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여자가 다시 한 번 유쾌한 듯 공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간이 발명한 것들 중에 공항만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건 없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안전벨트에 묶여 장시간 기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기막힌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공항이야말로 ‘날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동사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공항과 비행기를 함께 생각하고, 그것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의 투명한 뼈를 만지고 자유로운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공항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도 그런 것이다. 떠나고 싶어! 런던! 뉴욕! 도쿄! 아니 더 멀리. 케이프타운 같은 아프리카로!

“어머. 도착하나 봐요.”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누구에게든 쉽게 마음을 열고, 쉽게 말을 거는 여자들이 갖는 특유의 밝고 낙천적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바라봤다.

“그쪽도 누구 기다리죠? 승무원복 입고 기다릴 정도면 애인?”

“아뇨. 친구.”

“난 남편인데. 좀 재미없다.”

여자가 잠시 사강을 바라보다가 아직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주시했다. 이제 짐을 가득 든 사람들이 저곳의 문을 향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간절히 원하던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갈 것이고, 악수와 뜨거운 포옹과 사랑스런 입맞춤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모든 사랑이 영화처럼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공항의 출입구에서라면 누군가의 사랑을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다.

“우리 집 남자, 걸음이 엄청 빨라서 공항에선 늘 제일 먼저 나오곤 해요. 제가 너무 걸음이 빠르다고 늘 툴툴대는데도 절대 고쳐지지가 않는다니까요. 딸애랑 걸을 때만 걸음이 느려져요. 거짓말처럼. 재밌죠?”

사강은 여자의 눈가에 그려진 깊고 자잘한 주름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여자의 귀밑머리에서 짧고 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였다.

“제 말 맞죠? 제일 빠르잖아요. 저런 식이라니까. 밥도 얼마나 빨리 먹는지. 전 가봐야겠어요.”

여자가 일어나며 사강에게 말했다. 그녀는 사강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자주 웃었던 사람에게서 보이는 입가의 주름들이 부드럽게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생애의 대부분이 평온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란 소녀는 틀림없이 건강하고 따뜻한 숙녀로 자라날 것이다. 사강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주근깨가 올라온 발그레한 뺨과 햇볕에 탄 건강한 무릎.

사강은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정수가 인파 속을 뚫고 플라이트 백을 끌며 빠른 걸음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정수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곧 정수의 품에 안겼고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었다. 사강은 인파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동공이 커지고 포옹과 악수와 뜻밖의 웃음이 공항의 B 게이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윤희가 사강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이 탄 공항버스가 빠르게 인천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따뜻한 봄바람이 지훈의 코끝을 스쳐갔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위에서 지훈은 언젠가 길 위에서 보았던 몽환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12월 경부고속도로 길가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활짝 피어난 목련을. 그는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사강이 도쿄 아카사카의 공원에서 한밤중에 태양을 보았던 일만큼이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강물이 어는 혹한 속에 꽃을 피우고, 별도 뜨지 않은 한밤중에 태양을 뜨게 하는 것, 지금 그는 그것을 ‘기적’이 아닌 ‘사랑’이라 불렀다. 그가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엔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뿐이었다. 오전 일곱시에 만나 텅 빈 앞좌석을 바라보며 스물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아침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침 일곱시부터 성장을 한 채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아침 여덟시부터 잘 다린 옷을 차려 입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느 날, 시간이 거짓말처럼 뒤집어져 밤과 낮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착시들. 그것이 스물한 명의 사람들을 오전 일곱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란 긴 이름의 레스토랑 앞에 집결시켰다.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지훈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의 트위터에서 희망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네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잠든 사람이 적어도 다섯 명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한 명이 코를 골았고, 그중 한 명이 꾸벅거리며 졸다가 옆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는 것이다. 연인을 잃고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잠들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악몽을 떨쳐내며 선잠을 자는 풍경. 시인 최영미가 「사랑의 시차」에서 말했었다.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라고.

서울과 상파울루의 시차는 12시간이다.

그날, 지훈이 목격한 12시간은 그러나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헬싱키와 막 섬머 타임이 가동된 도쿄 사이에 벌어진 시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애 중인 사람들 사이에 생긴 사랑의 시차도 아니었다.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과 일상의 사람들 사이에 생긴 선명한 시차였다. 연인의 실종과 함께 벌어진 12시간이라는 틈 사이로 ‘과거’라는 이름의 폭우가 몰아치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영화가 계속해서 상영되던 시간의 낙폭이었다.

누군가 외로움의 각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라고 한다면 지훈은 그날 아침, 자신이 보았던 시침과 분침 사이의 거리를 잴 것이다. 그는 수학자처럼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따위엔 결코 나오지 않지만 외로움의 각도는 ‘150도’라고.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가 가리키던 오전 일곱시의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각도를 보면서, 그는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공항버스가 빠르게 공항터미널 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문 밖 하늘 위로 길고 하얀색 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L항공사의 비행기가 보였다.

한때, 저런 비행기 중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뉴욕의 한 건물을 향해 날아갈 때, 세계무역센터 101층에 갇혀 있던 한 여자가 기도하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의 충돌과 폭발이 일어난 후, 그녀 앞으로 엄청난 먼지와 연기가 달려들었다. 이미 벽이 무너져 내린 사무실에서 죽음을 직감한 그때,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 듯이 구조 요청을 하느라 배터리를 거의 다 소모한 그녀가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비행기가 충돌한 것 같아. 사랑해 당신, 영원히. 안녕!”

아메리카 에어라인 11편이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하던 순간, 몇몇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수화기를 든 그들이 누군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살려줘’,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가 아니라 ‘사랑해’, ‘고마워’,‘미안해’ 같은 말들이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감기 직전 지훈에게 했던 말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지훈은 결코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고로 부서진 자동차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엄마가 어린 지훈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했던 말도 그런 것이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죽더라도 영원히 널 사랑해…….’ 결국 이 세 마디면 다 되는 게 아니었을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죽음의 순간 사람들이 기억해낸 말이 끝끝내 그런 것들이었다면 말이다. ‘형을 부탁해’가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해도, 지훈은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훈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꼽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몸을 조금씩 돌리며 태엽처럼 조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버스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태양이 뜨겁게 녹아 서서히 가라앉는 쪽을 향해 자신의 손목시계를 비추었다.

오후 일곱시.

시계는 오전 일곱시와 같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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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8회 >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정말 놀랍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은 거니?”

일주일 후, 지훈은 현정을 만났다.

“내 로모!”

그가 카메라와 함께 내민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필름과 사진이었다. 모두 24장이었고, 대부분 햇빛이 들어가 퇴색해 있었다.

“필름에 햇빛이 들어갔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

“아니, 이 사진은 오히려 번져서 더 멋지네. 예술작품 같아.”

현정은 코앞까지 바짝 사진을 당겨 사진 속 장소를 일일이 확인했다. 성산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현정은 햇빛 속에 들어가 놀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 보이진 않지만 그때 현정은 내내 맨발이었다.

“고마워. 나라면 너처럼 못 했을 거야. 아마 꼭 숨기고 절대 안 줬을걸? 넌 진짜 신사야.”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신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고마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쿄에서 사강이 건네주었던 사진은 현정이 애타게 찾고 싶어 하던 제주도 사진들이었다. 사진은 현정이 태어났고, 현정이 유년기를 보냈던 제주도의 바다와 해녀 마을을 담고 있었다. 7년에 걸쳐 찍힌 추억의 지층들이었다.

현정은 자신의 로모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 로모 카메라를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은 현정을 깜빡 놀라게 해주기 위해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안에 넣어 ‘처리’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현정 옆을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몇몇이 지나갔다. 현정과 눈을 맞추며 웃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인사했다.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 수업이 있어.”

“알아.”

“내가 진짜 고마운 게 뭔지 알아?”

“안다니까.”

현정이 긴 숨을 내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늘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얼마나 날 원망했을지도 알 것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정말이야.”

지훈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멀어져가는 현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정이 뒤돌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로 시작하는 사랑보단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늘 더 힘들다. 상대보다 힘든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훈에게 그것은 운동장을 빠르게 뛰는 현정의 뒷모습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안녕!”

현정이 뒤돌아 배낭을 멘 사진 속 소녀처럼 손을 흔들었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운동장 정중앙을 가로질러 천천히 저 끝까지 걸어갔다. 그래, 안녕.

“여기 오클랜드발 비행기 도착하는 출입구 맞죠?”

사강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는 오랜만이라, 좀 헷갈리네요.”

선글라스를 밴드처럼 낀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웃으면 오른쪽 입술 아래 작은 보조개가 팬 여자였다. 많아봐야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는 하이힐이 아니라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29번 출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도착을 기다리며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하얀색 피켓을 들고 ‘MR LEE’를 기다리는 전자회사 직원과 한 무리의 여행객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과 오클랜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과 아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뒤섞여 출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착륙하길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여기 맞는 거죠?”

여자가 사강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맞아요. 한 출구로 여러 곳에서 돌아온 비행 승객들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기다리시는 분도 이곳으로 나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여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자주 봤다.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지연’ 사인이 뜰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여자를 본 지 오랜만이었다.

“근데 오클랜드발 왜 자꾸 도착 지연이죠? 30분이 넘었는데.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뇨. 종종 있는 일이에요. 출발하는 공항 대기 시간이나 기상 상황이 늘 바뀌니까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곧 도착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로, 참 친절하시네요. L항공사 승무원?”

여자가 사강의 L항공사 마크가 찍힌 크림색 제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오면 정말 이상해요. 떠나는 것도 아닌데 진짜 떠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막상 공항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보고 싶었단 생각이 들거든요. 공항이란 데가 참 이상하죠? 나만 그런가?”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여행가는 것보단 공항 오는 쪽이 더 설렌다고 할까. 공항에만 와도 꼭 여행 다녀온 느낌이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즐거운 얼굴로 사강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그랬어요.”

사강이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 오는 게 늘 즐거웠거든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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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 회>

누구에게나 소설의 엔딩이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소설의 끝은 책의 중간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소설의 첫 페이지 첫 번째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강에게 『슬픔이여, 안녕』의 엔딩은 소설의 마침표가 끝나는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 사강은 이 책의 번역자가 쓴 책 말미에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때의 아빠처럼 그녀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나보내며, 어린 딸을 떠올리다가 그가 했을지도 모를 마지막 말을.

* ‘슬픔이여, 안녕’, 여기에서의 안녕(bonjour)은 헤어질 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합니다.

사강은 책의 번역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아빠의 옛 이름이었다.

*

정전이 있던 날 아침.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강은 정수와 마주쳤다. 이른 아침이었다. 정수는 사강을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코너를 빠르게 돌아 사라졌다. 하지만 사강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지 못한 척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기장님.”

지난 일 년 동안 정수를 피해왔던 것과 다르게 사강은 조깅복을 갈아입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강은 자신의 아침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침묵 속에서 응시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강이 말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아침 인사를 깊은 침묵으로 응대하는 건 분명 ‘사랑의 역사’의 마지막 장에나 쓰여질 비극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숙한 어른들의 언어인 침묵의 진짜 의미를 아프게 배워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사람은 아주 조금씩 성장해간다. 침묵 속에서 사강은 멈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정수가 엘리베이터에 탄 채 사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에 타지 않았다. 정수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사강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정수가 그곳을 벗어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사강은 멈추지 않았다. 정수 역시 닫힌 문 사이로 자신처럼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는 걸 사강은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굿바이’가 아니어서.

안녕이 ‘헬로우’여서.

다행이었다.

정말.

도쿄 출장에서 돌아온 한 달 후, 지훈은 자신의 오래된 자동차를 중고 매매상에 팔았다. 그의 운전면허는 100일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도시에 사는 남자가 난데없이 자동차를 팔아 치울 때, 그의 삶은 적지 않은 변화로 몸부림친다. 일명 자동차 금단 현상. 차를 팔아 치운 후, 한 달 동안 지훈은 사람이 미어터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수없이 발을 밟혔고, 오전 여덟시의 신도림역에서 새로 산 양복의 첫 번째와 세 번째 단추가 동시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언제나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지훈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빠르게 걸으며 서울 시내를 이동했다. 이제 지훈은 자동차를 버리고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게 하는지 60분짜리 연설 원고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도 발견했고,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았다.

연수원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지훈은 문득 현정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수나 예산 같은 작고 소박한 지방의 터미널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여유롭게 창밖 풍경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범칙금 통지서를 여덟 통이나 받는 초유의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를 팔아버리는 따위의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볍씨왕’ ‘근사미’ ‘금자탑’ 같은 각종 농약 이름이 적힌 야구 모자를 쓴 늙수그레한 노인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올해 사과 작황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지훈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그때, 그 노인에게서 보았던 형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한때 그에게 시간은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사실 그것은 2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던 자신의 애마를 팔아 치우는 것 같은 파격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겼다.

이 모든 게 결국 현정 덕분이었다. 지훈은 이제 끝끝내 미뤄뒀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산의 버스터미널 매점 앞에서 현정에게 온 마지막 문자 메시지에 답을 했다.

6개월째 미루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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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6 회

사강이 소리를 내며 첫 번째 문장과 문단을 반복해 읽고 있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정신적인 수해로 망가진 열일곱 살의 봄을 기억했다.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 ‘세실’처럼 부재하는 한쪽 부모와의 시간이었고, 아빠와 함께했던 짧고도 강렬했던 열일곱 봄방학을 의미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모든 딸들이, 우리가 아는 부모와 딸처럼 살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이 그토록 많은 이혼과 불륜의 아이들이 존재할 리 없다. 두 명의 엄마가 있고, 두 명의 아빠가 있는 아이가 있고, 자신처럼 한 명의 아빠와 두 명의 엄마가 있는 아이도 있다. 지훈처럼 부모 없이 오직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키워진 아이는 누구보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른 죽음을 겪는 탓에 쉽게 조숙해진다.

세상에 수많은 다른 언어가 존재하고,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말이 있듯 우리는 누군가 나 아닌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기약 없는 사랑에 빠지고, 출구 없는 사랑에 넘어지고, 후회하고, 절망하고, 다시 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란 너무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빠 역할에 지독하게 미숙한 남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딸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이가 있었듯 그렇게.

한 번이라도 『슬픔이여, 안녕』을 제대로 읽었다면,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강은 아빠가 보내온 책을 펼쳐보았다. 스페인어가 적힌 책 맨 앞장에는 ‘나의 뮤즈에게’라고 쓴 그의 친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당분간 이 책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도착할 것이란 걸 깨달았다.

집으로 하얀색 택배 상자가 날아온 건 사강의 생일 아침이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사강은 1년 전, 그때처럼 문 앞에 놓인 상자를 힘껏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 상자 속에는 책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문고본 사이즈 정도의 얇은 책일 것이다. 만약 그가 리스본에 있었다면 포르투칼어로 된 책을 보냈을 것이다. 북경이나 청도에 있었다면 중국어로 된 책을 보냈을 것이고, 치앙마이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면 태국어판 『슬픔이여, 안녕』을 보냈을 것이다.

사강은 택배 상자의 투명 테이프를 뜯어내며 여러 도시를 떠돌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골목의 오래된 서점에 들어가 책을 고르고, 그 나라의 지폐와 동전으로 책값을 치르는 모습을 그렸다. 사강은 그가 바람을 가르며 러시아어로 번역된 『슬픔이여, 안녕』을 들고 천천히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자를 열자마자 사강은 크게 웃었다.

상자 안에는 『슬픔이여, 안녕』 한국어판이 들어 있었다. 꽤 오래된 책이었지만 놀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카드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강에게’라고 적힌 생일카드였다.

-내가 네게 얼마나 서툴렀는지 이제는 뼛속까지 느끼지만 그걸 알아주길 바란다면 그것 또한 내 욕심일 테지. 언제나 이 책의 마지막을 네게 큰 소리로 읽어주고 싶었다. ‘안녕’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걸 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알아낸 생의 가장 큰 비밀이었거든. 그래서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고,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다면 네가 좀더 선명히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얘길 하고 싶었어. 내가 후회하는 건 이런 거야. 네게 세상의 파도를 어떻게 헤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못한 것. 망가진 그물을 고치는 법, 연봉 계약서를 쓰는 법, 특히 낚싯밥 던지는 멍청한 놈팽이들에게 제대로 퇴짜 놓는 법. 빌어먹을! 조금 더 큰 카드를 살걸! 써야 할 말이 아직 많은데 칸이 별로 남지 않았다. 난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 터무니없는 멍청이처럼.

이름을 부르거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 생일카드는 ‘사랑한다’거나 ‘축하한다’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멍청이처럼’이란 문장으로 끝나 있었다. 무엇 하나 ‘축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카드였다. 사강은 그 카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사랑하는 내 딸 사강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파리에 있을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얘기한다면, 그 역시 몹시 당황할 것이다.

사강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슬픔이여, 안녕』을 꺼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지훈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책이었고 판본도, 문장도, 모두 다 달랐다.

사강은 느린 속도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은 ‘울었다’란 동사에서 책 읽기를 멈추었고, 햇볕이 좋던 어떤 날은 ‘매우’란 부사에서 독서를 중단했다. 비행을 쉬는 날이면 사강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을 잊은 채 책 속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교차로 어딘가에 멈춰 설 때마다 그녀는 책 속의 문장 하나를 읽었다. 정류장이 바뀌고, 길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그녀는 문장을 채집하듯 그 모든 것들을 가슴에 담았다. 생의 어느 순간,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 것이 있다. 지금 사강에게 그것은 『슬픔이여, 안녕』을 읽는 것이었다.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하다”이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인데, 이 책을 읽은 열네 살 즈음의 사강은 이 문장이 적힌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주저 없이 찢어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첫 번째 페이지는 1년 후 여름방학에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첫 문장이었다. “정말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소설 「무진기행」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로 끝난다.

『거미여인의 키스』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라고 끝나며, 사강이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마지막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사랑해야 한다”로 끝난다.

『슬픔이여, 안녕』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사강은 눈을 감았다.

다만 내가 침대 속에 누워 있을 때면, 파리에 자동차 소리만이 들리는 새벽녘이면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여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 모든 여름의 추억. 안느, 안느! 나는 이 여름을 아주 낮은 소리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자꾸만 불러본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해서 맞아들인다. 눈을 감은 채…….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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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 회

미도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인위적으로 밀어내는 눈물이 아니었다. 허기가 찾아들면 출렁이는 요란한 위의 진동처럼 순수한 내장 반응. 화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도는 아픔을 느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그것은 그날 아침 미도가 결코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영화를 만들던 내내 지독하리만치 운이 없던 대표는 그날 드디어 최고의 배우들을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며 연기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슬픔을 액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순수한 눈물 그 자체였다.

“설마,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인가요?”

그건 질문이 아니라 경고였다.

“영화제라도 출품하시려구요?”

그가 만약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미도는 당장 저 필름을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창문을 열고 그것을 던져버릴 수도 있었다. 대표는 대답 없이 필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뭔 줄 아십니까?”

그는 미도를 바라봤다.

“차장님이라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라고 말하시겠죠. 그게 정 차장님의 프로젝트 제목이었으니까. 전 아닙니다.”

미도는 그의 눈가를 덮고 있는 자잘한 주름들을 바라봤다. 실연을 경험한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특유의 상실감이 그의 눈가와 뺨 사이에도 번져 있었다. 그는 지쳐 보였지만 동시에 평온해 보였다. 격렬한 섹스를 마치고 난 후 남자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고요함이 그의 주위를 감쌌다. 그것은 윤사강의 눈물처럼 미도의 가슴을 이상할 정도로 조여왔다. 미도는 주먹을 꼭 쥔 채 대표를 바라보았다.

“실연이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우습지만 전 제 꿈에 실연당했으니까요. 아마 이 필름을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 프로젝트도, 차장님도, 모두 다 곤란해지겠죠.”

그가 웃었다.

“이걸 찍고 나서 분명히 알게 된 게 한 가지 있어요. 그게 뭔 줄 아십니까?”

대표는 미도를 바라봤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걸 해야 행복하다고 누군가 얘기해주더군요. 이번 일로 그걸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물론 정 차장님도 꿈이 있으시겠죠?”

“네?”

미도가 대표를 바라봤다.

“꿈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대표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런 진지함 때문에 그의 얼굴은 단단해 보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남자에게 그런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 꿈은…….”

말을 멈추고 미도는 창밖을 응시했다. 잔뜩 긴장한 몸에서 미끄러운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미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였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조금씩 풀렸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도는 언제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게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는 걸까. 의사가 꿈이었다가, 디자이너가 꿈이었다가, 별을 헤아리며 지구를 여행하는 천문학자가 꿈이 된 미우를 바라보면서 미도는 꿈이란 철딱서니 없는 무모한 어린애들이나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무모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닐까. 숨쉬기 힘든 세상에 산소를 만드는 게 아닐까. 미우가 성경처럼 반복해서 읽었던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노래처럼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은 꿈을 가진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었을까. 자신은 평생 동안 꿈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미도는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았다. 검은색 화면에 고요히 흐르는 하얀색 이름들을. 그것은 검고 깊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아름답고 처연한 반짝이는 물고기 떼 같았다.

“그날 아침 일곱시, 그곳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이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오전 일곱시의 유령들’ 어떻습니까?”

대표가 동의를 구하듯 미도를 바라봤을 때, 그녀의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울렸다. 그것은 연달아 두 개의 경고음을 울리며 그녀의 맥박을 빠르게 했다. 미도는 엔딩 크레디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윤사강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나 최종 합격했대!

미도는 다음 문자 메시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타인의 슬픔을 착취하는 악당 짓은 그만둬!

-당장 도쿄로 와, 언니!

-합격 기념으로 비행기 표는 내가 예매했어!

사강에게 지중해의 태양은 계절과 상관없이 카탈루냐 지방 남자들의 짙은 눈썹과 눈매처럼 선명하고 뜨겁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태양 아래에선 날씨에 상관없이 팔을 드러낸 가벼운 옷차림으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 비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 사강은 반팔 티셔츠 위에 얇은 카디건 하나를 두르고 호텔 주변을 걸었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은 채 아직 관광객들이 붐비기 전 람블라스 거리의 오래된 서점과 구불거리는 골목들 사이를 사강은 빠르게 걸었다. 바닷가 쪽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가 고프면 꽃을 파는 가게 옆 좌판에서 잘 익은 사과와 망고 하나를 샀고, 티셔츠에 사과를 대충 문질러 먹으며 ‘libro’ 라고 적힌 서점 창가에 보이는 책의 제목들을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가우디의 미니어처 성당을 파는 가게 옆 공원 벤치에 앉아, 남아 있던 망고의 달콤한 과육을 비둘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강이 비행 중 체류하는 호텔 밖을 나온 건 정수와 헤어지고 난 후 처음이었다. 서울은 지금 밤일 것이다. 산책을 하는 동안 사강은 몇 번이고 하품을 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그녀는 오전 열한시, 흑점이 보일 듯 선명한 바르셀로나의 태양 아래에서 지훈에게 빌린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사강은 점심을 잊은 채, 옛날 사람들이 독서했던 고전적인 방식대로 책을 읽었다. 눈이 아닌 입으로 소리를 내며 그녀는 천천히 문장을 따라 읽었다. 책 속의 ‘세실’이 걸음을 멈추면 그녀도 잠시 멈추고, 슬픔에 빠진 ‘안느’가 울면 그녀 역시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슬픔을 느꼈다. 사강은 문장을 입으로 읽고, 귀로 듣고, 마음에 새겼다. 책의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을 구현해내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열아홉 프랑수아즈 사강이 느꼈을 감정을 그녀 역시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것, 슬픔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권태라든지 후회, 아주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비단처럼 신경에 거슬리고 부드러운 그 무엇이 내 위에 도사리고 있어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아주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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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eea 2012.06.22 17: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54회가 빠졌는데요 ..

<제53회>

9부 슬픔이여, 안녕

-언니. 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 비행기 타야 돼. 나리타공항 도착하면 전화할게. 아까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도쿄 티켓 아직도 그랜드 바긴이야! 대박 싸다고! 내일 당장 이곳으로 와. 뒷일은 걱정 말고. 홧팅!! ^^

미우에게 문자가 온 건, 서울로 진입하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였다.

미도는 간단히 답장을 쓰고 창문을 내려다봤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도로는 거의 주차장처럼 변해 있었다.

대표의 전화를 받고 미도의 머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비즈니스로 이용한 자신의 행동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었다. 미도가 변명처럼 우정을 가장했던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다가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미도는 불평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치웠던 것뿐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실질적인 리허설 없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미도는 며칠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모든 것들을 진두지휘했다. 먼저 시네마테크 옆에 있던 유기농 레스토랑의 주인을 만나 식당을 정리하는 대신 리노베이션 하는 쪽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리노베이션 비용의 일정 부분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대신, 이벤트에 필요한 메뉴를 함께 개발하자는 조건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레스토랑 이름이 반드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어야 해요. 이름만 바꾸면 식당 홍보를 위한 기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사람들이 모르던 이곳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거죠.”

오너 셰프인 주인은 미도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건강식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계획대로 미도는 테이블과 의자의 배치부터 전부 바꾸었다. 그곳에서 감정을 고양시킬 비발디의 음악을 틀고, 물기가 많은 따뜻한 음식을 순서대로 내놓는 것 역시 그녀가 진두지휘했다.

정미도가 세심히 고른 것 중엔 레스토랑 벽 중앙에 걸린 거울도 있었다.

빈티지 가구를 파는 이태원 가구 골목을 돌며 미도는 아름답고 우아한 거울들을 사들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거울. 하지만 새벽 옹달샘처럼 선명해서 사람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까지 흡수할 것 같은 얼룩 없이 깨끗한 거울 말이다.

미도는 조찬 모임을 위해 일렬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레스토랑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보게 될 장면들을 수없이 그렸다. 그것은 마음속 가장 아픈 상처를 남김없이 건드리는 것이어야 했다. 자신들의 등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알게 하는 강력한 것이어야 했다.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고, 정지했을 리도 없으며, 세상 속의 연인들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고 밀려간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오전 일곱시가 겨우 넘은 시간. 회사원들이 즐비한 길 위에, 대학가에서나 볼 법한 젊고 아름다운 커플이 유독 많이 지나갔던 건 미도의 섭외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실연당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보게 될 거울 속 연인들의 모습은 미도가 감정을 극점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클라이맥스였다. 정미도의 사업가적 기질은 일정 정도의 죄책감을 증발시켰다. 무엇보다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는 점에 그녀는 고무되었다. 그녀가 세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은 성공적이었다. 정미도의 프리젠테이션 부제 그대로 ‘헤어져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믿기지 않게 긴 제목의 이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 트위터뿐 아니라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던 그때, 이런 아름다운 이별의 예식이 한 번 더 존재했으면 하는 요청이 미도에게 전해져왔다. 놀랍게도 소식은 글로벌 네트워크인 트위터의 특성상,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의 작은 섬에 사는 어느 빨간 머리 주근깨 소녀에게도 전해졌고, 자신이 갖게 된 실연의 기념품과 그것에 얽힌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이일 땐 한 손에 안길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두 팔로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실연의 기념품으로 남았다는 여자가 있었고, 그 개를 자신이 키우고 싶다는 세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자신에게 남게 된 세 장의 버스 카드와 직접 털실로 짠 양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지만 한여름 단 몇 시간 만에 쉬어버렸다는 김밥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이 실패였다는 점과, 그들에게 남겨진 쓸모없는 물건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터무니없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과 함께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쓸모없는 것만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트위터에 이런 문장을 남겼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겨진 실연의 기념품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을 아름답게 추억하자는 합의가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을 만들었다. 수천 개의 리트윗과 멘션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회사는 이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조찬 모임’이 성공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심스레 이번 프로젝트를 회사 내로 끌어들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셈이었다. 방송으로 비유하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아직 정규 방송으로 편입되진 않았지만 앞으로 대박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도의 메일함은 사람들의 편지와 쪽지로 가득 찼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별을 받아들였고, 이제 슬픔을 털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실연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참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받은 위로의 증거들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미도는 자신의 트위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뵈었던 윤사강입니다. 실례이긴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모임에 참석했던 이지훈 씨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미도에게 이 쪽지보다 모임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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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 회>

촛불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지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사강은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지훈을 응시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달 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의 죽음이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보험 조사관이라는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 남자가 이렇게 묻더군요. 할아버지가 복용하고 있던 약을 알고 있냐고. 그 약을 복용량 이상 섭취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고 물었죠. 혼란스러웠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죠. 보험 조사관이 엄청나게 두꺼운 기록들을 내놓으며 제게 말했어요. 복용량 이상의 약을 섭취하는 일, 그걸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부른다고.

여든이 넘은 노인이 자살 따위 할 리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경찰과 보험사, 병원을 어떻게 오고가며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왔어요. 하지만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어요. 할머니 평생의 다짐처럼, 할아버지 역시 당신이 벌을 받아야 손자들의 미래가 열릴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걸까. 이 모든 게 결국 살아남은 형과 나 때문에 벌어진 걸까. 차라리 그때 뒈져버렸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훈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의 눈빛이 촛불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사강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더 많은 촛불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던 초 하나에 불을 붙였다.

“전 늘 이런 상상을 했어요. 너무 자주 상상해서 언젠가 정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사강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촛불 속에 잠긴 방은 기이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가구와 가구 사이에 비어 있던 공간이 사라지고 그 사이에 부드러운 비누 거품이나 증류수처럼 느껴지는 투명한 기포들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공기의 밀도는 지훈과 사강의 이야기로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곳은 방이 아니라 이제 망망대해의 검은 바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서 목적지 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난민들처럼 지훈과 사강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공항에 서 있는 비행기를 바라보다가,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라 사라지는 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낡아서 가운데가 조금 주저앉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건너편 신문을 읽는 남편에게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당신, 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게 뭔 줄 알아? 그럼 남편이 제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는 거예요. 글쎄, 여자들은 임신하면 보통 신 게 먹고 싶지 않나? 오렌지나 귤 뭐, 이런 거? 순대가 먹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당신도 그런 거야? 그럼 전 보고 있던 두꺼운 앨범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어요. 부드럽게, 하지만 아이처럼 투정하듯, 말하죠.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고생했을 때, 헛구역질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 때, 그래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을 때, 아이를 위해 천정에 미리 매달아놓은 호랑나비 모빌을 보면서, 내가 그때 가장 먹고 싶었던 건 기내식이었어, 라고. 언제나 갤리 한구석에 서서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치킨과 비프 밀(meal). 포장된 채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배달되는 기내식.

로모 카메라의 필름을 인화했던 건…… 어쩜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진을 보는 순간 알아버렸어요. 그게 어떤 사랑인지. 이렇게 예쁘고 보기 좋은 연애. 부럽고 청순한 연애. 그렇게 웃는 사람, 그렇게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이겠죠. 이지훈 씨는 좋은 손자였을 거고, 좋은 동생이었을 거고, 좋은 남자 친구였을 거예요. 무엇보다 당신은 무례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소설을 빌려주는 좋은 친구죠.”

사강이 잠시 뭔가 생각에 빠진 듯 말을 멈추었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하는 가장 큰 일이 뭔 줄 알아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서려는 사람들 저지하는 일이에요. 손님. 안전벨트 사인이 켜져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손님,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손님, 지금 화장실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세요, 손님. 어쩜 안전벨트 사인이 켜져 있는 비행기 안에서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은 승객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을지도 몰라요. 아마도.

전 제게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몰랐어요. 비행기 안에선 언제나 두통에 시달렸고 헛구역질을 느꼈으니까. 전 그게 비행 증후군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차 적응에 실패한 탓이라고, 불면증 때문이라고, 편두통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2만 피트 상공 위에서 다리 아래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을 때도, 난 그게 매달 해치워야 하는 그런 일일 거라고, 그래서 일정치 않은 불순한 그 일이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게만 느껴졌었어요. 전 통증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늘 아프고, 늘 괴롭고, 늘 힘들었으니까. 그 시절의 난 거대한 눈물주머니 같아서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으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보다 쉬운 게 아닐까. 타인을 용서하면 거룩한 자비가 되겠지만, 나 자신을 쉽게 용서해버리고 나면 그건 싸구려 자기변명이나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때 전 제가 임신한 줄도 몰랐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아이는. 그 아이는, 한 번도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이가 자궁 속에서 맨드라미 꽃씨처럼 박혀 있을 때, 몽우리 진 꽃처럼 조금씩 부풀어 피어올랐을 때, 지금처럼 어둠을 선명히 볼 수 있는 밤에나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별이 됐을 거라고, 꼬리가 긴 유성이 돼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이 됐을 거라고 믿었죠.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서 어딘가에 있을 거라구요. 날짜 변경선 위로 다시 한 번 날아가고 싶었어요.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오늘이 아닌 어제로 시계를 바꿀 수 있다면 내 영혼이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좋다고 기도했어요. 내 몸 어딘가에 살아 있는 존재가 숨 쉬고 있었다는 걸, 죽어서야 알게 하는 게 신의 뜻이란 걸, 나는 죽어도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절대로!

얼마 동안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죠.

피렌체에서 19세기 그림을 복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선량한 푸른 눈을 가진 백발의 이탈리아 여자 분이었죠. 19세기 그림들은 검열 때문에 여자의 가슴 부분을 덧칠해 지워버린 경우가 많았다더군요. 그래서 그림 속에 있는 귀족 부인들을 덧칠한 물감을 조심스레 걷어내고 닦다 보면 그림 속에 보이지 않던 부분이 드러날 때가 있다고 했어요. 그녀가 제게 속삭이더군요. 그림 속에서 사라진 건 대부분 아기들이라고. 그리고 그림 속에서 사라진 아기들은 예외 없이 희고 풍성한 가슴 속에 파묻혀 여자의 젖을 먹으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고 했어요. 초상화 속의 여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젖을 먹는 아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가슴이 지워진 복원 전 그림은 한결같이 목과 어깨의 각도가 기묘하게 에로틱해 보인다고 말이죠. 그건 제가 아는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였어요.

우린 신이 아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도시 전체가 어둠에 잠겼을 때 지금처럼 가지고 있던 촛불 하나를 밝혀두는 게 전부죠. 어둠 속을 걸어서 이 작은 빛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희망이 걸어올지도 모르니까.”

사강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훈이 그녀의 젖은 뺨과 마른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잃어버린 그녀의 아이를 끌어안는 것처럼 지훈은 그녀의 가슴과 등을 끌어안았다. 사강의 눈물이 앉아 있던 지훈의 종아리에 떨어져 어두운 길을 걷던 그의 맨발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둠이 희뿌연 가로등 사이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햇빛은 이미 커튼 뒤로 바짝 다가와 밝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촛불이 필요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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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회>

타인의 비밀을 듣는다는 건 큰 책임을 요구한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책임, 간직하는 동시에 떠나보내야 하는 책임, 묵언의 서약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 역시 꺼내놓아야 하는 책임. 비밀은 공유하고 나눔으로 짓눌린 무게의 짐을 스스로 덜어놓는다.

‘간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를 마음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다. 비밀은 누군가에 의해 간직된다. 우리가 ‘간직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래된 장롱 ‘속’이나, 복잡한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금고 ‘안’이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렵게 끄집어내야 한다. ‘속’과 ‘안’ ‘곳’에 넣어두는 깊숙한 기억과 물건들.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에 닿아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것. 그 밤, 지훈이 명훈에 대해 얘기한 건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었다.

“형이 자폐아 판정을 받은 건 네 살 겨울이었어요. 치료가 시작된 건 여섯 살 봄이었고, 사고가 난 건 아홉 살 가을 무렵이었죠.”

창문에 반사된 지훈의 검은 실루엣이 촛불에 흔들렸다.

“처음 형의 이상을 발견한 건 외할머니였어요. 형은 집중력이 뛰어나서 비디오를 보거나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앉아 그것만 들여다봤죠. 형은 숫자도 놀랄 정도로 빨리 익혔어요.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 번 본 건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았죠. 형은 4시라고 말하지 않았고, 늘 시계가 4시 11분 10초를 가리킨다고 말했어요.

어른들은 형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오로지 외할머니만 예외였죠. 외할머니는 형의 집중력을 의심했어요. 형의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큰 목소리로 불러도 형은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거든요. 정말 하나도 듣지 못하는 아이 같았어요. 하지만 형이 이비인후과에서 가서 들은 얘기는 빠른 시간 안에 소아정신과로 가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그때 알게 된 거죠. 형의 증세를.

엄마는 그날로 직장을 그만뒀어요. 작가의 야망이 있는 분이셨어요. 하지만 오직 형에게만 매달리셨어요. 형에게 다양한 규칙을 정해준 것도 엄마였어요. 정해진 음식만 먹기, 정해진 길로만 다니기, 정해진 버스만 타기. 엄마는 형이 자신이 만든 규칙 안에서 생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형이 아홉 살 되던 때에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였죠.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어요. 단호하게 ‘이제부터 이 아이들은 내가 맡겠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하셨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외할머니의 검은색 벤츠와 밍크코트는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신뢰를 주었으니까. 자폐증은 유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외할머니는 평생 그것이 당신이 만든 유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외할머니는 천만 원이 넘는 모피코트를 입고서 무거운 십자가를 멘 예수처럼 사셨고, 딸과 사위의 죽음을 평생 애도하셨어요. 누군가 벌을 받아야 형의 미래가 열릴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야 인생이 공평해진다고 믿었어요. 형은 늘 빙글빙글 돌았어요. 세 번씩. 시계 방향으로. 홀수를 좋아했어요. 말도 세 번씩 외쳤어요. ‘나는’이라는 주어를 쓰면서 늘 문어체로 말했죠. 형은 숫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었어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어쨌든 형은 홀수 안에서, 숫자 3 안에 있어야 평화로운 사람이었어요. 강박증 형태로 나타나는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었죠…….”

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걸까? 설령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걸까? 형의 병이 빼앗아 간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따뜻한 공감 능력이었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은 이렇게 반응하겠구나, 라는 자기 인식.

현정이에게 전 이런 얘길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만지는 대신, 웅크린 몸을 조금씩 열리게 하는 따뜻한 포옹을 택하는 대신, 사람들이 보든 말든 꼿꼿하게 서 있는 자기 성기를 꺼내놓는 사람이 내 형이었어요. 팬티를 내리는 그 순간까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괴물같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할 수 있는 건 대낮에 벌이는 자위라는 활극뿐이었죠. 형은 웃으면서 그런 짓들을 저질렀어요. 유쾌한 확신범이었어요. 몸은 자라지만 정신은 자라지 않는 남자가 저지르는 몰상식을 감당하기엔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버렸어요. 결국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병의 증세를 교육 받고 능숙하게 협상하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졌죠.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어요.

형의 세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었어요. 자기 욕망, 자기 욕구, 자기 분노 같은 것들. 형은 타인을 향해 웃는 법을 몰랐어요. 물론 타인을 위해 우는 법도 몰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평생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죠. 그런 인간이니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요. 그래서 전 형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아예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자폐증의 가장 심한 패악이라고 생각했었죠. 이렇게 끔찍한 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유년기는 진창이 돼버렸죠.

그런 형이 언젠가 냉장고 앞에 서서 멍하게 뭔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형은 우유병을 바라보고 있었죠. 칼슘이 빠져나가는 병 때문에 할머니가 먹으라고 윽박지르며 소리치던 그 우유. 우유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걸 자동차 주유구에 퍼붓던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형이 우유병을 열더니 그걸 마시더군요. 처음엔 제가 본 장면이 환각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유령처럼 보였고, 조부모 둘을 연달아 잃은 저 역시 유령 같은 존재였으니까.

형의 얼굴을 묘사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어요. 웃는 듯 우는 듯. 우는 듯 웃는 듯. 그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어요. 눈썹이 없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것처럼 형의 얼굴은 정말 기묘하고 괴상했죠.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우는 얼굴. 아마도 형은 자기 식대로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빙글빙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 안을 돌고, 요양원 복도를 돌고, 돌고, 돌고, 역겨운 우유를 마시면서 다시 빙글빙글돌고 토하고…….

가장 큰 불안은 최악을 예상하는 일이 아니라, 최악도 차악도 뭣도 예상할 수 없을 때 생기게 마련이에요. 형을 이해하는 데 지금까지 제가 들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현정이도 무서웠겠죠. 점점 더 두려워졌겠죠.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요. 외할머니는 형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소원이었지만, 전 외할머니보다 형이 먼저 죽길 매일 밤 기도했어요. 형이 싫어서 몇 번이고 가출했었으니까. 어디론가 닥치는 대로 차를 타고 계속해서 달아났어요. 그 어딘가가 늘 형이 있는 곳에서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였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어요. 그런 거죠. 그런 식이었어요. 아무리 달아나도 돌아오게 되는 멀지만 가까운.

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탐정처럼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고, 쟁취해내는 일이에요.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카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6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철저히 노동 집약적인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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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삶을 관통하는 말은 하기 힘들다.

죄책감은 말의 껍질을 깨뜨리고, 분노와 슬픔은 껍질 안의 말을 짓눌러 부셔버리기 때문이다.

지훈은 사강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전, 한 여자의 얼굴을 목격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히 자신의 비극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면, 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것은 살아남은 아기와 죽은 사위와 딸에 대한 얘기였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녀의 얼굴은 몇 년 씩 지속되는 참혹한 전쟁의 전사자 목록에서 자식을 막 발견한 사람처럼 멍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예외 없이 담담했다. 자신의 비극을 객관화시켜 자기 자신에게 기필코 이해시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도 되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족처럼 느껴지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이야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길어졌다. 그러나 장황해지기보단 오히려 선명하고 더 명료해졌다. 사고는 교통사고로, 교통사고는 교차로에서 일어난 삼중 추돌 사고로, 교차로가 있던 곳은 강릉의 해수욕장으로 가는 국도변 과수원 길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지훈은 그런 이야기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훈련이며 몸부림이라는 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사강이 시퍼런 칼을 든 채 자신의 말투와 목소리에서 슬픔을 잘라내기까지 어느 정도의 불면을 겪었는지 지훈은 상상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담담함이 실은 많은 것들을 눌러 담고 있다는 것 역시 폐부 속 깊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담담한 얼굴로 사강은 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방으로 올라가죠. 우선 발부터 씻는 게 좋겠어요. 제게 비상 약품이 있어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일이면 아플지도 몰라요. 맨발로 걷기엔 힘든 거리였어요.”

사강은 지훈의 발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녀가 호텔 복도를 천천히 걷는 뒷모습은 언제나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사강은 카펫이 깔린 긴 호텔 복도를 맨발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사람처럼 그녀의 발걸음은 불안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너울이 심한 배 위를 걷는 듯 그녀의 몸은 자주 움직였다. 사강의 오른쪽 손엔 굳이 자신이 들고 가길 고집한 지훈의 운동화가 들려 있었다. 지훈은 방문을 여는 사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어둠에 잠겨 서늘해져 있었다. 사강은 자신의 트렁크 안에서 초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한 번에 성냥을 그어 작고 선명한 불꽃들을 만들고, 가지런히 놓아둔 양초에 빠른 속도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방 안의 스위치를 켜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늘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해 예민한 편지를 쓰는 사람처럼 우아한 동작들이었다.

빛이 방 주위에 점점 더 차오르자 방 안의 윤곽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강의 호텔방은 포장지를 막 뜯은 새 물건처럼 깨끗했다. 탁자와 침대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두꺼운 수면용 커튼은 창밖의 풍경을 단단히 차단하고 있었다. 슈트케이스가 서 있는 벽 위에는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빈 콘센트가 보였다.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기, 휴대용 독서 램프의 전선 따위가 가득 꽂혀 있는 지훈과는 대조적이었다. 언제든 짐을 싸들고 빠른 시간 안에 떠나야 하는 사람의 방 같은 단호함이 엿보였다.

“향초 냄새가 좋군요.”

지훈이 어둠 속에 서서 말했다.

“이건 세탁 건조향 향초예요. 오후의 강렬한 햇볕에 말린 빨래에서 나는 냄새가 나죠. 이건 비 온 후에 젖은 땅에서 나는 냄새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레인’이란 이름의 향초예요. 이건 ‘체리 블러섬’. 벚꽃 향기.”

사강이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향초를 여러 개 켜요. 가을에 옷을 하나둘 꺼내 입는 것처럼 향초를 하나둘 꺼내 켜고 있으면, 이런저런 기억들이 중첩되거든요.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오래전의 일, 어느 날엔 어릴 적부터 나중에 일어나면 좋겠다고 소원했던 일들까지……국경을 넘고 하늘을 나는 일.”

사강이 말을 멈추고 잠시 성냥갑 속의 성냥을 그어 향초 하나에 불을 더 붙였다. 동그랗고 빨간 성냥 머리가 검게 변할 때마다 옅은 황 냄새가 지훈의 코끝에 머물다 빠르게 사라졌다.

“냄새를 균일화시키면 세상의 어떤 낯선 장소든 자신의 방이 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그 사람이었어요.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것도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녀는 계속해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짓밟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군요.”

“읽을 수조차 없는 책들이에요.”

사강이 말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책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사람은 없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책이 선물이라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니까.”

“한 번도 이 책을 다른 사람이 보냈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일 거라고. 그 사람이 내게 보낸 거라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믿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래야 덜 비참하니까, 그래야 겨우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책을 보낸 사람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바보 같았어요. 읽을 수 없는 언어라고 생각해서 책조차 펼쳐 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죠?”

지훈이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다.

“졸업식 날 카네이션처럼 보이는 핑크색 장미를 잔뜩 보냈던 사람. 당신이 준 일본어 책을 펼쳐보고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판본의 63페이지에 뭔가 표식이 있을 거예요. 독일어판 마찬가지겠죠.”

“63페이지라면……”

“6월 3일.”

“당신 생일이군요.”

“아뇨. 제 출생신고일이에요. 동사무소에서 직접 신고한 사람만 알고 있는 법적인 출생신고일. 제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죠. 아빠가 태어난 날이랑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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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봤어요?”

지훈의 눈빛이 불빛으로 투명하게 일렁였다.

“아름답네요.”

사강은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강과 지훈이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로비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초들이 있었다. 달걀 껍질처럼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크림색, 크리스마스이브에나 쓸 법한 녹색과 빨간색 양초가 아름다운 불꽃을 가득 피워내고 있었다. 호텔 측이 급히 비품실에 있던 양초를 모두 끌어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얗고 매끈한 양초는 아무리 퍼 담아도 자꾸만 흘러넘치는 어둠의 끝을 잡아 커다란 불빛의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양초들 사이로 고여 있는 어둠은 깊고 아름다운 너울로 울렁였다. 그곳에서 사람은 짙은 그림자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강은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지상의 이런 곳에서 쉬어가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실한 목자처럼 어둠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촛불의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자신의 몸을 녹여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에 대한 경건함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세상의 양초들이 태어나 자라고, 머무는 정류장이 있다면 도쿄의 이 호텔 로비가 될 것이었다. 몇몇 투숙객들은 로비에 나와 사람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겨우 가정에서나 쓸 법한 양초가 대규모 정전을 대비한 호텔 측 준비라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차분함은 호텔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었다. 호텔에선 영어와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예고되지 않은 정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후쿠시마 원자력 누출 사고로 인해 야간에 가동할 수 있는 여분의 전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통은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꼭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성가 같았다. 그들은 촛불 쪽으로 몸을 바짝 끌어당겨 어두운 벽에 반사되는 불빛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에게 반드시 비밀을 고백해야 하는 협약이라도 맺은 사람들처럼.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호텔의 로비는 성당의 고해소처럼 어둠과 빛을 나누고 있었다.

“중요한 걸 잃어버렸나 봐요.”

지훈이 소파 쪽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사강에게 말했다. 남자가 소파 밑으로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카펫을 깔아놓은 바닥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건지도 몰라요. 지갑이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키일지도 몰라요.”

사강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지훈을 명확히 느꼈다.

“집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어요.”

지훈이 말했다.

“그 사람이 열쇠를 찾기 위해서 한참을 헤매는 걸 이웃집 사람이 목격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갔죠. 이웃집 남자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요. 열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였죠? 그는 이웃집 남자에게 현관문이라고 대답했어요. 이웃이 이상하단 얼굴로 이 남자에게 다시 물어보죠. 정말 현관문 근처 맞아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본인 얘긴가요?”

사강이 물었다.

“아뇨. 하지만 이런 곳에 잘 어울리는 얘기죠. 남자의 대답을 들은 이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해요. 잃어버린 열쇠를 현관문 근처에서 봤다면서요? 그럼 그쪽에 가서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여기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자 남자가 이웃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해요. 이봐요, 여기가 훨씬 더 밝잖아요!”

촛불이 집어 삼킨 어둠이 빛으로 산란되며 이들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전 영문학을 공부했어요. 학생 땐 주로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이쪽 일을 하고부터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는 책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보죠. 이 이야기는 ‘대니얼 고틀립’이라는 자폐아를 손자로 둔 심리학 박사가 쓴 책이었는데, 박사가 말하길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무의식적으로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대요. 하지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많다고 충고하더군요.”

지훈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저 남자도 촛불 밑에 있을 게 아니라, 처음 자신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도요?”

“칠흑 같은 어둠 안이라 해도.”

지훈이 대답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기억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잃어버린 열쇠들은 전부 다 그곳에 모여 있더군요.”

“그쪽이 잃어버린 열쇠는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사진 속 여자 분이겠군요.”

“자기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적어도 한 명은 있는 여자였어요. 미국식으로 말하면 우린 모범적인 ‘존과 앤’ 커플이었어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어요. 잃어버린 지갑이나 핸드폰을 되찾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잃어버린 걸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돼요. 그 밤 트위터에 실린 글을 보고 충동적으로 아침 일곱시에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나갔던 것처럼 말이죠.”

“충동적인 결정…….”

“…….”

“전 애인과 헤어지고 일 년 동안 사표를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사강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사표를 쓴 건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어요. 사랑니를 뽑겠다는 아주 사소한 계획 하나 실천하지 못했죠. 1년이 어떤 의미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어요.”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예요.”

“당신도 그랬나요?”

사강이 지훈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힘들어서 차라리 큰 소리로 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녀는 오랫동안 촛불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집에 장미 꽃다발 하나가 왔어요. 별생각 없이 그 꽃을 거꾸로 매달아서 거실 벽에 붙여놨었는데 꽃이 떨어지는 대신 꽃대까지 바싹 마르더군요. 향기 없이, 미라처럼요.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먼지가 쌓이면서 더러워 보였어요. 과거엔 아름다웠지만 향기 없이 말라버린 꽃을 바라보는 일이나, 이미 죽어 버린 사랑을 바라보는 일이 뭐가 다르죠?”

어둠 속에 일렁이는 촛불들이 녹아 이제 조금씩 형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춰 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하나둘 사라졌다. 사강의 눈동자가 막 불이 켜진 촛불처럼 일렁였다.

밤이 깊어갔다. 촛불도 조금씩 빛이 여위고 있었다. 로비의 손님용 소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사강과 지훈뿐이었다. 사강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는 처음 수영을 배운 사람처럼 숨을 참고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부드러운 촛불 때문에 침묵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좋아한 여자가 있었어요.”

사강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이혼하겠다고 얘기한 순간, 그와 헤어졌죠. 아내에게 돌아가라고 한 말이 여자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순간 여자는 엄마를 떠올렸어요. 끔찍하게 미워하던 엄마를. ‘어쩔 수 없다’란 말. 그게 엄마와 자신의 관계라는 걸 깨달은 거죠. 어쩔 수 없이.”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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