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회 >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정말 놀랍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은 거니?”

일주일 후, 지훈은 현정을 만났다.

“내 로모!”

그가 카메라와 함께 내민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필름과 사진이었다. 모두 24장이었고, 대부분 햇빛이 들어가 퇴색해 있었다.

“필름에 햇빛이 들어갔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

“아니, 이 사진은 오히려 번져서 더 멋지네. 예술작품 같아.”

현정은 코앞까지 바짝 사진을 당겨 사진 속 장소를 일일이 확인했다. 성산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현정은 햇빛 속에 들어가 놀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 보이진 않지만 그때 현정은 내내 맨발이었다.

“고마워. 나라면 너처럼 못 했을 거야. 아마 꼭 숨기고 절대 안 줬을걸? 넌 진짜 신사야.”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신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고마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쿄에서 사강이 건네주었던 사진은 현정이 애타게 찾고 싶어 하던 제주도 사진들이었다. 사진은 현정이 태어났고, 현정이 유년기를 보냈던 제주도의 바다와 해녀 마을을 담고 있었다. 7년에 걸쳐 찍힌 추억의 지층들이었다.

현정은 자신의 로모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 로모 카메라를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은 현정을 깜빡 놀라게 해주기 위해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안에 넣어 ‘처리’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현정 옆을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몇몇이 지나갔다. 현정과 눈을 맞추며 웃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인사했다.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 수업이 있어.”

“알아.”

“내가 진짜 고마운 게 뭔지 알아?”

“안다니까.”

현정이 긴 숨을 내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늘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얼마나 날 원망했을지도 알 것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정말이야.”

지훈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멀어져가는 현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정이 뒤돌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로 시작하는 사랑보단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늘 더 힘들다. 상대보다 힘든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훈에게 그것은 운동장을 빠르게 뛰는 현정의 뒷모습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안녕!”

현정이 뒤돌아 배낭을 멘 사진 속 소녀처럼 손을 흔들었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운동장 정중앙을 가로질러 천천히 저 끝까지 걸어갔다. 그래, 안녕.

“여기 오클랜드발 비행기 도착하는 출입구 맞죠?”

사강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는 오랜만이라, 좀 헷갈리네요.”

선글라스를 밴드처럼 낀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웃으면 오른쪽 입술 아래 작은 보조개가 팬 여자였다. 많아봐야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는 하이힐이 아니라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29번 출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도착을 기다리며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하얀색 피켓을 들고 ‘MR LEE’를 기다리는 전자회사 직원과 한 무리의 여행객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과 오클랜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과 아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뒤섞여 출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착륙하길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여기 맞는 거죠?”

여자가 사강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맞아요. 한 출구로 여러 곳에서 돌아온 비행 승객들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기다리시는 분도 이곳으로 나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여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자주 봤다.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지연’ 사인이 뜰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여자를 본 지 오랜만이었다.

“근데 오클랜드발 왜 자꾸 도착 지연이죠? 30분이 넘었는데.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뇨. 종종 있는 일이에요. 출발하는 공항 대기 시간이나 기상 상황이 늘 바뀌니까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곧 도착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로, 참 친절하시네요. L항공사 승무원?”

여자가 사강의 L항공사 마크가 찍힌 크림색 제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오면 정말 이상해요. 떠나는 것도 아닌데 진짜 떠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막상 공항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보고 싶었단 생각이 들거든요. 공항이란 데가 참 이상하죠? 나만 그런가?”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여행가는 것보단 공항 오는 쪽이 더 설렌다고 할까. 공항에만 와도 꼭 여행 다녀온 느낌이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즐거운 얼굴로 사강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그랬어요.”

사강이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 오는 게 늘 즐거웠거든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57 회>

누구에게나 소설의 엔딩이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소설의 끝은 책의 중간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소설의 첫 페이지 첫 번째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강에게 『슬픔이여, 안녕』의 엔딩은 소설의 마침표가 끝나는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 사강은 이 책의 번역자가 쓴 책 말미에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때의 아빠처럼 그녀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나보내며, 어린 딸을 떠올리다가 그가 했을지도 모를 마지막 말을.

* ‘슬픔이여, 안녕’, 여기에서의 안녕(bonjour)은 헤어질 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합니다.

사강은 책의 번역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아빠의 옛 이름이었다.

*

정전이 있던 날 아침.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강은 정수와 마주쳤다. 이른 아침이었다. 정수는 사강을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코너를 빠르게 돌아 사라졌다. 하지만 사강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지 못한 척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기장님.”

지난 일 년 동안 정수를 피해왔던 것과 다르게 사강은 조깅복을 갈아입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강은 자신의 아침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침묵 속에서 응시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강이 말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아침 인사를 깊은 침묵으로 응대하는 건 분명 ‘사랑의 역사’의 마지막 장에나 쓰여질 비극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숙한 어른들의 언어인 침묵의 진짜 의미를 아프게 배워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사람은 아주 조금씩 성장해간다. 침묵 속에서 사강은 멈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정수가 엘리베이터에 탄 채 사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에 타지 않았다. 정수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사강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정수가 그곳을 벗어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사강은 멈추지 않았다. 정수 역시 닫힌 문 사이로 자신처럼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는 걸 사강은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굿바이’가 아니어서.

안녕이 ‘헬로우’여서.

다행이었다.

정말.

도쿄 출장에서 돌아온 한 달 후, 지훈은 자신의 오래된 자동차를 중고 매매상에 팔았다. 그의 운전면허는 100일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도시에 사는 남자가 난데없이 자동차를 팔아 치울 때, 그의 삶은 적지 않은 변화로 몸부림친다. 일명 자동차 금단 현상. 차를 팔아 치운 후, 한 달 동안 지훈은 사람이 미어터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수없이 발을 밟혔고, 오전 여덟시의 신도림역에서 새로 산 양복의 첫 번째와 세 번째 단추가 동시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언제나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지훈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빠르게 걸으며 서울 시내를 이동했다. 이제 지훈은 자동차를 버리고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게 하는지 60분짜리 연설 원고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도 발견했고,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았다.

연수원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지훈은 문득 현정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수나 예산 같은 작고 소박한 지방의 터미널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여유롭게 창밖 풍경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범칙금 통지서를 여덟 통이나 받는 초유의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를 팔아버리는 따위의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볍씨왕’ ‘근사미’ ‘금자탑’ 같은 각종 농약 이름이 적힌 야구 모자를 쓴 늙수그레한 노인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올해 사과 작황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지훈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그때, 그 노인에게서 보았던 형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한때 그에게 시간은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사실 그것은 2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던 자신의 애마를 팔아 치우는 것 같은 파격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겼다.

이 모든 게 결국 현정 덕분이었다. 지훈은 이제 끝끝내 미뤄뒀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산의 버스터미널 매점 앞에서 현정에게 온 마지막 문자 메시지에 답을 했다.

6개월째 미루었던 일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56 회

사강이 소리를 내며 첫 번째 문장과 문단을 반복해 읽고 있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정신적인 수해로 망가진 열일곱 살의 봄을 기억했다.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 ‘세실’처럼 부재하는 한쪽 부모와의 시간이었고, 아빠와 함께했던 짧고도 강렬했던 열일곱 봄방학을 의미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모든 딸들이, 우리가 아는 부모와 딸처럼 살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이 그토록 많은 이혼과 불륜의 아이들이 존재할 리 없다. 두 명의 엄마가 있고, 두 명의 아빠가 있는 아이가 있고, 자신처럼 한 명의 아빠와 두 명의 엄마가 있는 아이도 있다. 지훈처럼 부모 없이 오직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키워진 아이는 누구보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른 죽음을 겪는 탓에 쉽게 조숙해진다.

세상에 수많은 다른 언어가 존재하고,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말이 있듯 우리는 누군가 나 아닌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기약 없는 사랑에 빠지고, 출구 없는 사랑에 넘어지고, 후회하고, 절망하고, 다시 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란 너무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빠 역할에 지독하게 미숙한 남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딸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이가 있었듯 그렇게.

한 번이라도 『슬픔이여, 안녕』을 제대로 읽었다면,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강은 아빠가 보내온 책을 펼쳐보았다. 스페인어가 적힌 책 맨 앞장에는 ‘나의 뮤즈에게’라고 쓴 그의 친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당분간 이 책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도착할 것이란 걸 깨달았다.

집으로 하얀색 택배 상자가 날아온 건 사강의 생일 아침이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사강은 1년 전, 그때처럼 문 앞에 놓인 상자를 힘껏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 상자 속에는 책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문고본 사이즈 정도의 얇은 책일 것이다. 만약 그가 리스본에 있었다면 포르투칼어로 된 책을 보냈을 것이다. 북경이나 청도에 있었다면 중국어로 된 책을 보냈을 것이고, 치앙마이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면 태국어판 『슬픔이여, 안녕』을 보냈을 것이다.

사강은 택배 상자의 투명 테이프를 뜯어내며 여러 도시를 떠돌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골목의 오래된 서점에 들어가 책을 고르고, 그 나라의 지폐와 동전으로 책값을 치르는 모습을 그렸다. 사강은 그가 바람을 가르며 러시아어로 번역된 『슬픔이여, 안녕』을 들고 천천히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자를 열자마자 사강은 크게 웃었다.

상자 안에는 『슬픔이여, 안녕』 한국어판이 들어 있었다. 꽤 오래된 책이었지만 놀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카드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강에게’라고 적힌 생일카드였다.

-내가 네게 얼마나 서툴렀는지 이제는 뼛속까지 느끼지만 그걸 알아주길 바란다면 그것 또한 내 욕심일 테지. 언제나 이 책의 마지막을 네게 큰 소리로 읽어주고 싶었다. ‘안녕’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걸 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알아낸 생의 가장 큰 비밀이었거든. 그래서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고,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다면 네가 좀더 선명히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얘길 하고 싶었어. 내가 후회하는 건 이런 거야. 네게 세상의 파도를 어떻게 헤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못한 것. 망가진 그물을 고치는 법, 연봉 계약서를 쓰는 법, 특히 낚싯밥 던지는 멍청한 놈팽이들에게 제대로 퇴짜 놓는 법. 빌어먹을! 조금 더 큰 카드를 살걸! 써야 할 말이 아직 많은데 칸이 별로 남지 않았다. 난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 터무니없는 멍청이처럼.

이름을 부르거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 생일카드는 ‘사랑한다’거나 ‘축하한다’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멍청이처럼’이란 문장으로 끝나 있었다. 무엇 하나 ‘축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카드였다. 사강은 그 카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사랑하는 내 딸 사강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파리에 있을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얘기한다면, 그 역시 몹시 당황할 것이다.

사강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슬픔이여, 안녕』을 꺼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지훈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책이었고 판본도, 문장도, 모두 다 달랐다.

사강은 느린 속도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은 ‘울었다’란 동사에서 책 읽기를 멈추었고, 햇볕이 좋던 어떤 날은 ‘매우’란 부사에서 독서를 중단했다. 비행을 쉬는 날이면 사강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을 잊은 채 책 속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교차로 어딘가에 멈춰 설 때마다 그녀는 책 속의 문장 하나를 읽었다. 정류장이 바뀌고, 길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그녀는 문장을 채집하듯 그 모든 것들을 가슴에 담았다. 생의 어느 순간,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 것이 있다. 지금 사강에게 그것은 『슬픔이여, 안녕』을 읽는 것이었다.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하다”이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인데, 이 책을 읽은 열네 살 즈음의 사강은 이 문장이 적힌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주저 없이 찢어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첫 번째 페이지는 1년 후 여름방학에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첫 문장이었다. “정말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소설 「무진기행」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로 끝난다.

『거미여인의 키스』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라고 끝나며, 사강이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마지막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사랑해야 한다”로 끝난다.

『슬픔이여, 안녕』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사강은 눈을 감았다.

다만 내가 침대 속에 누워 있을 때면, 파리에 자동차 소리만이 들리는 새벽녘이면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여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 모든 여름의 추억. 안느, 안느! 나는 이 여름을 아주 낮은 소리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자꾸만 불러본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해서 맞아들인다. 눈을 감은 채……. 슬픔이여 안녕.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51 회>

타인의 비밀을 듣는다는 건 큰 책임을 요구한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책임, 간직하는 동시에 떠나보내야 하는 책임, 묵언의 서약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 역시 꺼내놓아야 하는 책임. 비밀은 공유하고 나눔으로 짓눌린 무게의 짐을 스스로 덜어놓는다.

‘간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를 마음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다. 비밀은 누군가에 의해 간직된다. 우리가 ‘간직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래된 장롱 ‘속’이나, 복잡한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금고 ‘안’이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렵게 끄집어내야 한다. ‘속’과 ‘안’ ‘곳’에 넣어두는 깊숙한 기억과 물건들.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에 닿아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것. 그 밤, 지훈이 명훈에 대해 얘기한 건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었다.

“형이 자폐아 판정을 받은 건 네 살 겨울이었어요. 치료가 시작된 건 여섯 살 봄이었고, 사고가 난 건 아홉 살 가을 무렵이었죠.”

창문에 반사된 지훈의 검은 실루엣이 촛불에 흔들렸다.

“처음 형의 이상을 발견한 건 외할머니였어요. 형은 집중력이 뛰어나서 비디오를 보거나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앉아 그것만 들여다봤죠. 형은 숫자도 놀랄 정도로 빨리 익혔어요.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 번 본 건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았죠. 형은 4시라고 말하지 않았고, 늘 시계가 4시 11분 10초를 가리킨다고 말했어요.

어른들은 형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오로지 외할머니만 예외였죠. 외할머니는 형의 집중력을 의심했어요. 형의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큰 목소리로 불러도 형은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거든요. 정말 하나도 듣지 못하는 아이 같았어요. 하지만 형이 이비인후과에서 가서 들은 얘기는 빠른 시간 안에 소아정신과로 가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그때 알게 된 거죠. 형의 증세를.

엄마는 그날로 직장을 그만뒀어요. 작가의 야망이 있는 분이셨어요. 하지만 오직 형에게만 매달리셨어요. 형에게 다양한 규칙을 정해준 것도 엄마였어요. 정해진 음식만 먹기, 정해진 길로만 다니기, 정해진 버스만 타기. 엄마는 형이 자신이 만든 규칙 안에서 생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형이 아홉 살 되던 때에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였죠.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어요. 단호하게 ‘이제부터 이 아이들은 내가 맡겠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하셨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외할머니의 검은색 벤츠와 밍크코트는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신뢰를 주었으니까. 자폐증은 유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외할머니는 평생 그것이 당신이 만든 유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외할머니는 천만 원이 넘는 모피코트를 입고서 무거운 십자가를 멘 예수처럼 사셨고, 딸과 사위의 죽음을 평생 애도하셨어요. 누군가 벌을 받아야 형의 미래가 열릴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야 인생이 공평해진다고 믿었어요. 형은 늘 빙글빙글 돌았어요. 세 번씩. 시계 방향으로. 홀수를 좋아했어요. 말도 세 번씩 외쳤어요. ‘나는’이라는 주어를 쓰면서 늘 문어체로 말했죠. 형은 숫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었어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어쨌든 형은 홀수 안에서, 숫자 3 안에 있어야 평화로운 사람이었어요. 강박증 형태로 나타나는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었죠…….”

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걸까? 설령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걸까? 형의 병이 빼앗아 간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따뜻한 공감 능력이었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은 이렇게 반응하겠구나, 라는 자기 인식.

현정이에게 전 이런 얘길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만지는 대신, 웅크린 몸을 조금씩 열리게 하는 따뜻한 포옹을 택하는 대신, 사람들이 보든 말든 꼿꼿하게 서 있는 자기 성기를 꺼내놓는 사람이 내 형이었어요. 팬티를 내리는 그 순간까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괴물같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할 수 있는 건 대낮에 벌이는 자위라는 활극뿐이었죠. 형은 웃으면서 그런 짓들을 저질렀어요. 유쾌한 확신범이었어요. 몸은 자라지만 정신은 자라지 않는 남자가 저지르는 몰상식을 감당하기엔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버렸어요. 결국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병의 증세를 교육 받고 능숙하게 협상하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졌죠.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어요.

형의 세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었어요. 자기 욕망, 자기 욕구, 자기 분노 같은 것들. 형은 타인을 향해 웃는 법을 몰랐어요. 물론 타인을 위해 우는 법도 몰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평생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죠. 그런 인간이니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요. 그래서 전 형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아예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자폐증의 가장 심한 패악이라고 생각했었죠. 이렇게 끔찍한 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유년기는 진창이 돼버렸죠.

그런 형이 언젠가 냉장고 앞에 서서 멍하게 뭔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형은 우유병을 바라보고 있었죠. 칼슘이 빠져나가는 병 때문에 할머니가 먹으라고 윽박지르며 소리치던 그 우유. 우유를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걸 자동차 주유구에 퍼붓던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형이 우유병을 열더니 그걸 마시더군요. 처음엔 제가 본 장면이 환각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유령처럼 보였고, 조부모 둘을 연달아 잃은 저 역시 유령 같은 존재였으니까.

형의 얼굴을 묘사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어요. 웃는 듯 우는 듯. 우는 듯 웃는 듯. 그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어요. 눈썹이 없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것처럼 형의 얼굴은 정말 기묘하고 괴상했죠. 우는 듯 웃고, 웃는 듯 우는 얼굴. 아마도 형은 자기 식대로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빙글빙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 안을 돌고, 요양원 복도를 돌고, 돌고, 돌고, 역겨운 우유를 마시면서 다시 빙글빙글돌고 토하고…….

가장 큰 불안은 최악을 예상하는 일이 아니라, 최악도 차악도 뭣도 예상할 수 없을 때 생기게 마련이에요. 형을 이해하는 데 지금까지 제가 들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현정이도 무서웠겠죠. 점점 더 두려워졌겠죠.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요. 외할머니는 형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소원이었지만, 전 외할머니보다 형이 먼저 죽길 매일 밤 기도했어요. 형이 싫어서 몇 번이고 가출했었으니까. 어디론가 닥치는 대로 차를 타고 계속해서 달아났어요. 그 어딘가가 늘 형이 있는 곳에서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였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어요. 그런 거죠. 그런 식이었어요. 아무리 달아나도 돌아오게 되는 멀지만 가까운.

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탐정처럼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고, 쟁취해내는 일이에요.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카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6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철저히 노동 집약적인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48 회>

한 번이라도 눈을 감고 오랜 시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각이 균형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각이 단지 ‘본다’는 동사만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니다.

사강은 뒤집힌 낮과 밤의 흔적들이 여권에 찍힌 낯선 도시의 스탬프처럼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승무원이 된 후, 그녀는 잠들고 싶은 시간에 잠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시간에 정작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시간과 도저히 맞추어지지 않는 낮과 밤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대표적인 증후는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이었다.

비행을 앞두면 늘 집요한 두통이 사강을 괴롭혔다. 진통제로는 멈추지 않는 두통을 견디다 못해 신경외과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사강은 그곳에서 이비인후과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으라는 납득하기 힘든 얘길 들었다. 그녀의 두통이 뇌의 문제가 아니라 청각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과 달팽이관의 림프액 때문에 생긴 문제예요.”

의사가 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 림프액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아뇨.”

“그럼?”

“윤사강 씨는 림프액이 너무 많아요. 림프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불균형이 헛구역질과 두통으로 표출되는 거죠.”

사강이 말없이 의사를 바라봤다. 해야 할 질문들은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사강의 경험에 의하면 무엇인가 많다는 건,

적은 것보다 대부분 좋지 않았다.

사강의 교정 시력은 1.5였다. 그녀는 100미터를 평균적인 여자들보다 2초 이상 빨리 달렸다. 사강은 25미터 풀을 스무 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체력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해 승무원 체력 검사에서 그녀는 한 번도 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둠 속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굽 높이가 10센티미터나 되는 웨지힐을 신고 만든 기록이 아니었다.

호텔로 걸어가는 어둠 속에서 사강은 길 한가운데에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 그대로 곤두박질할 뻔했다. 사강의 걸음은 분명한 속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와 발목에 더 힘을 주었다. 사방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폭이 좁은 플레어 롱스커트를 입은 채 균형을 잡으며 걷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녀는 실감하고 있었다.

여전히 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별조차 보이지 않은 걸까. 개기월식이라도 일어난 걸까. 역시 혼란스런 상황 속에 생기는 착시 현상 같은 걸까. 사강은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마다 다리가 휘청였다.

“한 번만 더 휘청대면 업힐 각오 해요!”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사강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넘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이들을 봤다면 “그녀는 그에게 거의 매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 속에선 절차와 의례들은 사라지고 본능적인 감각들만 살아남았다. 도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정전 속에 두 남녀가 서 있다면, 한 사람이 넘어지려 할 때 다른 한 사람이 몸을 잡아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빠른 시간 안에 빛이 있는 호텔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걷고 있었다. 사강이 생각하기에 호텔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한 것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어둠이 모든 걸 덮어버리자 지훈의 손은 자신의 몸과 연결된 것 같았다. 사강은 손바닥의 흉터가 그의 손바닥과 마주칠 때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높은 하이힐 때문에 몇 번 더 기우뚱했다.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구두는 벗고 걷는 편이 좋겠어요.”

지훈이 말했다.

“일단 내 운동화를 신어요. 맨발보단 훨씬 나을 겁니다.”

사강이 운동화를 벗고 있는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그녀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운동화가 많이 클 수도 있어요. 일단 제 어깨를 잡고 운동화에 발부터 넣어요. 하이힐 신고 이런 어둠 속에선 몇 미터 걷기도 힘들어요. 아님 지금이라도 업히시든가.”

“나한테 신발을 벗어주면 당신은 맨발이잖아요.”

“지금 내 걱정 하는 겁니까?”

가소롭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내가 벗겨주길 원해요?”

지훈이 사강의 구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끝을 뾰족한 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강은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맨발로 바닥 위에 서 있었다. 길 위에 깔린 작은 포석이 컵에 양각한 장식들처럼 발밑으로 느껴졌다. 한밤의 길은 달빛만큼 차가웠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제야 희미하게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달이었다. 너무 작아서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달은 눈 한 번 깜짝여도 사라질 듯 불안하게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운동화 끈을 당신 발에 맞춰서 더 조이면 걸을 만할 거예요.”

사강은 그의 운동화에 한쪽 발을 넣었다. 운동화에 남아 있던 온기는 어느새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서서히 퍼졌다. 따뜻한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욕조 안에 언 발을 녹이며 서 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있던 발바닥과 발끝이 저릿했다.

“어때요? 편해요?”

그는 사강의 발에 맞춰 느슨한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지훈은 여전히 무릎을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사강은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사강의 손은 그의 어깨 위에 자연스레 기대듯 올려져 있었다. 검정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기적같이 돋아난 또 다른 그림자 같았다.

“고마워요.”

사강은 급히 몸을 떼며 다리에 힘을 준 채 그의 곁에 똑바로 섰다.

사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문을 닫은 어두운 상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건물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어둠이 가득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랜턴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점멸하듯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걸었다. 눈을 감아도 몸은 누군가 부드럽게 밀어내듯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길 위에 펼쳐진 거대한 점자책을 상상했다. 겨자 씨 같은 점자들이 책 위를 흘러나와 차갑고 어두운 길 위에 쏟아지는 장면을. 사강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선연한 길의 노래를 발끝으로 느꼈다. 손과 발끝으로 거리의 모서리들과 음각들을 짚어냈다. 어둠의 귀퉁이가 몸에 와 닿아 부드럽게 반사됐다. 그녀의 어깨와 귓불 그리고 팔꿈치와 발목까지 그것은 미끈하고 윤기 있는 벨벳처럼 몸 위를 덮었다. 어둠은 닫혀 있던 그녀의 감각을 열어 또 다른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사강의 눈엔 이제 검은색과 덜 검은 색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1950년대 흑백 영화 속에 나오는 진한 화장의 여자들처럼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 속에 서 있었다. 세상이 흑백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사강은 그 속에서 나무들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지훈이 내뱉는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조금 더 명확해져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그의 숨소리를 흉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표지판이 가르쳐주는 방향이 아니라, 닫혀 있던 감각들이 말해주는 대로 그녀의 귀가 부드럽게 열렸다. 사강은 지훈의 호흡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눈을 감아도 풍경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강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맥박과 호흡은 이제 손바닥을 타고 그녀의 심장까지 와 닿았다. “오래전에…… 손을 잡고 누군가와 깊은 어둠을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사강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빛을 향해 걷고 있는 두 걸음은 점점 보폭을 맞추고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긋나던 그들의 호흡은 이제 비슷한 기울기로 흘러내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포개지듯 겹쳐졌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은 밤이었다.

짙은 구름 속에서 달이 기울고 있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40회>

7부 호텔 생활자

“꼭 옛날 사진 속을 걷는 것 같네요.”

지훈이 다나카 상과 함께 간 곳은 고층 빌딩과 거대한 광고판들이 위압적으로 들어차 있는 신주쿠가 아니었다. 그곳은 예전부터 지훈이 봐왔던 신주쿠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군데군데 벽돌이 깨져 성하지 않은 몸피의 건물들과 낡고 좁은 골목들이 다닥다닥 뒤엉켜 마치 1970년대나 1960년대 분위기로 돌연 시간이 멈춰 선 것처럼 생경했다. 기묘한 타임테이블 위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이런 오래된 골목이 간직하고 있는 특유의 모습들, 가령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한껏 고여 있어 한 시절을 연상하기에 좋을 정도의 습기와 쓸쓸한 과거의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여긴 골덴가예요. 건너편 니시 신주쿠에 비하면 올드 시티죠. 제가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구요. 시마 과장 좋아하십니까?”

다나카 상이 말했다.

“만화는 형이 더 좋아해요.”

다나카 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올드보이』에도 골덴가가 나오네요. 한잔 걸치면서 신세 한탄하기 좋은 곳이에요.”

다나카 상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바람이 불자 애써 왼쪽 관자놀이 근처에 가지런히 붙인 머리카락이 솟아올라 뒤집혔다. 얼핏 잘못 만들어진 가발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머리숱은 적어도 10퍼센트가량 줄어든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문득 최 부장이 생각났다. 다나카 상은 지훈을 보더니 더 호탕하게 웃었다.

“방사능 비 맞아서 그런 겁니다. 크하하하.”

쉰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미혼인 다나카 상은 어깨가 유독 넓어 보이는 회청색 파워 슈트에 물방울이 자글자글한 실크 넥타이를 고수했다. 덕분에 영화진흥공사에나 가야 있을 법한 80년대 필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기억하는 1980년대는 무성했던 자신의 머리숱만큼이나 풍요롭고 따사로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 그들은 골덴가에 있는 다나카 상의 단골 선술집에 들렀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고, 입구엔 일본 식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사하는 고양이 인형 대신 ‘유키’라는 이름의 진짜 고양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유키 짱은 자기가 고양이인 걸 모르는 눈치예요.”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의자 옆에는 고양이가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가자미 굽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옆 사람과 어깨가 맞닿을 정도의 좁은 거리에선 누가 하는 말이든 쉽게 섞였다. 술자리의 화제가 이번 일본 대지진이라는 건 지훈도 알 수 있었다. 당장 핸드폰 버튼 하나만 눌러도 흙더미 속에 통째로 매몰된 마을과 무너진 건물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원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일본 특유의 전력 구조 때문인지 후쿠시마 원전 여파는 꽤 커 보였다. 도쿄 시내에선 전기를 아껴 쓰자는 캠페인 휘장을 두른 공무원들과도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이 집은 녹차가 일품이에요.”

다나카 상은 지훈에게 따뜻한 녹차를 권했다.

“여기, 사케 집 아닌가요?”

“주인이 나가타 현에 커다란 녹차 밭을 가지고 있어요.”

“나가타 현이 녹차가 유명한 곳인가 보죠?”

“그곳은 쌀이 유명합니다.”

다나카 상이 지훈을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자 지훈도 따라 웃었다.

“지진 때문에 걱정이긴 하지만 잘 이겨낼 거예요. 지금은 각자의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힘들 때니까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투명한 잔에 담긴 녹차를 바라봤다. 평화로웠던 일본의 지난봄과 뜨거운 여름의 태양을 가득 담은 녹차일 것이었다. 다나카 상이 찻물을 따르는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언제 가십니까?”

“회사에 전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내일 갈 생각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하루나 이틀쯤 더 있을 수도 있어요.”

“벚꽃이 제철이라 좋을 때예요. 근데 어제 소나기가 와서 왕창 떨어졌어요. 하루만 일찍 왔어도 참 좋았을 텐데요. 정말 아름다운 벚꽃이었는데.”

그는 아쉽다는 얼굴로 지훈을 바라봤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한 시간만 일찍…… 어쩌면 일분만 일찍 왔어도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 다나카 상은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꽤 무서운 말이었다.

“호텔은 편안하십니까?”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덕분에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지훈은 서울에서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극소량의 수면만으로 버텼던 몸이 보상받길 원하는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혹시라도 자다가 침대가 흔들리거나, 전등이 내려앉아도 놀라지 마세요.”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농담이면 좋겠지만…….”

다나카 상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에요.”

호텔 방문을 열자, 어둠과 함께 깊은 정적이 밀려왔다.

지훈은 재빨리 스마트키를 꽂아 넣었다. 모던한 스타일의 침대와 침구류, 미니멀한 화장대 그리고 소파와 옷장이 모두 정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는 트렁크를 올려놓는 탁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회의 때 입을 셔츠와 슈트를 꺼내 옷장에 비치된 옷걸이에 걸고, 속옷과 양말은 서랍에 개어 넣었다. 구두와 운동화는 슬리퍼가 들어 있던 더스트 백 안에 각각 넣어 옷장 앞에 놓아두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책은 침대 옆 스탠드 옆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책꽂이가 있는 것처럼 그는 책의 높이와 두께 크기를 맞추었다.

지훈은 가방 안에서 액자 하나를 꺼냈다.

가죽으로 만든 두툼한 수첩처럼 보였지만 펼치면 어디에든 세워놓을 수 있는 액자였다. 지훈은 액자 속 사진을 보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형과 외할아버지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쓰던 독서대와 꼬마전구가 달린 스탠드도 꺼냈다. 램프는 중국 광저우의 ‘이케아’에서 9달러를 주고 산 것이었다. 짐을 푸는 지훈의 얼굴은 주름 없이 빳빳한 호텔 침구류처럼 침착해져 있었다.

강의가 있는 날, 지훈은 하루 먼저 자동차를 몰고 가 연수원 숙소에서 잠을 잤다. 대부분 지방에 있는 연수원의 이른 아침 강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연수원에 미리 도착해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조직 구성원이나 조직 문화를 이해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는 최 부장의 충고 때문이었다. 지방의 기업 연수원에 내려가는 일은 지훈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물건을 12평짜리 연수원 숙소에 알맞게 재배치하는 건 늘 중요한 일이었다.

지훈은 호텔 창밖의 어두운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벽까지 열어놓는 작은 라멘 가게와 ‘lawson’이라고 적힌 파란색 간판 불빛이 어둠 속에 작은 배처럼 떠 있었다.

지훈은 잠옷을 꺼내 입듯 호텔 옷장에 걸려 있던 호텔 이름이 수놓아진 유카타를 걸치고, 오랜 기간 호텔에 머무는 장기 투숙자처럼 침대에 누웠다.

지훈은 호텔을 ‘숙소’라고 쓰고 ‘집’이라고 읽었다.

그가 명훈을 ‘형’이라 쓰고 ‘동생’이라 읽었던 세월과 무관하지 않은 고의적인 오독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34회>

                                         * 

   

 사강은 자신에게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정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수를 의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얼마든지 피렌체로 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도쿄라면 미주나 유럽을 돌며 셀 수도 없이 경유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화폐 단위가 제각각인 나라를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한정수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사강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된 소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읽을 수도 없으므로 책이라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웠다.  

 사강은 이 소설들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기로 결심했다. 같은 책이었지만 표지가 다르고 장정과 판본도 제각각인 다른 책이었다. 결국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사강은 이 책이 영화제 주최 측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모 카메라의 주인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누군가 실연의 기념품을 ‘대신’ 처리해준다는 것이었지만, 반지나 목걸이처럼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낡고 생채기 많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누구도 가져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로모에 필름이 들어 있는데, 혹시 아셨어요?”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공항 인근 현상소 직원이 사강에게 말했다.

 “필름이요?”

 “어떻게 할까요? 인화해드려요?” 

 사강은 커다란 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많은 가족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아기와 아빠, 아기와 엄마, 아기와 가족들…… 그리고 성장한 채 웃고 있는 또 다른 가족들…….  

 “이거, 꽤 오래된 필름 같네요. 적어도 몇 년은 된 것 같은데요.” 

 현상소 직원은 로모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사강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 산 35밀리미터 필름 세 통을 그녀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7, 8년은 된 것 같은데요?”    

 “7, 8년?”

 사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혹시 필름을 인화하면 필름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건가요?” 

 “필름이야 당연히 돌려드리죠. 필요 없으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사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상소 창밖을 멍하게 바라봤다. 

 카메라 주인은 이 로모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필름은 우연히 이곳에 남겨졌을 것이다. 사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 있는 필름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방치하진 않았을 테니까. 누구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찍혀 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남기진 않는다.  

 사강은 긁힌 자국이 남아 있는 카메라의 낡은 플라스틱 바디를 바라봤다. 단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것은 충분히 낡아서 별 쓸모 없어 보이는 카메라였지, 카메라 안에 든 필름이 아니었다. 필름 속 사진은 시간이 기록된 내밀한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일기장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을 리 없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이 필름을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의 머릿속에 든 첫 번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의 주인을 찾기 위해선 사진부터 인화해야 했다. 사진 속에 필름 주인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가 올라온 트위터를 역추적하면 카메라 주인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스물두 명이었다. 추적이 가능한 숫자였다. 카메라 주인이 트위터 프로필에 얼굴 사진을 첨부한 사람이라면 찾는 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인화해주세요.”

 창밖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30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따뜻한 녹차라도 드릴까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사강은 주인의 시선을 좇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에 젖어 연두색이 한껏 도드라진 버드나무 사이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버드나무를 미친 여자가 머리 푼 것 같은 모양이라 불길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사연 많은 여자의 긴 머리칼을 감싸는 오색 빛깔 머리띠 같았다. 

 자기 몫의 사랑이 이미 죽어버렸는데도 실연의 기념품들은 왜 이리 유난스레 반짝이는 걸까. 사랑이 사산된 후 남은 실패의 증거물인데도 말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속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차 때문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늑골 부근까지 통증이 뻐근히 내려왔다. 

 “예상대로 문제가 있는 필름이었어요.”

 주인이 심란한 얼굴로 사강을 바라봤다.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필름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지금 보니까 몇 장 빼면 대부분 상했어요. 보관하기 힘든 사진들일 텐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이 사강에게 되묻고 있었다. 

 사강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사진들을 손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 길게 늘어선 양떼구름과 하늘이 반쯤 지워진 풍경, 뿌옇게 사라진 오솔길, 학교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흐릿하게 번진 남자의 희미한 얼굴…… 이 사진 속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사진 속 연인이 궁금해졌다.  


 저녁으로 간단히 야채카레를 만들어 먹은 후, 사강은 몇 시간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모 카메라의 특징을 감안한다 해도, 사진들은 심하게 색이 바랬다. 가장 치명적인 건 누군가의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이었다. 사진의 구체적인 ‘상’은 대부분 날아가고 추상적인 색깔과 형체, 실루엣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나마 구체적인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사강이 고심 끝에 골라낸 아홉 장뿐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33회>

                                       *


 “아내는 요리사야.”  

 프라하의 한 호텔에서 트렁크를 열며 어느 날 정수가 말했다. 

 “망해가는 레스토랑의 요리사. 곧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지.”

 ‘망해가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는’ 같은 파멸의 문장들. 사강에겐 좋은 징조였다.

 “늘 건강식을 고집했어. 아마도 그게 그 레스토랑이 망해갔던 첫 번째 이유였을 거야. 칼로리가 낮은 음식이 건강에 도움이 될진 몰라도 대부분 맛은 없으니까. 나와 다르게 낭만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지.”

 좋은 징조는 점점 불길한 모습을 띠며 사강의 눈앞에 다가왔다. 정수는 잠시 뜸을 들이듯 트렁크 안의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기억나는 유별난 요리 이름이 하나 있는데…… 아마 ‘내일의 달걀찜’이라고 이름 붙인 요리였지. 달걀찜에 저민 닭고기가 들어 있는 괴상한 요리였어. 난 그걸 요리계의 근친상간이라고 놀려댔고.”

 심지어 정수는 아주 조금 웃기까지 시작했다. 

 “아마 지금 내가 그 식당 이름을 얘기한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못할 거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이름의 식당일 테니까. 오전 일곱시부터 문을 연다는 것도 이해하기 쉽진 않지. 이른 아침부터 산을 타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위한 식당도 아니었거든.”  

 사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건 아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사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짐 정리를 좀 해야겠어. 탁자 위에 참치 샌드위치가 있는데 좀 먹지그래?”

 정수는 탁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사강에게 말했다. 사강은 말없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날 휘장이 달린 그의 캡틴 제복은 활짝 열어놓은 옷장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호텔의 침대 정중앙에 커다란 트렁크가 누워 있었고, 젖혀진 트렁크의 짐들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침대 위에 널려 있었다. 정수는 트렁크 어딘가에서 계속 짐을 꺼내고 있었다. 속옷이나 간단한 상비약이 아니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물건들, 가령 보통 사람들의 여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절대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나온 대부분의 것들은 오랜 시간 햇빛에 바짝 말린 건어물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옷이 하나도 안 구겨지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비결이라도 있어요?”

 사강이 정수의 트렁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트렁크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간 그의 옷들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채 가방 밖으로 가뿐히 빠져나왔다. 속옷과 양말, 손수건과 검정색 피케셔츠가 나왔고, 음악 잡지와 항공 관련 잡지들이 나왔다. 그는 은색 스틸 액자에 넣은 그림과 사진을 꺼냈다.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사강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이 모든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의 트렁크에서 마침내 접어서 사용할 수 있는 베개가 나왔을 때, 사강은 정수가 벌이는 이 놀라운 ‘트렁크 쇼’의 클라이맥스를 보았다. 텅 비어 있던 호텔의 옷장은 서울에서 입던 익숙한 옷들로 채워졌고, 호텔 매뉴얼북이 놓여 있던 창가의 테이블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놓인 개인 탁자로 변신했다. 욕실에는 호텔용 세면도구가 아니라 그가 늘 사용하는 칫솔과 치약 비누가 나란히 놓였다. 

 사강은 모든 일이 특별한 규칙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수는 호텔을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처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가져온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모든 걸 트렁크 안에 넣고, 필요한 것만 꺼내 쓰는 사강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세계를 떠도는 직업 여행자의 삶이 일상이 되려면 바로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집을 옮겨놓듯 호텔을 사유화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사강은 불현듯 깨달았다. 일 년의 반 이상을 낯선 도시의 호텔 방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고향 집의 익숙한 풍경과 냄새를 복사해 그곳에 가져와야 한다는 걸, 한정수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야만 때때로 밀려드는 노스탤지어의 공습을, 칼끝처럼 와 닿는 낯선 언어와 불면의 고통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벌어져 채워지지 않는 뒤바뀐 오전과 오후의 시차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여행자의 운명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여행의 기술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곳과 저곳을 떠돌며 호텔 노마드로 생활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이걸 쓰면 방콕이든 델리든 뉴욕이든 동일한 공기를 만들 수 있어. 네가 좋아하는 향을 기억하고, 쉽게 잠들었던 냄새를 기록하는 게 중요해. 낯선 공기 속에서 편하게 쉬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수가 샌드위치를 들고 있던 사강에게 내민 것은 옅은 녹색 향초였다.

 “이름이 재밌어. ‘비 온 후 이끼’거든.”

 정수는 향초를 삼나무 숲에 비가 쏟아진 후, 나무 밑동에서 올라오는 이끼 냄새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조향사가 만든 인공적인 조합일 테지만, 사강은 향초가 구현하는 세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동물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젖은 흙냄새, 비 온 뒤 오래된 삼나무 숲으로 부는 바람의 냄새, 숲 속의 이끼들이 내뿜는 산소의 냄새. 

 냄새의 균질화. 

 호텔 침대에서 나는 옅은 세제 냄새와 막 청소한 카펫에서 나는 옅은 소독약 냄새를 없애고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로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기술. 

 사강은 향초가 자신이 누워 있는 작은 공간을 자신이 상상했던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눈을 감으면 천년이 넘은 삼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비에 젓은 융단처럼 폭신한 이끼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사강은 늘 같은 브랜드의 향초를 피웠다. 


 “윤사강, 당신은 내일 죽는다면 뭘 하고 싶어?”

 뉴욕의 호텔에서 정수가 다시 짐을 풀며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거예요. 정말 맛있는 걸 침대에서 먹고, 먹여주고, 다시 잘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타처럼 날 연주해주길 원해요. 기왕이면…… 그래요. 지미 헨드릭스가 좋겠네요."

 “난 지미 페이지 쪽이 더 좋은데.”

 “마지막 섹스는 혁명가처럼 하고 싶어요.”

 “지미는 27살에 죽었어. 체 게바라는 40살도 못 돼서 죽었고.”

 “당신은 이미 마흔 살이 넘었어요.”

 “난 혁명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요절했어. 내 친구들도 그랬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봤다. 정수는 잘 때도 풀지 않는 손목시계를 습관처럼 다시 바라봤다. 

 “울란바토르 일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지? 지금도 알고 싶어?”

 정수가 물었다. 사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날, 나는 몹시 피곤했어. 48시간째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지. 그래서 비행기에서 승무원들을 향해 난동을 부리는 그 작자들을 도저히 참고 봐줄 수가 없었어.”

 항문에 금괴를 끼어 밀수하려던 정신 나간 남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사강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탔던 비행기가 정수가 몰던 보잉 747-400이었고, 그가 고집한 원칙주의 때문에 사상 최대의 금괴 밀수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건 그녀의 관심과 별개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의 내막은 곧 이륙을 앞둔 L항공사 비행기에 울란바토르 경찰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승객 중 몇 명이 긴급 체포되었고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바로 서울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사업상 계약을 들먹이며 비행기가 자신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듯한 법무법인의 이름을 대며 소송할 것이란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는 그들을 단 1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즉각 이륙을 결정했다. 

 사강은 신문에서 울란바토르 경찰들에 의해 체포된 채 끌려가는 밀수업자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들이 숨겨 가려던 금괴가 고스란히 그들이 앉았던 비행기 좌석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보았다. 뉴스는 조종사가 정시 출발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날, 울란바토르에 넘겨졌을지도 모를 금괴는 대한민국 세관에 의해 안전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내 오메가 알지? 두 도시의 시간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편리한 기계지. 정시에 울란바토르를 떠나면 인천에 새벽 다섯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어.”

 “잠깐만요. 새벽 다섯시라면…….” 

 “오전 다섯시는 조종사들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야. 택시를 타도 관리팀에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이거든. 난 집까지 편하게 가고 싶었어.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한 날이었거든.”

 “설마! 모든 게 택시비 때문이었다구요?”

 사강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일이지.”

 “그 일로 회사에서 주는 상도 받았잖아요.”

 “받기 싫다고 설명하는 게 훨씬 더 귀찮았으니까.”

 “상금도 있었잖아요.”

 “공항버스 대신 택시 탈 정도였어.”

 “맙소사! 그 일로 당신의 원칙주의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부기장을 세 명이나 봤어요.”

 마침내 사강은 그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정수는 잠시 사강을 바라보더니 웃고 있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의 옷깃을 여미고 목덜미와 깊게 팬 쇄골에도 부드럽게 키스했다. 셔츠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푸는 정수의 손길이 느껴졌다. 브래지어의 와이어를 천천히 쇄골 쪽으로 밀어 올리는 동안 그녀의 젖꼭지에 그의 혀끝이 살짝 와 닿았다. 

 사강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목을 감싸고 있는 혈관을 따라 뛰고 있는 맥박을 느꼈다. 맥박이 뛰는 지점을 바라보는 동안 손바닥의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열다섯 살에 새겨진 상처는 이제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사강은 오래된 흉터를 뚫고 맥박이 뛰는 근처까지 자라난 생명선을 바라보았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32회>


 사강은 그의 얼굴과 팔을 젖은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닦았다. 그녀는 바짝 말라 보풀처럼 일어난 그의 입술에 바셀린을 바르고, 티스푼으로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사강은 룸서비스로 해열제와 가습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가습기를 올려놓았다. 가습기의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항균 마크가 적힌 분무를 통해 습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강은 습기가 건조한 호텔방 모서리를 따라 골고루 흐르도록 분무기를 조절했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받아둔 ‘응급처치 119’ 애플리케이션을 찾아냈다. 그녀는 알레르기 환자의 급작스런 발진과 발열 상황에 관한 카테고리를 읽다가, 고추와 굴 알레르기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찾아냈다. 

 H의 손등에 피었던 붉은색 반점도 이전보다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 낮게 웅크리고 앉아 그의 가슴에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갖다 댔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그의 심장 박동을 체크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호흡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복잡한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가는 통로들을 그려보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며 북태평양의 아득한 창공을 날고 있는 고요한 밤, 사강이 들었던 보잉 747-400의 엔진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녀는 다시 그의 심장 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행기 엔진 소리처럼 들리던 이명은 그의 심장 혈관과 연결되어 있을 심장박동 소리와 포개어졌다.

 누군가 문을 열고 틀어놓은 듯한 음악 소리가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is love,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존 레논의 <러브>였다. 사강은 끊임없이 사랑이 반복되는 레논의 속삭임을 들었다. 보통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는 이제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긴장감 때문에 뻣뻣해 보였던 얼굴과 눈가엔 순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게 구부러진 속눈썹은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천진함을 드리웠다. 호흡이 일정해졌고 가팔랐던 들숨과 날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사강은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봤다. 사강은 가습기에 물을 한 번 더 채웠다. 모든 게 채워지고, 제 위치에 돌아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정수의 침대맡에 젖은 이끼 냄새가 난다는 향초를 켰다. 그것이 그의 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건조한 기내에 시달린 사강의 눈은 이제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뻑뻑해져 있었다. 그의 몸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본 후,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24시간 째 긴장 속에 깨어 있던 그녀의 눈꺼풀은 어느새 감겨 있었고, 그녀는 정수의 방에 있던 하늘색 패브릭 소파 위에서 잠들었다. 꿈 없는 평온한 잠이 그녀의 온몸을 담요처럼 덮었다.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뒤척임 없이 잤다. 때때로 어떤 것에 깊게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천천히 닫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켜놓은 향초의 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사강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호텔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미몽 중에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그녀가 옅은 꿈속에서 벗어나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사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그가 소파 옆에 앉아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열이 있군.” 

 H가 말했다. 

 “계속 자는 게 좋겠어.”

 테이블에는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 


 한정수가 모는 보잉 747-400은 여객기는 물론 화물기로도 사용되는 CARGO 기종이었다.

 그는 때때로 평상복을 입고 승객으로 탑승해 앵커리지나 스톡홀름 같은 중간 기착지까지 날아가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로 갈아타고, 화물을 실어 날랐다. 레일이 깔린 화물칸 가득 공업용 소금과 구리나 망간을 싣고 도쿄로 향했고, 칠레에선 냉동육과 와인을 싣고 상하이로 날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살아 있는 수백 마리의 닭들을 화물칸에 운송하기도 했는데, 수면 마취제의 양을 잘못 판단해 주사한 탓에 비행 중간에 깨어난 닭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인도 남부의 고아에서 온 코끼리를 화물칸에 실은 적이 있었어. 오사카에 새로 생기는 동물원에 보내질 코끼리였지.”

 그가 운행하는 747-400의 어퍼 덱(upper deck)에는 모두 6개의 좌석과 승무원들이 쉴 수 있는 벙크가 있었다. 비행기로 코끼리를 수송하느라 긴장했던 조련사는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이르자 좌석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조련사는 커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바짝 마른 인도 사람이었는데, 너무 말라서 벨트 없이는 어떤 바지도 입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수는 그가 습관처럼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수시로 화물칸으로 연결된 비상계단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취시킨 코끼리의 상태를 살피는 그의 눈은 벵갈 호랑이처럼 매섭게 반짝였다. 

 정수는 정해진 시간마다 부기장과 교대해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벙크에서 쉬는 대신 화물칸에 잠들어 있는 코끼리를 보기 위해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따뜻한 지역에서 온 코끼리라 온도와 습도가 특히 중요했다. 습도를 맞추기 위해 조련사가 코끼리 옆에 놓은 찌그러진 은색 물주전자가 그의 눈에 보였다. 코끼리는 조종석 가장 가까운 구역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화물칸을 천천히 걸어 코끼리가 있는 구역까지 근접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믿을 수 없이 커다란 덩치의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있었어. 태국에서 본 비스듬히 누워 있는 불상처럼. 코를 말아 감고 잠들어 있었어. 코끼리는 사람 앞에선 잘 자지 않는다더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 거대한 동물이 절대 잠을 자지 않는 영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대.”

 “코끼리가 승객인 비행기는 잘 상상이 되질 않네요.”

 사강이 그를 바라보자 정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코끼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런 커다란 몸집의 네발 동물들만 있는 세상에 나만 유일하게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면 어떨까. 승객이 없는 비행기 안이라는 게 꽤나 외로워서 드는 생각이었을 거야.”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외로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가 느꼈던 도리 없는 고독이 그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그 외로움의 기울기가 너무나 비슷해 그녀의 마음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어떻게 된 거예요?”

 울지 않으려면 어떤 질문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강은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알고 싶어요”라고.

 “진실을 말인가? 듣고 나면 놀랄 텐데?”

 정수가 사강을 빤히 바라봤다.   

 아홉시 뉴스에도 방송되었던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그가 왜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평생 저주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자국민을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를 돌려 황급히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는지 따윈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에 사강은 항공사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몇몇이 특히 더 알고 싶어 했던 이런 질문을 말이다. 

 “당신 아내는 어떤 사람이죠?”    

 사강이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응시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31회>


이제 사강의 심장은 수시로 변하는 기압을 온몸으로 느꼈다. 심장에 연결됐던 팽팽한 힘줄들이 툭, 툭, 기타줄 끊어지듯 하나씩 잘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행기는 곧 파리의 드골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고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고,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는 평화로운 땅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가능했다. 사무장이나 기장의 보고서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기록될지 예상하는 건 훨씬 더 쉬웠다. 

    

                               * 

  

샹젤리제 거리의 맥도널드 앞에서 아빠와 거짓말처럼 부딪힌 건 3년 전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복동생 ‘폴’이 앉아 있었다. 폴은 빅맥을 먹느라 입술에 케첩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사강은 그가 폴의 양 볼에 묻은 케첩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저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강은 맥도널드가 보이는 바로 옆 카페에 자리를 잡고, 범인을 미행 중인 탐정회사의 직원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들 부자를 30분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쁜 여자들에겐 어김없이 눈이 돌아가는 아홉 살 폴. 늘씬한 여자의 다리엔 난데없이 눈빛이 꽂히는 7월의 복숭아 빛 뺨을 가진 폴. 지금 오른쪽 손에 닌텐도 게임기가 들려 있지만, 10년 후면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탱고를 추고 있을 아이였다. 아이와 대화하는 그의 모습도 이국의 춤처럼 낯설었다. 

파리에서 오래 살더니 평생 바게트만 입에 물고 산 프랑스인처럼 그는 과장된 몸짓을 사용했다. 눈썹을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다가, 지휘하듯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 열 개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랬다. 그곳엔 사강에겐 보여준 적 없는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 따스함이 고여 있었다. 사강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따스함이 놀라웠다. 

사강은 불현듯 폴과 같은 나이의 자신이 늘 “위험해! 더러워!”란 말을 듣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짙은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그건 고향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의 노스탤지어도 아니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생긴 두통도, 피곤함도 뭣도 아닌 순수한 질투심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사강은 창피해졌다. 그녀의 뒷목은 점점 더 뻣뻣해졌다. 폴의 오른쪽 무릎과 왼쪽 손등에는 생채기가 있었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생긴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겐 건강하고 발랄한 아홉 살짜리가 마땅히 달고 살아야 할 저런 표식이 없었다. 뛰어놀다 생긴 무릎과 팔꿈치의 멍과 딱지들 대신 자신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처가 있었다. 빨간약을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인다고 나을 리 없는 것들이었다. 폴은 인간이 아닌 금붕어 친구를 두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사강이 체념하듯 카페에서 일어나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사강은 큰 목소리로 폴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줌! 쉬 마려워요, 아빠!”

“일어나자, 폴.” 

폴은 “Oui”가 아닌 “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폴의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해서 서울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들과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엄마라면 조금만 참고 집 화장실을 사용하자고 했을 것이다. 거리의 공중화장실은 더러울 것이고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다. 사강은 폴과 아빠가 맥도널드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면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 일 이후, 사강은 아빠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파리가 더 싫었다. 한때 사강에게 파리는 5600마일리지를 주는 장거리 비행 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의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 시간째 사강은 낯선 남자의 호텔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 앞에서 그녀는 아빠와 폴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일찌감치 새어버린 아빠의 백발이 H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코노미 앞뒤 좌석 사이의 거리는 약 87센티미터이다. 

비즈니스 앞뒤 좌석 간 거리는 1미터 13센티미터. 

일등석은 2미터다. 

사강은 자신의 방과 H의 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파리 리츠칼튼 호텔 1302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1304호의 방문을 노크를 하기 전, 그녀는 H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이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은 유약해 보일 것이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왜 당신을 또 봐야해?’라는 불쾌한 질문을 유발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은 비굴해 보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는 ‘다시’라는 말 때문에 변명하기 좋아하는 무능한 직원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것이다. 

기내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승객들을 상대하면서 사강은 사과하는 법에 대해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과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이 되자, 어떤 쪽으로든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과를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사강의 손에는 약봉지와 죽, 향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사강은 택시를 타고 향수 가게에 들러 자신이 가진 유로를 털어 젖은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를 샀다. 윤희가 말했던 그 향초였다. 사강은 약국에 들렀고, 한국 식당에서 묽게 끓인 흰죽을 샀다. 적절한 시간에 H를 깨워 약과 함께 죽을 먹이고, 그가 좋아하는 향초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가 아니라 사표를 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 시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정식으로 조종사 과정을 교육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 여자 승무원이 검은색 히잡을 두른 채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제주 비행학교 출신의 여자 조종사 선배도 사강에게 조종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곤 했었다. 

사강은 망설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호텔 방문 앞에 약과 향초만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기장님!” 

초췌한 얼굴의 H가 말없이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사강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움켜쥐었다. 당혹스러움 때문에 사강의 목덜미와 귓불은 발개져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거구인 H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 위압적이었다. 몸에 있는 수분을 엄청나게 쏟아낸 그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것은 꼿꼿하고 반듯한 그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반쯤 덮고 있었다. 긴장감이 돌던 눈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풀어져 초점이 없이 느슨해져 있었다. 

“약을 가져왔어요. 좋아하신다고 해서 향초를…….”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묵직하게 와 닿았다.

사강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H는 사강의 눈앞에서 엎어지다시피 무너졌다.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와 향초를 담은 쇼핑백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사강은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했다. 카펫 위를 구르기 시작한 동그란 약통은 두툼한 카펫 때문에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둑한 복도는 웅크린 짐승의 뒷모습처럼 음울해 보였다. 

“정신 차려요!”

어떻게든 그의 손을 목에 감아 그를 침대까지 옮겨야 했다. 사강은 자신의 어깨에 걸치듯 늘어져 있는 H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등을 오른쪽 손으로 붙잡았다. 손등에 난 H의 흉터가 손바닥에 난 사강의 흉터와 포개지듯 꽉 맞물렸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