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여자가 다시 한 번 유쾌한 듯 공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간이 발명한 것들 중에 공항만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건 없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안전벨트에 묶여 장시간 기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기막힌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공항이야말로 ‘날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동사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공항과 비행기를 함께 생각하고, 그것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의 투명한 뼈를 만지고 자유로운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공항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도 그런 것이다. 떠나고 싶어! 런던! 뉴욕! 도쿄! 아니 더 멀리. 케이프타운 같은 아프리카로!

“어머. 도착하나 봐요.”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누구에게든 쉽게 마음을 열고, 쉽게 말을 거는 여자들이 갖는 특유의 밝고 낙천적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바라봤다.

“그쪽도 누구 기다리죠? 승무원복 입고 기다릴 정도면 애인?”

“아뇨. 친구.”

“난 남편인데. 좀 재미없다.”

여자가 잠시 사강을 바라보다가 아직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주시했다. 이제 짐을 가득 든 사람들이 저곳의 문을 향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간절히 원하던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갈 것이고, 악수와 뜨거운 포옹과 사랑스런 입맞춤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모든 사랑이 영화처럼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공항의 출입구에서라면 누군가의 사랑을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다.

“우리 집 남자, 걸음이 엄청 빨라서 공항에선 늘 제일 먼저 나오곤 해요. 제가 너무 걸음이 빠르다고 늘 툴툴대는데도 절대 고쳐지지가 않는다니까요. 딸애랑 걸을 때만 걸음이 느려져요. 거짓말처럼. 재밌죠?”

사강은 여자의 눈가에 그려진 깊고 자잘한 주름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여자의 귀밑머리에서 짧고 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였다.

“제 말 맞죠? 제일 빠르잖아요. 저런 식이라니까. 밥도 얼마나 빨리 먹는지. 전 가봐야겠어요.”

여자가 일어나며 사강에게 말했다. 그녀는 사강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자주 웃었던 사람에게서 보이는 입가의 주름들이 부드럽게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생애의 대부분이 평온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란 소녀는 틀림없이 건강하고 따뜻한 숙녀로 자라날 것이다. 사강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주근깨가 올라온 발그레한 뺨과 햇볕에 탄 건강한 무릎.

사강은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정수가 인파 속을 뚫고 플라이트 백을 끌며 빠른 걸음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정수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곧 정수의 품에 안겼고 이전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었다. 사강은 인파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동공이 커지고 포옹과 악수와 뜻밖의 웃음이 공항의 B 게이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윤희가 사강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이 탄 공항버스가 빠르게 인천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따뜻한 봄바람이 지훈의 코끝을 스쳐갔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위에서 지훈은 언젠가 길 위에서 보았던 몽환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12월 경부고속도로 길가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활짝 피어난 목련을. 그는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사강이 도쿄 아카사카의 공원에서 한밤중에 태양을 보았던 일만큼이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강물이 어는 혹한 속에 꽃을 피우고, 별도 뜨지 않은 한밤중에 태양을 뜨게 하는 것, 지금 그는 그것을 ‘기적’이 아닌 ‘사랑’이라 불렀다. 그가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엔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뿐이었다. 오전 일곱시에 만나 텅 빈 앞좌석을 바라보며 스물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아침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침 일곱시부터 성장을 한 채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아침 여덟시부터 잘 다린 옷을 차려 입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느 날, 시간이 거짓말처럼 뒤집어져 밤과 낮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착시들. 그것이 스물한 명의 사람들을 오전 일곱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란 긴 이름의 레스토랑 앞에 집결시켰다.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지훈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의 트위터에서 희망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네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잠든 사람이 적어도 다섯 명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한 명이 코를 골았고, 그중 한 명이 꾸벅거리며 졸다가 옆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는 것이다. 연인을 잃고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잠들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악몽을 떨쳐내며 선잠을 자는 풍경. 시인 최영미가 「사랑의 시차」에서 말했었다.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라고.

서울과 상파울루의 시차는 12시간이다.

그날, 지훈이 목격한 12시간은 그러나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헬싱키와 막 섬머 타임이 가동된 도쿄 사이에 벌어진 시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애 중인 사람들 사이에 생긴 사랑의 시차도 아니었다.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과 일상의 사람들 사이에 생긴 선명한 시차였다. 연인의 실종과 함께 벌어진 12시간이라는 틈 사이로 ‘과거’라는 이름의 폭우가 몰아치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영화가 계속해서 상영되던 시간의 낙폭이었다.

누군가 외로움의 각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라고 한다면 지훈은 그날 아침, 자신이 보았던 시침과 분침 사이의 거리를 잴 것이다. 그는 수학자처럼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따위엔 결코 나오지 않지만 외로움의 각도는 ‘150도’라고.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가 가리키던 오전 일곱시의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각도를 보면서, 그는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공항버스가 빠르게 공항터미널 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문 밖 하늘 위로 길고 하얀색 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L항공사의 비행기가 보였다.

한때, 저런 비행기 중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뉴욕의 한 건물을 향해 날아갈 때, 세계무역센터 101층에 갇혀 있던 한 여자가 기도하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의 충돌과 폭발이 일어난 후, 그녀 앞으로 엄청난 먼지와 연기가 달려들었다. 이미 벽이 무너져 내린 사무실에서 죽음을 직감한 그때,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 듯이 구조 요청을 하느라 배터리를 거의 다 소모한 그녀가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비행기가 충돌한 것 같아. 사랑해 당신, 영원히. 안녕!”

아메리카 에어라인 11편이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하던 순간, 몇몇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수화기를 든 그들이 누군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살려줘’,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가 아니라 ‘사랑해’, ‘고마워’,‘미안해’ 같은 말들이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감기 직전 지훈에게 했던 말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지훈은 결코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고로 부서진 자동차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엄마가 어린 지훈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했던 말도 그런 것이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죽더라도 영원히 널 사랑해…….’ 결국 이 세 마디면 다 되는 게 아니었을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죽음의 순간 사람들이 기억해낸 말이 끝끝내 그런 것들이었다면 말이다. ‘형을 부탁해’가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해도, 지훈은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훈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꼽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몸을 조금씩 돌리며 태엽처럼 조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버스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태양이 뜨겁게 녹아 서서히 가라앉는 쪽을 향해 자신의 손목시계를 비추었다.

오후 일곱시.

시계는 오전 일곱시와 같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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