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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24 부희령 소설집 <꽃>

 

 

 

지금, 여기, 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지독한 불편함이 고개를 쳐든다!

 

 

부희령 작가 첫 소설집

세계의 끝을 향해 돌진하는 ‘날것의 리얼리티’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가항력적 간극에 대한 깨달음

한때 지녔던 삶의 이상이 깨져버린 것에 대한 환멸

이 모든 생의 치부를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일말의 환상도 파고들 틈 없는 지독한 세계!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어떤 갠 날」로 등단한 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며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부희령 작가의 첫 소설집. 등단 이후 각종 지면에 발표한 7편의 단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세상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함께 현실의 서정성과 잔혹함을 절묘하게 배합해내는 작가 특유의 화법을 압축적으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의 장소이자 꿈에 불과한 ‘화양’이라는 장소에 대한 동경을 그린 「화양」, 감정 역시 돈과 교환될 수 있으리라는 위악의 어조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머니 익스체인지」, 자기 안에서 개화하는 육체적 여성성에 대한 소녀의 성장 기록 「꽃」, 내가 누군가에게 밟히거나 내가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날이 고작 일요일 하루뿐임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팔월의 월요일」, 철거가 예정된 집에서 갑작스럽게 나가야 하는 주인공의 불안했던 청춘 시절에 관한 이야기 「어떤 갠 날」, 자기의 치부와 상처에 눈감고 그것을 타인에게 숨겨야만 간신히 삶이 가능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다리 게임」, 이상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과, 불가항력적 운명의 비극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정선, 청령포」.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 그 속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부희령 작가는 세상이 본래 어떤 것인지에 대해 눈감거나 시선을 돌려버리는 이야기들 혹은 대결하더라도 심연까지 치닫지 못하고 손쉽게 화해해버리는 이야기들을 거부한다. 작가는 이 7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똑바로 응시하고 삶과 대결해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

 

세계의 끝을 향해 돌진하는 ‘날것의 리얼리티’

7편의 단편소설 속 세계, 주인공들의 삶은 하나같이 그악스럽고 비루하다. 그 속에 바로 생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이 있고, 그 시선은 우리의 맨얼굴을 꿰뚫어본다. 가족이 있는 남자와 이혼녀와의 만남이 욕정의 쓰레기통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수밖에 없는 객관적 상황, 이혼녀라는 꼬리표와 빚보증을 잘못 서 생계를 위해 보험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자본주의의 물신인 화폐의 부질없는 흐름과 그 시스템의 생리에 환멸을 느껴 위악적 심정으로 부당한 관계를 지속하는 여자 등 소설 속 상황과 인물들은 현실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 이면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표제작 「꽃」이 이런 모습을 여실히 나타낸다. 섹스에 대한 남녀의 기대와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 소설은 성관계라는 것이 성(性)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관계의 교환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에서 육체적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판타지로 포장된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 포장을 벗겨내 날것으로 드러낸다. 한편 「사다리 게임」에서는 세상에 대한 환멸, 냉소를 통해 노골적으로 세태를 풍자한다.

지금, 여기, 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시키면서 불편함을 끄집어내는 이야기, 판타지 없는 지독한 현실을 심도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잔혹함이 일상과 현실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해설 중에서

이것들은 모두, 우리네 생과 세계의 맨얼굴에 대한 충분한 르포로 읽히기도 한다. 그들의 불행과 고뇌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불가항력적 출구 없음에 대한 탄식을 피하기 어렵다. 삶의 맨얼굴을 이야기하는 소설들, 날것의 현실이 어떤 위장도 판타지도 없이 거울처럼 비춰지는 순간들은 때때로 당혹스럽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결코 르포가 아니다. 그럼에도 르포에 가까운 리얼한 현실들이 조금의 타협도 없이 구체적으로 부감되는 것은, 근래 소설들을 떠올려볼 때 퍽 드문 것이기도 하다.

(김미정|문학평론가)

 

본문 속으로

X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잠 안 오는 밤, 왜 읽는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 내려가던 포털 게시판의 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간녀. 욕정의 쓰레기통.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법적인 부인이었고, 그 시절 내 남편도 밖에 나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때 나는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은 부인인 내가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p. 19, 「화양」 중에서)

 

여자가 기대했던 분홍빛 구름 같은 첫 섹스는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진저리나는 구멍 찾기뿐이었다. 남자에게도 첫 경험인 섹스였으므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여자의 거웃과 살덩이들을 헤집었다. 거의 해부학적인 관심에 가까운 탐구였다. 마침내 여자의 다리는 제법 큰 원을 그리기 위한 컴퍼스의 다리처럼 벌어졌고, 남자는 삽입을 시도했다. 어쩌면 어느 순간까지 여자는 남자에게 따뜻하기도 하고 상냥하기도 한 감정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고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앞에 선 남자의 모습에서는, 따뜻함일 수도 있고 상냥함일 수도 있으며, 분홍빛 구름이거나 무지갯빛 안개일 수 있는 그 무엇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p.72, 「꽃」 중에서)

 

도처에 널려 있던 거울은 당연히 모텔의 욕실에도 있었고, 그 속에는 화장이 반쯤 지워진 한 여자의 얼굴이 피곤과 상실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모란은, 자기 또한 눈두덩이 붉고 푸른 채 부어오른 모습이었다고 할지라도, 선글라스라도 끼고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65, 「사다리 게임」 중에서)

 

차례

화양

머니 익스체인지

팔월의 월요일

어떤 갠 날

사다리 게임

정선, 청령포

해설_누구에게나 ‘스트로베리 필드’가 없을 수 있겠는가 (김미정)

작가의 말

 

저자_부희령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어떤 갠 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소설 집필과 함께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청소년 소설 『고양이 소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모래 폭풍이 지날 때』, 『동물도 말을 한다』, 『트위그의 신기한 하루』, 『새로운 앨리엇』 등 다수가 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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