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윤희는 비밀스런 얘기라도 꺼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사강을 바라보았다.

“H 말이야. 비행 끝나면 늘 호텔에만 있잖아. 근데 언젠가 파리 라데팡스에 쇼핑 갔다가 ‘세포라’에서 H랑 마주친 적이 있었어. H가 향수나 화장품을 사러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세포라에 온다는 게 넌 상상이나 되니?”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근데 정말 이상했던 게 뭔 줄 알아? 상점 하나를 전부 거덜 낼 모양인지 향초만 잔뜩 사가지고 가는 거야.”    

“향초?”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장 압권은…… 그 산더미 같은 향초가 전부 똑같은 제품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포라 세일 날.”

“나 파리 가, H랑. 이달 말.”

사강이 말했다.

“어쩌니?”

“상관없어. 절대로 같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방법은 찾은 거야? 스케줄러한테 말했어?” 

“응.”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나를 정말 싫어해.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등신!’이란 말까지 했었어.”

“거야, 너무 뜨거워서 발작하듯 한 말일걸? 누구라도 그렇잖아. 감탄사처럼 아프다는 말 대신 욕 나오는 거.”

윤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브리핑하는 시간에 날 보면 아마 뒷목 잡고 경기할걸?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돼. 스케줄 바꿔줄 거지? 넌 적을 많이 아니까 그만큼 상대하기도 쉬울 거야. 그렇지? 난 병가 낼 생각이야.”

사강이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지저분한 퀵턴(Quick turn) 일정을 처리해주면 몰라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내가 너 대신 뭄바이까지 뛴 거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알지? 인도 뭄바이!”

“네 입에서 그 말 나올 줄 알았는데 얼마나 싫으면 이러겠니? H가 나도 진짜 미워해!” 

“설마, 나 만큼이겠니?”

사강이 윤희를 빤히 바라봤다.  

“별일 없을 거야, 내가 기도할게.”

“이게 기도까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아멘!”  

 

                                           *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개적인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윤희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H를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강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불평 없이 해치운다는 말은 그녀가 직업적인 신념처럼 여겨왔던 것이었다. 비행기가 20분 정도 하늘을 날아 순항 고도에 이르자 곧 안전벨트 사인이 풀렸다. 승객들에게 담요와 함께 음료 서비스가 나가는 동안에도 사강은 스스로에게 ‘불평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29찰리 손님-오렌지 주스, 14찰리-여분 담요 한 장 더, 3브라보-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물수건. 15알파-천식이 있는 손님이므로 자리 다시 한 번 확인할 것. 특히 두 명의 ‘2알파’와 ‘2찰리’는 모두 VIP로 파리의 국제회의로 가는 여당 국회위원들이므로 비행 중 불편함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 쓸 것.  

사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장을 한 채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길 기다렸다. 고령의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기내식으로 준비한 비빔밥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것만 빼면 늘 이어지는 보통의 비행이었다.  

마침내 칵핏에서 콜이 울렸다. 저녁 식사를 부탁하는 부기장의 콜이었다. 

“기장님은 라면. 저랑 부기장 한 명은 비프랑 치킨입니다!”

기장과 부기장은 항공법 규정상 같은 기내식을 먹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음식을 먹고 탈이 나게 되면 남은 한 명은 비행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이 라면을 먹더라도 한 명이 봉지 라면을 먹으면, 다른 한 명은 컵라면을 먹는 것이 규정이었다. 사실 라면은 끔찍하리만치 건조한 기내에서 먹을 수 있는 인기 메뉴였다. 

사강은 갤리 안에서 기장과 부기장의 기내식을 따로 준비했다. 특별히 H에게 내갈 기내식에는 따로 서비스되지 않는 로열 밀크티를 만들었다. 그가 차가운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는 정보를 준 건 윤희였다. 사강은 라면에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준비한 냉동 야채가 아닌 신선한 야채를 가득 넣었다. 엄밀히 채소는 기내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었다. 하지만 비행을 책임진 캡틴을 위한 것이었고, 이 정도의 불법은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했다.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잘게 자른 꽈리고추가 들어 있는 야채라면. 사강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라면을 바라봤다.

  

사강이 서비스한 기내식을 먹은 지 10분 만에 한정수의 얼굴에 하나둘씩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벌레에 물린 것처럼 표시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에 H는 별생각 없이 손톱으로 몇 차례 자신의 왼쪽 뺨과 눈 밑 주위를 긁었다.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극심한 가려움이 얼굴에서 목과 오른쪽 어깨로 퍼졌을 즈음, 그는 이제 에어컨이 나오는 조종석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긁은 자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인지했다. 

알레르기의 이유는 알레르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H의 갑작스런 설사와 구토 발진에는 딱 한 가지만 존재했다. 분명한 건, 그것이 사강의 소망대로 단순한 복통이나 운 나쁘게 찾아온 우연한 장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지 1시간 20분 후, H는 기내 화장실 변기 안에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냈다. 그의 온몸엔 갑각류의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 주위는 거대한 선충에 물린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일단 새콤으로 항보실(항공 의료원)에 연락할게요! 일단 저한테 맡기고 좌석에 가서 쉬세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기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H는 더 이상 조종석을 지킬 수 없었다.  

곧 의사를 찾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 안에는 불임 시술에 관한 학회 차 파리에 가는 산부인과 의사와 휴가 차 비행기를 탄 흉부외과 의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먼저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은 H에겐 응급 처방이 내려졌다.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탈수 증세를 막기 위해 소량의 소금과 설탕을 섞어 만든 전해질 용액을 계속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건, 식은땀을 몇 리터쯤 쏟아낸 기장이 초인적인 힘으로 착륙 직전에 조종석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H의 얼굴을 특징짓는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H는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H의 손등에 남아 있던 흉터 위에는 좁쌀 같은 열꽃이 피어 번져 있었다. 사강은 이제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땅콩이나 우유 알레르기는 들어봤어도 고추 알레르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부기장님 말로는 그냥 고추 알레르기가 아니라 꽈리고추 알레르기래요.”

“근데 알레르기가 그렇게 괴상할 수도 있는 거니?”

“알레르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잖아. 조개나 땅콩 알레르기로 죽었단 사람 본 적 있어.”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지. 이런 특별 케이스의 경우,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죽게 되겠지.”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야. 이건 누가 봐도 고의적이지. 이런 경우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사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복수라고 해!”

사강의 눈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그것이 흐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결국 사강이 라면에 넣은 꽈리고추가 문제였다. 

그녀는 고추씨가 지저분하게 라면에 뜨지 않게 하기 위해 통째로 꽈리고추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아주 얇게 다져 씨를 덜어냈다. 제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잔뜩 들어간 라면에서 작은 고추 조각 몇 개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선의였든 비행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불행 속에 몰아넣은 이상, 동료들은 앞으로 사강이 앞으로 쓰게 될 시말서의 종류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시말서도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 

검역되지 않은 식료품을 기내에 반입한 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24회>


“정미도!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뭐, 그때까지 땅에서 스팀 보일러처럼 연기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잿더미에 덮인 그 땅이 꼭 살아 있는 짐승의 뒷모습 같더군. 그 안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거나, 하이힐을 신은 수백 그루의 시체들이 묻혀 있을 걸 생각하면 끔찍하긴 했지만, 뭐랄까.” 

미도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듯 잠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장엄했어. 장엄하고 압도적인 서사시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지. 얼마나 큰 슬픔인지 전염성이 강해서 나도 생면부지인 사람들에 섞여서 넋을 놓고 울고 있었거든. 모두 하얀 꽃을 사들고, 떠나간 친구나 가족들의 사진을 들고, 눈물을 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꼭 뉴욕이란 도시의 가장 슬픈 배경 음악 같았어. 잿더미 위에 수북이 쌓인 꽃들은 시들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처연한 느낌까지 주더라. 뭐랄까, 시에라리온 같은 아프리카에선 다이아몬드 하나 때문에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죽어간 적도 있는데, 그곳에선 구체적인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아마 아프리카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근데 내가 직접 목격한 뉴욕 그라운드 제로의 슬픔은 너무 구체적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어.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의 친구가, 그 친구의 친구들이 공부하거나, 일하고, 삶을 개척하며 살아간 도시였으니까. 그게 내가 처음 본 뉴욕의 이미지야. 무너지거나 상실된 사람들의 땅.”

“그래서?”

“그래서 도쿄에도 가보고 싶어.”

미도가 말했다.

“위로해주고 싶어서?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언니가 마더 테레사니?”

“위로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위로받고 싶어서겠지.”

미우가 심란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나지막이 긴 한숨을 쉬더니, 뭔가 새롭게 다짐하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언니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구나.”

“무슨 일은?”

“아냐, 분명히 있어. 말 안 할 거야?”

“비행기 표 값이 너무 싸잖아!” 

“너무 일차원적이야.”

“너 같은 다차원적인 인간이랑 살다 보니 더 이렇게 된 거야. 한 번도 도쿄에 못 가봤으니까 이번이 좋은 기회야. 너무 싸!”

“싼 만큼 위험하겠지.”

“이봐, 젊은이. 모험가 정신 좀 키워봐. 면접관이 원하는 건 그런 거야.” 

“어떻게 9․11 테러에서 그런 결론이 나와?”

“너한테는 없는 현실 감각이지.”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

“가르친다고 생기지도 않아! 도쿄 갈 거야, 말 거야? 2인용 끊어, 말아? 삼 초 안에 대답해.”

“방사능에 피폭되면 어떡해?”

“현실 감각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일 초.”

“지진 나서 건물 무너지면?”

“이 초 막 지나갔다.” 

“신문 보니까 편의점에 물건도 거의 없고, 생수 사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던…….”

“일 초.”

“가자, 가!”   

“혼자 죽긴 너한테 투자한 돈이 너무 아깝잖아. 너한테 효도 받을 날을 꿈꾸면서 투자하는 건데. 너는 주식, 부동산, 금 통틀어서 투자 대비 효용성이 가장 꽝이야.”

“너무해!”

미도가 크게 소리 질렀다.  

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세 번 울렸다. 

조용히 안 하면 당장 벽을 부셔버리겠다는 옆방 고시원 총무의 날카로운 경고음이었다. 


*


며칠 후, 미도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 한 통이 떴다. 


―이 형제, 캐면 캘수록 엄청나게 흥미롭던데요? 지난 이십오 년간 보험회사 최고의 악성 고객이었을 듯. 2008년에는 거액의 생명보험 두 개를 연달아 탔어요. 금액을 알고 나면 아마 과장님이 직접 사귀고 싶어질걸요? K 생명회사에 최고 베테랑 보험조사관이 이 사건을 직접 맡아 삼 개월 동안이나 밀착 조사했었습니다.   


셜록이 보낸 메시지였다. 

미도의 이메일에는 ‘이명훈 파일’이란 제목의 메일이 도착했다. 

이명훈과 이지훈. 이름만 봐도 이들이 혈연관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미도는 천천히 이지훈과 이명훈의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이들 형제는 불과 십육 개월 차이로 태어난 연년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평탄하게 살아온 듯 보이던 이지훈이 실질적인 고아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는 건 여러모로 미도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지훈이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린 시절 그와 형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나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부모 없는 고아의 삶이 어떤지 미도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가족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는 건, 그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셜록이 알아낸 자료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일 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명훈은 팔 년 만에야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그것은 나이가 다르지만 일정 기간 명훈과 지훈이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그는 주소지를 바꾸며 무려 네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다. 명훈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에 들어간 건 누군가의 확고부동한 의지로 이루어낸 기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다섯 달 만에 쫓겨났다. 그는 곧 중학교를 자퇴했다. 교무 일지에 의하면 이명훈은 수업 중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벌떡 일어나 빙글빙글 도는 이상행동을 자주 했다. 

그가 중학교를 자퇴한 후 주소지가 한 번 더 바뀌었다. 명훈은 성북구에 있는 장애인 학교에 들어갔다.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전문적으로 코칭하는 특수 교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미도는 이메일을 읽다가 놀라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놀랍게도 명훈의 최종 학력이 전문대 중퇴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은 겨우 삼 개월 정도만 다녔을 뿐이지만 장애인 학교를 다녔던 아이가 대학교 교육까지 받게 된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메일의 거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이들의 경제적, 정서적 지원자가 사 년 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는 기록이었다. 보험조사관이 조사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이에겐 끔찍한 재난이었지만, 어떤 이에겐 영원한 휴식을 의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먼저 외할머니가 죽었다. 

한 달 후 외할아버지가 죽었다.

모두 명훈의 대학 중퇴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이지훈이 대학을 졸업하기 일 년 전이었다. 조부모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이지훈은 사망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이명훈은 현재 파주의 한 전문 요양 시설에 있었다. 이지훈은 매주 토요일 일정한 시간에 형을 찾아간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매주 형이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사 가지고 가기 때문에 요양원 최고의 인기남이에요. 돈 많고 외로운 그곳 노인들 모두의 친손자인 셈이죠. 


셜록의 이메일은 ‘친손자’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채 끝나 있었다. 

미도는 컴퓨터를 닫고 사람들이 퇴근한 어두운 건물을 지나 버스 정류장에 섰다. 

소나기가 내린 후 서울의 도심은 여기저기 젖어 있었다. 거리의 건물과 나무들은 본래의 색보다 더 진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빈 버스 안에서 미도는 자신의 등에 감도는 희미한 불빛을 느꼈다. 비가 내린 후라 기온은 떨어졌고, 하늘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에 축축이 물든 도시는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힘들어도 웃어라,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긴다, 슬퍼도, 싫어도 좋은 말만 해라. 그래야 그 말길을 따라 좋은 일들이 걸어 들어오는 거니까.”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아빠는 삽다리 근처에서 택시 운전을 했다. 

미도는 그때의 두려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나보다 약한 존재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고 만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첫 번째 생리처럼 그것은 낯선 통증을 동반한다. 그녀는 지훈을 생각하다가, 창문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도가 탄 심야 버스가 올림픽 대교 위를 들어서려는 찰나, 거대한 다리의 철골 아치 사이에 걸린 보름달이 미도의 눈에 꽉 차올랐다. 도시의 고층 건물과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을 가뿐히 밀어내는 눈부시게 환한 보름달이었다. 미도는 그 달을 바라봤다. 버스의 창문을 열자 물기 많은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감겨왔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달리는 버스에 부딪히는 단단한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느꼈다.  

미도는 핸드폰을 열어 열한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이지훈의 전화번호를 바라보았다.

버튼만 누르면 현정의 사진과 셜록의 이메일 속에만 존재하던 그 실체와 직접 연결될 것이었다. 버튼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영 점 일 초의 시간이면 지구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의 전파가 그를 자신과 연결시킬 것이었다. 

그러나 미도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 돈이 투입된다는 아이러니가 미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미도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미도는 눈을 감고, 이 밤의 달빛을 처연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묘한 일이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이지훈 한 명만을 위한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더구나 돈을 받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적 없는 그녀가 위험 부담을 끌어안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아빠 말, 정말 맞나 봐. 기분이 정말 이상하거든.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녀는 창문 위에 뜬 달을 보며 아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미도는 핸드폰을 입고 있던 모직코트 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휴대전화에 닿았던 그녀의 검지 끝이 저릿해져왔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21회>

*


정현정은 미도의 고객 리스트 중 단연 최고의 고객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 ‘올해의 개매너’라는 우스꽝스런 상이 있었다면, 단연 그녀가 반짝이는 트로피를 받고 영광의 우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현정의 사진을 봤을 때, 미도는 그녀가 남자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얻을 거라고 확신했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공무원 연금이라니! 남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직업이었다.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만큼 학벌도 부모 재력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던 남자들은 한결같이 당황한 목소리로 미도에게 불쾌함을 표현했다. 

“뭐, 이런 날라리 같은 여자를 봤나!” 

“소개팅에 자주색 망사 스타킹 신고 나온 거 알아요? 정말 교사 맞아요?”

미도는 고객의 불평 전화에 시달렸다. 회사 웹사이트 게시판에는 태도가 불량한 악성 고객으로 현정의 실명과 학교 이름이 등장해 회사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결혼정보회사 사람들은 그런 악성 고객들에게 제각각 암호 같은 이름을 붙였는데 현정의 별명은 ‘십 분’이었다. 그녀는 십 분 안에 자신이 만났던 모든 남자들을 퇴짜 놓았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문자메시지에 보낸 하트가 너무 많아서, 귓불이 작아서, 코가 커서, 입술이 두꺼워서, 구두 색깔이 불길해서 그녀는 남자를 퇴짜 놓았다. 귓불이 작으면서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데다가 구두 색깔까지 불길한 남자가 나타난 것도 기적이었지만, 모든 걸 기억하고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는 현정의 기억력에 미도는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그것은 정현정이 백 일 안에 성취한 결과물이자, 정미도가 몇 년 동안 구축했던 백 건이 훌쩍 넘는 커플 메이킹 성과들을 한낱 과거의 유물로 추락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미도가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었던 클레임은 들어온 지 오 분 만에 남자가 자신은 머릿속에 난 ‘가마’가 두 개라 결혼을 또 한 번 할 팔자라고 장담했던 대학병원 흉부외과 의사 한 사람뿐이었다. 현정은 그 얘길 하다가 “그 남자가 직접 머리를 까더니, 가마 두 개를 보여주더라구요, 글쎄. 너무 웃기고 황당하지 않아요?”라고 말해 미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 일 이후, 미도는 현정이 모든 일을 고의적으로 망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미도는 그제야 현정뿐만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실연 이후, 미도가 결심한 건 너무 일만 하느라 친구를 등한시하진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미도가 선택한 전략은 자신의 고객을 최고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일이 고객들의 이름과 취미를 기억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엔 손쉬운 집단 문자 대신 일일이 전화를 하거나 손으로 안부를 묻는 카드를 보냈다. 진심을 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절실할 때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미도의 친구들은 그러므로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해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좋은 성과와 인센티브로 돌아왔다.  


이 년 전, 정현정을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시킨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미도는 회사 신원확인팀의 막강한 정보력을 이용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던 현정의 어머니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이유로 이들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가히 무궁무진했다. 가령 아파트가 좋은지 빌라가 좋은지 오피스텔이 좋은지 같은 개인적인 주택 구입 성향과 어떤 회사의 어떤 차종을 좋아하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도 쉽게 밝혀낼 수 있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보석을 선택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온몸에 달고 있었던 그녀의 모친은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업자)였다. 무엇보다 미도의 눈에 확실히 띄는 대목이 하나 존재했다. 

그녀가 번 가장 큰 재산은 인상적이게도 고시원과 도시형 생활주택을 통해 나왔다. 교통이 좋고 상권이 발달한 역세권에는 종종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녀가 직접 개발한 전국 고시원과 원룸의 숫자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미도가 머물고 있던 ‘승리 고시원’의 건물주가 실은 현정의 엄마라는 사실 역시 현정과 미도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인맥을 중요시하는 정미도에게 그것은 아주 확실한 인증 마크였다. 게다가 결혼에 관련된 엄마와 딸의 갈등에 대한 논문이 있다면 미도는 꽤 훌륭한 발제자가 될 것이었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현정은 “안녕하세요. 커플매니저 정미도입니다”로 시작하는 미도의 전화를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통화 때문에 미도의 전화번호는 현정의 휴대전화에 스팸 번호로 즉각 분류되었다. 삭제가 아니라 스팸 번호로 등록함으로써 다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정현정은 주관이 명확한 단호한 여자였다. 

현정이 갑자기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전화한 건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예상 밖이었다. 

현정의 전화에 한동안 미도는 심란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현정이 그날, 이승철의 <네버 엔딩 스토리>가 울려 퍼지는 독일식 호프집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SOS’를 쳤을 때, 미도는 그녀를 도와 환상의 커플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꼭 직업윤리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전 제 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길 원해요.”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미도의 관심이 아니었다. 바람을 피웠건, 권태기 때문이었건, 남자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았건 개인 사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헤어진 남자를 어째서 다시 찾고 싶어 하는지 아는 건 중요했다. 미도는 결국 “왜 다시 만나고 싶어 하죠?”라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현정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야만 자신도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현정은 자신이 퇴짜 놓은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뻔뻔함과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다가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손수건이 부족할 정도였다. 실연 앞에서 그녀의 눈은 애처로울 정도로 충혈되었다. 미도는 현정에게 완벽히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상상력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드물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몰래카메라가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건, 그것이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 고객들에게 가장 먼저 심어주어야 할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종류의 속임수였다. 

‘이 사람은 돈을 내고 만난 사람이 아니라 기막힌 우연이 만들어낸 운명이다’라는 판타지. 그것이 상황을 컨트롤하는 사람에 의해 조작됐다 해도, 그 안에는 일정 정도의 우연이 개입한다. 드라마 작가는 그것을 방송에서 보여주지만, 미도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진짜로 만들어냈다.

“현정 씨는 운이 참 좋네요.” 

“네?”

“전 타고난 기획자거든요.” 

미도가 웃으며 현정을 바라봤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친구를 고객으로 둔 커플 매니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이승철의 목소리가 절절하던 그날, 현정과 함께 듣던 <네버 엔딩 스토리>는 그런 자신들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치는 응원가였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