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항공사에는 다양한 경로로 들어온 조종사들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인 항공대 출신.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간에 진로를 변경해 제주도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제주 비행훈련원 출신, 일명 ‘제비’들과 H처럼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항공대를 나와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항공대를 나와 제주 비행훈련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 세 카테고리 안에서 조종사들의 경로가 분류된다. 

어린 나이에 조종사가 되는 건, 대부분 제비 출신들이다. 

수년간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 비행 조종사가 된 여성 조종사도 있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 ‘비행’에 대한 책을 쓴다면 대부분은 자유분방한 ‘제비’일 것이다. 정해진 비행 스케줄이 바뀌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는 어김없이 연륜이 있는 공군 출신의 조종사들이다. 바로 그때가 ‘비행 사고’가 일어나는 최적의 시간임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H는 최정예 전투기인 F16 조종사였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동기가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버티고 현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교관이었던 선배 한 명을 비행 사고로 잃은 건 그로부터 6년 후였는데, 훈련 중 많은 비행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버티고 현상은 수만 피트로 고도가 높아지면 신체 균형이 붕괴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비행 사고였다. 동료의 죽음. 그것은 공군 출신 조종사들이 가진 공동의 트라우마였다.

사강은 H의 손등에 난 흉터가 그때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쌍둥이처럼 비슷한 흉터가 그녀의 손바닥에 있었다.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에 난 흉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소송으로 혼란스럽던 어느 날,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면도칼로 손바닥의 생명선을 따라 빗금을 그었다. 자신의 생명선이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피가 흘러 자신의 팔목을 적시고, 무릎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문을 열어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린 문으로 엄마가 달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때 흘러내리는 피는 붉지 않다. 마치 눈물에 희석된 것처럼.

그러므로 어느 날 사무장이 “이봐, 주니어. 내가 곧 H에 대해 알게 해줄게. 이번 비행에선 네가 칵핏에 음식을 서비스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H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일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장님이 건조한 걸 정말 싫어하시니까, 칵핏에서 콜 오기 전에 자주 차를 갖다 드리도록 해. 커피는 절대 안 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온도를 아주 잘 맞춰야 해. 딱 한마디만 해줄게. 무조건 뜨겁게 만들어야 돼! 최대한 뜨겁게! 기장님은 미지근한 걸 제일 싫어해. 물은 아주 차가워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차갑고 뜨겁게. 그것만 기억해둬.”

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H는 경력이 많은 시니어 승무원들도 힘들어했다. 

예정보다 지연되기 일쑤인 비행기 출발 시간을 트집 잡고, 기내식을 혐오하는 일부 일등석 승객을 손쉽게 누그러뜨렸던 친절과 노하우도 까다로운 H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그가 훌륭한 조종사인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좋은 동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사강. 내가 보기엔 넌 승무원 매뉴얼북 그대로라 정말 잘할 것 같아. 매뉴얼대로! 그게 기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고전적인 훈육법은 국경이나 인종을 떠나 예외 없이 비슷하다.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멍청한 악질이 아닌 이상, 누구도 처음부터 후배를 닦달하진 않는다. 당근을 많이 준 토끼가 배불러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순간, 채찍을 들이대며 호통을 치는 쪽이 효과적이고 더 큰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강 역시 H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유달리 먼지가 잘 보이는 칵핏에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도 부기장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사무장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잘 만들 순 없어도 최대한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H의 명성이 막 열정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한 신입사원의 모험 정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종석에서 나온 사강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강은 쟁반을 든 채 갤리 안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강이 조종석에 들고 간 쟁반 위의 찻잔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사강의 앞치마는 3분의 1이나 물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손등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윤사강, 괜찮아?”

어느새 기내 복도에서 면세품 카트를 밀다가 갤리로 돌아온 승무원들이 사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불안전한 기류 때문에 올려놓은 집기들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류에 익숙한 승무원들은 누구 하나 비틀거리지 않고 꼿꼿이 그곳에 서 있었다. 사강은 젖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검정색 비행 슈즈에도 물이 튀어 있었다. 몇 분 사이 손등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  

“너 손은 왜 그래? 데었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윤사강이 H에게 특별한 예외가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악랄한 동료애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라는 듯 말이다. 

“선배님! 어떡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미소가 재빨리 그녀의 손등에 얼음을 끼운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 안에 얼음을 몇 개 더 쥐고 있었다.  

“기장님…… 괜찮으시겠죠?” 

사강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런던에 도착하면 사표부터 써야 할 거예요, 저.”

“무슨 소리냐구!”

“윤사강, 너 사고 친 거야?”

사무장이 물었다.

“제가 뜨거운 차를 쏟았어요. 거기에. 정중앙.”

사람들이 일제히 사강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변명처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칵핏으로 얼음이랑 물수건 보내, 당장!”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강의 손등에 물수건을 얹었던 미소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틀어막고 어깨가 흔들리도록 웃었다. 발밑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선 ‘떨어진다’라는 말은 금기어다. “나 공항에 다섯시에 떨어져!” 같은 일상적인 말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사강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추락이었다. 

 

매달 21일 승무원들은 한 달 치 비행 스케줄 표를 받는다.

그때, 자신과 비행할 ‘크루 리스트’도 함께 받는다.  

사강은 H의 747-400을 타고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에 가는 일이 없도록 매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난 건 1년 동안이었다. CARGO 기종인 그의 비행기가 승객이 아니라 종종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팀인 윤희가 네 번이나 H의 비행기를 타는 동안 그녀에게는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그날, 사강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표를 읽고 또 읽었다. 

‘드디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녹차 때문에 생긴 얼룩진 자신의 앞치마를 빨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윤희가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객에게 받은 첫 번째 항의 레터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강이 사무장의 충고대로 팔팔 끓는 물에 녹차 티백을 넣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던 녹차가 그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몸의 정중앙에 낙하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난기류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스캔들과 소문을 먹어치우는 회사의 빅 마우스들은 ‘H의 장엄한 소시지를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되는 맹랑한 꼬마가 끓는 물에 삶았다’고 표현했다. ‘운동광인 H가 그날 이후 클럽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돌았다.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사강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표는 말도 안 돼! 그거, 등신 인증이라고! H를 피하면 너만 손해야. 어차피 부딪히게 될 직장 상사라고. 그건 누가 뭐래도 실수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윤희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H 얘기를 종종 꺼냈다. 대부분은 그와 함께 비행하며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가끔은 다른 종류의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H는…… 어떤 땐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질 않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20회>

*


“그만둬. 무리야, 도저히 무리.”

미우가 말했다.

“미쳤니? 이게 어떤 기회인데. 돈 많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지휘자가 됐는데 내가 그걸 왜 포기해? 회사 돈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신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런 경험은 앞으로 내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언니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잖아. 모든 게 결혼정보회사 이벤트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 회사 잇속을 위해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는 거야. 부도덕해! 질이 나쁘다고!” 

“줄리아드 음대 기계공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사 빠졌니, 너? 부도덕이란 말이 뭔 줄이나 알고 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아직 징징대는 어린애라는 거야. 세상은 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전부 사기꾼에 악당들이야.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악당들이라고. 내가 하는 일은 최소한 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단 정당해. 돈을 뺏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야. 난 일시적인 장애를 돕고자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실연 때문에 엄청나게 멍청해진 사람들이라구!”

“언니!”

“그 사람들, 마음의 장애인이야. 정신적인 회로가 끊기거나 꼬였는데 사람이 멀쩡할 리 있니?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속이는 거고, 언니가 하는 짓은 양아치 짓이야. 결국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등쳐 먹겠다는 거잖아. 자기 합리화하지 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혹시 그걸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대로 된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면접관한테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면 그 사람이 감동받아 널 뽑아주겠어? 회사가 무슨 납골당이냐? 뼈는 묻길 왜 묻어!” 

“치사하게! 갑자기 면접 얘길 왜 하는 건데?”

미우가 발끈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면접에 스무 번 넘게 떨어졌으면 너도 느끼는 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백날 편의점 알바 해봐라, 거기서 등록금이 나오고, 용돈이 나오는지. 넌 모르면 가만있어. 이게 단지 내 잇속만을 위한 일은 아니라는 거야. 훨씬 더 고귀한 뜻이 담겨 있으니까.” 

미도는 미우가 이해하기 힘든 얘길 하며 조용히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옆에 있던 초록색 스탠드의 불을 켰다. 고객 리스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미우는 침대에 누워 읽고 있던 신문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나 내일 최종 면접이야.”

“알아.”

“잘하라고 말 안 해줄 거야?”

“말 안 해도 잘할 거잖아.”

“언젠 스무 번이나 떨어졌다고 비꼬더니!”

“그건 네가 네 스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사에만 지원했기 때문에 그래. 정신 차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실연당한 사람들 말고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을 위로해주는 건 불가능한 거냐?”

미우가 뭔가 억울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 게 위로라고.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이 진짜 위로를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위험성을 미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그래서 난장판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최초의 제안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분노에 차 회사를 상대로 고소라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다. 

미도는 회사 법무팀에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의했다. 보안상 그런 상황이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므로 준비는 해둬야 했다. 위험 요소가 많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갖는 열매도 크고 달다. 어떤 위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세상의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 점심 따위는 없으니까.

미도는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특별관리’라고 적혀 있는 컴퓨터의 작은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를 열자 몇 명의 고객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나타났다.  

정현정.

미도는 현정의 이름을 클릭했다. 증명사진과 함께 나이와 키, 학교와 주소 등을 기록한 구체적인 개인 정보들이 화면에 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거야.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미도가 열어놓았던 노트북의 창들을 닫으며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르네 마그리트의 화집을 넘겨보던 미우가 미도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그치?”

“응. 이번 회사엔 진짜 합격이야!”

“아님 백수가 되겠지.”

“너무하다.”

“비올라 들고 음대 들어갔던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갑자기 의대에 들어가고, 다시 적성에 안 맞는다고 천문학과에 들어가는 것만큼 나쁠 일이 또 어디 있겠니? 가장 나쁜 건 나처럼 그런 인간의 언니가 되는 일이야!”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미도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미도는 짜증스런 얼굴로 미우를 바라봤다. 건조하게 튼 입술 사이로 일어난 보풀들, 지문이 잔뜩 묻은 안경을 끼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폼이 고등학생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미도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우가 의대에 들어가면 앞으로 병실 잡을 걱정은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비올라든 깽깽이든 하기만 하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미우가 머리 하나는 타고나게 좋아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지역 수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화났냐? 미안.”

미우가 베개를 앞에 두고 넙죽 절을 하며 미도를 바라봤다. 앞으로 묶은 야자수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듯 앞뒤로 달랑거렸다.  

“미안하단 말은 어쩜 밥 먹듯 저렇게 잘하는지. 넌 자존심도 없냐?”

“응. 그게 얹혀사는 사람의 예의지.”

미도는 미우를 노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고시원은 너무 작아서 싸움을 하기에도, 애정을 나누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살려면 무조건 크기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도 작게, 기쁨도 작게, 희망도 좌절도 작게, 작게! 그것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안 하는 내 미래를 언니가 왜 걱정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언니는 발터 벤야민처럼 토성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느리게 공전해야 하는데, 밥벌이 때문에 타고난 기질을 누르고 빠르게 휘몰아치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야. 점점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지는 거지. 특히 얼굴 누렇게 뜨고 현기증 자주 나는 거. 오늘 너무 피곤해 보인다.”

천문학과를 나온 미우가 토성이며 화성 공전 자전 타령을 할 때마다 미도는 지구처럼 자기 몸도 10도쯤 기우뚱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토성은 무슨. 간 때문이야!” 

미우가 웃었다. 크게 웃으면 옆방에 사는 총무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들 자매는 리모컨 볼륨 1 정도로 소리를 조금씩 죽이며 히죽거렸다.  

미도는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번 프로젝트는 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이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정말 그런 모임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나올까. 며칠 후, 대표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참가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것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회>


팀장들 모두가 일제히 대표를 바라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디서건 늘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덕분에 표정을 읽기 힘든 사장의 얼굴에 얼핏 미소 비슷한 것이 점처럼 찍혔다 사라졌다. 그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미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란 사람들은 원래 칭찬에 목말라 있고, 장점과 강점 같은 단어에 눈먼 존재들이라는 걸 미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위치한 회사라는 게 장점이죠. 그런 분위기 때문에 타사에 비해 회사라는 딱딱한 느낌이 덜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 준다는 강점이 있어요. 바빠서 잘 가진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의 지하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도 있더군요.”

회장은 처치 곤란이라며 당장 없애고 싶어 하지만 전직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아들이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풍문 속의 독립영화관이었다. 미도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표를 바라봤다.  

뉴욕의 NYU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관객이 거의 들지 않은 망한 영화 몇 편을 찍기도 했던 대표의 눈빛이 검정색 선글라스 속에서 반짝였다. 짙은 그림자처럼 늘 표정을 감추어주던 선글라스는 역설적으로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대표는 무심히 몸을 틀어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가 의자를 살짝 끌어당길 때마다 팀장들의 눈도 바쁘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미도는 잠시 테이블 옆에 있던 생수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했다. 

“생수가 800원짜리 생수통에 담겨 있으면 그냥 800원짜리 편의점 생수가 되겠죠. 하지만 아티스트가 특별히 디자인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이름의 병에 담는다면 그 가치가 얼마로 올라갈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고객에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제 ‘스토리’는 우리 업계 최고의 화두가 될 거예요.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나와서 비빔밥 한 그릇에도 이야기를 담자고 목 터지게 외치는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 팀들의 화합이 아주 중요해요. 분열되지 않고 서로 똘똘 뭉쳐서 이번 기회에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고객들을 확보하는 겁니다. 이런 기획이 아니라면 절대로 결혼정보회사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도도한 고객들 말이죠. 우리에게 열광하는 만큼 우릴 경멸하고 혐오하고 심지어 경박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미도는 조 부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기술에 접목되어야 할 것이 휴머니즘과 인문학이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매칭 계획서나 던져주고, 전화 몇 통 해대면서 우리 회사랑 제휴된 회사가 500개다 600개다 같은 광고 정도로 사람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는 결혼 비즈니스에 눈물이 넘쳐나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접목시키는 거예요. 이 감수성 넘치는 고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서비스를 받게 될 거고, 미래에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들이 될 겁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어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전 이렇게 되돌려 말하겠습니다. 행복한 커플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커플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우리의 타깃은 이미 헤어져서 불행한 커플들이에요. 제각각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미도는 마우스를 클릭해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 파일을 열기 시작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이것이 이번 비밀 프로젝트의 제목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가능하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제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L 결혼정보회사의 대표이사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망한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러나 세상에 망한 영화감독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치열한 영화계에서 입봉조차 못한 조감독 출신들이 즐비한 지금, 그가 말아먹은 영화가 중요해질 일 따윈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원 숫자만 400명이 넘는 이 거대한 회사 사람들에게는 ‘망한 영화감독 출신의 결혼정보회사 대표’라는 긴 이름만큼 부조리한 직함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표는 가끔씩 나타났지만 사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로 예의 발랐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뉴욕 양키tm 야구 모자를 쓴 채 양복을 입는 등 단번에 ‘워스트 드레서’에 등극할 괴상망측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물론 그가 누가 봐도 형편없는 야구 영화를 만들었다가 쫄딱 망해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도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야구 모자를 시도 때도 없이 쓴다거나, 번식욕이 유달리 강한 회장의 배다른 자식일 거란 루머는 막 입사한 신입사원들까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도의 이번 프로젝트는 ‘원탁의 기사’ 단 네 명만 참석해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원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진들에겐 무늬만 사장이라고 생각했던 대표가 회의 중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빅뉴스였다. 그런 대표가 한 번도 벗지 않던 선글라스를 벗고 박수까지 쳤다는 믿기 힘든 소식은 삽시간에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물론 회사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건 이 회의를 주재했던 사람이 정미도라는 사실이었다.   

미도가 한때 영화감독이었던 대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벤트로 ‘시네마테크’와 영화를 이용한 영악한 마케팅을 펼쳤다는 건, 그녀를 시기하는 쪽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미도의 이해할 수 없는 레이어드 룩, 일명 ‘덕지덕지 패션’ 역시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란 말도 흘러나왔다. 팀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미도는 ‘마녀’와 ‘악녀’, ‘천재’로 각기 이름을 달리하며 회오리 같은 소문 속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  

소문과 악명!

이것이야 말로 회사 생활의 꽃 중에 꽃이다. 악명은 정미도에게 회사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었다. 미도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진행해나갔다. 그녀는 즉시 시네마테크 관계자를 만났다. 다음 날 지독한 경영난으로 레스토랑을 포기하려는 유기농 레스토랑 주인을 만나 포섭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해 정기화될 경우 회사가 얻게 될, 이익과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권위와 명성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는 미도가 지켜온 원칙 중 하나였다. 뜸들이다가 김새는 일은 쌔고 쌨다. 당장 돈이 없어 내일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감각이 그녀에게 준 것은 ‘핵심이 아닌 것은 전부 지워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시원에 도착한 미도가 이 화려한 성과에 대해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단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정미도! 이 천하의 사기꾼!”

그것이 동생 미우의 평가였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18회>

  

정미도가 오피스텔이 아닌 회사 근처 고시원에 살게 된 건, 대부분 잠만 자고 나오는 공간에 관리비나 도시가스비 같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충청남도 삽교에서 여고를 마친 미도는 하루 서너 시간씩 쪽잠을 자며 대학을 다니던 칠 년 반 동안 각종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편의점, 호프집, 백화점 가구 매장 아르바이트 이외에 그녀는 여덟 가지 이상의 일을 했다. 삽교에서 같은 여고를 다니는 여동생의 학비와 레슨비도 그녀가 보내줘야 했다. 

“비올라? 꽃 이름 말하는 거야?”

동생이 이름마저 생소한 악기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미도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바이올린도, 첼로도 아닌 비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도가 ‘일단 해봐!’라고 말했던 건, 가녀린 외모와 딴판인 기질적인 호탕함과 그녀의 낭만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미도가 즉석 밥 하나로 하루 세 끼를 나누어 해결하던 생활밀착형 인간인 건 사실이었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돈을 아끼려다 보니 그런 식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체류비가 많이 들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사실이었다. 평생 삽다리 촌 바닥에서 살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미도의 아빠는 간암으로 죽기 전, 그녀에게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넌 넓게 살아라. 


그건 대처로, 서울로 가라는 뜻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충청도 번호판을 단 택시기사로 좁아터진 택시 안에서 다리 한 번 마음껏 못 뻗고 생을 마감한 아빠의 뜻에, 소작농으로 평생 좁은 땅뙈기에서 마늘밭을 일구던 할아버지의 뜻까지 보태 더 넓고 크게 해석했다. 

미도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유일한 사치는 인터넷 여행 사이트를 뒤지며 중간 경유지에서 손님들을 태우고 오느라 직항보다 적어도 스물네 시간은 더 걸리는 싸구려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이었다. 호주, 이집트, 미국, 인도 같은 나라를 그녀는 그렇게 여행했다. 모두 광활하고 따뜻한 나라들로, 겨울이 아예 없거나 한국이 겨울일 때 여름이거나,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대는 나라들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취미를 살려 대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여행사의 가이드로 첫 직장을 얻었다. 그때 마닐라의 로컬 여행사 현지 가이드에게 푼돈을 줘가며 현지인들이 쓰는 타갈로그식 발음이 섞인 서바이벌 필리핀 영어를 배운 덕분에 일 년 후, 미도는 해외영업팀으로 보직을 옮길 수 있었다.

자기 몫을 다하며 비교적 잘나가던 그녀가 첫 직장을 그만둔 건 다니던 여행사의 부도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운이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껄끄러운 결말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싫어하는 엔딩이었다. 

남녀 관계에서 사표를 던져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헤어지거나. 

결혼하거나. 

정미도는 사내 커플이었다. 사내 연애의 단점이 현실적으로 폭발할 때는 커플이 찢어질 때다. 헤어져도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것 이외에 하나로 통일되던 많은 것들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 그건 누군가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지혁, 당연히 네가 그만둬야지!”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은 쪽이 회사에 남는 게 당연하다는 쪽은 미도였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미도는 홧김에 사표를 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다른 일에 대한 신념이 있다기보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게 구차해서였다. 지혁과 헤어지고 난 후, 옮긴 직장 생활은 이 두 가지를 일일이 확인하며 증명하는 일이었다. 

“결혼이 사랑과 낭만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조건과 현실을 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죠?” 

정미도가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회사 근처 대로변에 있는 ‘필승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골드스타 안테나’가 다양한 수치의 통계 자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고 있었다. 미도는 회의실에 모인 부서 팀장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보여주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일단 헤어져야 만난다는 사실이에요. 이걸 한자로 정리하면 뭔 줄 아시죠?”

동그란 유리 원탁에 앉은 팀장들이 사자성어를 찾느라 골몰하고 있을 때,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쏟아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실연은 또 다른 기회예요. 실연당한 사람들이야말로 잠재적인 우리 고객인거죠. 이혼이 우리 업계의 블루오션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청첩장 사이트에 ‘재혼 시 50퍼센트 세일’이란 문구를 붙여놓는다고 생각해보시죠. 아마 그 사이트 재수 옴 붙었다고 단번에 악플에 시달리고 망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재혼을 겸하지 않는 결혼정보회사는 한 곳도 없어요. 결혼과 이혼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다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감각은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에요. 이혼 전문 변호사가 자신의 고객 정보를 이용해 재혼 전문 결혼회사를 차리는 세상이에요.”

미도가 “그렇지 않나요?”라고 묻기도 전에, ‘원탁의 기사들’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팀장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연당해 돌아온 싱글들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싱글들이 모이라고 한다고 얼씨구나 좋다고 모여들까요? 아니죠! 그들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 있어요. 그들은 누구보다 불행합니다. 불행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이죠! 누군들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이 상대방에게 차일 거라고 상상했겠어요? 자신이 혼자라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몸부림치고 있다구요.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맞아요! 불면증. 아주 심각한 불면증이 생기는 거죠. 약도 없어요. 수면제도 소용없죠.” 

미도는 온몸으로 ‘저도 겪어봐서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팀장들은 감정이 실린 그녀의 손가락과 명료하고 단호한 눈빛에 빠르게 감응하고 있었다. 

“우리는 실연의 가치에 대해 사업적으로 접근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인과 헤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일은 철저히 정서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거기엔 그 어떤 사업적인 냄새나 낌새도 새어 나가선 안 돼요. 요즘 고객들, 아무리 잡지나 신문에 기사처럼 꾸며도 애드버토리얼이라면 귀신같이 알아내니까요. 아주 까다롭고 감성지수가 높은 고객들이에요. 우리보다 고객들이 더 똑똑합니다. 최 팀장님도 아시죠?”

반쯤 눈을 감고 졸고 있던 최 팀장이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는 피곤해질 수도 있는 릴레이 회의 사이사이 적절한 순간에 불쑥 동의를 구함으로써 잠시도 자신의 이야기에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브리핑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상처 받은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게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뺨을 치다니요?” 

옆에 있던 조 부장이 미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헤어진 사람들은 전부 울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울고 싶으면 울 수 있게 만들어줘야죠. 실연당한 사람 위로해준답시고 친구들이 해주는 이런저런 좋은 말 대신, 우리는 친구들이 절대로 해줄 수 없는 냉혹한 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니까요.”

“존재 이유라…….”  

“실컷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서 그때부터 자신의 위치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게 될 겁니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대로 뺨 맞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때리되 때리지 않았다는 듯 의뭉스럽게 시치미를 떼야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데 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 부장이 미도를 바라봤다.

“누군가 대뜸 조 부장님 뺨을 때렸다면 기분 나쁘고 아프지 않겠어요?”

“뭐…… 당연히.”

“아프겠죠! 부지불식간에 맞고 나면 아무리 멍한 상태인 사람이라도 내가 대체 왜 맞았을까 생각하지 않겠어요? 왜 내 뺨을 쳤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까요?”

“거야 억울해서라도 그렇겠죠.”

“보이지 않는 정신적 타격! 그게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될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세밀한 기획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이들이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충분히 울었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새 인연을 찾아라! 이게 포인트예요. 이해되세요?”

“…….”

“너는 혼자다. 이제 당신은 홀로 남겨졌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거죠. 애인을 잊지 못해서 과거의 연인과 유령처럼 동거 중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생각보다 많아요. 혼자라는 걸 깨닫지 못해서 오랫동안 싱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우리가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회사의 강점을 여러모로 생각해봤습니다. 회원 수가 많다는 것 역시 장점이 되겠지만 우리만이 가진 의외의 강점이 있더군요.”

“그게 뭡니까, 정 과장님?”

내내 침묵하던 대표가 미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