ‘시네마테크’와 영화를 이용한 영악한 마케팅을 펼쳤다는 건, 그녀를 시기하는 쪽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미도의 이해할 수 없는 레이어드 룩, 일명 ‘덕지덕지 패션’ 역시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란 말도 흘러나왔다. 팀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미도는 ‘마녀’와 ‘악녀’, ‘천재’로 각기 이름을 달리하며 회오리 같은 소문 속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  

소문과 악명!

이것이야 말로 회사 생활의 꽃 중에 꽃이다. 악명은 정미도에게 회사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었다. 미도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진행해나갔다. 그녀는 즉시 시네마테크 관계자를 만났다. 다음 날 지독한 경영난으로 레스토랑을 포기하려는 유기농 레스토랑 주인을 만나 포섭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해 정기화될 경우 회사가 얻게 될, 이익과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권위와 명성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는 미도가 지켜온 원칙 중 하나였다. 뜸들이다가 김새는 일은 쌔고 쌨다. 당장 돈이 없어 내일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감각이 그녀에게 준 것은 ‘핵심이 아닌 것은 전부 지워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시원에 도착한 미도가 이 화려한 성과에 대해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단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정미도! 이 천하의 사기꾼!”

그것이 동생 미우의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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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모두 123쌍의 커플들


‘눈에 보이는 것을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 
이것은 정미도가 오랫동안 주거할 집을 고를 때 고수한 생활 철칙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보일러나 싱크대의 수도꼭지, 화장실 배수구 등은 반드시 작동시켜야 한다. 물을 틀고, 잠그고, 물을 다시 틀어 흘려보내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며 한밤중에 마트에서 ‘뚫어펑’을 사느라 낭패를 보기 싫다면 말이다. 작은 냉장고가 있다면 당연히 열어봐야 한다. 고무 패킹이 떨어져 나간 냉장고는 전기를 잡아먹는 하마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확인하지 않아 집을 계약해버리면 집주인은 고장 난 것을 고치는 데 인색해진다. 장인어른이 생일이라거나, 장모님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없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일 따위를 들먹이며 곰팡이 핀 천장이나 터진 보일러를 방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입자를 나 몰라라 하는 막가파 주인을 대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입안에 백 년 묵은 걸레를 문 것처럼 쌍욕을 해대고, 반복적으로 행패를 부림으로써 주인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사이코를 만났군!”이라고 분명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 시원한 해결 방법엔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 결국, 주변보다 싼 시세의 재계약은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한 가지는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순응주의는 막 서울로 올라온 스무 살 정미도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
하수구는 막힌 채로,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싱크대는 졸졸 흘러나오는 채로, 터진 보일러는 “돈 아끼는 셈 치지!”라고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돌리지 않는 것. 그렇게 미도는 FM 91.9 주파수만 잘 나오는 라디오를 고장 난 채 사용했고, 막힌 하수구 역시 막힌 채 사용했다. 그녀는 한 번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2구 가스레인지를 한 번에 서른 번 넘게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통 사람들에게 없는 비범한 인내심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장시간 웅크리고 앉아 부패한 음식물 찌꺼기 냄새를 풍기는 하수구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펜치로 자른 철제 옷걸이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집어내는 일이나, 배고픔을 참아가며 가스레인지를 수십 번씩 돌리는 일이나,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방에서 영하 10도의 겨울을 나는 일은 모두 극기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장 난 것투성이인 집에서 살다 보니, 스스로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도가 순응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삶의 노선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불평 없이 고장 난 걸 ‘참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착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년은 정말 머리가 고장 난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친절함을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착각하는 인간들을 미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계약하기 전에 친절히 구는 집주인은 더 의심해야 마땅했고, ‘전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고객일수록 더 유심히 주목해야 하며, ‘난 뒤끝 없어!’라고 주장하는 상사들에겐 절대 속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이라고 집이 빠졌는데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그물거리는 악덕 주인에게는 나이와 별개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도리다.
“돈 내놔! 이 개 호로 새끼야! 당장 성추행범으로 형사 고소해버리기 전에!”
그게 미도가 살아온 삶이었다.
 
미도는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이벤트기획부와 웨딩사업부 합동 프레젠테이션에 사용할 자신의 안테나를 챙겼다. 안테나는 그녀의 첫 번째 집주인이 선심 쓰듯 내어준 텔레비전 위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훗날 그녀의 동생 정미우가 ‘1995년에 생긴 태양계의 급격한 변화’라는 제목의 썰렁한 농담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태양계에서 금성이 사라진 거, 정말 놀라운 일 아냐?”
농담의 실체는 이러했다.
1995년에 금성이 LG로 바뀐 것이다.
집주인의 오래된 텔레비전은 1995년산으로, 지금은 황학동 고물상에서조차 찾기 힘든 ‘골드스타’ 마크가 붙어 있었다. 주인은 그 텔레비전을 사고 전세를 탈출해 이곳 은평구 불광동에 첫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는 좁아터진 서울 바닥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텔레비전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이런 선행은 절대로 없을 것이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미도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아저씨가 가져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학생 생각해서 텔레비전도 거저 줬으니 불편하겠지만 싱크대는 그냥 쓰는 게 좋겠어.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라고 말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는 탐욕스런 주인이었다.
골드스타.
한때 우리가 ‘금성’이라 불렀던 전자회사의 텔레비전 광고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

미도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골드스타 텔레비전을 ‘발로 차’ 일부러 고장 낸 것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기념품을 찾다가 텔레비전에 꽂혀 있던 그 안테나를 뽑아왔다. 어차피 고장 나면 절대 고칠 수 없는 옛날 물건이었다. 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그 안테나를 사용했다. 길이도 볼륨감도 적당했다.
순간의 선택은 정말로 정미도의 십 년을 좌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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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나 같은 남자를 생물학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많지 않다. 현정은 딱히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도, 호감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조 있는 여자라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오래된 연인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자학하듯 최악의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 것이다. 현정은 딜레마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 밖에 이별을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귀결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것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훈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놈일까? 아는 인간일까? 사내 연애? 학교 동창인 걸까? 당장 다음 달에 결혼 청첩장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빌어먹을, 어떤 얼굴로 청첩장의 신랑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들에게 쏟아질 동정과 위로의 시선들은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의문의 꼬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그에게 남겨졌다.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글자 없이 하얀 백지만 있는 책장을 펼쳐 든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는 외팔이 검객이 나오는 옛날 홍콩 영화를 보다가 맥주 얼룩이 남아 있는 패브릭 소파에서 졸았다. 낮에 꾸벅거리다 보니 밤에는 잠이 더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다가,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없는 휑한 사무실에 출근했다.
딱히 먹을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훈은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주말엔 파자마를 입은 채 세 가지 종류의 라면을 점심과 저녁으로 끓이고, 먹고, 설거지하고, 냄비와 그릇을 일일이 마른행주로 닦고, 냉장고 속을 정리해도 시간이 남았다. 일요일엔 짜파게티를 먹는 광고 속 모범 시민 같은 삶이 그에겐 전혀 즐겁지 않았다. 
라면 봉지를 버리려다가 지훈은 넘치기 직전인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그는 쓰레기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봉지 하나를 꺼냈다. 쓰레기통이 집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먹을 걸 찾는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 뒤에 적혀 있는 매뉴얼을 큰 소리로 읽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뻥끗하지 않은 입에선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순간 면을 먼저 넣어야 할지,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할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몇 시간 동안 온갖 라면카페를 뒤졌다. 그는 ‘365일 라면만 먹고 살고 싶은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긴 이름의 카페 회원으로 가입했다.
머릿속이 쓰레기통 속처럼 가득 차올랐다. 
지훈은 쓰레기통 속의 라면 봉지를 전부 꺼내, 쓰레기통 앞에 앉아 라면 봉지를 겹겹이 접기 시작했다. 그는 라면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스프 봉투 속에 작게 접은 라면 봉지를 집어넣었다. 네 개의 라면 봉지를 이렇게 처리하자 넘칠 것 같았던 쓰레기통의 부피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부피가 큰 라면 봉지는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건 현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럴 땐 혼자 있지 말고 무조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도 빌어먹을 현정이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 한 달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28일과 31일이 낀 달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헤어진 지 삼십 일째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지훈은 평소보다 자주 시계를 봤다.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남자가 멍청해 보인다는 평소 현정의 주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긴 했지만 깨어보면 꿈과 현실이 또렷이 분간되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일상을 두들겼다. 
“새로 나온 벤틀리 엔진 소리 들어봤어? 그 소릴 들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령 늦은 점심을 먹다가 지훈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현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정이 꼭 식판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네가 환장하는 폴 오스터가 이 제품으로 『뉴욕 3부작』의 초고를 썼대. 1974년에 친구한테 40달러를 주고 산 타자기라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니? 소리 한번 들어볼래? 권총 장전할 때 나는 상쾌한 소리가 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현정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잠시 자신의 청각에 진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고민했다.
“이 시계, 태엽 감는 소리 한번 들어봐.”
현정의 관심을 끈 것은 대부분 기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니콘이나 콘탁스의 카메라 셔터 소리나 막 출시된 스마트폰의 다이얼 터치 동작음, 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산 올림피아 타자기에서 나는 차갑고 묵직한 자판음 같은 것들로, 지훈에겐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 시끄러운 ‘소음들’이었다.
현정과 헤어진 지 백 일째 되던 날, 지훈은 박스 안에서 두꺼운 앨범 한 권을 꺼냈다. 앨범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앨범 속 사진을 매일 바라보았다.
사진을 태우는 건 대부분 버림받은 쪽이다.
사진을 태우기 위해 그것을 모으고, 라이터를 켜고, 쓰레기통 속에서 타들어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을 소각시키는 건 심장과 연결된 기억의 일부분을 잿더미로 덮어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지훈은 앨범 속 사진을 바라봤다. 새 롤러코스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에버랜드의 튤립 축제, 광릉의 수목원의 전나무 앞에서 찍은 B컷, 일산의 호수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타며 찍은 사진과 일본으로 떠났던 여행 사진들이 있었다. ‘현정 7세. 현정 12세. 현정 18세. 현정 23세. 현정 27세’로 기록된 사진 속의 현정은 볼이 빵빵한 꼬마 여자아이의 성장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성장 다큐멘터리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입사 첫날, 회사 앞에서 현정과 어깨동무를 하며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의 감정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가지고 있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앨범 속의 사진들을 한 장씩 빼냈다. 그것을 하나씩 태워 없애는 것으로 지나간 일들을 재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훈은 사진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현정의 이마와 볼과 어깨가 서서히 불길 아래로 스러져갔다. 시간을 들여 한 장씩 태워버리면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는 사진을 태우고 남은 극소량의 재를 작은 유리병에 모아두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뼈와 살을 수습해 화장하고 남은 흔적 같았다. 잿가루를 모아둔 유리병을 보며 그는 매일 현정의 죽음을 애도했다.

*

지훈이 트위터에서 우연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본 건 그즈음이었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내일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처음에 지훈은 트위터를 무시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는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 일곱 시부터 아침을 먹는다는 발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바쁜 출근길, 회사 앞 단골 노점상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계란토스트 하나를 서서 먹는 정도였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그의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는 가게

그는 충동적으로 ‘기념품’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지훈은 이제 노트북을 바짝 끌어당기고 ‘서로의 상처를 교환한다’는 문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사진을 태우고 남은 재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현정이 준 첫 번째 선물을 떠올렸다.
여름방학 MT,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밤, 그들이 함께 바라보았던 강변의 밤하늘. 지훈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던 그 밤의 정적을 기억해냈다. 모든 것이 잠든 밤, 그런 정적의 와중에 소름같이 돋아나던 귀뚜라미 소리가 정적을 더 두꺼운 장막처럼 만들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과 나무는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어둠 속에서 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연인들의 손은 터질 듯한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사랑해’란 말을 하기엔 모든 게 희미한 때였다. 지금의 현정이라면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라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사랑의 감정이 도파민과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호통치듯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몸이 간질거리는 수줍음 때문에 그들은 ‘사랑해’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스물 몇 살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었다. 
그는 옷장 속에 넣어뒀던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버릴 수도, 태울 수도, 누군가를 줘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한다는 건, 그것의 세세한 내막을 모를 때에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것이 실연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없는 물건을 골라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실제 주인에게 그 물건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게 더 의미 없는 물건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만약 그것이 반지라면 끼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라면?
목에 걸지 않을 것이다.
음반이라면?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스턴트 참치 캔이라면 평생도록 먹지 않고 보관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런 식의 연상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만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는 가족처럼, 그저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훈은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는 옷장과 누군가의 반지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가지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최초의 선물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현정과의 일을 고통에서 추억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실연을 빙자해 새벽까지 친구들을 붙잡아놓고 술을 퍼마시며 하소연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밤새 먹은 음식을 토해내며 스스로의 배설물을 확인하는 자학적인 방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형편없는 스토커로 떨어져 경찰 신세를 지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실연 때문에 여기저기 곯아 터진 상처가 전시된 갤러리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처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어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참가하고 싶습니다

지훈은 어느새 참가 의사를 밝히는 쪽지를 쓰고 있었다.

 

 

(1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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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13일.
 지훈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자동차 클랙슨을 연달아 누르며 C 전자 경주 연수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직진으로 곧장 뻗어 있던 고속도로는 이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IC를 건너뛰고 직진해 달리면 서울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고 복잡해질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유턴은 불가능하다. 그저 앞으로 가거나, 멀리 다른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이대로 연수원까지 달려가 일 년 동안 지속됐던 C 전자의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내 교육 담당자와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다음 교육 일정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방향을 틀어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다. 서울로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C 전자와는 영원히 등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 때문인지 재채기가 났다. 코를 풀고 버린 휴지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볍게 날아갔다.
 지훈은 시계를 보다가 방향을 틀어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황당할 정도로 멍청한 결정이었는데, 그날은 갖은 방법을 써도 사람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 C 전자 연수원장과의 독대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 중 중요한 일부분 역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이라고 적힌 표지판 위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

 

 “이지훈! 오늘 연수원장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우린 주말에 통화하기로 했잖아. 나 오늘 선생님들하고 회식이야. 들어가봐야 돼.”
 그가 전속력으로 연수원이 아닌 현정의 학교로 달려가 그녀를 만났을 때, 현정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삶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지훈에겐 불행히도 그 순간이 바로 그때 찾아왔다. 현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줄게”라고 말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입술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현정이 긴 침묵을 깼다.  
 지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말 헤어지고 싶어?”라고 질문하는 게 정현정이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그녀는 대답 대신 ‘반드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결혼하자고 말하면 “결혼하고 싶어?”라고 질문할 것이었고,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뭔데?”라고 반문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현정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현정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현정 사이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오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훈련된 협상 전문가처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곳까지 달려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고마워”란 얘길 듣는 순간, 그는 현정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의 한숨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겨울바람과는 다른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았다.

 

 겨우 오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현정은 질문을 포기했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을 무시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랑이란 끊임없는 질문’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아포리즘은 실종됐다. 현정은 대화의 문을 닫았다. 지훈은 대화를 이어나갈 어떤 구실도 찾지 못했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눈비가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속도 그대로 온몸으로 그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운전 조심해.”
 그는 현정의 손등을 바라봤다. 벌에 쏘여 삼각형 모양의 흉터로 남은 손등에서 추억들이 윙윙대며 쏟아져 날렸다. 지훈의 얼굴 위로 잘 갈린 얼음 알갱이가 달라붙었다. 누군가 티스푼으로 얼음 빙수를 떠 자신의 뜨거운 눈동자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다.
 길을 달려오는 동안 마주쳤던 풍경들이 거꾸로 되돌아와 그를 흔들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12월에 개나리나 목련이 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려오던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지훈은 그녀에게 경부고속도로에서 본 길가의 꽃들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2월에 핀 벚꽃을 보았다고 얘기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어준단 말인가. 그것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 현정이란 자각이 지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것은 지훈이 생각했던 이별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도 가끔, 아주 가끔은, 현정과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차 안에서, 호텔에서, 그들이 숱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익숙한 침대 위에서. 이별의 장면 속엔 늘 축축한 눈물이 있었다. 짱짱한 하늘에 느닷없이 비구름이 몰려오고, 바짝 마른 빨래 위에 비가 떨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무표정했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이별엔 생략되어 있었다.
 두 시간 후, 서울 도심에 폭설이 내렸다.
 눈발이 점점 더 몰아치더니 무거운 몸체를 이기지 못한 듯 수직으로 낙하했다. 버스와 대중교통은 마비되었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걷기를 멈추었고, 고개를 수그린 채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하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차들은 운행을 포기했다. 정지된 자동차들의 무덤. 도시를 뒤덮던 날카로운 소음들은 진공의 눈 속에 파묻혀 가라앉고 있었다. 12월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고요한 밤이었지만 지훈의 심장은 시속 150킬로미터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나’의 연속적인 타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길고 날렵한 총구를 정확히 겨누었다. 눈이 쏟아지는 도심의 네온 광고판에서 여름만 존재하는 괌 관광청의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그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신의 심장이 와장창, 유리처럼 깨지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 드류 베리모어는 모두 일곱 가지 통신 장비로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전화번호가 하나이던 시절이 그리워! 응답기 하나에 테이프도 하나!” 이 영화는 지훈이 현정과 함께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지훈이 현정에게 처음 이별을 통보받은 건 일주일 전, 월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네 번이나 들어야 했는데, ‘미안해. 잘 살아’로 끝나는 네 가지 종류의 이별 메시지였다.
 만약 어느 날, 각각의 통신 장비에 접속할 때마다 ‘헤어지자!’, ‘잘 살아!’,  ‘건강해야 돼!’, ‘행복하길 빌게!’, ‘넌 진짜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따위의 일곱 가지 버전의 이별 고해사를 듣는다면, 그가 누구라도 21세기적인 이별의 방식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묵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이 전송 방식과 전송음이 제각각인 네 가지 버전의 통신 기계들로 이별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곤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네 번 놀랐고, 네 번 분노했다. 네 번이라고 했지만 그건 매번 그에게 그전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 현정은 제일 먼저 이메일로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2. 현정은 페이스북에 그 사실을 올려놓았다.
3. 현정은 지훈의 트위터에도 이별 사실을 알렸다.
4. 그러고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이별의 메시지는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도착해 있었다.
 사실 현정의 이별 메시지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과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마우스로 긁어서 복사해 올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현정은 네 번이나 같은 얘길 반복했다. 분명히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은 이 불길한 냄새가 결국 테스토스테론과 관련된 것이며, 그녀가 남긴 일관된 이별 메시지가 남긴 유일한 의미는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다른 남자가 생겼어!’라거나 ‘다른 놈이랑 잤어!’ 같은 고백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자명한 이유를 이제껏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현정은 실언한 게 아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1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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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그만 헤어질까?”
 언젠가 휴가를 맞춰 함께 떠난 파리에서 현정은 지훈에게 불쑥 물었다. 그러나 지훈의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현정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입술에 잔뜩 묻힌 채 말했다.
 “아님 말고!”
 현정은 살짝 벌어진 앞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흰 구름이 카푸치노 위에 올려놓은 포근한 우유 거품처럼 느껴지던 날이었다.
 지훈과 현정은 다른 연인들처럼 퐁네프 다리나 에펠탑에서 사진을 찍고, 파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현정이 지하철역 근처 서점에서 산 잡지를 뒤지며 볼만한 공연의 리뷰를 찾는 동안 지훈은 걸어 다니며 바게트나 샌드위치를 바쁘게 먹는 파리지앵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지도를 들고 몽마르트르의 뒷골목을 걷다가 영화 <아멜리에>에서 나왔던 ‘카페 레드 뮬랭’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크림 브뤼레와 하트 모양의 다크 초콜릿이 토핑으로 올라간 레몬치즈 케이크를 먹었다. 계획 없이 걷고 또 걷는 건 파리를 여행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었다. 시차 때문에 너무 일찍 일어난 다음 날, 이들은 오페라 극장 앞에 앉아 해 뜨는 광경을 보다가, 이리저리 건물 내부의 뼈대가 튀어나와 기괴하게 보이던 퐁피두 센터의 영화 자료실에서 발음하기 힘든 이란 감독의 옛날 영화와 프랑수와 트뤼포의 <줄 앤 짐>을 봤다.
 그날 오후에 지훈과 현정은 리옹역에서 RER 티켓을 끊어 베르사유로 가는 이층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베르사유 궁궐의 아름다운 정원을 걸으며 현정은 지훈에게 말했었다.
 “베르사유는 원래 루이 13세가 사냥을 위해 머물던 여름 별장이었대. 주변이 온통 늪지대였고 쓸모없는 땅뿐이었는데 그걸 루이 14세가 아름다운 궁궐로 만든 거지. 절대왕권 시대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이곳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생각하면 너무 놀라워. 삼백 년이 넘은 건물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게 정말 신기하잖아. 넌 믿겨지니?”
 지훈이 고개를 젓자 현정은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가끔 우리가 사귄 지 십 년 가까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내 청춘이 너란 사람으로 채워진 거잖아. 테트리스로 치면 난 정사각형만 잔뜩 들어가 있는 블록 같아. 어떤 사람들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 가로가 긴 직사각형, 기역, 니은 모양의 도형처럼 다양한 블록들로 가득 차 있을 텐데.”
 직선처럼 부는 바람 때문에 나무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흔들렸다. 현정의 긴 머리도 같은 방향으로 흩날렸다.
 “지루해?”
 “가끔. 넌?”
 “글쎄.” 
 “…….”
 지훈은 바람에 날리는 현정의 긴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셔츠 사이로 볼록 튀어나온 그녀의 작은 젖꼭지를 바라봤다. 현정이 숨을 내리쉴 때마다 그것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국을 떠나면 현정은 늘 브래지어부터 풀어놓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이즈보다 늘 한 치수 큰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평균보다 작은 가슴에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언어와 공기가 달라지면 현정은 제일 먼저 자신의 가슴보다 큰 브래지어 사이즈를 불편해했다.
 이들은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농담으로 흘려버릴 정도로 그들의 시간은 함께 마모됐다. 지훈은 시간이 오래된 가죽처럼 부드럽게 낡아가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터질 듯한 열정과 섹스로 가득 찬다면 인류의 절반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자살했거나, 미쳤을 것이다. 열정이나 욕망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라는 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한 여자와의 지속적인 연애는 때때로 지훈을 발기 불능의 노인처럼 만들었다.
 “캠퍼스 커플이라는 게 운명적이라기보단 전형적이란 생각이 들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거나, 선을 보는 거나, 뭐가 다를까 생각도 들고. 너랑 난 너무 모범생들처럼 만났잖아. 우린 모범적으로 연애하고 결혼도 모범생들처럼 하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현정이 회한에 찬 듯 웃었다.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지 그래? 넌 고등학교 선생이라 최고 등급일걸?”
 “진담이니?”
 “농담 같아?”
 “나랑 헤어지면 어떨 것 같아?”
 “넌 어떨 것 같아?”
 “우리 말이야. 매일 이혼할까 말까, 이러면서 지지고 볶는 나이 든 부부 같지 않니?”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남 얘기하듯 늘어놓고 자주 웃었다.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오래된 영화 얘길 하듯 했던 말을 반복했고, 말이 나오기도 전에 뭘 물어볼지, 뭘 먹고 싶을지, 어디에 가고 싶을지 다 아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자.”
 “그래.”
 “내가 어디 가자고 하는지 알아?”
 “피곤하니까 호텔로 돌아가잔 얘기잖아.”
 “맞아.”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훈을 바라보다가 깔깔대며 웃었다.
 
 자동차를 렌트해 엑상프로방스와 아를에 가자고 한 건 현정이었다.
 니스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칸까지 기차를 타고 가자고 한 건 지훈이었다.
 ‘피터 메일’의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에세이 『나의 프로방스』를 연상시키는 남프랑스 여행은 그러나 그들이 함께했던 수많은 여행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렌터카 회사에서 장담한 고장 날 일 따윈 없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혼다 어코드’의 타이어는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도중 장렬한 소리와 함께 펑크 났다. 한 시간에 겨우 차 몇 대만 다니는 시골 바닥에 어째서 이런 날카로운 나사못이 뒹굴어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포도나무, 간혹 차를 멈추게 하며 소 떼가 지나가고, 낮은 하늘 위에 구름이 덮인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상상했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들이 마주친 남부 프랑스의 풍광은 축축한 비와 번개로 뭉개지며 질척거렸다.
 그날따라 마을 초입에 있던 오층짜리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있었다. 이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절염 환자의 무릎처럼 무너질 듯 삐걱대는 계단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파리 지하철의 낡아빠진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던 무시무시한 소리와 정말 비슷했다.
 “예전에 정형외과 다니는 친구가 어긋난 무릎뼈 맞추는 걸 본 적 있거든. 그때 뼈에서 나는 소리랑도 비슷해!”
 공짜라고 해도 묵고 싶지 않은 으스스한 호텔에서 지훈과 현정은 이틀을 보냈다. 히치콕 영화에서처럼 옆방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고 생각될 만한 음침한 방이었다. 욕실에선 필라멘트가 끊어지기 직전에 나는 아슬아슬한 소리가 들렸고, 온수가 찔끔거리며 나왔다 끊기길 반복했다.
 찬물로 머리를 감은 현정은 감기에 걸렸다.
 비상약을 먹었지만 상태가 쉽게 호전되진 않았다. 햇볕이 쨍쨍한 프랑스 남부의 목가적인 풍경은 창문 밖으로만 상영되었다.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이들은 침대에 누워 노트북에 받아 온 영화를 봤다. 지훈은 현정 곁에서 읽다 만 여행 잡지를 읽었다. 영화를 보며 현정은 종종 감기약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멍청아! 변하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이냐고, 변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결국 사랑일 수는 없는 거냐고 묻고 싶어지던 날 밤, 지훈 역시 감기에 걸렸다.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 후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비상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지훈은 코가 통째로 흘러나올 정도로 재채기를 해대고도 약국을 찾지 못해, 그날 밤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지훈은 그때 감기약에 취한 듯 내뱉던 현정의 말이 이별의 전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랬던 거였어,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사랑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깨달음은 항상 늦다.

 

 

(1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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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시속 150킬로미터

 

  12월 13일.
 이지훈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C 전자의 천안 연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막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지훈은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12월에 부는 시베리아 북서풍에도 흰색 면봉 같은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목련과 활짝 핀 개나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차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훈의 검은색 중고 소나타 뒷좌석 왼쪽에는 강의 때 갈아입을 양복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두 장의 화이트 셔츠가 걸려 있었다. 모두 현정이 백화점 세일 기간에 산 것이었다. 차 트렁크에는 오랫동안 신어 뒤꿈치가 닳은 뉴발란스 운동화가 있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이세이 미야키의 검정색 터틀넥 풀오버,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의 그레이 992, 어디선가 익숙한 듯 보이는 이 조합은 1998년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이었다. 지훈은 그것이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전의를 불사르기 위해 그가 입는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H 그룹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롤 모델’ 교육을 하다가 지훈은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을 흉내 냈다. 그의 왼쪽 시력은 1.5에 가까웠지만 그는 가끔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안경은 잡스가 착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도쿄 출장길에 오모테산도힐즈의 한 안경점에서 산 것이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다가 발동한 특유의 장난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실제로 종종 지훈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점점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도 못 말릴 신경질과 강박적인 식습관, 췌장암에 걸린 것만 빼면 잡스는 여러모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를 벗어 던지자 다소 차갑게 생긴 그는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는 엉뚱한 천재 타입의 남자처럼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Y 마트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 교육에선 캔 커피와 초콜릿 쿠키 상자를 가득 넣은 커다란 마트용 쇼핑카트를 끌고 나왔고, 점심 후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며 근무 환경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강의할 장소의 화장실에서 얻는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도 금세 알아챘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 바퀴가 달린 여행용 플라이트백, 등산용 배낭과 가발 등은 그의 강의 소품이 되었다.
 이지훈은 기업 강연계의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 환경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딱딱한 강의에 적절히 유머를 섞었고, 쉬운 비유와 많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선 늘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을 받았다.
 “애인 있으세요?”
 “결혼하신 건 아니죠?”
 그때마다 지훈은 웃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주실 겁니까?”라고 가볍게 질문을 피하며 되물었다. 서비스센터 직원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첫 번째 고정 매뉴얼 같은 말이었다.

 

 

 지훈이 다니는 회사의 남녀 성비율은 7 대 3 정도로 남자들이 많았다. 회사 내의 연애가 전적으로 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20년이 되면 여자가 없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걸?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별로 해소되고 있지 않잖아? 한민족 단일국가설은 이제 끝났어. 철저한 부익부 빈익빈이야. 정글이야, 정글! 우리 회사만 해도 절대적으로 그렇고.”
 마흔넷이 넘도록 미혼인 최 부장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엉뚱하게 비꼬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여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태어난 최 부장이 막 딸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대신 계절마다 머리를 염색하고 ‘소녀시대’나 ‘빅뱅’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별난 중년이었다. 
 그가 ‘싱싱한 난자’나 ‘젖’ 같은 단어를 들먹일 때마다 지훈은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나 정육 코너에 진열된 젓갈들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최고급 젓갈 세트를 선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훈은 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커다란 명란젓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가,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생선알도 못 먹는 거야? 난 명란젓 진짜 좋아하는데. 명란젓은 좋은 참기름을 뿌려 먹는 게 최고야!”
 지훈은 젓갈 세트를 몽땅 들고 현정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압력밥솥에 밥을 뜸 들였다. 그리고 금방 한 뜨거운 밥 위에 가위로 자른 명란젓을 올려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 천천히 밥과 섞기 시작했다. 곧 부풀어 있던 밥 알갱이가 오톨도톨한 명란과 섞여 보기 좋은 핑크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몇 번이나 “네 인생이 식도락과 거리가 먼 건 진짜 비극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훈을 놀렸다.
 요리를 좋아하는 현정은 지훈을 위한 음식도 만들었다. 명란젓과 신선한 올리브와 파프리카를 넣은 샐러드, 그리고 지훈을 위해 명란을 익혀서 만든 오므라이스였다.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뿌리며 지훈이 말했다. 
 “싱싱한 난자를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싱싱한 정자를 먹는 맛이 어떤지는 내가 좀 아는데.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까?”
 현정이 명란젓을 포크로 콕 찍어 올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좋아”라고 말하다가 참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현정의 입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훈이 설거지를 했다. 현정이 함께 볼 DVD를 고르는 동안 지훈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지훈과 현정은 <위기의 주부들>의 6시즌 7화를 보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정자의 맛을 음미하는 섹스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현정은 침대에, 지훈은 구부러진 소파의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지훈은 현정의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침 자국을 바라보았고, 현정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느라 쿠션의 격자무늬 자국이 잔뜩 찍힌 지훈의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위기의 주부들> 1, 2, 3, 4, 5시즌을 함께 본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풍경이었다.
 <위기의 주부들> 2시즌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시즌이나 4시즌의 절반이 지나갔을 때쯤, 그것이 현정에겐 엄마 이야기이고, 지훈에겐 형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의도적으로 엄마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각자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졌다. 현정은 오이를 먹지 못했고, 지훈은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생선회를 가장 좋아했던 현정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지만, 지훈은 눈에 보이는 족족 우유를 마셔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칼슘을 우유로 섭취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는 법을 영리하게 터득해나갔으므로 이들의 연애 전선에 끼는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지 않고 근처에 머물다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 날 저녁, 지훈과 현정은 친구들을 불러 프라이드치킨과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맛 나초를 먹으며 포커를 쳤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닭 뼈다귀들 속에서도 이들은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봤다. 베드신과 키스신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섹스는 이미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지훈은 잠들어 있던 현정을 껴안았다. 현정은 간지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릴 때조차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고요히 사정했다. 현정은 익숙한 듯 그의 목덜미에 달큰한 침을 발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훈은 콘돔을 크리넥스에 싸서 버리고, 출근을 하며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갈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맨이었다. 기업 강연과 대중 강연을 병행하는 컨설턴트 강사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다. 그럴수록 비공식인 일에 대해선 그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지금 이 속도로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면 아직 퇴근 전인 현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한 턱이 날카로운 바람에 따끔거렸다. 수염이 면도로 약해진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12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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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의 이별은 거의 일 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주 충혈됐다. 그녀는 밭은 재채기를 종종 내뱉었다. 가혹한 봄날이었다. 손수건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손수건마저 정수가 사강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와 연결되지 않은 물건을 찾는 게 불가능해질 즈음, 사강은 실연이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듯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사물을 그와의 기억 쪽으로 되돌리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걷던 길에 이런 나무가 서 있었어.
그와 함께 먹던 음식에 이런 토끼 귀 모양의 은빛 스푼이 놓여 있었지.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지.
그와 함께 보던 영화에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흘러나왔어,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헤어지길 잘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별이 진짜 이별일 수는 없다. 아흔아홉 살에 죽음에 이른 노인의 자연사를 절규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강에게 실연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 칼날을 겨눈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칼날을 목 위에 대기 전 자신의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던 날 밤, 사강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뜬 문장을 읽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그녀는 잠들지 못한 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를 클릭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

 

사강은 손가락으로 실연이나 치유 같은 단어들을 쓸어내렸다. 각각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클릭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설명되어 있는 몇 개의 카테고리가 나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치유’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영화제라는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00일의 썸머>
<러브레터>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

 

사강은 세로로 정렬된 영화 제목을 하나씩 클릭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와 촬영 스텝에 관한 정보들이 떴다. 모두 실연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사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에서 ‘실연’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그리고 탈칵, 소리와 함께 새롭게 넘어가는 화면을 지켜보았다. 

 

       실연은 오래  

 

화면이 부유하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문장을 밀어내고 있었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사강은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다가 눈을 감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눈물이 동공 위로 서서히 차올랐다. 눈을 뜨면 곧 낙하할 뜨거운 웅덩이를 사강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이별은 ‘하는’ 것이지만 실연은 ‘당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별 당하다’라고 말하거나, ‘실연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일시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  
실연 후, 사강의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 쪽으로만 회귀했다. 과거가 그 모든 시간과 가능성을 빨아들였다. 실연은 기쁨과 슬픔, 회한과 쓸쓸함, 분노 같은 모든 감각들을 거대한 분화구의 화산재처럼 덮어버렸다. 미래 역시 과거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치도 나아가지 않은 너무나 익숙한 미래. 실연은 그렇게 사강에게 오래된 미래가 되었다. 
사강은 트위터를 보며 ‘미래’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곧이어 ‘저랑 함께 아침 드실래요?’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실연이 미래를 낳고, 미래가 아침 식사를 낳고, 아침 식사가 치유를, 치유란 단어가 다시 기념품이란 단어를 밀어 올리며 상처란 명사로까지 옮아가고 있었다. 
실연을 어루만지는 단어들이 겨우 아가미를 내밀고 흘러와 ‘외로움’이란 이름의 호수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그것을 간증했다. 자신의 실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회한이 이 조찬 모임에 처연한 색채를 덧씌웠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새벽기도회를 연상시켰다. 사강은 가방 속의 물건들 역시 성경책만큼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너무 무거운 얼굴들이에요.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기분이 들구요.”
미도가 말했다.
“헤어진 애인의 상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거겠죠.”
“이런 분위기면 전 밥 먹다 체할 것 같아요. 소화제 가져올 걸 그랬어요. 꼭 <최후의 만찬> 같지 않아요?”
“예수님 제자는 열 두 명뿐이에요.”
“그런가? 제가 한번 몇 명인가 세어볼까요? 눈치 못 채게 셀 수 있어요.”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미도는 사람들을 나지막이 세어보며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몇몇이 사강과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마침내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 만족스런 얼굴로 사강에게 “스무 명이네요”라고 속삭였다.
사강은 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미도를 포함해 모두 스물한 명이었지만 사강은 고쳐 말하지 않았다.

 

 

(8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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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 밤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정은 어떤 모습일까
                                                                                                                                          - 에밀리 디킨슨



1부.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 

  

 
오전 일곱 시부터 주름 없이 다린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아침형 인간들일 것이고, 하루 네 시간의 수면만으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침대에서 어렵지 않게 일어날 사람 말이다. 혈색 좋은 얼굴에는 자신감과 미소가 넘치고, 이른 아침부터 서로의 눈을 맞췄다는 동지애로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수성가한 CEO, 정치인, 엘리트 관료들의 은밀한 식사 시간. 호텔의 레스토랑이 새벽부터 이런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건, 이들의 조찬 모임에는 비공식적인 행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조 단위 세금이 투입되는 정책을 결정하거나, 어느 가장의 모가지를 대량으로 자르는 일을 하면서도 밥을 남기는 사람은 없다. 굳이 성공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는 여유가 아침의 밥맛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넘치는 식욕이 강렬한 성욕과 직결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장소는 별 다섯 개짜리 특급 호텔과 비행기 일등석이다.

 사강은 직업상 이들을 자주 봐왔었다.

 그들은 비행기 안에서도 절대 잠들지 않는 부류로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대신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팔목에 찬 채 서류를 보거나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를 읽는다. 통화기금이나 개발협회, 금융공사 같은 이름을 단 국제기구의 고위급 간부, 미국계 거대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전무이사, ESPN 같은 채널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유명 운동선수들…….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말투나, 커피나 물이라고 말하는 대신 ‘더블 에스프레소’, ‘에비앙’이라고 짧게 끊어 구체적으로 말하는 성향, 오랜 시간의 비행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라는 것 외에도 그들은 넘치는 에너지와 돈을 무기로 많은 자식과 애인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 지구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강은 그런 사람들을 ‘기내에서 똑같은 면세품을 두 개씩 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균형의 미덕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명정대함은 이들에게 아내와 애인 모두를 오랫동안 소유할 수 있는 권력 이상의 것을 줄 것이다. 사강은 신중하게 고른 값비싼 선물이 죽어가는 인간관계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공이 인증된 수컷들에게 발견되는 이런 균형의 DNA가 어떻게 체내에 이식되는지에 대한 이론은 아직 들은 바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보고서를 쓴다면 사강은 첫 서문을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샤넬로 하죠.”

 화장품이나 스카프, 가방 역시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샤넬이다.

 그러나 브랜드 ‘샤넬’이 아닌 인간 ‘가브리엘 샤넬’은 오랫동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숨겨진 정부로 살아야 했다. 아내를 둔 남자의 애인들이 닥치는 대로 샤넬의 물건들을 사들이는 것은 수면 위에 잘 드러나지 않는 가브리엘의 무의식과 고뇌를 닮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었을 땐 샤넬이 촌스럽게만 보였어. 샤넬의 두꺼운 트위드 재킷이나 진주 목걸이가 꼭 할머니 옷장에서 막 훔쳐낸 것처럼 보였거든. 근데 나이가 들면서 늘 똑같아 보이던 옷이나 핸드백이 예뻐 보이더구나. 별일이지. 그 여자 옷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내가 샤넬의 클래식 2.55 백을 들게 되면, 그땐 나 역시 중년이 됐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지.”

 샤넬이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고, 권력 있는 남자들의 열정적인 정부였다는 사실을 처음 얘기해준 건 엄마였다. 엄마는 샤넬을 ‘스커트 길이 하나 줄인 것치곤 돈을 너무 많이 번 여자’였다고 말했다. 사강이 엄마에게 제일 먼저 배운 것도 턱을 살짝 치켜들고 상대방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샤넬처럼 냉정하고 단호히 말하는 법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왜 사랑하지 않아? 왜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거지?”

 그때 엄마의 상처 난 목에는 아빠가 선물한 샤넬의 실크 스카프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

 

 

 빈 거리를 버스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사강은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가라앉은 창가에 기대어 대형 광고판이 서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표정이 바뀌는 지점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그녀는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카펜터스의 노래를 들었다. 버스는 이태원 해밀턴 호텔 정류장을 지나며 커다란 배낭을 멘 외국인을 태웠다.

 개암나무 빛깔의 선명한 눈동자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걷기 열풍이 불던 때, 사강은 가슴에 교회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부착한 채 성지순례를 떠나는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여러 차례 탔었다. 그녀는 지중해의 햇볕에 그을린 스페인 남자들의 혈색을, 뜨거운 태양광선 아래서 잘 익은 올리브를 먹고 FC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의 극성팬으로 자라난 ‘카를로, 라울, 호세’라 불리는 스페인 남자들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쉽게 사랑에 빠지지만 금세 식어버리는 악동 기질, 짙은 눈썹을 씰룩이며 자신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특유의 몸짓이나 깊게 쪼개진 턱 사이의 굴곡에 대해서라면 말이다. 남자는 버스에 앉자마자 승객이었던 사강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사강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커다란 배낭을 바라봤다. 남자는 창가를 통해 전달되는 낯선 풍경에 매료된 듯 한동안 서울의 아침을 관찰하더니, 눈물이 고일 정도로 하품을 하며 품 안의 배낭을 베개 삼아 졸기 시작했다. 버스가 좌회전하자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목과 어깨도 부드럽게 꺾였다. 낡은 양철 컵이 매달린 남자의 검정색 배낭이 오른쪽으로 기울며 흔들렸다.

 오전 다섯 시 이십 분.

 피곤에 겨운 졸음이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FM 라디오와 함께 사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강은 서리가 옅게 낀 버스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차갑게 불어왔다. 사강은 새벽녘 한적한 도로 위 상점을 바라보았다. 흰 앞치마를 두른 남자들이 빵집 안으로 쉴 새 없이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건너편 4차선 도로 24시간 편의점 트럭은 물건이 가득 담긴 초록색 플라스틱 박스를 토해내고 있었다. 교차로에 잠시 멈춰서 있던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강은 24시간 편의점 옆 작은 카페 유리창에 적힌 짧은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갓 볶은 원두 커피가 단돈 900원


 

 0의 숫자를 가만히 세어보다가 사강은 문득 멍해졌다.

 그것은 서울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였다.

 저혈압 환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오슬로의 차고 무거운 공기 속을 막 뚫고 돌아온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1유로짜리 동전들을 만지작거렸다. 원두커피의 가격을 알리는 문구 밑에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추신처럼 다정한 말이 동봉되어 있었다.

 

 

 갓 구운 에그토스트 1,000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식빵이 그녀의 눈동자 아래에 잠시 정지해 있었다.

 

 

 갓 볶은

 갓 구운

 

 

 ‘갓’이란 부사 위로 아침에 만든 버터처럼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단지 1유로나 2유로짜리 동전 하나면 가능한 풍족한 식사였다. 오슬로에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문득 서울이 가진 아량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버스가 고가도로 위를 가뿐히 올라섰다.

 사강은 뻑뻑한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이른 봄의 냉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뺨 위로 불어왔다. 가방 속에서 어젯밤 잠들기 직전 맞추어놓았던 휴대전화의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강은 가방 안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마치 익숙한 일상이라도 되는 듯 눈으로 보지 않고 휴대전화 알람 기능을 간단히 껐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사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버스 문 앞에 서서 짧게 하차 버튼을 눌렀다. 버튼 음이 울렸다. 다시 버스의 손잡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FM 진행자의 목소리와 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듯 버스의 맥박이 라디오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카펜터스 특집의 마지막 곡입니다. 불멸의 히트곡. <TOP OF THE WORLD>입니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전주와 함께 카렌 카펜터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하늘의 꼭짓점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침을 여는 라디오의 주파수가 열린 창문 사이로 서울 곳곳을 넘쳐흘렀다. 사강의 눈에 하나둘, 문을 여는 카페와 상점들이 보였다. 딸깍, 자물쇠 열리는 묵직한 소리, 오랫동안 닫힌 가게 문을 열 때 나는 미어지는 쇳소리, 키를 꽂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때 나는 가벼운 진동음들처럼 서울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하철 입구에서 걸어 나왔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어떤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서울의 심박 수였다.

 

(2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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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mlb jerseys 2012.06.07 16: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신재민 실형 3년6월 선고 “청렴해야할 공무원이..” 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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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7.05 16: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5. ans 2012.10.11 20: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만화속세상만 있는 게 아니었네요! 감사히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