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 

   

 사강은 자신에게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정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수를 의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얼마든지 피렌체로 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도쿄라면 미주나 유럽을 돌며 셀 수도 없이 경유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화폐 단위가 제각각인 나라를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한정수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사강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된 소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읽을 수도 없으므로 책이라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웠다.  

 사강은 이 소설들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기로 결심했다. 같은 책이었지만 표지가 다르고 장정과 판본도 제각각인 다른 책이었다. 결국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사강은 이 책이 영화제 주최 측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모 카메라의 주인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누군가 실연의 기념품을 ‘대신’ 처리해준다는 것이었지만, 반지나 목걸이처럼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낡고 생채기 많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누구도 가져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로모에 필름이 들어 있는데, 혹시 아셨어요?”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공항 인근 현상소 직원이 사강에게 말했다.

 “필름이요?”

 “어떻게 할까요? 인화해드려요?” 

 사강은 커다란 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많은 가족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아기와 아빠, 아기와 엄마, 아기와 가족들…… 그리고 성장한 채 웃고 있는 또 다른 가족들…….  

 “이거, 꽤 오래된 필름 같네요. 적어도 몇 년은 된 것 같은데요.” 

 현상소 직원은 로모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사강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 산 35밀리미터 필름 세 통을 그녀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7, 8년은 된 것 같은데요?”    

 “7, 8년?”

 사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혹시 필름을 인화하면 필름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건가요?” 

 “필름이야 당연히 돌려드리죠. 필요 없으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사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상소 창밖을 멍하게 바라봤다. 

 카메라 주인은 이 로모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필름은 우연히 이곳에 남겨졌을 것이다. 사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 있는 필름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방치하진 않았을 테니까. 누구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찍혀 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남기진 않는다.  

 사강은 긁힌 자국이 남아 있는 카메라의 낡은 플라스틱 바디를 바라봤다. 단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것은 충분히 낡아서 별 쓸모 없어 보이는 카메라였지, 카메라 안에 든 필름이 아니었다. 필름 속 사진은 시간이 기록된 내밀한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일기장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을 리 없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이 필름을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의 머릿속에 든 첫 번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의 주인을 찾기 위해선 사진부터 인화해야 했다. 사진 속에 필름 주인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가 올라온 트위터를 역추적하면 카메라 주인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스물두 명이었다. 추적이 가능한 숫자였다. 카메라 주인이 트위터 프로필에 얼굴 사진을 첨부한 사람이라면 찾는 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인화해주세요.”

 창밖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30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따뜻한 녹차라도 드릴까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사강은 주인의 시선을 좇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에 젖어 연두색이 한껏 도드라진 버드나무 사이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버드나무를 미친 여자가 머리 푼 것 같은 모양이라 불길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사연 많은 여자의 긴 머리칼을 감싸는 오색 빛깔 머리띠 같았다. 

 자기 몫의 사랑이 이미 죽어버렸는데도 실연의 기념품들은 왜 이리 유난스레 반짝이는 걸까. 사랑이 사산된 후 남은 실패의 증거물인데도 말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속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차 때문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늑골 부근까지 통증이 뻐근히 내려왔다. 

 “예상대로 문제가 있는 필름이었어요.”

 주인이 심란한 얼굴로 사강을 바라봤다.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필름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지금 보니까 몇 장 빼면 대부분 상했어요. 보관하기 힘든 사진들일 텐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이 사강에게 되묻고 있었다. 

 사강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사진들을 손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 길게 늘어선 양떼구름과 하늘이 반쯤 지워진 풍경, 뿌옇게 사라진 오솔길, 학교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흐릿하게 번진 남자의 희미한 얼굴…… 이 사진 속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사진 속 연인이 궁금해졌다.  


 저녁으로 간단히 야채카레를 만들어 먹은 후, 사강은 몇 시간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모 카메라의 특징을 감안한다 해도, 사진들은 심하게 색이 바랬다. 가장 치명적인 건 누군가의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이었다. 사진의 구체적인 ‘상’은 대부분 날아가고 추상적인 색깔과 형체, 실루엣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나마 구체적인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사강이 고심 끝에 골라낸 아홉 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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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


 “아내는 요리사야.”  

 프라하의 한 호텔에서 트렁크를 열며 어느 날 정수가 말했다. 

 “망해가는 레스토랑의 요리사. 곧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지.”

 ‘망해가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는’ 같은 파멸의 문장들. 사강에겐 좋은 징조였다.

 “늘 건강식을 고집했어. 아마도 그게 그 레스토랑이 망해갔던 첫 번째 이유였을 거야. 칼로리가 낮은 음식이 건강에 도움이 될진 몰라도 대부분 맛은 없으니까. 나와 다르게 낭만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지.”

 좋은 징조는 점점 불길한 모습을 띠며 사강의 눈앞에 다가왔다. 정수는 잠시 뜸을 들이듯 트렁크 안의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기억나는 유별난 요리 이름이 하나 있는데…… 아마 ‘내일의 달걀찜’이라고 이름 붙인 요리였지. 달걀찜에 저민 닭고기가 들어 있는 괴상한 요리였어. 난 그걸 요리계의 근친상간이라고 놀려댔고.”

 심지어 정수는 아주 조금 웃기까지 시작했다. 

 “아마 지금 내가 그 식당 이름을 얘기한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못할 거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이름의 식당일 테니까. 오전 일곱시부터 문을 연다는 것도 이해하기 쉽진 않지. 이른 아침부터 산을 타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위한 식당도 아니었거든.”  

 사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건 아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사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짐 정리를 좀 해야겠어. 탁자 위에 참치 샌드위치가 있는데 좀 먹지그래?”

 정수는 탁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사강에게 말했다. 사강은 말없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날 휘장이 달린 그의 캡틴 제복은 활짝 열어놓은 옷장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호텔의 침대 정중앙에 커다란 트렁크가 누워 있었고, 젖혀진 트렁크의 짐들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침대 위에 널려 있었다. 정수는 트렁크 어딘가에서 계속 짐을 꺼내고 있었다. 속옷이나 간단한 상비약이 아니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물건들, 가령 보통 사람들의 여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절대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나온 대부분의 것들은 오랜 시간 햇빛에 바짝 말린 건어물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옷이 하나도 안 구겨지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비결이라도 있어요?”

 사강이 정수의 트렁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트렁크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간 그의 옷들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채 가방 밖으로 가뿐히 빠져나왔다. 속옷과 양말, 손수건과 검정색 피케셔츠가 나왔고, 음악 잡지와 항공 관련 잡지들이 나왔다. 그는 은색 스틸 액자에 넣은 그림과 사진을 꺼냈다.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사강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이 모든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의 트렁크에서 마침내 접어서 사용할 수 있는 베개가 나왔을 때, 사강은 정수가 벌이는 이 놀라운 ‘트렁크 쇼’의 클라이맥스를 보았다. 텅 비어 있던 호텔의 옷장은 서울에서 입던 익숙한 옷들로 채워졌고, 호텔 매뉴얼북이 놓여 있던 창가의 테이블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놓인 개인 탁자로 변신했다. 욕실에는 호텔용 세면도구가 아니라 그가 늘 사용하는 칫솔과 치약 비누가 나란히 놓였다. 

 사강은 모든 일이 특별한 규칙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수는 호텔을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처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가져온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모든 걸 트렁크 안에 넣고, 필요한 것만 꺼내 쓰는 사강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세계를 떠도는 직업 여행자의 삶이 일상이 되려면 바로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집을 옮겨놓듯 호텔을 사유화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사강은 불현듯 깨달았다. 일 년의 반 이상을 낯선 도시의 호텔 방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고향 집의 익숙한 풍경과 냄새를 복사해 그곳에 가져와야 한다는 걸, 한정수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야만 때때로 밀려드는 노스탤지어의 공습을, 칼끝처럼 와 닿는 낯선 언어와 불면의 고통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벌어져 채워지지 않는 뒤바뀐 오전과 오후의 시차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여행자의 운명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여행의 기술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곳과 저곳을 떠돌며 호텔 노마드로 생활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이걸 쓰면 방콕이든 델리든 뉴욕이든 동일한 공기를 만들 수 있어. 네가 좋아하는 향을 기억하고, 쉽게 잠들었던 냄새를 기록하는 게 중요해. 낯선 공기 속에서 편하게 쉬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수가 샌드위치를 들고 있던 사강에게 내민 것은 옅은 녹색 향초였다.

 “이름이 재밌어. ‘비 온 후 이끼’거든.”

 정수는 향초를 삼나무 숲에 비가 쏟아진 후, 나무 밑동에서 올라오는 이끼 냄새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조향사가 만든 인공적인 조합일 테지만, 사강은 향초가 구현하는 세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동물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젖은 흙냄새, 비 온 뒤 오래된 삼나무 숲으로 부는 바람의 냄새, 숲 속의 이끼들이 내뿜는 산소의 냄새. 

 냄새의 균질화. 

 호텔 침대에서 나는 옅은 세제 냄새와 막 청소한 카펫에서 나는 옅은 소독약 냄새를 없애고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로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기술. 

 사강은 향초가 자신이 누워 있는 작은 공간을 자신이 상상했던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눈을 감으면 천년이 넘은 삼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비에 젓은 융단처럼 폭신한 이끼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사강은 늘 같은 브랜드의 향초를 피웠다. 


 “윤사강, 당신은 내일 죽는다면 뭘 하고 싶어?”

 뉴욕의 호텔에서 정수가 다시 짐을 풀며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거예요. 정말 맛있는 걸 침대에서 먹고, 먹여주고, 다시 잘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타처럼 날 연주해주길 원해요. 기왕이면…… 그래요. 지미 헨드릭스가 좋겠네요."

 “난 지미 페이지 쪽이 더 좋은데.”

 “마지막 섹스는 혁명가처럼 하고 싶어요.”

 “지미는 27살에 죽었어. 체 게바라는 40살도 못 돼서 죽었고.”

 “당신은 이미 마흔 살이 넘었어요.”

 “난 혁명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요절했어. 내 친구들도 그랬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봤다. 정수는 잘 때도 풀지 않는 손목시계를 습관처럼 다시 바라봤다. 

 “울란바토르 일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지? 지금도 알고 싶어?”

 정수가 물었다. 사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날, 나는 몹시 피곤했어. 48시간째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지. 그래서 비행기에서 승무원들을 향해 난동을 부리는 그 작자들을 도저히 참고 봐줄 수가 없었어.”

 항문에 금괴를 끼어 밀수하려던 정신 나간 남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사강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탔던 비행기가 정수가 몰던 보잉 747-400이었고, 그가 고집한 원칙주의 때문에 사상 최대의 금괴 밀수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건 그녀의 관심과 별개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의 내막은 곧 이륙을 앞둔 L항공사 비행기에 울란바토르 경찰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승객 중 몇 명이 긴급 체포되었고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바로 서울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사업상 계약을 들먹이며 비행기가 자신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듯한 법무법인의 이름을 대며 소송할 것이란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는 그들을 단 1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즉각 이륙을 결정했다. 

 사강은 신문에서 울란바토르 경찰들에 의해 체포된 채 끌려가는 밀수업자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들이 숨겨 가려던 금괴가 고스란히 그들이 앉았던 비행기 좌석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보았다. 뉴스는 조종사가 정시 출발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날, 울란바토르에 넘겨졌을지도 모를 금괴는 대한민국 세관에 의해 안전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내 오메가 알지? 두 도시의 시간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편리한 기계지. 정시에 울란바토르를 떠나면 인천에 새벽 다섯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어.”

 “잠깐만요. 새벽 다섯시라면…….” 

 “오전 다섯시는 조종사들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야. 택시를 타도 관리팀에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이거든. 난 집까지 편하게 가고 싶었어.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한 날이었거든.”

 “설마! 모든 게 택시비 때문이었다구요?”

 사강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일이지.”

 “그 일로 회사에서 주는 상도 받았잖아요.”

 “받기 싫다고 설명하는 게 훨씬 더 귀찮았으니까.”

 “상금도 있었잖아요.”

 “공항버스 대신 택시 탈 정도였어.”

 “맙소사! 그 일로 당신의 원칙주의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부기장을 세 명이나 봤어요.”

 마침내 사강은 그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정수는 잠시 사강을 바라보더니 웃고 있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의 옷깃을 여미고 목덜미와 깊게 팬 쇄골에도 부드럽게 키스했다. 셔츠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푸는 정수의 손길이 느껴졌다. 브래지어의 와이어를 천천히 쇄골 쪽으로 밀어 올리는 동안 그녀의 젖꼭지에 그의 혀끝이 살짝 와 닿았다. 

 사강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목을 감싸고 있는 혈관을 따라 뛰고 있는 맥박을 느꼈다. 맥박이 뛰는 지점을 바라보는 동안 손바닥의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열다섯 살에 새겨진 상처는 이제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사강은 오래된 흉터를 뚫고 맥박이 뛰는 근처까지 자라난 생명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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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사강은 그의 얼굴과 팔을 젖은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닦았다. 그녀는 바짝 말라 보풀처럼 일어난 그의 입술에 바셀린을 바르고, 티스푼으로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사강은 룸서비스로 해열제와 가습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가습기를 올려놓았다. 가습기의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항균 마크가 적힌 분무를 통해 습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강은 습기가 건조한 호텔방 모서리를 따라 골고루 흐르도록 분무기를 조절했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받아둔 ‘응급처치 119’ 애플리케이션을 찾아냈다. 그녀는 알레르기 환자의 급작스런 발진과 발열 상황에 관한 카테고리를 읽다가, 고추와 굴 알레르기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찾아냈다. 

 H의 손등에 피었던 붉은색 반점도 이전보다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 낮게 웅크리고 앉아 그의 가슴에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갖다 댔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그의 심장 박동을 체크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호흡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복잡한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가는 통로들을 그려보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며 북태평양의 아득한 창공을 날고 있는 고요한 밤, 사강이 들었던 보잉 747-400의 엔진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녀는 다시 그의 심장 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행기 엔진 소리처럼 들리던 이명은 그의 심장 혈관과 연결되어 있을 심장박동 소리와 포개어졌다.

 누군가 문을 열고 틀어놓은 듯한 음악 소리가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is love,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존 레논의 <러브>였다. 사강은 끊임없이 사랑이 반복되는 레논의 속삭임을 들었다. 보통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는 이제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긴장감 때문에 뻣뻣해 보였던 얼굴과 눈가엔 순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게 구부러진 속눈썹은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천진함을 드리웠다. 호흡이 일정해졌고 가팔랐던 들숨과 날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사강은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봤다. 사강은 가습기에 물을 한 번 더 채웠다. 모든 게 채워지고, 제 위치에 돌아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정수의 침대맡에 젖은 이끼 냄새가 난다는 향초를 켰다. 그것이 그의 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건조한 기내에 시달린 사강의 눈은 이제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뻑뻑해져 있었다. 그의 몸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본 후,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24시간 째 긴장 속에 깨어 있던 그녀의 눈꺼풀은 어느새 감겨 있었고, 그녀는 정수의 방에 있던 하늘색 패브릭 소파 위에서 잠들었다. 꿈 없는 평온한 잠이 그녀의 온몸을 담요처럼 덮었다.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뒤척임 없이 잤다. 때때로 어떤 것에 깊게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천천히 닫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켜놓은 향초의 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사강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호텔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미몽 중에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그녀가 옅은 꿈속에서 벗어나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사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그가 소파 옆에 앉아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열이 있군.” 

 H가 말했다. 

 “계속 자는 게 좋겠어.”

 테이블에는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 


 한정수가 모는 보잉 747-400은 여객기는 물론 화물기로도 사용되는 CARGO 기종이었다.

 그는 때때로 평상복을 입고 승객으로 탑승해 앵커리지나 스톡홀름 같은 중간 기착지까지 날아가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로 갈아타고, 화물을 실어 날랐다. 레일이 깔린 화물칸 가득 공업용 소금과 구리나 망간을 싣고 도쿄로 향했고, 칠레에선 냉동육과 와인을 싣고 상하이로 날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살아 있는 수백 마리의 닭들을 화물칸에 운송하기도 했는데, 수면 마취제의 양을 잘못 판단해 주사한 탓에 비행 중간에 깨어난 닭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인도 남부의 고아에서 온 코끼리를 화물칸에 실은 적이 있었어. 오사카에 새로 생기는 동물원에 보내질 코끼리였지.”

 그가 운행하는 747-400의 어퍼 덱(upper deck)에는 모두 6개의 좌석과 승무원들이 쉴 수 있는 벙크가 있었다. 비행기로 코끼리를 수송하느라 긴장했던 조련사는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이르자 좌석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조련사는 커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바짝 마른 인도 사람이었는데, 너무 말라서 벨트 없이는 어떤 바지도 입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수는 그가 습관처럼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수시로 화물칸으로 연결된 비상계단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취시킨 코끼리의 상태를 살피는 그의 눈은 벵갈 호랑이처럼 매섭게 반짝였다. 

 정수는 정해진 시간마다 부기장과 교대해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벙크에서 쉬는 대신 화물칸에 잠들어 있는 코끼리를 보기 위해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따뜻한 지역에서 온 코끼리라 온도와 습도가 특히 중요했다. 습도를 맞추기 위해 조련사가 코끼리 옆에 놓은 찌그러진 은색 물주전자가 그의 눈에 보였다. 코끼리는 조종석 가장 가까운 구역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화물칸을 천천히 걸어 코끼리가 있는 구역까지 근접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믿을 수 없이 커다란 덩치의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있었어. 태국에서 본 비스듬히 누워 있는 불상처럼. 코를 말아 감고 잠들어 있었어. 코끼리는 사람 앞에선 잘 자지 않는다더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 거대한 동물이 절대 잠을 자지 않는 영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대.”

 “코끼리가 승객인 비행기는 잘 상상이 되질 않네요.”

 사강이 그를 바라보자 정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코끼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런 커다란 몸집의 네발 동물들만 있는 세상에 나만 유일하게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면 어떨까. 승객이 없는 비행기 안이라는 게 꽤나 외로워서 드는 생각이었을 거야.”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외로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가 느꼈던 도리 없는 고독이 그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그 외로움의 기울기가 너무나 비슷해 그녀의 마음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어떻게 된 거예요?”

 울지 않으려면 어떤 질문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강은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알고 싶어요”라고.

 “진실을 말인가? 듣고 나면 놀랄 텐데?”

 정수가 사강을 빤히 바라봤다.   

 아홉시 뉴스에도 방송되었던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그가 왜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평생 저주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자국민을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를 돌려 황급히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는지 따윈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에 사강은 항공사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몇몇이 특히 더 알고 싶어 했던 이런 질문을 말이다. 

 “당신 아내는 어떤 사람이죠?”    

 사강이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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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이제 사강의 심장은 수시로 변하는 기압을 온몸으로 느꼈다. 심장에 연결됐던 팽팽한 힘줄들이 툭, 툭, 기타줄 끊어지듯 하나씩 잘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행기는 곧 파리의 드골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고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고,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는 평화로운 땅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가능했다. 사무장이나 기장의 보고서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기록될지 예상하는 건 훨씬 더 쉬웠다. 

    

                               * 

  

샹젤리제 거리의 맥도널드 앞에서 아빠와 거짓말처럼 부딪힌 건 3년 전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복동생 ‘폴’이 앉아 있었다. 폴은 빅맥을 먹느라 입술에 케첩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사강은 그가 폴의 양 볼에 묻은 케첩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저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강은 맥도널드가 보이는 바로 옆 카페에 자리를 잡고, 범인을 미행 중인 탐정회사의 직원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들 부자를 30분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쁜 여자들에겐 어김없이 눈이 돌아가는 아홉 살 폴. 늘씬한 여자의 다리엔 난데없이 눈빛이 꽂히는 7월의 복숭아 빛 뺨을 가진 폴. 지금 오른쪽 손에 닌텐도 게임기가 들려 있지만, 10년 후면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탱고를 추고 있을 아이였다. 아이와 대화하는 그의 모습도 이국의 춤처럼 낯설었다. 

파리에서 오래 살더니 평생 바게트만 입에 물고 산 프랑스인처럼 그는 과장된 몸짓을 사용했다. 눈썹을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다가, 지휘하듯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 열 개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랬다. 그곳엔 사강에겐 보여준 적 없는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 따스함이 고여 있었다. 사강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따스함이 놀라웠다. 

사강은 불현듯 폴과 같은 나이의 자신이 늘 “위험해! 더러워!”란 말을 듣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짙은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그건 고향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의 노스탤지어도 아니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생긴 두통도, 피곤함도 뭣도 아닌 순수한 질투심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사강은 창피해졌다. 그녀의 뒷목은 점점 더 뻣뻣해졌다. 폴의 오른쪽 무릎과 왼쪽 손등에는 생채기가 있었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생긴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겐 건강하고 발랄한 아홉 살짜리가 마땅히 달고 살아야 할 저런 표식이 없었다. 뛰어놀다 생긴 무릎과 팔꿈치의 멍과 딱지들 대신 자신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처가 있었다. 빨간약을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인다고 나을 리 없는 것들이었다. 폴은 인간이 아닌 금붕어 친구를 두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사강이 체념하듯 카페에서 일어나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사강은 큰 목소리로 폴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줌! 쉬 마려워요, 아빠!”

“일어나자, 폴.” 

폴은 “Oui”가 아닌 “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폴의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해서 서울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들과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엄마라면 조금만 참고 집 화장실을 사용하자고 했을 것이다. 거리의 공중화장실은 더러울 것이고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다. 사강은 폴과 아빠가 맥도널드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면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 일 이후, 사강은 아빠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파리가 더 싫었다. 한때 사강에게 파리는 5600마일리지를 주는 장거리 비행 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의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 시간째 사강은 낯선 남자의 호텔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 앞에서 그녀는 아빠와 폴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일찌감치 새어버린 아빠의 백발이 H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코노미 앞뒤 좌석 사이의 거리는 약 87센티미터이다. 

비즈니스 앞뒤 좌석 간 거리는 1미터 13센티미터. 

일등석은 2미터다. 

사강은 자신의 방과 H의 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파리 리츠칼튼 호텔 1302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1304호의 방문을 노크를 하기 전, 그녀는 H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이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은 유약해 보일 것이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왜 당신을 또 봐야해?’라는 불쾌한 질문을 유발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은 비굴해 보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는 ‘다시’라는 말 때문에 변명하기 좋아하는 무능한 직원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것이다. 

기내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승객들을 상대하면서 사강은 사과하는 법에 대해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과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이 되자, 어떤 쪽으로든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과를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사강의 손에는 약봉지와 죽, 향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사강은 택시를 타고 향수 가게에 들러 자신이 가진 유로를 털어 젖은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를 샀다. 윤희가 말했던 그 향초였다. 사강은 약국에 들렀고, 한국 식당에서 묽게 끓인 흰죽을 샀다. 적절한 시간에 H를 깨워 약과 함께 죽을 먹이고, 그가 좋아하는 향초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가 아니라 사표를 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 시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정식으로 조종사 과정을 교육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 여자 승무원이 검은색 히잡을 두른 채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제주 비행학교 출신의 여자 조종사 선배도 사강에게 조종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곤 했었다. 

사강은 망설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호텔 방문 앞에 약과 향초만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기장님!” 

초췌한 얼굴의 H가 말없이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사강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움켜쥐었다. 당혹스러움 때문에 사강의 목덜미와 귓불은 발개져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거구인 H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 위압적이었다. 몸에 있는 수분을 엄청나게 쏟아낸 그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것은 꼿꼿하고 반듯한 그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반쯤 덮고 있었다. 긴장감이 돌던 눈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풀어져 초점이 없이 느슨해져 있었다. 

“약을 가져왔어요. 좋아하신다고 해서 향초를…….”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묵직하게 와 닿았다.

사강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H는 사강의 눈앞에서 엎어지다시피 무너졌다.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와 향초를 담은 쇼핑백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사강은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했다. 카펫 위를 구르기 시작한 동그란 약통은 두툼한 카펫 때문에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둑한 복도는 웅크린 짐승의 뒷모습처럼 음울해 보였다. 

“정신 차려요!”

어떻게든 그의 손을 목에 감아 그를 침대까지 옮겨야 했다. 사강은 자신의 어깨에 걸치듯 늘어져 있는 H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등을 오른쪽 손으로 붙잡았다. 손등에 난 H의 흉터가 손바닥에 난 사강의 흉터와 포개지듯 꽉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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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윤희는 비밀스런 얘기라도 꺼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사강을 바라보았다.

“H 말이야. 비행 끝나면 늘 호텔에만 있잖아. 근데 언젠가 파리 라데팡스에 쇼핑 갔다가 ‘세포라’에서 H랑 마주친 적이 있었어. H가 향수나 화장품을 사러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세포라에 온다는 게 넌 상상이나 되니?”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근데 정말 이상했던 게 뭔 줄 알아? 상점 하나를 전부 거덜 낼 모양인지 향초만 잔뜩 사가지고 가는 거야.”    

“향초?”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장 압권은…… 그 산더미 같은 향초가 전부 똑같은 제품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포라 세일 날.”

“나 파리 가, H랑. 이달 말.”

사강이 말했다.

“어쩌니?”

“상관없어. 절대로 같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방법은 찾은 거야? 스케줄러한테 말했어?” 

“응.”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나를 정말 싫어해.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등신!’이란 말까지 했었어.”

“거야, 너무 뜨거워서 발작하듯 한 말일걸? 누구라도 그렇잖아. 감탄사처럼 아프다는 말 대신 욕 나오는 거.”

윤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브리핑하는 시간에 날 보면 아마 뒷목 잡고 경기할걸?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돼. 스케줄 바꿔줄 거지? 넌 적을 많이 아니까 그만큼 상대하기도 쉬울 거야. 그렇지? 난 병가 낼 생각이야.”

사강이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지저분한 퀵턴(Quick turn) 일정을 처리해주면 몰라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내가 너 대신 뭄바이까지 뛴 거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알지? 인도 뭄바이!”

“네 입에서 그 말 나올 줄 알았는데 얼마나 싫으면 이러겠니? H가 나도 진짜 미워해!” 

“설마, 나 만큼이겠니?”

사강이 윤희를 빤히 바라봤다.  

“별일 없을 거야, 내가 기도할게.”

“이게 기도까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아멘!”  

 

                                           *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개적인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윤희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H를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강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불평 없이 해치운다는 말은 그녀가 직업적인 신념처럼 여겨왔던 것이었다. 비행기가 20분 정도 하늘을 날아 순항 고도에 이르자 곧 안전벨트 사인이 풀렸다. 승객들에게 담요와 함께 음료 서비스가 나가는 동안에도 사강은 스스로에게 ‘불평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29찰리 손님-오렌지 주스, 14찰리-여분 담요 한 장 더, 3브라보-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물수건. 15알파-천식이 있는 손님이므로 자리 다시 한 번 확인할 것. 특히 두 명의 ‘2알파’와 ‘2찰리’는 모두 VIP로 파리의 국제회의로 가는 여당 국회위원들이므로 비행 중 불편함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 쓸 것.  

사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장을 한 채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길 기다렸다. 고령의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기내식으로 준비한 비빔밥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것만 빼면 늘 이어지는 보통의 비행이었다.  

마침내 칵핏에서 콜이 울렸다. 저녁 식사를 부탁하는 부기장의 콜이었다. 

“기장님은 라면. 저랑 부기장 한 명은 비프랑 치킨입니다!”

기장과 부기장은 항공법 규정상 같은 기내식을 먹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음식을 먹고 탈이 나게 되면 남은 한 명은 비행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이 라면을 먹더라도 한 명이 봉지 라면을 먹으면, 다른 한 명은 컵라면을 먹는 것이 규정이었다. 사실 라면은 끔찍하리만치 건조한 기내에서 먹을 수 있는 인기 메뉴였다. 

사강은 갤리 안에서 기장과 부기장의 기내식을 따로 준비했다. 특별히 H에게 내갈 기내식에는 따로 서비스되지 않는 로열 밀크티를 만들었다. 그가 차가운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는 정보를 준 건 윤희였다. 사강은 라면에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준비한 냉동 야채가 아닌 신선한 야채를 가득 넣었다. 엄밀히 채소는 기내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었다. 하지만 비행을 책임진 캡틴을 위한 것이었고, 이 정도의 불법은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했다.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잘게 자른 꽈리고추가 들어 있는 야채라면. 사강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라면을 바라봤다.

  

사강이 서비스한 기내식을 먹은 지 10분 만에 한정수의 얼굴에 하나둘씩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벌레에 물린 것처럼 표시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에 H는 별생각 없이 손톱으로 몇 차례 자신의 왼쪽 뺨과 눈 밑 주위를 긁었다.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극심한 가려움이 얼굴에서 목과 오른쪽 어깨로 퍼졌을 즈음, 그는 이제 에어컨이 나오는 조종석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긁은 자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인지했다. 

알레르기의 이유는 알레르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H의 갑작스런 설사와 구토 발진에는 딱 한 가지만 존재했다. 분명한 건, 그것이 사강의 소망대로 단순한 복통이나 운 나쁘게 찾아온 우연한 장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지 1시간 20분 후, H는 기내 화장실 변기 안에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냈다. 그의 온몸엔 갑각류의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 주위는 거대한 선충에 물린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일단 새콤으로 항보실(항공 의료원)에 연락할게요! 일단 저한테 맡기고 좌석에 가서 쉬세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기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H는 더 이상 조종석을 지킬 수 없었다.  

곧 의사를 찾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 안에는 불임 시술에 관한 학회 차 파리에 가는 산부인과 의사와 휴가 차 비행기를 탄 흉부외과 의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먼저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은 H에겐 응급 처방이 내려졌다.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탈수 증세를 막기 위해 소량의 소금과 설탕을 섞어 만든 전해질 용액을 계속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건, 식은땀을 몇 리터쯤 쏟아낸 기장이 초인적인 힘으로 착륙 직전에 조종석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H의 얼굴을 특징짓는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H는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H의 손등에 남아 있던 흉터 위에는 좁쌀 같은 열꽃이 피어 번져 있었다. 사강은 이제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땅콩이나 우유 알레르기는 들어봤어도 고추 알레르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부기장님 말로는 그냥 고추 알레르기가 아니라 꽈리고추 알레르기래요.”

“근데 알레르기가 그렇게 괴상할 수도 있는 거니?”

“알레르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잖아. 조개나 땅콩 알레르기로 죽었단 사람 본 적 있어.”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지. 이런 특별 케이스의 경우,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죽게 되겠지.”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야. 이건 누가 봐도 고의적이지. 이런 경우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사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복수라고 해!”

사강의 눈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그것이 흐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결국 사강이 라면에 넣은 꽈리고추가 문제였다. 

그녀는 고추씨가 지저분하게 라면에 뜨지 않게 하기 위해 통째로 꽈리고추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아주 얇게 다져 씨를 덜어냈다. 제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잔뜩 들어간 라면에서 작은 고추 조각 몇 개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선의였든 비행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불행 속에 몰아넣은 이상, 동료들은 앞으로 사강이 앞으로 쓰게 될 시말서의 종류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시말서도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 

검역되지 않은 식료품을 기내에 반입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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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항공사에는 다양한 경로로 들어온 조종사들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인 항공대 출신.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간에 진로를 변경해 제주도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제주 비행훈련원 출신, 일명 ‘제비’들과 H처럼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항공대를 나와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항공대를 나와 제주 비행훈련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 세 카테고리 안에서 조종사들의 경로가 분류된다. 

어린 나이에 조종사가 되는 건, 대부분 제비 출신들이다. 

수년간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 비행 조종사가 된 여성 조종사도 있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 ‘비행’에 대한 책을 쓴다면 대부분은 자유분방한 ‘제비’일 것이다. 정해진 비행 스케줄이 바뀌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는 어김없이 연륜이 있는 공군 출신의 조종사들이다. 바로 그때가 ‘비행 사고’가 일어나는 최적의 시간임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H는 최정예 전투기인 F16 조종사였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동기가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버티고 현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교관이었던 선배 한 명을 비행 사고로 잃은 건 그로부터 6년 후였는데, 훈련 중 많은 비행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버티고 현상은 수만 피트로 고도가 높아지면 신체 균형이 붕괴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비행 사고였다. 동료의 죽음. 그것은 공군 출신 조종사들이 가진 공동의 트라우마였다.

사강은 H의 손등에 난 흉터가 그때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쌍둥이처럼 비슷한 흉터가 그녀의 손바닥에 있었다.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에 난 흉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소송으로 혼란스럽던 어느 날,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면도칼로 손바닥의 생명선을 따라 빗금을 그었다. 자신의 생명선이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피가 흘러 자신의 팔목을 적시고, 무릎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문을 열어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린 문으로 엄마가 달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때 흘러내리는 피는 붉지 않다. 마치 눈물에 희석된 것처럼.

그러므로 어느 날 사무장이 “이봐, 주니어. 내가 곧 H에 대해 알게 해줄게. 이번 비행에선 네가 칵핏에 음식을 서비스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H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일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장님이 건조한 걸 정말 싫어하시니까, 칵핏에서 콜 오기 전에 자주 차를 갖다 드리도록 해. 커피는 절대 안 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온도를 아주 잘 맞춰야 해. 딱 한마디만 해줄게. 무조건 뜨겁게 만들어야 돼! 최대한 뜨겁게! 기장님은 미지근한 걸 제일 싫어해. 물은 아주 차가워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차갑고 뜨겁게. 그것만 기억해둬.”

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H는 경력이 많은 시니어 승무원들도 힘들어했다. 

예정보다 지연되기 일쑤인 비행기 출발 시간을 트집 잡고, 기내식을 혐오하는 일부 일등석 승객을 손쉽게 누그러뜨렸던 친절과 노하우도 까다로운 H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그가 훌륭한 조종사인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좋은 동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사강. 내가 보기엔 넌 승무원 매뉴얼북 그대로라 정말 잘할 것 같아. 매뉴얼대로! 그게 기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고전적인 훈육법은 국경이나 인종을 떠나 예외 없이 비슷하다.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멍청한 악질이 아닌 이상, 누구도 처음부터 후배를 닦달하진 않는다. 당근을 많이 준 토끼가 배불러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순간, 채찍을 들이대며 호통을 치는 쪽이 효과적이고 더 큰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강 역시 H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유달리 먼지가 잘 보이는 칵핏에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도 부기장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사무장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잘 만들 순 없어도 최대한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H의 명성이 막 열정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한 신입사원의 모험 정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종석에서 나온 사강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강은 쟁반을 든 채 갤리 안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강이 조종석에 들고 간 쟁반 위의 찻잔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사강의 앞치마는 3분의 1이나 물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손등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윤사강, 괜찮아?”

어느새 기내 복도에서 면세품 카트를 밀다가 갤리로 돌아온 승무원들이 사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불안전한 기류 때문에 올려놓은 집기들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류에 익숙한 승무원들은 누구 하나 비틀거리지 않고 꼿꼿이 그곳에 서 있었다. 사강은 젖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검정색 비행 슈즈에도 물이 튀어 있었다. 몇 분 사이 손등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  

“너 손은 왜 그래? 데었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윤사강이 H에게 특별한 예외가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악랄한 동료애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라는 듯 말이다. 

“선배님! 어떡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미소가 재빨리 그녀의 손등에 얼음을 끼운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 안에 얼음을 몇 개 더 쥐고 있었다.  

“기장님…… 괜찮으시겠죠?” 

사강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런던에 도착하면 사표부터 써야 할 거예요, 저.”

“무슨 소리냐구!”

“윤사강, 너 사고 친 거야?”

사무장이 물었다.

“제가 뜨거운 차를 쏟았어요. 거기에. 정중앙.”

사람들이 일제히 사강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변명처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칵핏으로 얼음이랑 물수건 보내, 당장!”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강의 손등에 물수건을 얹었던 미소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틀어막고 어깨가 흔들리도록 웃었다. 발밑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선 ‘떨어진다’라는 말은 금기어다. “나 공항에 다섯시에 떨어져!” 같은 일상적인 말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사강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추락이었다. 

 

매달 21일 승무원들은 한 달 치 비행 스케줄 표를 받는다.

그때, 자신과 비행할 ‘크루 리스트’도 함께 받는다.  

사강은 H의 747-400을 타고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에 가는 일이 없도록 매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난 건 1년 동안이었다. CARGO 기종인 그의 비행기가 승객이 아니라 종종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팀인 윤희가 네 번이나 H의 비행기를 타는 동안 그녀에게는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그날, 사강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표를 읽고 또 읽었다. 

‘드디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녹차 때문에 생긴 얼룩진 자신의 앞치마를 빨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윤희가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객에게 받은 첫 번째 항의 레터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강이 사무장의 충고대로 팔팔 끓는 물에 녹차 티백을 넣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던 녹차가 그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몸의 정중앙에 낙하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난기류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스캔들과 소문을 먹어치우는 회사의 빅 마우스들은 ‘H의 장엄한 소시지를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되는 맹랑한 꼬마가 끓는 물에 삶았다’고 표현했다. ‘운동광인 H가 그날 이후 클럽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돌았다.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사강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표는 말도 안 돼! 그거, 등신 인증이라고! H를 피하면 너만 손해야. 어차피 부딪히게 될 직장 상사라고. 그건 누가 뭐래도 실수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윤희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H 얘기를 종종 꺼냈다. 대부분은 그와 함께 비행하며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가끔은 다른 종류의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H는…… 어떤 땐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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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전 용돈 없인 절대 안 웃어요!”

불현듯 스치는 사강의 차가운 무표정은 그녀가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고,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용돈을 줘야겠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그에게 애정이 담긴 선물이 아니라 돈을 줄 때만 아빠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분노와 슬픔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사강의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것이 눈동자 색깔이 다른 이복동생을 직접적으로 증오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아빠에게서 온 선물이 통장에 적지 않은 숫자로 찍힐 때마다, 사강은 엄마에게 다양한 물건들을 선물했다. 반지나 목걸이처럼 애인에게나 줄 법한 값비싼 선물일 때도 있었고, 베트남의 G7커피나 인도의 ‘히말라야’ 화장품처럼 특정한 나라에 가면 승무원들이 광적으로 사 모으는 물건일 때도 있었다. 

“고맙구나. 잘 쓸게.”

엄마에게 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사강은 언제나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빠가 주는 선물이에요.”

그것이 엄마에게 얼마만큼의 위로가 되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특별한 효도라는 점에서도.   


책을 보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결혼도 이혼도 그런 식으로 해치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의 남자가 일 년씩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천착했고, 그에게 스타일이란 패턴의 축적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가 미디어 아트를 선택한 것도, 이 분야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움에 열광하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작 시리즈’ 같은 말을 혐오했다. 같은 제목에 번호만 붙이는 것은 그의 성품과도 맞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아빠라면 그것은 1년이나 이어진 ‘연작’의 형태로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긴 시간을 투자해 견고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 치밀하고 조직적일 것이다. 

결국 사강은 과거에 헤어졌던 남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사강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난 후, 농담하듯 자신에게 이런 책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 명은 됐다. 

그들 대부분은 사강을 먼저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댔고, 백화점 브로슈어 첫 페이지에 나올 법한 선물들을 보냈고, 수컷이 보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추파를 던졌다. 연애가 시작되려면 이런 요란한 행동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사강은 소개팅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비행기에서 자신에게 반해 추파를 던지는 쪽이, “커피나 한잔!”을 과감히 외치는 쪽이 훨씬 건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본능과 직관이 발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적인 구애를 받는다. 사강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십 대 여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연애의 생태계를 이해했다. 일생 동안 한 번의 예외를 빼면 사강이 먼저 좋아했던 남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헤어지자고 한 쪽은 언제나 남자들이었다. 그녀는 늘 먼저 차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가 차이는 쪽이 아니라 찬 쪽이라고 생각할걸?”

친구인 윤희는 그것이 늘 윤사강 연애 역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점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명의 남자들이 사강의 눈앞을 휭휭 지나갔었다. 

승무원이었던 우혁은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고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섹스할 때마다 사강에게 “좋았어?”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묻기 전에 사강이 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사강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우혁과의 섹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섹스가 끝난 후 귓속에 속삭이는 ‘좋았어?’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관제사였던 경완은 취미로 시작한 직장인연합 합창단 베이스 파트의 독보적인 멤버였다. 그러나 사강은 곧 그 목소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활주로가 아닌 침대 위라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데이트한 몇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뀐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지 못했다.  

책을 받는 순간 누구보다 사강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한정수였다.   

그는 우혁, 경완과 다르게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유일한 남자였다. 

한정수는 그녀가 먼저 사귀자고 했던 최초의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최초이며 시작인 유일한 남자.  



사람들은 한정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항공사 직원들과 ‘외항사’라 부르는 외국 항공사 사람들까지도 그를 ‘H’라고 불렀다.

H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는 혼자 산책했고, 혼자 커피를 마셨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다. H의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는데 세상의 소음만큼 싫은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밥 딜런이나 산울림 같은 옛날 가수들의 음악만 들었다. 그가 ‘존 레넌’의 <Hey, Jude>를 흥얼거리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목격자 이외에 한 명도 없었다. 그의 방 어딘가에 날렵하게 잘 빠진 생채기 많은 녹색 펜더(기타)가 있다는 사실을 항공사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H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기타리스트였고,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조앤 바에즈’라는 사실 역시도. 

그는 언제 어디서나 구겨지지 않은 제복을 입었고, 잘 단련된 종아리가 드러난 반바지와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입고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도록 공항 안에 있는 조깅 트랙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가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달리는 걸 멈출 때는 피트니스 센터에 후렴이 반복되는 시끄러운 후크송이 나올 때뿐이었다. 

H에 대해서라면 믿기 힘든 소문들이 많았다.   

가령 그가 어느 날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괴소문이나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같은 게 그런 예였다. 그가 회장의 첩자라는 소문은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H는 소문에 대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정점에 있는 건 그가 지키기 힘든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란 사실이었다. 그가 준수하는 원칙은 음반으로 치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클래식’이었지만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환경에 노출된 항공업계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십오 년 동안 직접 태엽을 감아야 하는 오래된 기계식 오메가 시계를 차고, 세 시나 네 시가 아니라 세 시 십일 분이나 네 시 이십육 분처럼 정확함을 요구하는 시간에 비행팀 전체를 이끌고 브리핑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철저한 시간 엄수는 그가 요구하는 승무원의 첫 번째 자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코어북에 매번 최고 기록만을 새겨 넣는 프로 야구선수 같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어떤 타격 폼을 유지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장타자 같았다. 그는 무엇보다 원칙을 위해선 반복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스스로 고집하는 몇 가지 원칙들 때문에 그의 비행기는 젊은 부기장들에겐 존경과 동시에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일부 사람들은 H를 싫어했다. 

어떤 부류는 광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짙은 회색빛 은발과 음울한 눈빛을 가리는 보잉 선글라스는 H를 늘 비밀의 언저리에 있는 인물처럼 보이게 했다. 누구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인사과에 기록된 그의 생년월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는 결혼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와이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행을 마친 사강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픽업 버스를 기다리는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낡아 보였지만 잘 관리된 물건이 그렇듯 시대를 초월한 기품이 있었다.

사실 사강이 그를 처음 본 건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쪽 손등의 상처였다. 

피부 위에 굵은 실처럼 올라와 있는 그 상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였다. 그런 상처는 그의 손등에 한 줄 더 그어져 있었다. 사강은 그 옛날 백과사전 위에 자를 대고 반듯이 밑줄을 긋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강은 그 상처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날 밤 잠들기 직전에도 똑같은 장면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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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아빠는 수집광이었다. 

그는 오디오에 미쳐 집 안을 온통 쌀 궤짝처럼 생긴 괴상한 스피커로 가득 채우곤 했는데, 그의 수집벽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시계, 카메라, 초판본이나 장정이 독특한 희귀본 고서 같은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아빠의 수집 욕망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한 여자들이었다. 육감적인 일본 여자, 눈동자가 유달리 검은 초원의 몽골 여자, 몇 달 동안 햇빛 한 번 쏘인 적 없어 보이는 옅은 금발의 창백한 스웨덴 여자…….

어린 시절부터 사강은 늘 귓속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음을 들었다. 

그 소음들 속에는 엄마의 울음소리나 아빠의 웃음소리가 괴상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강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불시에 부모의 이혼을 맞이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기어이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집념을 키우게 된 건, 아홉 살 윤사강이 택한 최악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엄마의 양육 방식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사강은 말하는 법보다 말하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아프다고 울기보단 스스로 약국에 가는 편을 택했다. 물론 그녀가 아주 많은 말을 하는 예외적인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말을 참았던 부작용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라는 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녀의 말끝에는 잘린 전선처럼 생긴 마디들이 드러났고, 그 마디 끝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보기엔 힘든 짓눌려 너덜대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사강은 너무 말을 안 하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주변의 어른들을 걱정시키는 아이였다. 

그럴수록 엄마는 사강을 더 보호하려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사강의 신경증을 두려워했다. 엄마는 ‘하지 마!’란 말을 달고 살았다. 더러우니까, 위험하니까, 힘이 드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는 사강이 커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고기를 사랑하는 편이 더 쉬웠다.  

사강은 수족관에 있는 엔젤 피시의 밥을 직접 주었다. 엔젤 피시에게 ‘꼬마’란 이름을 지어준 것도 사강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물고기 밥은 하루에 딱 10알만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강은 자신이 배가 고플 때마다 꼬마에게 매번 한 움큼씩 먹이를 더 주었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처럼 사강은 물고기와 우정을 나누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손등을 꼬집은 일, 맨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자신의 치마를 들춰낸 일도 꼬마에게만은 말했다. 그녀는 물속을 움직이며 말없이 뻐끔거릴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꼬마의 얇고 투명한 지느러미를 사랑했다.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불룩해지는 꼬마의 입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리를 나풀거리며 헤엄치던 꼬마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이 수영단에서 막 배영을 배우던 시기였으므로 사강은 꼬마가 수족관 안에서 배영을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강은 배를 내보인 채 30분이나 둥둥 떠다니는 꼬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꼬마가 죽어버린 후였다. 

“잘 기억해둬. 사랑을 너무 많이 주면 이렇게 배가 터져 죽어버려!”

꼬마가 배를 보이며 뒤집혀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때, 플라스틱 뜰채로 물고기 사체를 건지며 엄마가 말했다. 사강은 차라리 아프게 손바닥을 맞고 싶었다. 물고기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면 벌을 받아 끔찍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얼굴 더러워지니까 울지 마라.” 

“…….”

“넌 이제 꼬마가 아니야.”

엄마는 꼬마와 똑같은 금붕어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강에게 더 이상의 물고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너도 곧 열 살이야. 알겠니?”

두 손의 주먹을 꼭 쥐고 있던 사강은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점차 누군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말하지 않게 되자, 점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사강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재능을 잃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아주 유능한 회사원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불만 없이 자족하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그것은 거꾸로 보기 드문 재능으로 승화되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짜거나 싱겁다고 고래노래 소리를 지르며 매니저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사강은 경외감을 느꼈다. 비행기에서 난동을 피우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겠다고 발작을 일으키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커피가 뜨겁지 않다고, 샐러드가 차갑지 않다고, 기내 에어컨이 너무 세다고, 약하다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격정적인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고 만나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사강이 잃어버린 승객의 콘택트렌즈를 찾아주고, 보드카를 생수병에 넣어 몰래 반입한 시끄러운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하고, 불편한 자기 자리 대신 텅 빈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 승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고객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스웨덴 여자와 살며 눈 푸른 이복동생을 낳은 아빠에게 뭘 기대한단 말인가. 지금의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딸을 낳은 엄마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올해의 스튜어디스 상’을 두 번이나 탄 사강이 뛰어난 승무원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녀의 서비스는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자연스러웠고,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러나 사강은 점점 비행기 타는 것이 두려웠다. 비행기를 타면 가슴이 죄어오고 숨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는 자주 주먹으로 흉곽 부위를 내리쳤다. 과호흡이나 공황장애 환자를 위해 기내에 설치된 산소호흡기를 떼서 입에 대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그것이 수시로 바뀌는 고도나, 헤어 제품으로 애써 고정한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조여 맸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란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비행기 조종사에게 뜻하지 않은 고소공포증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까. 도서평론가에게 불시에 난독증이 생겼다면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그녀의 일상을 점점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강은 신발장을 활짝 열었다.

상자 속에서 네 개의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 중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독일어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사강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사강은 혐오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곁에 두지 않을 권리라면 그녀는 마음껏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책들, 『슬픔이여, 안녕』은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


책은 대부분 기념일이나 기념일 전날 도착했다.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열흘 전, 생일, 여름휴가 시즌에도 책이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기념일’인지 알 수 없는 평범한 날 도착했다. 네 권의 책이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이 걸리지 않았다. 책에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선물을 보내진 않는다. 

사강은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았다. 패턴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이런 선물은 사강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습작기 학생이 쓴 플롯 없는 엉망진창인 추리소설 같았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첫 번째 일본어판 『슬픔이여, 안녕』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다. 상자에는 교토를 상징하는 황궁이 그려진 우표가 나란히 두 장 붙어 있었다. 사강은 일본어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본어라면 아주 조금 말할 수는 있었지만, 한자를 제외한 일본어를 읽을 순 없었다. 



가로가 아닌 세로로 길게 늘어선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강은 이 책이 낯설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도착한 상자 속에는 스페인어 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발신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스탬프가 택배 상자 위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크리스마스 열흘 전에는 이태리 피렌체에서 『Boungiorno Tristezza』가 날아왔다. 

사강의 생일 날, 베를린에서 날아온 책에는 『Hallo von Sorrow』라는 소설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매번 사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간대가 전혀 다른 낯선 도시를 배회하며 자신에게 책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그 사람의 손가락 지문과 그림자가 이 낯선 책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 책들을 읽으라고 보낼 리 없었다. 

생일에는 코끼리나 주술사가 그려진 실크 스카프와 함께 ‘사랑하는 내 딸’로 시작하는 엄마의 축하 카드가 날아왔다. 매년 같은 생일 축하 문장과 다른 패턴의 스카프를 보내는 것이 엄마의 인사법이었고, 스카프가 들어 있던 오렌지색 박스를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이 사강의 생일날 아침 풍경이었다. 하지만 의문의 상자가 도착하기 시작한 후, 생일은 축하의 의미보단 이번에는 과연 어떤 도시에서부터 어떤 언어로 번역된 책이 날아올지를 추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강은 파리에 사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태리에 간 아빠가 피렌체를 떠돌다 두오모 근처의 헌책방에서 충동적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사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딸의 이름을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으로 지었던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사랑의 표현이 동명 소설가의 책을 보내는 일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사강에게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준 어떤 선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사강 자신이었다. 그는 딸에게 선물할 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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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


윤사강이 날짜변경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열 살 때였다. 

출판사에서 산 두꺼운 전집과 사전을 거실 안에 들여놓는 게 집 안의 품격을 유지한다고 믿는 세대에 태어난 아이는 잘못 들다가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발톱 하나쯤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닌 전화번호부 두께의 백과사전을 제일 친한 친구로 삼았다.

백과사전은 이혼한 부모님의 유물처럼 남겨졌다. 그것은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처럼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먼지를 털어주고, 찢어진 귀퉁이를 정성스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주는 정도의, 말하자면 ‘보관’이란 단어를 쓸 만한 물건이 되었다.   

아빠가 부재하던 유년 시절, 사강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리한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책이라고 믿기 시작한 엄마가 강박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세계명작전집들과 거실에 놓인 거대한 사전의 영향으로 그녀는 오래된 책을 뒤적이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찾아보기 좋아하는 흔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강은 늘 헬로 키티가 그려진 ‘10센티미터 자’를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에 연필로 반듯하게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마주친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녀는 귓속에 그 단어들을 하나둘 숨겨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살이 되던 여름, 동아 백과사전 속에서 ‘날짜변경선’이라 지칭되어 있는 단어와 마주쳤다. 

 

날짜변경선: 북극과 남극을 이어 두 지역의 역일(曆日)을 임의로 구분하는 가상의 선. 본초자오선인 그리니치 천문대의 180도 정반대쪽 태평양 한가운데(경도 180도)에 동서로 나뉜 국제 날짜변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 기준선을 넘나들 때마다 하루를 가감하게 된다. 즉 이 선을 서에서 동으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늦추고, 동에서 서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빨리한다. 날짜변경선은 태평양의 중앙부를 지나 대부분은 바다의 영역에 있어, 섬이나 육지를 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즉 동일 시간대에 속한 나라가 날짜가 달라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동일 지역으로 묶어, 일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그어져 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변경선은 그녀가 사는 지구에 존재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하늘 위에서 바쁘게 시계를 ‘풀었다 조였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열 살 윤사강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투명한 날짜 경계선 위에 둥둥 떠서 시계태엽을 감고, 풀고 다시 조이는 사람들을 그녀는 상상했다. 

만약 어제와 오늘의 경계선 위에서 한쪽 발은 어제에, 다른 한쪽 발은 오늘에 닿아 있다면 지금의 나는 어제를 사는 걸까, 오늘을 사는 걸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강은 사전을 펼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슬픈 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이 아닌 ‘어제’의 날짜 경계선 위에 서 발걸음을 옮기면 거짓말처럼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후회가 되어 눈물처럼 흐를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강은 날짜변경선에 단박에 매혹 당했다.  

어제 누군가 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날짜변경선에선 오늘이 어제가 될 것이므로 고통스런 불행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강의 지구엔 이런 ‘마법의 선’이 존재했다. 블랙홀처럼 시간이 빨려 들어가는 그 ‘구멍’ 속을 사강은 꼭 자신의 힘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날짜변경선을 보려면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강의 미래가 결정됐다. 어린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비행기 승무원은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교수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단어 같았고, 집과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열 살 소녀의 머릿속엔 고향을 타향처럼 느끼는 외로움이 자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비행 승무원이 된 후, 윤사강이 탄 에어버스 330이 지구의 날짜변경선 위를 가뿐히 날아오르던 순간, 사강은 주먹을 쥔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피아노 줄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경계선이 몸 안 여기저기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지문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날은 사강의 생일이었다. 

태평양의 중앙부, 경도 180도의 자오선,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가 수만 마일 너머 날짜변경선 위를 날고 있을 때, 사강은 눈을 감고 자신의 생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빗금 위에 걸쳐져 사라지는 광경을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 사이로 푸른 장화를 신은 날짜 경계선의 정령들이 시계태엽을 빠르게 감고 푸는 모습이 보였다. 180도의 서경 쪽은 180도의 동경 쪽보다 하루 늦게 되는 것이므로 이제 그녀의 생일은 가볍게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짙은 구름들로 한껏 부풀어 오른 어둠 위에 거대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내식과 기내 면세품 판매가 끝난 비행기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에어버스 330의 길고 좁은 복도의 램프 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승객들은 잠들어 있었다. 

사강은 1등석에만 서비스되는 모엣 샹동 샴페인의 기포를 바라보았다. 옅은 복숭아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차갑게 와 닿았다. 그녀는 경계선 위에 놓여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생일을 향해 속삭였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구나.”

날짜 경계선을 알게 되던 열 살의 기억들이 샴페인 기포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보글거리다 톡톡 터져 나왔다. 사강은 그 어둠 속을 뒤로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어제를 바라보았다.


*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다시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불안정하지만 몇 년 동안 반복되면서 어느새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한 사강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집 앞에 의문의 상자가 놓이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처음 그 상자는 신화나 성경에 등장하는 버려진 어린 아기처럼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밤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쏟아지는 햇볕에 찔렸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왔다. 사강은 무심코 바닥에 놓인 상자를 어린 아기같이 번쩍 들어 올렸다. 상자를 흔들자 이리저리 물건이 상자 모서리에 부딪히며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강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책 한 권 들어 있었다. 사강은 그 책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현관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책장을 들춰보지 않은 건 그것이 외국어로 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로 써진 책 말이다.  


*  

                                   

이장희의 노래 <슬픔이여 안녕>은 ‘외로운 내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고 떠나간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로 시작한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으로 변해버려

떨어진 낙엽처럼 멍이 들고 말았네

흩어진 꽃잎처럼 조각난 추억들을

나 홀로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하려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도 이젠 그만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사강이 이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된 건 반복되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그 순간이었다. 적어도 사강의 기억에 엄마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던 어렴풋한 기억도 났다. 마침내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해냈다.   

“아빠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어. 태어나기도 전에 넌 사강이었지. 아들이었어도 네 이름은 윤사강이었을 거야.” 

고민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만약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괴테나 카프카였다면? 자신의 이름이 윤괴테나 윤카프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됨으로써 부모를 저주하는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짓이었다. 

사강은 20대의 아빠를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 뛰어난 청년으로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국제적인 미술상을 받아 신문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인을 이혼녀로 만들었다. 몇 년 후엔 누구도 원치 않는 이복동생까지 안겨주었다. 그와 똑같은 눈매를 한 금발의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장아장 쫓아오는 게 자신이 자주 꾸는 악몽의 도입부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건 이토록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자에겐 아빠가 될 권리도 없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부모가 헤어진 아이들이 그렇듯, 사강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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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5부.  B747-400 



2009년 일본의 젠니쿠 항공사는 승객들에게 비행기 탑승 전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올 것을 권고한 적이 있다. 승객들의 소변 무게를 줄이면 이산화탄소와 연료의 소모를 줄여 지구 환경 보존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항공사 측의 의견이었다. 

같은 이유로 승무원들의 플라이트 백 무게를 줄이라는 회사 측 공문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공문이 나가기 전,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승무원들이 승진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론은 하나야. 마르고, 팔 길고, 여자보다 힘센 게이가 앞으로 항공업계를 장악할 거야! 키 작아도 팔만 길면 승객들 짐쯤이야 선반 위에 쉽게 밀어 넣을 수 있잖아? 너, 뚱뚱한 게이 본 적 있어? 난 없거든.”

첫째와 둘째 아이를 동시에 임신했던 입사 동기 윤희는 자신의 뚱뚱한 배를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었다. 

항공사에는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로드 마스터’라는 전문적인 직업이 존재한다. 비행기에 승객이 탑승하면 로드 마스터는 비행기의 ‘웨이팅 밸런스’를 체크해 승객의 짐과 화물을 나누어 배분하고 파악한다. 짐을 앞쪽에 실을 것인지, 뒤쪽에 실을 것인지에 따라 비행기의 이착륙이 달라지기도 한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비행기의 균형을 위해 승객의 좌석 위치를 바뀌는 경우도 있다. 보잉 777이나 에어버스 380처럼 거대한 비행 물체가 하늘로 떠오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사강은 균형을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런던에서, 모레는 상하이에서 뒤집힌 낮과 밤을 맞이해야 하는 게 일상이라면 균형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뿌리내리고 살려면 말이다. 사강은 십 년째 같은 몸무게를 유지했다. 잠들기 위해 똑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 같은 브랜드의 샴푸와 린스를 쓰는 것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만약 그녀의 인생에 ‘로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지금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사강은 공항 카페 라운지에 앉아 이륙을 준비 중인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어릴 땐 비행기를 바라보면 어딘가 자유롭게 떠나는 보헤미안의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하지만 승무원으로 입사한 후 한동안은 에어버스 330의 꼬리를 바라보면 ‘반 냉동 상태의 기내식은 160도 이상의 오븐에서 이십오 분 데운다’ 같은 공식이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새 떼들을 보면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승무원이 된 후엔 비행기 프로펠러 속으로 그것들이 빨려들어가거나 부딪혀 일어나는 ‘버드 스트라이크’ 같은 비행 사고가 먼저 떠올랐다.     

승무원이 된 후, 어느 도시에 가도 감흥이 십 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도쿄는 서울과 비슷하고, 스위스는 독일과 비슷해 보였다. 프라하는 로마와 비슷해 보이고, 세부는 발리와 비슷했다. 어떤 도시가 어떤 도시와 비슷해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 끊임없이 “어디 가니?”라고 묻는 증세를 승무원들은 ‘항공성 치매’라고 불렀다. 항공성 치매의 가장 안 좋은 점은, 더 이상 어떤 아름다운 도시에 가도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로모 아냐?” 

윤희가 말했다.  

“너 비행할 때 카메라도 가져가니? 난 잠자느라 호텔 밖으론 나가지도 않는데. 보기보다 낭만적이다, 윤사강. 입사 칠 년 차가 이럴 수도 있구나.” 

사강은 막 도쿄 비행을 마치고 활주로가 보이는 에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치즈가 들어간 파니니를 먹으며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는 성인 어른의 것이라기보단 조카에게 선물로 주기에 적당한 장난감처럼 보였다. 

“로모가 뭐야?”

사강이 말했다. 

“로모 몰라? 러시아에서 만든 카메라잖아. 나 이 카메라 좋아하는데.”

“왜?”

“싸잖아. 10만 원도 안 할걸?”

윤희는 사강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빼앗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로모, 색감이 되게 독특해. 사진을 찍으면 탈색된 것처럼 뿌옇게 날아가버리거든. 파스텔 톤이 된다고. 그래서 이 카메라만 고집해서 쓰는 로모 마니아도 있어. 근데 너, 필름 카메라는 좀 불편하지 않아? 현상소 찾는 것도 일이잖아. 난 되게 귀찮던데.”

“필름 카메라라구?”

카메라를 든 채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카메라 뚜껑 열면 필름 넣는 곳이 있을걸? 로모는 디지털 아니잖아.”

“필름이 없으면 이 카메라 쓸 수 없는 거니?”

“당연하지. 요즘 전문가들 빼고 누가 필름 카메라를 쓰겠냐? 디지털처럼 당장 확인해볼 수도 없고, 잘못 찍어도 지울 수도 없고, 현상하는 데 돈 들고. 그나마 현상소도 별로 없잖아.”

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사강의 머릿속에 ‘무용지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놓고 온 기념품을 가져갔을 사람이 느낄 당혹감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를 모르면 읽을 수 없는 책과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카메라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이유로 비틀즈의 <ABBEY ROAD> LP판을 선물해줬다 해도 만약 LP를 걸 턴테이블이 없다면 제아무리 값비싼 희귀 앨범이라 해도 역시 별 소용 없는 거 아닐까.  

사강은 로모 카메라를 바라봤다. 사강은 필름 카메라를 써본 적조차 없었다. 카메라에 필요한 필름을 사고, 그것을 카메라 안에 끼워 넣고, 필름 현상소에 가서 사진을 인화하는 일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필름 어디서 팔아?” 

“모르겠어. 필름 사본 지 하도 오래돼서.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팔지 않을까? 혹시 공항 안에 현상소가 있었나 모르겠네?”

윤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사강 역시 길거리에서 도저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동창을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실연을 당하고 ‘차차차’나 ‘살사’처럼 격정적인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실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실연 후 사표를 던지고 스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탄 채 지구 반대편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영화에서 우연히 본 가우디의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에 반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는 사람도 있다. 

사강은 창문 밖의 활주로를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진 듯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필름 넣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필름 카메라는 골치 아픈 기계다. 하지만 쓸모 있다는 것의 정의가 사람마다 같을 순 없다. 무용지물이라야 가치가 올라가는 세계도 있으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쓸모만큼만 인정받다가, 쓸모가 사라지면 즉각 폐기되는 삶이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경쟁이라면 그것의 반대편엔 또 다른 세계도 있는 거 아닐까. 세상엔 쓰임새가 애매해서 그저 간직할 수밖에 없는 물건도 있다.

“카메라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응.”  

사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손에 꼭 쥐었다. 

“남자?” 

“글쎄…….”

카메라를 카메라가 아닌 ‘로모’라 부르는 일. 이 ‘로모’가 누군가에겐 ‘로모’가 아닌 또 다른 애칭으로 불렸을지도 모를 가능성. 그런 것들. 살면서 가지고 있는 물건에 친근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친구처럼 생각하며 소중하게 다루는 일. 사강은 귀퉁이가 낡아 둥글어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낡은 카메라의 진짜 이름과 시간이 궁금해졌다. 

창문을 향해 막 마드리드에서 착륙한 보잉 777-200 한 대가 비행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비행기 꼬리가 아름다운 피조물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터미널 쪽을 향해 들어왔다. 사강은 가방 속에 다시 카메라를 넣었다. 그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윤희에게 중얼대고 있었다. 

“런던에서 돌아오면 당장 필름부터 사러 가야겠어.”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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