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여자가 다시 한 번 유쾌한 듯 공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간이 발명한 것들 중에 공항만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건 없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안전벨트에 묶여 장시간 기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기막힌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공항이야말로 ‘날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동사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공항과 비행기를 함께 생각하고, 그것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의 투명한 뼈를 만지고 자유로운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공항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도 그런 것이다. 떠나고 싶어! 런던! 뉴욕! 도쿄! 아니 더 멀리. 케이프타운 같은 아프리카로!

“어머. 도착하나 봐요.”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누구에게든 쉽게 마음을 열고, 쉽게 말을 거는 여자들이 갖는 특유의 밝고 낙천적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바라봤다.

“그쪽도 누구 기다리죠? 승무원복 입고 기다릴 정도면 애인?”

“아뇨. 친구.”

“난 남편인데. 좀 재미없다.”

여자가 잠시 사강을 바라보다가 아직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주시했다. 이제 짐을 가득 든 사람들이 저곳의 문을 향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간절히 원하던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갈 것이고, 악수와 뜨거운 포옹과 사랑스런 입맞춤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모든 사랑이 영화처럼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공항의 출입구에서라면 누군가의 사랑을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다.

“우리 집 남자, 걸음이 엄청 빨라서 공항에선 늘 제일 먼저 나오곤 해요. 제가 너무 걸음이 빠르다고 늘 툴툴대는데도 절대 고쳐지지가 않는다니까요. 딸애랑 걸을 때만 걸음이 느려져요. 거짓말처럼. 재밌죠?”

사강은 여자의 눈가에 그려진 깊고 자잘한 주름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여자의 귀밑머리에서 짧고 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였다.

“제 말 맞죠? 제일 빠르잖아요. 저런 식이라니까. 밥도 얼마나 빨리 먹는지. 전 가봐야겠어요.”

여자가 일어나며 사강에게 말했다. 그녀는 사강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자주 웃었던 사람에게서 보이는 입가의 주름들이 부드럽게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생애의 대부분이 평온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란 소녀는 틀림없이 건강하고 따뜻한 숙녀로 자라날 것이다. 사강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주근깨가 올라온 발그레한 뺨과 햇볕에 탄 건강한 무릎.

사강은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정수가 인파 속을 뚫고 플라이트 백을 끌며 빠른 걸음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정수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곧 정수의 품에 안겼고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었다. 사강은 인파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동공이 커지고 포옹과 악수와 뜻밖의 웃음이 공항의 B 게이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윤희가 사강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이 탄 공항버스가 빠르게 인천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따뜻한 봄바람이 지훈의 코끝을 스쳐갔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위에서 지훈은 언젠가 길 위에서 보았던 몽환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12월 경부고속도로 길가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활짝 피어난 목련을. 그는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사강이 도쿄 아카사카의 공원에서 한밤중에 태양을 보았던 일만큼이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강물이 어는 혹한 속에 꽃을 피우고, 별도 뜨지 않은 한밤중에 태양을 뜨게 하는 것, 지금 그는 그것을 ‘기적’이 아닌 ‘사랑’이라 불렀다. 그가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엔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뿐이었다. 오전 일곱시에 만나 텅 빈 앞좌석을 바라보며 스물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아침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침 일곱시부터 성장을 한 채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아침 여덟시부터 잘 다린 옷을 차려 입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느 날, 시간이 거짓말처럼 뒤집어져 밤과 낮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착시들. 그것이 스물한 명의 사람들을 오전 일곱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란 긴 이름의 레스토랑 앞에 집결시켰다.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지훈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의 트위터에서 희망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네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잠든 사람이 적어도 다섯 명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한 명이 코를 골았고, 그중 한 명이 꾸벅거리며 졸다가 옆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는 것이다. 연인을 잃고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잠들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악몽을 떨쳐내며 선잠을 자는 풍경. 시인 최영미가 「사랑의 시차」에서 말했었다.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라고.

서울과 상파울루의 시차는 12시간이다.

그날, 지훈이 목격한 12시간은 그러나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헬싱키와 막 섬머 타임이 가동된 도쿄 사이에 벌어진 시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애 중인 사람들 사이에 생긴 사랑의 시차도 아니었다.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과 일상의 사람들 사이에 생긴 선명한 시차였다. 연인의 실종과 함께 벌어진 12시간이라는 틈 사이로 ‘과거’라는 이름의 폭우가 몰아치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영화가 계속해서 상영되던 시간의 낙폭이었다.

누군가 외로움의 각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라고 한다면 지훈은 그날 아침, 자신이 보았던 시침과 분침 사이의 거리를 잴 것이다. 그는 수학자처럼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따위엔 결코 나오지 않지만 외로움의 각도는 ‘150도’라고.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가 가리키던 오전 일곱시의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각도를 보면서, 그는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공항버스가 빠르게 공항터미널 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문 밖 하늘 위로 길고 하얀색 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L항공사의 비행기가 보였다.

한때, 저런 비행기 중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뉴욕의 한 건물을 향해 날아갈 때, 세계무역센터 101층에 갇혀 있던 한 여자가 기도하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의 충돌과 폭발이 일어난 후, 그녀 앞으로 엄청난 먼지와 연기가 달려들었다. 이미 벽이 무너져 내린 사무실에서 죽음을 직감한 그때,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 듯이 구조 요청을 하느라 배터리를 거의 다 소모한 그녀가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비행기가 충돌한 것 같아. 사랑해 당신, 영원히. 안녕!”

아메리카 에어라인 11편이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하던 순간, 몇몇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수화기를 든 그들이 누군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살려줘’,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가 아니라 ‘사랑해’, ‘고마워’,‘미안해’ 같은 말들이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감기 직전 지훈에게 했던 말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지훈은 결코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고로 부서진 자동차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엄마가 어린 지훈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했던 말도 그런 것이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죽더라도 영원히 널 사랑해…….’ 결국 이 세 마디면 다 되는 게 아니었을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죽음의 순간 사람들이 기억해낸 말이 끝끝내 그런 것들이었다면 말이다. ‘형을 부탁해’가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해도, 지훈은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훈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꼽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몸을 조금씩 돌리며 태엽처럼 조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버스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태양이 뜨겁게 녹아 서서히 가라앉는 쪽을 향해 자신의 손목시계를 비추었다.

오후 일곱시.

시계는 오전 일곱시와 같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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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8회 >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정말 놀랍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은 거니?”

일주일 후, 지훈은 현정을 만났다.

“내 로모!”

그가 카메라와 함께 내민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필름과 사진이었다. 모두 24장이었고, 대부분 햇빛이 들어가 퇴색해 있었다.

“필름에 햇빛이 들어갔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

“아니, 이 사진은 오히려 번져서 더 멋지네. 예술작품 같아.”

현정은 코앞까지 바짝 사진을 당겨 사진 속 장소를 일일이 확인했다. 성산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현정은 햇빛 속에 들어가 놀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 보이진 않지만 그때 현정은 내내 맨발이었다.

“고마워. 나라면 너처럼 못 했을 거야. 아마 꼭 숨기고 절대 안 줬을걸? 넌 진짜 신사야.”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신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고마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쿄에서 사강이 건네주었던 사진은 현정이 애타게 찾고 싶어 하던 제주도 사진들이었다. 사진은 현정이 태어났고, 현정이 유년기를 보냈던 제주도의 바다와 해녀 마을을 담고 있었다. 7년에 걸쳐 찍힌 추억의 지층들이었다.

현정은 자신의 로모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 로모 카메라를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은 현정을 깜빡 놀라게 해주기 위해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안에 넣어 ‘처리’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현정 옆을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몇몇이 지나갔다. 현정과 눈을 맞추며 웃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인사했다.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 수업이 있어.”

“알아.”

“내가 진짜 고마운 게 뭔지 알아?”

“안다니까.”

현정이 긴 숨을 내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늘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얼마나 날 원망했을지도 알 것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정말이야.”

지훈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멀어져가는 현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정이 뒤돌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로 시작하는 사랑보단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늘 더 힘들다. 상대보다 힘든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훈에게 그것은 운동장을 빠르게 뛰는 현정의 뒷모습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안녕!”

현정이 뒤돌아 배낭을 멘 사진 속 소녀처럼 손을 흔들었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운동장 정중앙을 가로질러 천천히 저 끝까지 걸어갔다. 그래, 안녕.

“여기 오클랜드발 비행기 도착하는 출입구 맞죠?”

사강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는 오랜만이라, 좀 헷갈리네요.”

선글라스를 밴드처럼 낀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웃으면 오른쪽 입술 아래 작은 보조개가 팬 여자였다. 많아봐야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는 하이힐이 아니라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29번 출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도착을 기다리며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하얀색 피켓을 들고 ‘MR LEE’를 기다리는 전자회사 직원과 한 무리의 여행객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과 오클랜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과 아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뒤섞여 출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착륙하길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여기 맞는 거죠?”

여자가 사강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맞아요. 한 출구로 여러 곳에서 돌아온 비행 승객들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기다리시는 분도 이곳으로 나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여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자주 봤다.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지연’ 사인이 뜰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여자를 본 지 오랜만이었다.

“근데 오클랜드발 왜 자꾸 도착 지연이죠? 30분이 넘었는데.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뇨. 종종 있는 일이에요. 출발하는 공항 대기 시간이나 기상 상황이 늘 바뀌니까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곧 도착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로, 참 친절하시네요. L항공사 승무원?”

여자가 사강의 L항공사 마크가 찍힌 크림색 제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오면 정말 이상해요. 떠나는 것도 아닌데 진짜 떠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막상 공항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보고 싶었단 생각이 들거든요. 공항이란 데가 참 이상하죠? 나만 그런가?”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여행가는 것보단 공항 오는 쪽이 더 설렌다고 할까. 공항에만 와도 꼭 여행 다녀온 느낌이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즐거운 얼굴로 사강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그랬어요.”

사강이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 오는 게 늘 즐거웠거든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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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 회>

누구에게나 소설의 엔딩이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소설의 끝은 책의 중간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소설의 첫 페이지 첫 번째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강에게 『슬픔이여, 안녕』의 엔딩은 소설의 마침표가 끝나는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 사강은 이 책의 번역자가 쓴 책 말미에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때의 아빠처럼 그녀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나보내며, 어린 딸을 떠올리다가 그가 했을지도 모를 마지막 말을.

* ‘슬픔이여, 안녕’, 여기에서의 안녕(bonjour)은 헤어질 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합니다.

사강은 책의 번역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아빠의 옛 이름이었다.

*

정전이 있던 날 아침.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강은 정수와 마주쳤다. 이른 아침이었다. 정수는 사강을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코너를 빠르게 돌아 사라졌다. 하지만 사강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지 못한 척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기장님.”

지난 일 년 동안 정수를 피해왔던 것과 다르게 사강은 조깅복을 갈아입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강은 자신의 아침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침묵 속에서 응시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강이 말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아침 인사를 깊은 침묵으로 응대하는 건 분명 ‘사랑의 역사’의 마지막 장에나 쓰여질 비극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숙한 어른들의 언어인 침묵의 진짜 의미를 아프게 배워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사람은 아주 조금씩 성장해간다. 침묵 속에서 사강은 멈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정수가 엘리베이터에 탄 채 사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에 타지 않았다. 정수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사강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정수가 그곳을 벗어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사강은 멈추지 않았다. 정수 역시 닫힌 문 사이로 자신처럼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는 걸 사강은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굿바이’가 아니어서.

안녕이 ‘헬로우’여서.

다행이었다.

정말.

도쿄 출장에서 돌아온 한 달 후, 지훈은 자신의 오래된 자동차를 중고 매매상에 팔았다. 그의 운전면허는 100일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도시에 사는 남자가 난데없이 자동차를 팔아 치울 때, 그의 삶은 적지 않은 변화로 몸부림친다. 일명 자동차 금단 현상. 차를 팔아 치운 후, 한 달 동안 지훈은 사람이 미어터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수없이 발을 밟혔고, 오전 여덟시의 신도림역에서 새로 산 양복의 첫 번째와 세 번째 단추가 동시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언제나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지훈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빠르게 걸으며 서울 시내를 이동했다. 이제 지훈은 자동차를 버리고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게 하는지 60분짜리 연설 원고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도 발견했고,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았다.

연수원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지훈은 문득 현정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수나 예산 같은 작고 소박한 지방의 터미널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여유롭게 창밖 풍경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범칙금 통지서를 여덟 통이나 받는 초유의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를 팔아버리는 따위의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볍씨왕’ ‘근사미’ ‘금자탑’ 같은 각종 농약 이름이 적힌 야구 모자를 쓴 늙수그레한 노인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올해 사과 작황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지훈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그때, 그 노인에게서 보았던 형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한때 그에게 시간은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사실 그것은 2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던 자신의 애마를 팔아 치우는 것 같은 파격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겼다.

이 모든 게 결국 현정 덕분이었다. 지훈은 이제 끝끝내 미뤄뒀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산의 버스터미널 매점 앞에서 현정에게 온 마지막 문자 메시지에 답을 했다.

6개월째 미루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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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9부 슬픔이여, 안녕

-언니. 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 비행기 타야 돼. 나리타공항 도착하면 전화할게. 아까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도쿄 티켓 아직도 그랜드 바긴이야! 대박 싸다고! 내일 당장 이곳으로 와. 뒷일은 걱정 말고. 홧팅!! ^^

미우에게 문자가 온 건, 서울로 진입하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였다.

미도는 간단히 답장을 쓰고 창문을 내려다봤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도로는 거의 주차장처럼 변해 있었다.

대표의 전화를 받고 미도의 머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비즈니스로 이용한 자신의 행동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었다. 미도가 변명처럼 우정을 가장했던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다가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미도는 불평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치웠던 것뿐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실질적인 리허설 없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미도는 며칠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모든 것들을 진두지휘했다. 먼저 시네마테크 옆에 있던 유기농 레스토랑의 주인을 만나 식당을 정리하는 대신 리노베이션 하는 쪽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리노베이션 비용의 일정 부분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대신, 이벤트에 필요한 메뉴를 함께 개발하자는 조건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레스토랑 이름이 반드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어야 해요. 이름만 바꾸면 식당 홍보를 위한 기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사람들이 모르던 이곳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거죠.”

오너 셰프인 주인은 미도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건강식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계획대로 미도는 테이블과 의자의 배치부터 전부 바꾸었다. 그곳에서 감정을 고양시킬 비발디의 음악을 틀고, 물기가 많은 따뜻한 음식을 순서대로 내놓는 것 역시 그녀가 진두지휘했다.

정미도가 세심히 고른 것 중엔 레스토랑 벽 중앙에 걸린 거울도 있었다.

빈티지 가구를 파는 이태원 가구 골목을 돌며 미도는 아름답고 우아한 거울들을 사들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거울. 하지만 새벽 옹달샘처럼 선명해서 사람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까지 흡수할 것 같은 얼룩 없이 깨끗한 거울 말이다.

미도는 조찬 모임을 위해 일렬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레스토랑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보게 될 장면들을 수없이 그렸다. 그것은 마음속 가장 아픈 상처를 남김없이 건드리는 것이어야 했다. 자신들의 등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알게 하는 강력한 것이어야 했다.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고, 정지했을 리도 없으며, 세상 속의 연인들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고 밀려간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오전 일곱시가 겨우 넘은 시간. 회사원들이 즐비한 길 위에, 대학가에서나 볼 법한 젊고 아름다운 커플이 유독 많이 지나갔던 건 미도의 섭외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실연당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보게 될 거울 속 연인들의 모습은 미도가 감정을 극점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클라이맥스였다. 정미도의 사업가적 기질은 일정 정도의 죄책감을 증발시켰다. 무엇보다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는 점에 그녀는 고무되었다. 그녀가 세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은 성공적이었다. 정미도의 프리젠테이션 부제 그대로 ‘헤어져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믿기지 않게 긴 제목의 이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 트위터뿐 아니라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던 그때, 이런 아름다운 이별의 예식이 한 번 더 존재했으면 하는 요청이 미도에게 전해져왔다. 놀랍게도 소식은 글로벌 네트워크인 트위터의 특성상,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의 작은 섬에 사는 어느 빨간 머리 주근깨 소녀에게도 전해졌고, 자신이 갖게 된 실연의 기념품과 그것에 얽힌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이일 땐 한 손에 안길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두 팔로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실연의 기념품으로 남았다는 여자가 있었고, 그 개를 자신이 키우고 싶다는 세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자신에게 남게 된 세 장의 버스 카드와 직접 털실로 짠 양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지만 한여름 단 몇 시간 만에 쉬어버렸다는 김밥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이 실패였다는 점과, 그들에게 남겨진 쓸모없는 물건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터무니없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과 함께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쓸모없는 것만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트위터에 이런 문장을 남겼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겨진 실연의 기념품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을 아름답게 추억하자는 합의가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을 만들었다. 수천 개의 리트윗과 멘션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회사는 이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조찬 모임’이 성공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심스레 이번 프로젝트를 회사 내로 끌어들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셈이었다. 방송으로 비유하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아직 정규 방송으로 편입되진 않았지만 앞으로 대박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도의 메일함은 사람들의 편지와 쪽지로 가득 찼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별을 받아들였고, 이제 슬픔을 털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실연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참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받은 위로의 증거들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미도는 자신의 트위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뵈었던 윤사강입니다. 실례이긴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모임에 참석했던 이지훈 씨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미도에게 이 쪽지보다 모임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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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회>

타인의 비밀을 듣는다는 건 큰 책임을 요구한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책임, 간직하는 동시에 떠나보내야 하는 책임, 묵언의 서약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 역시 꺼내놓아야 하는 책임. 비밀은 공유하고 나눔으로 짓눌린 무게의 짐을 스스로 덜어놓는다.

‘간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를 마음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다. 비밀은 누군가에 의해 간직된다. 우리가 ‘간직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래된 장롱 ‘속’이나, 복잡한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금고 ‘안’이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렵게 끄집어내야 한다. ‘속’과 ‘안’ ‘곳’에 넣어두는 깊숙한 기억과 물건들.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에 닿아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것. 그 밤, 지훈이 명훈에 대해 얘기한 건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었다.

“형이 자폐아 판정을 받은 건 네 살 겨울이었어요. 치료가 시작된 건 여섯 살 봄이었고, 사고가 난 건 아홉 살 가을 무렵이었죠.”

창문에 반사된 지훈의 검은 실루엣이 촛불에 흔들렸다.

“처음 형의 이상을 발견한 건 외할머니였어요. 형은 집중력이 뛰어나서 비디오를 보거나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앉아 그것만 들여다봤죠. 형은 숫자도 놀랄 정도로 빨리 익혔어요.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 번 본 건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았죠. 형은 4시라고 말하지 않았고, 늘 시계가 4시 11분 10초를 가리킨다고 말했어요.

어른들은 형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오로지 외할머니만 예외였죠. 외할머니는 형의 집중력을 의심했어요. 형의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큰 목소리로 불러도 형은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거든요. 정말 하나도 듣지 못하는 아이 같았어요. 하지만 형이 이비인후과에서 가서 들은 얘기는 빠른 시간 안에 소아정신과로 가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그때 알게 된 거죠. 형의 증세를.

엄마는 그날로 직장을 그만뒀어요. 작가의 야망이 있는 분이셨어요. 하지만 오직 형에게만 매달리셨어요. 형에게 다양한 규칙을 정해준 것도 엄마였어요. 정해진 음식만 먹기, 정해진 길로만 다니기, 정해진 버스만 타기. 엄마는 형이 자신이 만든 규칙 안에서 생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형이 아홉 살 되던 때에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였죠.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어요. 단호하게 ‘이제부터 이 아이들은 내가 맡겠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하셨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외할머니의 검은색 벤츠와 밍크코트는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신뢰를 주었으니까. 자폐증은 유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외할머니는 평생 그것이 당신이 만든 유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외할머니는 천만 원이 넘는 모피코트를 입고서 무거운 십자가를 멘 예수처럼 사셨고, 딸과 사위의 죽음을 평생 애도하셨어요. 누군가 벌을 받아야 형의 미래가 열릴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야 인생이 공평해진다고 믿었어요. 형은 늘 빙글빙글 돌았어요. 세 번씩. 시계 방향으로. 홀수를 좋아했어요. 말도 세 번씩 외쳤어요. ‘나는’이라는 주어를 쓰면서 늘 문어체로 말했죠. 형은 숫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었어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어쨌든 형은 홀수 안에서, 숫자 3 안에 있어야 평화로운 사람이었어요. 강박증 형태로 나타나는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었죠…….”

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걸까? 설령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걸까? 형의 병이 빼앗아 간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따뜻한 공감 능력이었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은 이렇게 반응하겠구나, 라는 자기 인식.

현정이에게 전 이런 얘길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만지는 대신, 웅크린 몸을 조금씩 열리게 하는 따뜻한 포옹을 택하는 대신, 사람들이 보든 말든 꼿꼿하게 서 있는 자기 성기를 꺼내놓는 사람이 내 형이었어요. 팬티를 내리는 그 순간까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괴물같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할 수 있는 건 대낮에 벌이는 자위라는 활극뿐이었죠. 형은 웃으면서 그런 짓들을 저질렀어요. 유쾌한 확신범이었어요. 몸은 자라지만 정신은 자라지 않는 남자가 저지르는 몰상식을 감당하기엔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버렸어요. 결국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병의 증세를 교육 받고 능숙하게 협상하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졌죠.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어요.

형의 세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었어요. 자기 욕망, 자기 욕구, 자기 분노 같은 것들. 형은 타인을 향해 웃는 법을 몰랐어요. 물론 타인을 위해 우는 법도 몰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평생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죠. 그런 인간이니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요. 그래서 전 형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아예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자폐증의 가장 심한 패악이라고 생각했었죠. 이렇게 끔찍한 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유년기는 진창이 돼버렸죠.

그런 형이 언젠가 냉장고 앞에 서서 멍하게 뭔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형은 우유병을 바라보고 있었죠. 칼슘이 빠져나가는 병 때문에 할머니가 먹으라고 윽박지르며 소리치던 그 우유. 우유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걸 자동차 주유구에 퍼붓던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형이 우유병을 열더니 그걸 마시더군요. 처음엔 제가 본 장면이 환각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유령처럼 보였고, 조부모 둘을 연달아 잃은 저 역시 유령 같은 존재였으니까.

형의 얼굴을 묘사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어요. 웃는 듯 우는 듯. 우는 듯 웃는 듯. 그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어요. 눈썹이 없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것처럼 형의 얼굴은 정말 기묘하고 괴상했죠.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우는 얼굴. 아마도 형은 자기 식대로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빙글빙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 안을 돌고, 요양원 복도를 돌고, 돌고, 돌고, 역겨운 우유를 마시면서 다시 빙글빙글돌고 토하고…….

가장 큰 불안은 최악을 예상하는 일이 아니라, 최악도 차악도 뭣도 예상할 수 없을 때 생기게 마련이에요. 형을 이해하는 데 지금까지 제가 들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현정이도 무서웠겠죠. 점점 더 두려워졌겠죠.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요. 외할머니는 형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소원이었지만, 전 외할머니보다 형이 먼저 죽길 매일 밤 기도했어요. 형이 싫어서 몇 번이고 가출했었으니까. 어디론가 닥치는 대로 차를 타고 계속해서 달아났어요. 그 어딘가가 늘 형이 있는 곳에서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였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어요. 그런 거죠. 그런 식이었어요. 아무리 달아나도 돌아오게 되는 멀지만 가까운.

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탐정처럼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고, 쟁취해내는 일이에요.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카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6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철저히 노동 집약적인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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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삶을 관통하는 말은 하기 힘들다.

죄책감은 말의 껍질을 깨뜨리고, 분노와 슬픔은 껍질 안의 말을 짓눌러 부셔버리기 때문이다.

지훈은 사강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전, 한 여자의 얼굴을 목격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히 자신의 비극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면, 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것은 살아남은 아기와 죽은 사위와 딸에 대한 얘기였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녀의 얼굴은 몇 년 씩 지속되는 참혹한 전쟁의 전사자 목록에서 자식을 막 발견한 사람처럼 멍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예외 없이 담담했다. 자신의 비극을 객관화시켜 자기 자신에게 기필코 이해시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도 되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족처럼 느껴지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이야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길어졌다. 그러나 장황해지기보단 오히려 선명하고 더 명료해졌다. 사고는 교통사고로, 교통사고는 교차로에서 일어난 삼중 추돌 사고로, 교차로가 있던 곳은 강릉의 해수욕장으로 가는 국도변 과수원 길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지훈은 그런 이야기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훈련이며 몸부림이라는 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사강이 시퍼런 칼을 든 채 자신의 말투와 목소리에서 슬픔을 잘라내기까지 어느 정도의 불면을 겪었는지 지훈은 상상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담담함이 실은 많은 것들을 눌러 담고 있다는 것 역시 폐부 속 깊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담담한 얼굴로 사강은 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방으로 올라가죠. 우선 발부터 씻는 게 좋겠어요. 제게 비상 약품이 있어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일이면 아플지도 몰라요. 맨발로 걷기엔 힘든 거리였어요.”

사강은 지훈의 발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녀가 호텔 복도를 천천히 걷는 뒷모습은 언제나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사강은 카펫이 깔린 긴 호텔 복도를 맨발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사람처럼 그녀의 발걸음은 불안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너울이 심한 배 위를 걷는 듯 그녀의 몸은 자주 움직였다. 사강의 오른쪽 손엔 굳이 자신이 들고 가길 고집한 지훈의 운동화가 들려 있었다. 지훈은 방문을 여는 사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어둠에 잠겨 서늘해져 있었다. 사강은 자신의 트렁크 안에서 초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한 번에 성냥을 그어 작고 선명한 불꽃들을 만들고, 가지런히 놓아둔 양초에 빠른 속도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방 안의 스위치를 켜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늘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해 예민한 편지를 쓰는 사람처럼 우아한 동작들이었다.

빛이 방 주위에 점점 더 차오르자 방 안의 윤곽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강의 호텔방은 포장지를 막 뜯은 새 물건처럼 깨끗했다. 탁자와 침대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두꺼운 수면용 커튼은 창밖의 풍경을 단단히 차단하고 있었다. 슈트케이스가 서 있는 벽 위에는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빈 콘센트가 보였다.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기, 휴대용 독서 램프의 전선 따위가 가득 꽂혀 있는 지훈과는 대조적이었다. 언제든 짐을 싸들고 빠른 시간 안에 떠나야 하는 사람의 방 같은 단호함이 엿보였다.

“향초 냄새가 좋군요.”

지훈이 어둠 속에 서서 말했다.

“이건 세탁 건조향 향초예요. 오후의 강렬한 햇볕에 말린 빨래에서 나는 냄새가 나죠. 이건 비 온 후에 젖은 땅에서 나는 냄새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레인’이란 이름의 향초예요. 이건 ‘체리 블러섬’. 벚꽃 향기.”

사강이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향초를 여러 개 켜요. 가을에 옷을 하나둘 꺼내 입는 것처럼 향초를 하나둘 꺼내 켜고 있으면, 이런저런 기억들이 중첩되거든요.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오래전의 일, 어느 날엔 어릴 적부터 나중에 일어나면 좋겠다고 소원했던 일들까지……국경을 넘고 하늘을 나는 일.”

사강이 말을 멈추고 잠시 성냥갑 속의 성냥을 그어 향초 하나에 불을 더 붙였다. 동그랗고 빨간 성냥 머리가 검게 변할 때마다 옅은 황 냄새가 지훈의 코끝에 머물다 빠르게 사라졌다.

“냄새를 균일화시키면 세상의 어떤 낯선 장소든 자신의 방이 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그 사람이었어요.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것도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녀는 계속해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짓밟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군요.”

“읽을 수조차 없는 책들이에요.”

사강이 말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책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사람은 없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책이 선물이라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니까.”

“한 번도 이 책을 다른 사람이 보냈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일 거라고. 그 사람이 내게 보낸 거라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믿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래야 덜 비참하니까, 그래야 겨우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책을 보낸 사람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바보 같았어요. 읽을 수 없는 언어라고 생각해서 책조차 펼쳐 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죠?”

지훈이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다.

“졸업식 날 카네이션처럼 보이는 핑크색 장미를 잔뜩 보냈던 사람. 당신이 준 일본어 책을 펼쳐보고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판본의 63페이지에 뭔가 표식이 있을 거예요. 독일어판 마찬가지겠죠.”

“63페이지라면……”

“6월 3일.”

“당신 생일이군요.”

“아뇨. 제 출생신고일이에요. 동사무소에서 직접 신고한 사람만 알고 있는 법적인 출생신고일. 제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죠. 아빠가 태어난 날이랑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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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봤어요?”

지훈의 눈빛이 불빛으로 투명하게 일렁였다.

“아름답네요.”

사강은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강과 지훈이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로비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초들이 있었다. 달걀 껍질처럼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크림색, 크리스마스이브에나 쓸 법한 녹색과 빨간색 양초가 아름다운 불꽃을 가득 피워내고 있었다. 호텔 측이 급히 비품실에 있던 양초를 모두 끌어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얗고 매끈한 양초는 아무리 퍼 담아도 자꾸만 흘러넘치는 어둠의 끝을 잡아 커다란 불빛의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양초들 사이로 고여 있는 어둠은 깊고 아름다운 너울로 울렁였다. 그곳에서 사람은 짙은 그림자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강은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지상의 이런 곳에서 쉬어가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실한 목자처럼 어둠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촛불의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자신의 몸을 녹여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에 대한 경건함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세상의 양초들이 태어나 자라고, 머무는 정류장이 있다면 도쿄의 이 호텔 로비가 될 것이었다. 몇몇 투숙객들은 로비에 나와 사람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겨우 가정에서나 쓸 법한 양초가 대규모 정전을 대비한 호텔 측 준비라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차분함은 호텔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었다. 호텔에선 영어와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예고되지 않은 정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후쿠시마 원자력 누출 사고로 인해 야간에 가동할 수 있는 여분의 전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통은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꼭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성가 같았다. 그들은 촛불 쪽으로 몸을 바짝 끌어당겨 어두운 벽에 반사되는 불빛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에게 반드시 비밀을 고백해야 하는 협약이라도 맺은 사람들처럼.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호텔의 로비는 성당의 고해소처럼 어둠과 빛을 나누고 있었다.

“중요한 걸 잃어버렸나 봐요.”

지훈이 소파 쪽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사강에게 말했다. 남자가 소파 밑으로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카펫을 깔아놓은 바닥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건지도 몰라요. 지갑이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키일지도 몰라요.”

사강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지훈을 명확히 느꼈다.

“집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어요.”

지훈이 말했다.

“그 사람이 열쇠를 찾기 위해서 한참을 헤매는 걸 이웃집 사람이 목격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갔죠. 이웃집 남자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요. 열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였죠? 그는 이웃집 남자에게 현관문이라고 대답했어요. 이웃이 이상하단 얼굴로 이 남자에게 다시 물어보죠. 정말 현관문 근처 맞아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본인 얘긴가요?”

사강이 물었다.

“아뇨. 하지만 이런 곳에 잘 어울리는 얘기죠. 남자의 대답을 들은 이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해요. 잃어버린 열쇠를 현관문 근처에서 봤다면서요? 그럼 그쪽에 가서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여기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자 남자가 이웃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해요. 이봐요, 여기가 훨씬 더 밝잖아요!”

촛불이 집어 삼킨 어둠이 빛으로 산란되며 이들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전 영문학을 공부했어요. 학생 땐 주로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이쪽 일을 하고부터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는 책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보죠. 이 이야기는 ‘대니얼 고틀립’이라는 자폐아를 손자로 둔 심리학 박사가 쓴 책이었는데, 박사가 말하길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무의식적으로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대요. 하지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많다고 충고하더군요.”

지훈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저 남자도 촛불 밑에 있을 게 아니라, 처음 자신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도요?”

“칠흑 같은 어둠 안이라 해도.”

지훈이 대답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기억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잃어버린 열쇠들은 전부 다 그곳에 모여 있더군요.”

“그쪽이 잃어버린 열쇠는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사진 속 여자 분이겠군요.”

“자기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적어도 한 명은 있는 여자였어요. 미국식으로 말하면 우린 모범적인 ‘존과 앤’ 커플이었어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어요. 잃어버린 지갑이나 핸드폰을 되찾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잃어버린 걸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돼요. 그 밤 트위터에 실린 글을 보고 충동적으로 아침 일곱시에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나갔던 것처럼 말이죠.”

“충동적인 결정…….”

“…….”

“전 애인과 헤어지고 일 년 동안 사표를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사강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사표를 쓴 건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어요. 사랑니를 뽑겠다는 아주 사소한 계획 하나 실천하지 못했죠. 1년이 어떤 의미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어요.”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예요.”

“당신도 그랬나요?”

사강이 지훈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힘들어서 차라리 큰 소리로 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녀는 오랫동안 촛불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집에 장미 꽃다발 하나가 왔어요. 별생각 없이 그 꽃을 거꾸로 매달아서 거실 벽에 붙여놨었는데 꽃이 떨어지는 대신 꽃대까지 바싹 마르더군요. 향기 없이, 미라처럼요.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먼지가 쌓이면서 더러워 보였어요. 과거엔 아름다웠지만 향기 없이 말라버린 꽃을 바라보는 일이나, 이미 죽어 버린 사랑을 바라보는 일이 뭐가 다르죠?”

어둠 속에 일렁이는 촛불들이 녹아 이제 조금씩 형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춰 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하나둘 사라졌다. 사강의 눈동자가 막 불이 켜진 촛불처럼 일렁였다.

밤이 깊어갔다. 촛불도 조금씩 빛이 여위고 있었다. 로비의 손님용 소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사강과 지훈뿐이었다. 사강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는 처음 수영을 배운 사람처럼 숨을 참고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부드러운 촛불 때문에 침묵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좋아한 여자가 있었어요.”

사강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이혼하겠다고 얘기한 순간, 그와 헤어졌죠. 아내에게 돌아가라고 한 말이 여자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순간 여자는 엄마를 떠올렸어요. 끔찍하게 미워하던 엄마를. ‘어쩔 수 없다’란 말. 그게 엄마와 자신의 관계라는 걸 깨달은 거죠.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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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그만둬. 무리야, 도저히 무리.”

미우가 말했다.

“미쳤니? 이게 어떤 기회인데. 돈 많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지휘자가 됐는데 내가 그걸 왜 포기해? 회사 돈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신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런 경험은 앞으로 내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언니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잖아. 모든 게 결혼정보회사 이벤트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 회사 잇속을 위해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는 거야. 부도덕해! 질이 나쁘다고!” 

“줄리아드 음대 기계공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사 빠졌니, 너? 부도덕이란 말이 뭔 줄이나 알고 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아직 징징대는 어린애라는 거야. 세상은 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전부 사기꾼에 악당들이야.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악당들이라고. 내가 하는 일은 최소한 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단 정당해. 돈을 뺏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야. 난 일시적인 장애를 돕고자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실연 때문에 엄청나게 멍청해진 사람들이라구!”

“언니!”

“그 사람들, 마음의 장애인이야. 정신적인 회로가 끊기거나 꼬였는데 사람이 멀쩡할 리 있니?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속이는 거고, 언니가 하는 짓은 양아치 짓이야. 결국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등쳐 먹겠다는 거잖아. 자기 합리화하지 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혹시 그걸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대로 된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면접관한테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면 그 사람이 감동받아 널 뽑아주겠어? 회사가 무슨 납골당이냐? 뼈는 묻길 왜 묻어!” 

“치사하게! 갑자기 면접 얘길 왜 하는 건데?”

미우가 발끈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면접에 스무 번 넘게 떨어졌으면 너도 느끼는 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백날 편의점 알바 해봐라, 거기서 등록금이 나오고, 용돈이 나오는지. 넌 모르면 가만있어. 이게 단지 내 잇속만을 위한 일은 아니라는 거야. 훨씬 더 고귀한 뜻이 담겨 있으니까.” 

미도는 미우가 이해하기 힘든 얘길 하며 조용히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옆에 있던 초록색 스탠드의 불을 켰다. 고객 리스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미우는 침대에 누워 읽고 있던 신문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나 내일 최종 면접이야.”

“알아.”

“잘하라고 말 안 해줄 거야?”

“말 안 해도 잘할 거잖아.”

“언젠 스무 번이나 떨어졌다고 비꼬더니!”

“그건 네가 네 스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사에만 지원했기 때문에 그래. 정신 차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실연당한 사람들 말고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을 위로해주는 건 불가능한 거냐?”

미우가 뭔가 억울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 게 위로라고.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이 진짜 위로를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위험성을 미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그래서 난장판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최초의 제안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분노에 차 회사를 상대로 고소라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다. 

미도는 회사 법무팀에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의했다. 보안상 그런 상황이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므로 준비는 해둬야 했다. 위험 요소가 많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갖는 열매도 크고 달다. 어떤 위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세상의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 점심 따위는 없으니까.

미도는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특별관리’라고 적혀 있는 컴퓨터의 작은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를 열자 몇 명의 고객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나타났다.  

정현정.

미도는 현정의 이름을 클릭했다. 증명사진과 함께 나이와 키, 학교와 주소 등을 기록한 구체적인 개인 정보들이 화면에 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거야.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미도가 열어놓았던 노트북의 창들을 닫으며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르네 마그리트의 화집을 넘겨보던 미우가 미도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그치?”

“응. 이번 회사엔 진짜 합격이야!”

“아님 백수가 되겠지.”

“너무하다.”

“비올라 들고 음대 들어갔던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갑자기 의대에 들어가고, 다시 적성에 안 맞는다고 천문학과에 들어가는 것만큼 나쁠 일이 또 어디 있겠니? 가장 나쁜 건 나처럼 그런 인간의 언니가 되는 일이야!”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미도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미도는 짜증스런 얼굴로 미우를 바라봤다. 건조하게 튼 입술 사이로 일어난 보풀들, 지문이 잔뜩 묻은 안경을 끼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폼이 고등학생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미도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우가 의대에 들어가면 앞으로 병실 잡을 걱정은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비올라든 깽깽이든 하기만 하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미우가 머리 하나는 타고나게 좋아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지역 수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화났냐? 미안.”

미우가 베개를 앞에 두고 넙죽 절을 하며 미도를 바라봤다. 앞으로 묶은 야자수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듯 앞뒤로 달랑거렸다.  

“미안하단 말은 어쩜 밥 먹듯 저렇게 잘하는지. 넌 자존심도 없냐?”

“응. 그게 얹혀사는 사람의 예의지.”

미도는 미우를 노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고시원은 너무 작아서 싸움을 하기에도, 애정을 나누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살려면 무조건 크기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도 작게, 기쁨도 작게, 희망도 좌절도 작게, 작게! 그것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안 하는 내 미래를 언니가 왜 걱정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언니는 발터 벤야민처럼 토성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느리게 공전해야 하는데, 밥벌이 때문에 타고난 기질을 누르고 빠르게 휘몰아치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야. 점점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지는 거지. 특히 얼굴 누렇게 뜨고 현기증 자주 나는 거. 오늘 너무 피곤해 보인다.”

천문학과를 나온 미우가 토성이며 화성 공전 자전 타령을 할 때마다 미도는 지구처럼 자기 몸도 10도쯤 기우뚱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토성은 무슨. 간 때문이야!” 

미우가 웃었다. 크게 웃으면 옆방에 사는 총무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들 자매는 리모컨 볼륨 1 정도로 소리를 조금씩 죽이며 히죽거렸다.  

미도는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번 프로젝트는 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이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정말 그런 모임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나올까. 며칠 후, 대표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참가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것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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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정미도가 오피스텔이 아닌 회사 근처 고시원에 살게 된 건, 대부분 잠만 자고 나오는 공간에 관리비나 도시가스비 같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충청남도 삽교에서 여고를 마친 미도는 하루 서너 시간씩 쪽잠을 자며 대학을 다니던 칠 년 반 동안 각종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편의점, 호프집, 백화점 가구 매장 아르바이트 이외에 그녀는 여덟 가지 이상의 일을 했다. 삽교에서 같은 여고를 다니는 여동생의 학비와 레슨비도 그녀가 보내줘야 했다. 

“비올라? 꽃 이름 말하는 거야?”

동생이 이름마저 생소한 악기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미도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바이올린도, 첼로도 아닌 비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도가 ‘일단 해봐!’라고 말했던 건, 가녀린 외모와 딴판인 기질적인 호탕함과 그녀의 낭만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미도가 즉석 밥 하나로 하루 세 끼를 나누어 해결하던 생활밀착형 인간인 건 사실이었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돈을 아끼려다 보니 그런 식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체류비가 많이 들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사실이었다. 평생 삽다리 촌 바닥에서 살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미도의 아빠는 간암으로 죽기 전, 그녀에게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넌 넓게 살아라. 


그건 대처로, 서울로 가라는 뜻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충청도 번호판을 단 택시기사로 좁아터진 택시 안에서 다리 한 번 마음껏 못 뻗고 생을 마감한 아빠의 뜻에, 소작농으로 평생 좁은 땅뙈기에서 마늘밭을 일구던 할아버지의 뜻까지 보태 더 넓고 크게 해석했다. 

미도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유일한 사치는 인터넷 여행 사이트를 뒤지며 중간 경유지에서 손님들을 태우고 오느라 직항보다 적어도 스물네 시간은 더 걸리는 싸구려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이었다. 호주, 이집트, 미국, 인도 같은 나라를 그녀는 그렇게 여행했다. 모두 광활하고 따뜻한 나라들로, 겨울이 아예 없거나 한국이 겨울일 때 여름이거나,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대는 나라들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취미를 살려 대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여행사의 가이드로 첫 직장을 얻었다. 그때 마닐라의 로컬 여행사 현지 가이드에게 푼돈을 줘가며 현지인들이 쓰는 타갈로그식 발음이 섞인 서바이벌 필리핀 영어를 배운 덕분에 일 년 후, 미도는 해외영업팀으로 보직을 옮길 수 있었다.

자기 몫을 다하며 비교적 잘나가던 그녀가 첫 직장을 그만둔 건 다니던 여행사의 부도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운이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껄끄러운 결말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싫어하는 엔딩이었다. 

남녀 관계에서 사표를 던져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헤어지거나. 

결혼하거나. 

정미도는 사내 커플이었다. 사내 연애의 단점이 현실적으로 폭발할 때는 커플이 찢어질 때다. 헤어져도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것 이외에 하나로 통일되던 많은 것들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 그건 누군가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지혁, 당연히 네가 그만둬야지!”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은 쪽이 회사에 남는 게 당연하다는 쪽은 미도였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미도는 홧김에 사표를 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다른 일에 대한 신념이 있다기보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게 구차해서였다. 지혁과 헤어지고 난 후, 옮긴 직장 생활은 이 두 가지를 일일이 확인하며 증명하는 일이었다. 

“결혼이 사랑과 낭만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조건과 현실을 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죠?” 

정미도가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회사 근처 대로변에 있는 ‘필승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골드스타 안테나’가 다양한 수치의 통계 자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고 있었다. 미도는 회의실에 모인 부서 팀장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보여주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일단 헤어져야 만난다는 사실이에요. 이걸 한자로 정리하면 뭔 줄 아시죠?”

동그란 유리 원탁에 앉은 팀장들이 사자성어를 찾느라 골몰하고 있을 때,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쏟아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실연은 또 다른 기회예요. 실연당한 사람들이야말로 잠재적인 우리 고객인거죠. 이혼이 우리 업계의 블루오션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청첩장 사이트에 ‘재혼 시 50퍼센트 세일’이란 문구를 붙여놓는다고 생각해보시죠. 아마 그 사이트 재수 옴 붙었다고 단번에 악플에 시달리고 망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재혼을 겸하지 않는 결혼정보회사는 한 곳도 없어요. 결혼과 이혼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다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감각은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에요. 이혼 전문 변호사가 자신의 고객 정보를 이용해 재혼 전문 결혼회사를 차리는 세상이에요.”

미도가 “그렇지 않나요?”라고 묻기도 전에, ‘원탁의 기사들’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팀장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연당해 돌아온 싱글들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싱글들이 모이라고 한다고 얼씨구나 좋다고 모여들까요? 아니죠! 그들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 있어요. 그들은 누구보다 불행합니다. 불행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이죠! 누군들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이 상대방에게 차일 거라고 상상했겠어요? 자신이 혼자라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몸부림치고 있다구요.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맞아요! 불면증. 아주 심각한 불면증이 생기는 거죠. 약도 없어요. 수면제도 소용없죠.” 

미도는 온몸으로 ‘저도 겪어봐서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팀장들은 감정이 실린 그녀의 손가락과 명료하고 단호한 눈빛에 빠르게 감응하고 있었다. 

“우리는 실연의 가치에 대해 사업적으로 접근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인과 헤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일은 철저히 정서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거기엔 그 어떤 사업적인 냄새나 낌새도 새어 나가선 안 돼요. 요즘 고객들, 아무리 잡지나 신문에 기사처럼 꾸며도 애드버토리얼이라면 귀신같이 알아내니까요. 아주 까다롭고 감성지수가 높은 고객들이에요. 우리보다 고객들이 더 똑똑합니다. 최 팀장님도 아시죠?”

반쯤 눈을 감고 졸고 있던 최 팀장이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는 피곤해질 수도 있는 릴레이 회의 사이사이 적절한 순간에 불쑥 동의를 구함으로써 잠시도 자신의 이야기에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브리핑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상처 받은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게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뺨을 치다니요?” 

옆에 있던 조 부장이 미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헤어진 사람들은 전부 울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울고 싶으면 울 수 있게 만들어줘야죠. 실연당한 사람 위로해준답시고 친구들이 해주는 이런저런 좋은 말 대신, 우리는 친구들이 절대로 해줄 수 없는 냉혹한 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니까요.”

“존재 이유라…….”  

“실컷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서 그때부터 자신의 위치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게 될 겁니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대로 뺨 맞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때리되 때리지 않았다는 듯 의뭉스럽게 시치미를 떼야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데 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 부장이 미도를 바라봤다.

“누군가 대뜸 조 부장님 뺨을 때렸다면 기분 나쁘고 아프지 않겠어요?”

“뭐…… 당연히.”

“아프겠죠! 부지불식간에 맞고 나면 아무리 멍한 상태인 사람이라도 내가 대체 왜 맞았을까 생각하지 않겠어요? 왜 내 뺨을 쳤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까요?”

“거야 억울해서라도 그렇겠죠.”

“보이지 않는 정신적 타격! 그게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될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세밀한 기획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이들이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충분히 울었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새 인연을 찾아라! 이게 포인트예요. 이해되세요?”

“…….”

“너는 혼자다. 이제 당신은 홀로 남겨졌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거죠. 애인을 잊지 못해서 과거의 연인과 유령처럼 동거 중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생각보다 많아요. 혼자라는 걸 깨닫지 못해서 오랫동안 싱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우리가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회사의 강점을 여러모로 생각해봤습니다. 회원 수가 많다는 것 역시 장점이 되겠지만 우리만이 가진 의외의 강점이 있더군요.”

“그게 뭡니까, 정 과장님?”

내내 침묵하던 대표가 미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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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이 입사한 A 컨설팅 회사는 다국적 기업으로 다양한 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상 활력팀’이란 괴상한 이름의 부서도 있었는데, 지훈이 원한 건 바로 크리에이티브한 일과 관련된 그 부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업 교육’이라는 뜻밖의 업무가 맡겨졌을 때, 지훈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를 가르친 경험이라면 대학생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잠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했던 게 전부였다. 수영이라면 개헤엄밖에 칠 줄 모르는데, 뭔가 대단한 행정 착오로 특별 해양구조대의 일원으로 차출돼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며칠 동안 결국 사표를 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매달 집세를 내야 했고, 대출받았던 대학 등록금도 상환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양원에 있는 형을 위해 저금을 해두어야 했다. 물론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건 간단치 않았다.
 그는 결국 회사의 선택을 증명하는 쪽으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저녁을 간단히 김밥이나 피자 같은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일도 잦아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유명 강사들의 동영상 파일을 보며 특유의 몸짓이나 강의 스타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컨설팅 교육 팀에서 받은 다양한 해외 자료들을 읽어보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야근이 계속됐지만 이런 생활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너, 네가 담당하고 있는 기업 교육이 얼마나 심층적인 건지 모르지? 그냥 자료 찾아 리포트 나눠주고, 강연하고 그런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교육이야말로 컨설팅의 기본이야.”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날, 최 부장이 술자리에서 지훈에게 말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게 저랑 잘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말은, 그러니까 모르는 걸 직접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초등학생이랑 대학생이 같은 문제를 두고 같은 판단을 내릴 것 같아?”
 “회사가 대학생이란 얘기예요?”
 “네가 초딩이란 얘기지. 회사가 사원의 사적인 경험까지 설계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고민을 회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길 절대 원치 않는 건 오히려 회사 쪽 입장이었다.
 “이봐, 이지훈. 회사는 괴물이야. 빅브라더라구. 누가 날 자르는지 누가 내 진로를 결정하는지 아무도 몰라. 널 내 라인에 집어넣기로 결심했으니 내가 재밌는 얘길 하나 해주지.”
 최 부장은 500시시 생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켜며 연달아 트림을 해댔다. 콧잔등 위엔 하얀 맥주 거품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느 기업이 특정 사원을 뽑아놓았을 땐, 다 그만 한 이유가 있으며 그의 미래는 어느 순간, 회사에 의해 정해진다는 건 최 부장의 논리였다. 아시아 시장을 성장의 동력으로 보고 그것에 주력하고 있는 모 선박 회사의 경우, 미래에 인도 법인을 키우기 위해 인도 전문가를 뽑았다. 흥미로운 건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이 인도 전문가로 키워질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남자는 계속 외국을 떠돌며 실질적인 업무 경험을 쌓는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영국, 다시 인도. 짧은 파견 기간이 끝나자 그는 인도의 델리나 뭄바이에 있는 현지 공장을 돌며 다시 일을 배운다. 석회질이 가득한 인도 현지 물을 마셔가며 설사와 배앓이를 하던 초창기와 다르게 그는 점점 인도의 물과 흙과 공기에 적응해간다. 물론 어떤 말을 하던,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일수록, “NO PROBLEM!”이라 외치는 인도인 특유의 정서에도 적응한다.
 계속해서 척박한 풍토의 나라를 떠돌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진력이 날 즈음, 남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나 독일의 베를린 같은 곳에서 회사가 제시한 파격적인 교육 연수의 혜택을 받기도 한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드는 회사 연수의 대가로 그가 지불해야 하는 건, 몇 년 동안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불허하겠다는 회사 측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청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회사의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흘러간다. 스물네 살 청년은 서른이 되고 곧 삼십 초반을 넘어서게 된다.
 “너,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외국으로 뺑이 돌리듯 돌려대는 거.”
 최 부장은 이제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심호흡을 하며 지훈을 바라봤다. 술을 들이켜며 계속 코를 벌름거리느라 그의 콧구멍에는 더 많은 공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봐봐. 일단 남자의 동선을 잘 살펴보면 회사가 그 남자를 잠시도 서울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단 공통점이 나와. 이유가 뭐겠어?”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서울 본사에서 일할 만큼 능력이 없어서?”
 “당신도 그런 생각이 들지? 근데 아니야. 그건 서울에서 한국 여자를 사귀지 말라는 소리야.”
 “얘기가 이상하게 튀는데요?”
 “왜냐!”
 최 부장은 잠시 지훈을 바라보더니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말 설고 물 설은 인도에서 뿌리박고 평생 살겠단 여자는 별로 없 거든. 인도가 뉴욕이나 파리도 아니고, 폼 안 나잖아? 게다가 한국 여자 뒤에는 한국 엄마들이 버티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딸 가진 엄마들이 좀 극성이야. 딸내미 인도 가서 산다면 카레 해 먹이면서 버선발로 반대하겠지. 카레는 내가 평생 질리게 해주마. 넌 인도 가지 마라! 걔랑 당장 찢어져!”
 “그러다 독신으로 늙어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설마 회사가 독신주의를 원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 회사는 나 같은 독신남을 정말로 싫어해. 외로워서 술 처마시고, 룸살롱 가서 헛돈 쓰고 지랄하는 애들을 회사라고 좋아하겠어? 돈 벌어오라고 꽥꽥 소리 지르는 와이프도 있고, 학교 보낼 애들도 주렁주렁 매달려야 홧김에 사표도 안 집어던지고 충성 복무하면서 암에 걸리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할 거 아냐?”
 “그러니까, 부장님 말의 요지가 뭐예요?”
 “아직도 모르겠어?”
 답답하다는 듯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인도 여자 사귀란 소리지 뭐야! 현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면 인도 문화를 깊숙이 알게 되고, 그럼 그 여자의 오랜 경험이 이 남자에게 이식되겠지. 힌두나 이슬람 문화를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부인이 인도인인 이 남자는 외국인이지만 인도 법인에서 벌어지는 직원들 사이의 갈등을 조율할 때도 인도적인 마인드로 접근할 수 있는 거야. 황당한 이유로 파업을 하거나, 더 황당한 이유로 배 째라고 웃통 벗고 사표 던지는 미치광이 인도 직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인도 시장을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제품을 만드는 데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거야. 한마디로 인도인 부인이 그 남자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는 거지. 이거야말로 완벽한 현지화 전략이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남자는 애초에 인도 법인의 사장으로 키워질 인재였다는 거야. 회사가 그 남자가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미리 다 설계해놨던 거라고. 어릴 적 잠시 뭄바이에서 살았다는 게 회사가 그를 선택한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거 소설 같은데? 정말이에요?”
 “초딩이 머리 굴리지 말고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소리야!”
 “근데 회사가 개인 메일을 체크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겨우 이메일만? 모르는 게 약이야.”
 “언젠 아는 게 힘이라더니.”
 “귀걸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야, 끝!”
 최 부장의 불콰한 얼굴을 보며 지훈은 앞에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거나한 그의 트림 소리는 시끄러운 가요에 묻혀 사라졌다. 
 그날 이후, 지훈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메일은 회사 랩톱 컴퓨터가 아닌 개인 노트북으로 썼다. 

 회사에선 컴퓨터로 개인적인 메신저나 쪽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공식적인 일과 비공식적인 것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회사에 입사한 지 삼 년 후,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이건 그저 비즈니스적인 판단일 뿐이에요”라고 잘라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놀랍고 급격한 변화였다.

 

 

(13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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