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전 용돈 없인 절대 안 웃어요!”

불현듯 스치는 사강의 차가운 무표정은 그녀가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고,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용돈을 줘야겠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그에게 애정이 담긴 선물이 아니라 돈을 줄 때만 아빠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분노와 슬픔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사강의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것이 눈동자 색깔이 다른 이복동생을 직접적으로 증오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아빠에게서 온 선물이 통장에 적지 않은 숫자로 찍힐 때마다, 사강은 엄마에게 다양한 물건들을 선물했다. 반지나 목걸이처럼 애인에게나 줄 법한 값비싼 선물일 때도 있었고, 베트남의 G7커피나 인도의 ‘히말라야’ 화장품처럼 특정한 나라에 가면 승무원들이 광적으로 사 모으는 물건일 때도 있었다. 

“고맙구나. 잘 쓸게.”

엄마에게 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사강은 언제나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빠가 주는 선물이에요.”

그것이 엄마에게 얼마만큼의 위로가 되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특별한 효도라는 점에서도.   


책을 보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결혼도 이혼도 그런 식으로 해치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의 남자가 일 년씩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천착했고, 그에게 스타일이란 패턴의 축적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가 미디어 아트를 선택한 것도, 이 분야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움에 열광하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작 시리즈’ 같은 말을 혐오했다. 같은 제목에 번호만 붙이는 것은 그의 성품과도 맞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아빠라면 그것은 1년이나 이어진 ‘연작’의 형태로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긴 시간을 투자해 견고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 치밀하고 조직적일 것이다. 

결국 사강은 과거에 헤어졌던 남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사강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난 후, 농담하듯 자신에게 이런 책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 명은 됐다. 

그들 대부분은 사강을 먼저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댔고, 백화점 브로슈어 첫 페이지에 나올 법한 선물들을 보냈고, 수컷이 보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추파를 던졌다. 연애가 시작되려면 이런 요란한 행동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사강은 소개팅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비행기에서 자신에게 반해 추파를 던지는 쪽이, “커피나 한잔!”을 과감히 외치는 쪽이 훨씬 건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본능과 직관이 발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적인 구애를 받는다. 사강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십 대 여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연애의 생태계를 이해했다. 일생 동안 한 번의 예외를 빼면 사강이 먼저 좋아했던 남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헤어지자고 한 쪽은 언제나 남자들이었다. 그녀는 늘 먼저 차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가 차이는 쪽이 아니라 찬 쪽이라고 생각할걸?”

친구인 윤희는 그것이 늘 윤사강 연애 역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점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명의 남자들이 사강의 눈앞을 휭휭 지나갔었다. 

승무원이었던 우혁은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고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섹스할 때마다 사강에게 “좋았어?”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묻기 전에 사강이 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사강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우혁과의 섹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섹스가 끝난 후 귓속에 속삭이는 ‘좋았어?’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관제사였던 경완은 취미로 시작한 직장인연합 합창단 베이스 파트의 독보적인 멤버였다. 그러나 사강은 곧 그 목소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활주로가 아닌 침대 위라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데이트한 몇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뀐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지 못했다.  

책을 받는 순간 누구보다 사강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한정수였다.   

그는 우혁, 경완과 다르게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유일한 남자였다. 

한정수는 그녀가 먼저 사귀자고 했던 최초의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최초이며 시작인 유일한 남자.  



사람들은 한정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항공사 직원들과 ‘외항사’라 부르는 외국 항공사 사람들까지도 그를 ‘H’라고 불렀다.

H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는 혼자 산책했고, 혼자 커피를 마셨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다. H의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는데 세상의 소음만큼 싫은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밥 딜런이나 산울림 같은 옛날 가수들의 음악만 들었다. 그가 ‘존 레넌’의 <Hey, Jude>를 흥얼거리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목격자 이외에 한 명도 없었다. 그의 방 어딘가에 날렵하게 잘 빠진 생채기 많은 녹색 펜더(기타)가 있다는 사실을 항공사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H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기타리스트였고,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조앤 바에즈’라는 사실 역시도. 

그는 언제 어디서나 구겨지지 않은 제복을 입었고, 잘 단련된 종아리가 드러난 반바지와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입고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도록 공항 안에 있는 조깅 트랙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가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달리는 걸 멈출 때는 피트니스 센터에 후렴이 반복되는 시끄러운 후크송이 나올 때뿐이었다. 

H에 대해서라면 믿기 힘든 소문들이 많았다.   

가령 그가 어느 날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괴소문이나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같은 게 그런 예였다. 그가 회장의 첩자라는 소문은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H는 소문에 대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정점에 있는 건 그가 지키기 힘든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란 사실이었다. 그가 준수하는 원칙은 음반으로 치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클래식’이었지만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환경에 노출된 항공업계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십오 년 동안 직접 태엽을 감아야 하는 오래된 기계식 오메가 시계를 차고, 세 시나 네 시가 아니라 세 시 십일 분이나 네 시 이십육 분처럼 정확함을 요구하는 시간에 비행팀 전체를 이끌고 브리핑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철저한 시간 엄수는 그가 요구하는 승무원의 첫 번째 자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코어북에 매번 최고 기록만을 새겨 넣는 프로 야구선수 같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어떤 타격 폼을 유지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장타자 같았다. 그는 무엇보다 원칙을 위해선 반복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스스로 고집하는 몇 가지 원칙들 때문에 그의 비행기는 젊은 부기장들에겐 존경과 동시에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일부 사람들은 H를 싫어했다. 

어떤 부류는 광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짙은 회색빛 은발과 음울한 눈빛을 가리는 보잉 선글라스는 H를 늘 비밀의 언저리에 있는 인물처럼 보이게 했다. 누구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인사과에 기록된 그의 생년월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는 결혼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와이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행을 마친 사강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픽업 버스를 기다리는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낡아 보였지만 잘 관리된 물건이 그렇듯 시대를 초월한 기품이 있었다.

사실 사강이 그를 처음 본 건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쪽 손등의 상처였다. 

피부 위에 굵은 실처럼 올라와 있는 그 상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였다. 그런 상처는 그의 손등에 한 줄 더 그어져 있었다. 사강은 그 옛날 백과사전 위에 자를 대고 반듯이 밑줄을 긋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강은 그 상처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날 밤 잠들기 직전에도 똑같은 장면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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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아빠는 수집광이었다. 

그는 오디오에 미쳐 집 안을 온통 쌀 궤짝처럼 생긴 괴상한 스피커로 가득 채우곤 했는데, 그의 수집벽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시계, 카메라, 초판본이나 장정이 독특한 희귀본 고서 같은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아빠의 수집 욕망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한 여자들이었다. 육감적인 일본 여자, 눈동자가 유달리 검은 초원의 몽골 여자, 몇 달 동안 햇빛 한 번 쏘인 적 없어 보이는 옅은 금발의 창백한 스웨덴 여자…….

어린 시절부터 사강은 늘 귓속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음을 들었다. 

그 소음들 속에는 엄마의 울음소리나 아빠의 웃음소리가 괴상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강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불시에 부모의 이혼을 맞이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기어이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집념을 키우게 된 건, 아홉 살 윤사강이 택한 최악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엄마의 양육 방식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사강은 말하는 법보다 말하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아프다고 울기보단 스스로 약국에 가는 편을 택했다. 물론 그녀가 아주 많은 말을 하는 예외적인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말을 참았던 부작용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라는 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녀의 말끝에는 잘린 전선처럼 생긴 마디들이 드러났고, 그 마디 끝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보기엔 힘든 짓눌려 너덜대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사강은 너무 말을 안 하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주변의 어른들을 걱정시키는 아이였다. 

그럴수록 엄마는 사강을 더 보호하려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사강의 신경증을 두려워했다. 엄마는 ‘하지 마!’란 말을 달고 살았다. 더러우니까, 위험하니까, 힘이 드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는 사강이 커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고기를 사랑하는 편이 더 쉬웠다.  

사강은 수족관에 있는 엔젤 피시의 밥을 직접 주었다. 엔젤 피시에게 ‘꼬마’란 이름을 지어준 것도 사강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물고기 밥은 하루에 딱 10알만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강은 자신이 배가 고플 때마다 꼬마에게 매번 한 움큼씩 먹이를 더 주었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처럼 사강은 물고기와 우정을 나누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손등을 꼬집은 일, 맨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자신의 치마를 들춰낸 일도 꼬마에게만은 말했다. 그녀는 물속을 움직이며 말없이 뻐끔거릴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꼬마의 얇고 투명한 지느러미를 사랑했다.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불룩해지는 꼬마의 입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리를 나풀거리며 헤엄치던 꼬마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이 수영단에서 막 배영을 배우던 시기였으므로 사강은 꼬마가 수족관 안에서 배영을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강은 배를 내보인 채 30분이나 둥둥 떠다니는 꼬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꼬마가 죽어버린 후였다. 

“잘 기억해둬. 사랑을 너무 많이 주면 이렇게 배가 터져 죽어버려!”

꼬마가 배를 보이며 뒤집혀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때, 플라스틱 뜰채로 물고기 사체를 건지며 엄마가 말했다. 사강은 차라리 아프게 손바닥을 맞고 싶었다. 물고기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면 벌을 받아 끔찍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얼굴 더러워지니까 울지 마라.” 

“…….”

“넌 이제 꼬마가 아니야.”

엄마는 꼬마와 똑같은 금붕어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강에게 더 이상의 물고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너도 곧 열 살이야. 알겠니?”

두 손의 주먹을 꼭 쥐고 있던 사강은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점차 누군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말하지 않게 되자, 점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사강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재능을 잃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아주 유능한 회사원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불만 없이 자족하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그것은 거꾸로 보기 드문 재능으로 승화되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짜거나 싱겁다고 고래노래 소리를 지르며 매니저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사강은 경외감을 느꼈다. 비행기에서 난동을 피우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겠다고 발작을 일으키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커피가 뜨겁지 않다고, 샐러드가 차갑지 않다고, 기내 에어컨이 너무 세다고, 약하다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격정적인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고 만나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사강이 잃어버린 승객의 콘택트렌즈를 찾아주고, 보드카를 생수병에 넣어 몰래 반입한 시끄러운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하고, 불편한 자기 자리 대신 텅 빈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 승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고객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스웨덴 여자와 살며 눈 푸른 이복동생을 낳은 아빠에게 뭘 기대한단 말인가. 지금의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딸을 낳은 엄마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올해의 스튜어디스 상’을 두 번이나 탄 사강이 뛰어난 승무원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녀의 서비스는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자연스러웠고,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러나 사강은 점점 비행기 타는 것이 두려웠다. 비행기를 타면 가슴이 죄어오고 숨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는 자주 주먹으로 흉곽 부위를 내리쳤다. 과호흡이나 공황장애 환자를 위해 기내에 설치된 산소호흡기를 떼서 입에 대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그것이 수시로 바뀌는 고도나, 헤어 제품으로 애써 고정한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조여 맸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란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비행기 조종사에게 뜻하지 않은 고소공포증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까. 도서평론가에게 불시에 난독증이 생겼다면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그녀의 일상을 점점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강은 신발장을 활짝 열었다.

상자 속에서 네 개의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 중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독일어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사강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사강은 혐오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곁에 두지 않을 권리라면 그녀는 마음껏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책들, 『슬픔이여, 안녕』은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


책은 대부분 기념일이나 기념일 전날 도착했다.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열흘 전, 생일, 여름휴가 시즌에도 책이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기념일’인지 알 수 없는 평범한 날 도착했다. 네 권의 책이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이 걸리지 않았다. 책에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선물을 보내진 않는다. 

사강은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았다. 패턴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이런 선물은 사강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습작기 학생이 쓴 플롯 없는 엉망진창인 추리소설 같았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첫 번째 일본어판 『슬픔이여, 안녕』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다. 상자에는 교토를 상징하는 황궁이 그려진 우표가 나란히 두 장 붙어 있었다. 사강은 일본어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본어라면 아주 조금 말할 수는 있었지만, 한자를 제외한 일본어를 읽을 순 없었다. 



가로가 아닌 세로로 길게 늘어선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강은 이 책이 낯설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도착한 상자 속에는 스페인어 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발신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스탬프가 택배 상자 위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크리스마스 열흘 전에는 이태리 피렌체에서 『Boungiorno Tristezza』가 날아왔다. 

사강의 생일 날, 베를린에서 날아온 책에는 『Hallo von Sorrow』라는 소설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매번 사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간대가 전혀 다른 낯선 도시를 배회하며 자신에게 책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그 사람의 손가락 지문과 그림자가 이 낯선 책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 책들을 읽으라고 보낼 리 없었다. 

생일에는 코끼리나 주술사가 그려진 실크 스카프와 함께 ‘사랑하는 내 딸’로 시작하는 엄마의 축하 카드가 날아왔다. 매년 같은 생일 축하 문장과 다른 패턴의 스카프를 보내는 것이 엄마의 인사법이었고, 스카프가 들어 있던 오렌지색 박스를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이 사강의 생일날 아침 풍경이었다. 하지만 의문의 상자가 도착하기 시작한 후, 생일은 축하의 의미보단 이번에는 과연 어떤 도시에서부터 어떤 언어로 번역된 책이 날아올지를 추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강은 파리에 사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태리에 간 아빠가 피렌체를 떠돌다 두오모 근처의 헌책방에서 충동적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사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딸의 이름을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으로 지었던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사랑의 표현이 동명 소설가의 책을 보내는 일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사강에게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준 어떤 선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사강 자신이었다. 그는 딸에게 선물할 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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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


윤사강이 날짜변경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열 살 때였다. 

출판사에서 산 두꺼운 전집과 사전을 거실 안에 들여놓는 게 집 안의 품격을 유지한다고 믿는 세대에 태어난 아이는 잘못 들다가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발톱 하나쯤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닌 전화번호부 두께의 백과사전을 제일 친한 친구로 삼았다.

백과사전은 이혼한 부모님의 유물처럼 남겨졌다. 그것은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처럼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먼지를 털어주고, 찢어진 귀퉁이를 정성스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주는 정도의, 말하자면 ‘보관’이란 단어를 쓸 만한 물건이 되었다.   

아빠가 부재하던 유년 시절, 사강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리한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책이라고 믿기 시작한 엄마가 강박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세계명작전집들과 거실에 놓인 거대한 사전의 영향으로 그녀는 오래된 책을 뒤적이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찾아보기 좋아하는 흔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강은 늘 헬로 키티가 그려진 ‘10센티미터 자’를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에 연필로 반듯하게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마주친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녀는 귓속에 그 단어들을 하나둘 숨겨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살이 되던 여름, 동아 백과사전 속에서 ‘날짜변경선’이라 지칭되어 있는 단어와 마주쳤다. 

 

날짜변경선: 북극과 남극을 이어 두 지역의 역일(曆日)을 임의로 구분하는 가상의 선. 본초자오선인 그리니치 천문대의 180도 정반대쪽 태평양 한가운데(경도 180도)에 동서로 나뉜 국제 날짜변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 기준선을 넘나들 때마다 하루를 가감하게 된다. 즉 이 선을 서에서 동으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늦추고, 동에서 서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빨리한다. 날짜변경선은 태평양의 중앙부를 지나 대부분은 바다의 영역에 있어, 섬이나 육지를 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즉 동일 시간대에 속한 나라가 날짜가 달라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동일 지역으로 묶어, 일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그어져 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변경선은 그녀가 사는 지구에 존재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하늘 위에서 바쁘게 시계를 ‘풀었다 조였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열 살 윤사강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투명한 날짜 경계선 위에 둥둥 떠서 시계태엽을 감고, 풀고 다시 조이는 사람들을 그녀는 상상했다. 

만약 어제와 오늘의 경계선 위에서 한쪽 발은 어제에, 다른 한쪽 발은 오늘에 닿아 있다면 지금의 나는 어제를 사는 걸까, 오늘을 사는 걸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강은 사전을 펼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슬픈 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이 아닌 ‘어제’의 날짜 경계선 위에 서 발걸음을 옮기면 거짓말처럼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후회가 되어 눈물처럼 흐를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강은 날짜변경선에 단박에 매혹 당했다.  

어제 누군가 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날짜변경선에선 오늘이 어제가 될 것이므로 고통스런 불행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강의 지구엔 이런 ‘마법의 선’이 존재했다. 블랙홀처럼 시간이 빨려 들어가는 그 ‘구멍’ 속을 사강은 꼭 자신의 힘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날짜변경선을 보려면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강의 미래가 결정됐다. 어린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비행기 승무원은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교수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단어 같았고, 집과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열 살 소녀의 머릿속엔 고향을 타향처럼 느끼는 외로움이 자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비행 승무원이 된 후, 윤사강이 탄 에어버스 330이 지구의 날짜변경선 위를 가뿐히 날아오르던 순간, 사강은 주먹을 쥔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피아노 줄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경계선이 몸 안 여기저기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지문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날은 사강의 생일이었다. 

태평양의 중앙부, 경도 180도의 자오선,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가 수만 마일 너머 날짜변경선 위를 날고 있을 때, 사강은 눈을 감고 자신의 생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빗금 위에 걸쳐져 사라지는 광경을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 사이로 푸른 장화를 신은 날짜 경계선의 정령들이 시계태엽을 빠르게 감고 푸는 모습이 보였다. 180도의 서경 쪽은 180도의 동경 쪽보다 하루 늦게 되는 것이므로 이제 그녀의 생일은 가볍게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짙은 구름들로 한껏 부풀어 오른 어둠 위에 거대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내식과 기내 면세품 판매가 끝난 비행기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에어버스 330의 길고 좁은 복도의 램프 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승객들은 잠들어 있었다. 

사강은 1등석에만 서비스되는 모엣 샹동 샴페인의 기포를 바라보았다. 옅은 복숭아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차갑게 와 닿았다. 그녀는 경계선 위에 놓여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생일을 향해 속삭였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구나.”

날짜 경계선을 알게 되던 열 살의 기억들이 샴페인 기포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보글거리다 톡톡 터져 나왔다. 사강은 그 어둠 속을 뒤로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어제를 바라보았다.


*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다시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불안정하지만 몇 년 동안 반복되면서 어느새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한 사강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집 앞에 의문의 상자가 놓이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처음 그 상자는 신화나 성경에 등장하는 버려진 어린 아기처럼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밤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쏟아지는 햇볕에 찔렸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왔다. 사강은 무심코 바닥에 놓인 상자를 어린 아기같이 번쩍 들어 올렸다. 상자를 흔들자 이리저리 물건이 상자 모서리에 부딪히며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강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책 한 권 들어 있었다. 사강은 그 책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현관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책장을 들춰보지 않은 건 그것이 외국어로 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로 써진 책 말이다.  


*  

                                   

이장희의 노래 <슬픔이여 안녕>은 ‘외로운 내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고 떠나간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로 시작한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으로 변해버려

떨어진 낙엽처럼 멍이 들고 말았네

흩어진 꽃잎처럼 조각난 추억들을

나 홀로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하려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도 이젠 그만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사강이 이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된 건 반복되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그 순간이었다. 적어도 사강의 기억에 엄마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던 어렴풋한 기억도 났다. 마침내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해냈다.   

“아빠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어. 태어나기도 전에 넌 사강이었지. 아들이었어도 네 이름은 윤사강이었을 거야.” 

고민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만약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괴테나 카프카였다면? 자신의 이름이 윤괴테나 윤카프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됨으로써 부모를 저주하는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짓이었다. 

사강은 20대의 아빠를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 뛰어난 청년으로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국제적인 미술상을 받아 신문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인을 이혼녀로 만들었다. 몇 년 후엔 누구도 원치 않는 이복동생까지 안겨주었다. 그와 똑같은 눈매를 한 금발의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장아장 쫓아오는 게 자신이 자주 꾸는 악몽의 도입부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건 이토록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자에겐 아빠가 될 권리도 없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부모가 헤어진 아이들이 그렇듯, 사강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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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5부.  B747-400 



2009년 일본의 젠니쿠 항공사는 승객들에게 비행기 탑승 전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올 것을 권고한 적이 있다. 승객들의 소변 무게를 줄이면 이산화탄소와 연료의 소모를 줄여 지구 환경 보존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항공사 측의 의견이었다. 

같은 이유로 승무원들의 플라이트 백 무게를 줄이라는 회사 측 공문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공문이 나가기 전,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승무원들이 승진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론은 하나야. 마르고, 팔 길고, 여자보다 힘센 게이가 앞으로 항공업계를 장악할 거야! 키 작아도 팔만 길면 승객들 짐쯤이야 선반 위에 쉽게 밀어 넣을 수 있잖아? 너, 뚱뚱한 게이 본 적 있어? 난 없거든.”

첫째와 둘째 아이를 동시에 임신했던 입사 동기 윤희는 자신의 뚱뚱한 배를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었다. 

항공사에는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로드 마스터’라는 전문적인 직업이 존재한다. 비행기에 승객이 탑승하면 로드 마스터는 비행기의 ‘웨이팅 밸런스’를 체크해 승객의 짐과 화물을 나누어 배분하고 파악한다. 짐을 앞쪽에 실을 것인지, 뒤쪽에 실을 것인지에 따라 비행기의 이착륙이 달라지기도 한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비행기의 균형을 위해 승객의 좌석 위치를 바뀌는 경우도 있다. 보잉 777이나 에어버스 380처럼 거대한 비행 물체가 하늘로 떠오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사강은 균형을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런던에서, 모레는 상하이에서 뒤집힌 낮과 밤을 맞이해야 하는 게 일상이라면 균형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뿌리내리고 살려면 말이다. 사강은 십 년째 같은 몸무게를 유지했다. 잠들기 위해 똑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 같은 브랜드의 샴푸와 린스를 쓰는 것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만약 그녀의 인생에 ‘로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지금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사강은 공항 카페 라운지에 앉아 이륙을 준비 중인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어릴 땐 비행기를 바라보면 어딘가 자유롭게 떠나는 보헤미안의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하지만 승무원으로 입사한 후 한동안은 에어버스 330의 꼬리를 바라보면 ‘반 냉동 상태의 기내식은 160도 이상의 오븐에서 이십오 분 데운다’ 같은 공식이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새 떼들을 보면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승무원이 된 후엔 비행기 프로펠러 속으로 그것들이 빨려들어가거나 부딪혀 일어나는 ‘버드 스트라이크’ 같은 비행 사고가 먼저 떠올랐다.     

승무원이 된 후, 어느 도시에 가도 감흥이 십 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도쿄는 서울과 비슷하고, 스위스는 독일과 비슷해 보였다. 프라하는 로마와 비슷해 보이고, 세부는 발리와 비슷했다. 어떤 도시가 어떤 도시와 비슷해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 끊임없이 “어디 가니?”라고 묻는 증세를 승무원들은 ‘항공성 치매’라고 불렀다. 항공성 치매의 가장 안 좋은 점은, 더 이상 어떤 아름다운 도시에 가도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로모 아냐?” 

윤희가 말했다.  

“너 비행할 때 카메라도 가져가니? 난 잠자느라 호텔 밖으론 나가지도 않는데. 보기보다 낭만적이다, 윤사강. 입사 칠 년 차가 이럴 수도 있구나.” 

사강은 막 도쿄 비행을 마치고 활주로가 보이는 에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치즈가 들어간 파니니를 먹으며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는 성인 어른의 것이라기보단 조카에게 선물로 주기에 적당한 장난감처럼 보였다. 

“로모가 뭐야?”

사강이 말했다. 

“로모 몰라? 러시아에서 만든 카메라잖아. 나 이 카메라 좋아하는데.”

“왜?”

“싸잖아. 10만 원도 안 할걸?”

윤희는 사강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빼앗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로모, 색감이 되게 독특해. 사진을 찍으면 탈색된 것처럼 뿌옇게 날아가버리거든. 파스텔 톤이 된다고. 그래서 이 카메라만 고집해서 쓰는 로모 마니아도 있어. 근데 너, 필름 카메라는 좀 불편하지 않아? 현상소 찾는 것도 일이잖아. 난 되게 귀찮던데.”

“필름 카메라라구?”

카메라를 든 채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카메라 뚜껑 열면 필름 넣는 곳이 있을걸? 로모는 디지털 아니잖아.”

“필름이 없으면 이 카메라 쓸 수 없는 거니?”

“당연하지. 요즘 전문가들 빼고 누가 필름 카메라를 쓰겠냐? 디지털처럼 당장 확인해볼 수도 없고, 잘못 찍어도 지울 수도 없고, 현상하는 데 돈 들고. 그나마 현상소도 별로 없잖아.”

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사강의 머릿속에 ‘무용지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놓고 온 기념품을 가져갔을 사람이 느낄 당혹감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를 모르면 읽을 수 없는 책과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카메라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이유로 비틀즈의 <ABBEY ROAD> LP판을 선물해줬다 해도 만약 LP를 걸 턴테이블이 없다면 제아무리 값비싼 희귀 앨범이라 해도 역시 별 소용 없는 거 아닐까.  

사강은 로모 카메라를 바라봤다. 사강은 필름 카메라를 써본 적조차 없었다. 카메라에 필요한 필름을 사고, 그것을 카메라 안에 끼워 넣고, 필름 현상소에 가서 사진을 인화하는 일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필름 어디서 팔아?” 

“모르겠어. 필름 사본 지 하도 오래돼서.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팔지 않을까? 혹시 공항 안에 현상소가 있었나 모르겠네?”

윤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사강 역시 길거리에서 도저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동창을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실연을 당하고 ‘차차차’나 ‘살사’처럼 격정적인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실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실연 후 사표를 던지고 스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탄 채 지구 반대편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영화에서 우연히 본 가우디의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에 반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는 사람도 있다. 

사강은 창문 밖의 활주로를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진 듯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필름 넣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필름 카메라는 골치 아픈 기계다. 하지만 쓸모 있다는 것의 정의가 사람마다 같을 순 없다. 무용지물이라야 가치가 올라가는 세계도 있으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쓸모만큼만 인정받다가, 쓸모가 사라지면 즉각 폐기되는 삶이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경쟁이라면 그것의 반대편엔 또 다른 세계도 있는 거 아닐까. 세상엔 쓰임새가 애매해서 그저 간직할 수밖에 없는 물건도 있다.

“카메라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응.”  

사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손에 꼭 쥐었다. 

“남자?” 

“글쎄…….”

카메라를 카메라가 아닌 ‘로모’라 부르는 일. 이 ‘로모’가 누군가에겐 ‘로모’가 아닌 또 다른 애칭으로 불렸을지도 모를 가능성. 그런 것들. 살면서 가지고 있는 물건에 친근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친구처럼 생각하며 소중하게 다루는 일. 사강은 귀퉁이가 낡아 둥글어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낡은 카메라의 진짜 이름과 시간이 궁금해졌다. 

창문을 향해 막 마드리드에서 착륙한 보잉 777-200 한 대가 비행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비행기 꼬리가 아름다운 피조물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터미널 쪽을 향해 들어왔다. 사강은 가방 속에 다시 카메라를 넣었다. 그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윤희에게 중얼대고 있었다. 

“런던에서 돌아오면 당장 필름부터 사러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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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정미도!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뭐, 그때까지 땅에서 스팀 보일러처럼 연기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잿더미에 덮인 그 땅이 꼭 살아 있는 짐승의 뒷모습 같더군. 그 안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거나, 하이힐을 신은 수백 그루의 시체들이 묻혀 있을 걸 생각하면 끔찍하긴 했지만, 뭐랄까.” 

미도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듯 잠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장엄했어. 장엄하고 압도적인 서사시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지. 얼마나 큰 슬픔인지 전염성이 강해서 나도 생면부지인 사람들에 섞여서 넋을 놓고 울고 있었거든. 모두 하얀 꽃을 사들고, 떠나간 친구나 가족들의 사진을 들고, 눈물을 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꼭 뉴욕이란 도시의 가장 슬픈 배경 음악 같았어. 잿더미 위에 수북이 쌓인 꽃들은 시들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처연한 느낌까지 주더라. 뭐랄까, 시에라리온 같은 아프리카에선 다이아몬드 하나 때문에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죽어간 적도 있는데, 그곳에선 구체적인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아마 아프리카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근데 내가 직접 목격한 뉴욕 그라운드 제로의 슬픔은 너무 구체적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어.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의 친구가, 그 친구의 친구들이 공부하거나, 일하고, 삶을 개척하며 살아간 도시였으니까. 그게 내가 처음 본 뉴욕의 이미지야. 무너지거나 상실된 사람들의 땅.”

“그래서?”

“그래서 도쿄에도 가보고 싶어.”

미도가 말했다.

“위로해주고 싶어서?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언니가 마더 테레사니?”

“위로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위로받고 싶어서겠지.”

미우가 심란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나지막이 긴 한숨을 쉬더니, 뭔가 새롭게 다짐하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언니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구나.”

“무슨 일은?”

“아냐, 분명히 있어. 말 안 할 거야?”

“비행기 표 값이 너무 싸잖아!” 

“너무 일차원적이야.”

“너 같은 다차원적인 인간이랑 살다 보니 더 이렇게 된 거야. 한 번도 도쿄에 못 가봤으니까 이번이 좋은 기회야. 너무 싸!”

“싼 만큼 위험하겠지.”

“이봐, 젊은이. 모험가 정신 좀 키워봐. 면접관이 원하는 건 그런 거야.” 

“어떻게 9․11 테러에서 그런 결론이 나와?”

“너한테는 없는 현실 감각이지.”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

“가르친다고 생기지도 않아! 도쿄 갈 거야, 말 거야? 2인용 끊어, 말아? 삼 초 안에 대답해.”

“방사능에 피폭되면 어떡해?”

“현실 감각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일 초.”

“지진 나서 건물 무너지면?”

“이 초 막 지나갔다.” 

“신문 보니까 편의점에 물건도 거의 없고, 생수 사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던…….”

“일 초.”

“가자, 가!”   

“혼자 죽긴 너한테 투자한 돈이 너무 아깝잖아. 너한테 효도 받을 날을 꿈꾸면서 투자하는 건데. 너는 주식, 부동산, 금 통틀어서 투자 대비 효용성이 가장 꽝이야.”

“너무해!”

미도가 크게 소리 질렀다.  

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세 번 울렸다. 

조용히 안 하면 당장 벽을 부셔버리겠다는 옆방 고시원 총무의 날카로운 경고음이었다. 


*


며칠 후, 미도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 한 통이 떴다. 


―이 형제, 캐면 캘수록 엄청나게 흥미롭던데요? 지난 이십오 년간 보험회사 최고의 악성 고객이었을 듯. 2008년에는 거액의 생명보험 두 개를 연달아 탔어요. 금액을 알고 나면 아마 과장님이 직접 사귀고 싶어질걸요? K 생명회사에 최고 베테랑 보험조사관이 이 사건을 직접 맡아 삼 개월 동안이나 밀착 조사했었습니다.   


셜록이 보낸 메시지였다. 

미도의 이메일에는 ‘이명훈 파일’이란 제목의 메일이 도착했다. 

이명훈과 이지훈. 이름만 봐도 이들이 혈연관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미도는 천천히 이지훈과 이명훈의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이들 형제는 불과 십육 개월 차이로 태어난 연년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평탄하게 살아온 듯 보이던 이지훈이 실질적인 고아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는 건 여러모로 미도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지훈이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린 시절 그와 형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나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부모 없는 고아의 삶이 어떤지 미도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가족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는 건, 그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셜록이 알아낸 자료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일 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명훈은 팔 년 만에야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그것은 나이가 다르지만 일정 기간 명훈과 지훈이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그는 주소지를 바꾸며 무려 네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다. 명훈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에 들어간 건 누군가의 확고부동한 의지로 이루어낸 기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다섯 달 만에 쫓겨났다. 그는 곧 중학교를 자퇴했다. 교무 일지에 의하면 이명훈은 수업 중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벌떡 일어나 빙글빙글 도는 이상행동을 자주 했다. 

그가 중학교를 자퇴한 후 주소지가 한 번 더 바뀌었다. 명훈은 성북구에 있는 장애인 학교에 들어갔다.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전문적으로 코칭하는 특수 교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미도는 이메일을 읽다가 놀라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놀랍게도 명훈의 최종 학력이 전문대 중퇴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은 겨우 삼 개월 정도만 다녔을 뿐이지만 장애인 학교를 다녔던 아이가 대학교 교육까지 받게 된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메일의 거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이들의 경제적, 정서적 지원자가 사 년 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는 기록이었다. 보험조사관이 조사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이에겐 끔찍한 재난이었지만, 어떤 이에겐 영원한 휴식을 의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먼저 외할머니가 죽었다. 

한 달 후 외할아버지가 죽었다.

모두 명훈의 대학 중퇴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이지훈이 대학을 졸업하기 일 년 전이었다. 조부모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이지훈은 사망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이명훈은 현재 파주의 한 전문 요양 시설에 있었다. 이지훈은 매주 토요일 일정한 시간에 형을 찾아간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매주 형이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사 가지고 가기 때문에 요양원 최고의 인기남이에요. 돈 많고 외로운 그곳 노인들 모두의 친손자인 셈이죠. 


셜록의 이메일은 ‘친손자’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채 끝나 있었다. 

미도는 컴퓨터를 닫고 사람들이 퇴근한 어두운 건물을 지나 버스 정류장에 섰다. 

소나기가 내린 후 서울의 도심은 여기저기 젖어 있었다. 거리의 건물과 나무들은 본래의 색보다 더 진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빈 버스 안에서 미도는 자신의 등에 감도는 희미한 불빛을 느꼈다. 비가 내린 후라 기온은 떨어졌고, 하늘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에 축축이 물든 도시는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힘들어도 웃어라,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긴다, 슬퍼도, 싫어도 좋은 말만 해라. 그래야 그 말길을 따라 좋은 일들이 걸어 들어오는 거니까.”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아빠는 삽다리 근처에서 택시 운전을 했다. 

미도는 그때의 두려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나보다 약한 존재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고 만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첫 번째 생리처럼 그것은 낯선 통증을 동반한다. 그녀는 지훈을 생각하다가, 창문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도가 탄 심야 버스가 올림픽 대교 위를 들어서려는 찰나, 거대한 다리의 철골 아치 사이에 걸린 보름달이 미도의 눈에 꽉 차올랐다. 도시의 고층 건물과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을 가뿐히 밀어내는 눈부시게 환한 보름달이었다. 미도는 그 달을 바라봤다. 버스의 창문을 열자 물기 많은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감겨왔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달리는 버스에 부딪히는 단단한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느꼈다.  

미도는 핸드폰을 열어 열한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이지훈의 전화번호를 바라보았다.

버튼만 누르면 현정의 사진과 셜록의 이메일 속에만 존재하던 그 실체와 직접 연결될 것이었다. 버튼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영 점 일 초의 시간이면 지구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의 전파가 그를 자신과 연결시킬 것이었다. 

그러나 미도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 돈이 투입된다는 아이러니가 미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미도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미도는 눈을 감고, 이 밤의 달빛을 처연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묘한 일이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이지훈 한 명만을 위한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더구나 돈을 받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적 없는 그녀가 위험 부담을 끌어안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아빠 말, 정말 맞나 봐. 기분이 정말 이상하거든.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녀는 창문 위에 뜬 달을 보며 아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미도는 핸드폰을 입고 있던 모직코트 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휴대전화에 닿았던 그녀의 검지 끝이 저릿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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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정미도는 회사에 들어가 모두 서른여덟 개의 회원 명부를 정리하고 일일이 전화를 걸어 커플 매칭 상황을 체크했다. 이벤트팀의 정 대리와 만나 새롭게 론칭할 ‘러브 보트’에 대한 브리핑도 받았다. 하지만 미도가 회사에 돌아와 저녁 내내 골몰한 것은 ‘실연’과 ‘결혼’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미도는 자신이 수집한 실패한 연애들의 기록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처음에 보드라운 솜털 뭉치처럼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늑대만 한 사나운 개로 변신해 죽도록 짖어대는 과정과 비슷했다. 실제 미도가 두 번째 사귄 남자에게 선물로 받은 귀여운 레트리버는 몇 달 만에 우렁찬 목소리를 내는 집채만 한 대형견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치 곤란한 선물 때문에 미도는 예산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척에게 그 개를 넘기기 전까지 옆방 남자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영감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미도는 수첩에 그것을 ‘실연의 기념품’이라고 적었다. 

처치 곤란한 실연의 흔적은 누구에게나 남는다. 따라서 그것을 깨끗하게 처리해주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시간 없는 독신자들을 위해 결혼정보회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지훈이 그녀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트위터로 들어가 그에게 던질 ‘큐피트의 화살’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현정이 말해준 트루먼 카포티의 문장 이외에도 여러 편의 영화와 소설, 연극의 대사들을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으며 목숨을 버리는 아름답고, 슬픈 탄식들이 미도의 컴퓨터를 채워나갔다. 그녀는 트위터를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퍼 나르는 말이 결국은 실연과 관련된 사랑의 언어임을 깨달았다.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누구나 잃어버린 자신의 한쪽을 찾기 위한 기꺼운 여정에 동참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것이 그저 이지훈 한 명만을 위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실연 때문에 엉뚱한 사이트에 들어가 있는 대로 바이러스를 옮아오거나, 지하철을 거꾸로 타고 황망한 얼굴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과거에 미도에게도 일어났던 일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시간 동안 트위터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말 중, 미도의 마음을 가장 움직였던 것은 결국 ‘커트 보네거트’라는 소설가의 말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

미도는 그것을 트루먼 카포티의 문구 대신 자신의 트위터에 올려놓았다가 하루 만에 지웠다.

 

그러니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그나마 남자’인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다.      

그날 밤, 현정의 말대로 회사에 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나마 남자’인 친구가 한 명도 없는 현정의 엄마였다. 어렸을 때, 남편을 잃은 여자가 딸에게 갖는 집착이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끝이 갈라질 만큼 신경질적이라 듣는 사람에게 자연스런 반감을 느끼게 했다. 

“그 애가, 이지훈 형에 대해서 말 안 하던가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는 얼마간 지쳐 있었다. 곧 현정이 예상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미도는 차분하게 예상 답변을 차례로 내놓았다.  

“현정이한테 전해요. 나랑 협상하고 싶으면 당장 찾아오라고!”

자신의 딸과 대화 아닌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통보하는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결혼의 파탄은 대부분 돈 때문에 일어난다. 

연애할 때는 문제되지 않았던 집이나 혼수, 신혼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까지 모든 게 돈과 관련된다.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효도’의 문제 역시 놀랍게도 돈으로 환원된다. 누가 누구의 부모를 어디에서 모시고 살 것인가부터 누가 누구의 부모에게 얼마짜리 선물을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파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결혼을 준비하며 배운다. 미도는 돈을 무시하는 태도를 끔찍하게 경멸했다. 정현정과 이지훈 사이의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사람’이 끼여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돈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도는 이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지훈의 형이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실체 없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조사해야 했다. 결혼정보회사의 커플 매니저가 탐문에 능하다는 말은 그 어떤 매뉴얼북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도는 자신의 일이 리서치와 탐문, 신원 조회, 방문 조사 같은 명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노블레스 회원들에게 정확한 정보는 특히 더 중요했다. 그러려면 우선 이지훈의 형 본명부터 알아내야 했다. 

미도는 신원확인팀에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예상대로라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신호가 울리더니 딸깍, 소리와 함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셜록’이란 별명을 가진 차 대리였다. 

“알아볼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가능할까?” 

“이십사 시간 주세요.”

늘 그렇듯 셜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일하는 걸 특히 좋아해서 야근이 잦은 미도와 자주 늦은 저녁을 먹었었다. 셜록과 친분을 쌓아두는 건 여러모로 미도에게 이익이었다.  

“미안한데 이름을…… 아직 몰라. 시간이 많지도 않고. 일주일이면 될까?”

“칠십이 시간.”

“좋아. 그 남자 동생 이름이 이지훈이야. 이지훈 주소랑 주민등록번호 불러줄게. 회사 주소도 알려줄까?” 

“얼굴 확인할 수 있는 사진도 첨부해줘요.”

미도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마우스로 창 하나를 클릭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적힌 폴더였다. 컴퓨터 화면 사이로 한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차올랐다. 사람을 꿰뚫는 듯 깊은 눈을 가진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도는 자신도 모르게 안경 너머 지훈의 동공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 복잡한 일들을 해결할 실마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빠르게 사진을 첨부한 이메일을 보냈다. 

“꽤 잘생겼는데요? 재수 없게!” 

셜록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이 진행되기 백 일 전의 일이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후쿠 지방을 강타한 리히터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어나고, 후쿠시마 원전 2호기의 격납기 부분이 녹기 시작한지 팔십삼 일 전의 일이기도 했다.


*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진행하며 야근을 거듭하던 미도에게 달콤한 휴가가 주어진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다. 회사에선 정미도의 포상 휴가가 승진을 앞둔 그녀에게 주어진 선물 보따리 중 하나라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후, 회사의 온라인 시스템을 정비하던 중 발생한 사고 때문에 마침 직원들에게도 휴가가 주어졌다. 기계 고장 때문에 회사 전체가 쉬던 어느 날, 미도는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뜻밖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정미우, 면접 불합격 기념으로 도쿄 갈래?” 

그것은 일본으로 가는 왕복 비행기 티켓이 평소에 비해 너무 싸다는 것이었다. 

“아직 발표 안 났거든!”

“중요한 프로젝트 끝내고 일주일 후야. 일본 가기 싫어?”  

미도는 여행 사이트의 비행기 노선을 클릭하며 도쿄로 떠나는 비행 날짜를 확인했다. 이렇게 싼 비행기 티켓이라면 물가가 비싼 일본이라도 휴가비가 남을 것 같았다. 

“갈 거야, 안 갈 거야?”

“일본 지금 난리 났잖아. 여진이 언제 일지도 모르고, 방사능비도 내린다고 하지 않았어? 언닌 신문도 안 보냐?”

“기상청 들어가봤는데, 떠나는 날부터 일주일 동안 도쿄에 비 안 온대.”

“대한민국에 기상청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

“난 공인된 국가 기관을 철석같이 믿는 선량한 시민이야.”

미우가 콧방귀 끼듯 미도를 바라봤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사실 나 알카에다가 설치던 9․11 때 뉴욕에 갔었어.”

“뭐?”

미우가 미도를 노려봤다. 

“발리 간다고 뻥치고 간 건 미안한데 어쨌든 좋았어.”

“언닌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 테러 터진 뉴욕은 왜?” 

“그때도 지금 도쿄행 비행기 티켓처럼 비행기 왕복권이 무지 쌌거든. 그때 정말 누구도 뉴욕에 안 가려고 들었으니까.”

“언니가 분쟁 지역 전문 기자라도 돼? 왜 그런 델 골라 가?” 

미우가 읽고 있던 책장을 덮었다.

“뉴스를 봤어. 언제 또 그곳에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죽게 되면 죽는 거고, 살게 되면 사는 거고, 그땐 직장이고 뭐고 때려치운 상태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그때, 폭삭 무너져 거대한 회색 잿더미로 변한 그라운드제로도 보고, 사진도 찍었어. 남들이야 뭐라고 말하든 기묘한 슬픔의 경험이었지. 괴물처럼 큰 세계무역센터가 폭삭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나 멀쩡하게 차려입은 뉴요커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았거든. 근데 너, 도쿄 진짜 안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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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


“지금의 나를 십 년 후 똑같은 내가 바라봐도 전혀 이해되지 않을지 몰라요. 지금 이 일이 제 생애 가장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죠.”

후회해도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현정이 미도에게 내민 것은 지훈의 연락처가 적힌 사진이었다. 미도는 사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회사 사이트의 추천회원 코너보단 자신의 지갑 안에 넣고 다니고 싶은 타입의 남자 얼굴이었다.

“왜 본인이 직접 연락하지 않죠? 그게 더 효과적일 텐데. 훨씬 더 빠르기도 할 거구요.”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기다리는 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시 만나기로 결심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미도는 “종이학을 만 마리쯤 접지 그래요?”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현정을 바라봤다.

“쉽게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라면, 쉽게 만나겠다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끝내기 힘든 만큼 시작하기는 더 힘든 거죠.”

“알아요. 그래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현정은 잠시 뭔가 고민하듯 말을 멈췄다. 

“제가 이런 얘길 하는 건…… 도저히 이해받기 힘든 방법으로 헤어졌기 때문에 일상적인 방법으로 화해하는 것도 그만큼 힘들 거란 얘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헤어졌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한텐 인생에서 가장 복잡하고 충동적인 일이었어요. 화해를 위해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해요.”

“원래 일은 그렇게 벌어져요. 이미 난장판이라 수습 불가거나. 이지훈 씨에 대해 가능하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다 보내주세요. 문자든, 이메일이든, 전화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제가 직접 파악해야 하니까요.”

“그런 걸 전부 다 알아야 하나요?”

현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정 씨, 사실은 제가 직접 알아볼 수도 있어요. 꽤 자세한 일들까지.”

미도는 현정에게 무조건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편보단 현정 씨가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현정이 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얘기하고 싶은 정보 없나요?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일이라든가, 특별히 싫어하는 거라든가.” 

“지훈이는 소설을 좋아해요. 개인 트위터를 하니까 쉽게 성향이 파악될 거예요. 트루먼 카포티. 카포티의 소설을 인용하는 게 좋겠어요.” 

현정이 잠시 말을 멈췄다.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멋진 문장이네요. 실연당한 사람들이 보면 눈물 꽤나 흘리겠어요.”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리트윗 하는 것도 방법일 거고, 지훈이 트위터의 팔로우를 연구하는 것도 방법일 거예요.”

“좋아요. 제일 먼저 트위터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볼게요.”

“지훈이는 강의를 해요. 좋은 문장들을 모으죠.”

“무슨 뜻이죠?”

“강의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수집하는 버릇이 있어요. 소설, 영화, 연극, 에세이, 강의집에 나온 좋은 글귀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요. 그걸 강의 때 인용하고 그걸 바탕으로 에피소드들을 만들죠. 트위터에서 팔로잉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글귀들을 많이 올리는 사람들이에요.”    

“참고할게요.”

미도가 잠시 입을 다물고 뭔가 생각하듯 고개를 숙였다. 

“헤어지자고 한 쪽은 현정 씨가 맞는 거죠?”

미도는 이것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해두어야 생각했다. 그것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현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현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현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도 도와주실 거죠?”라고 되물었다.   

“그게 제 직업이에요.”

“지훈이는…… 지훈이와 헤어지고 나서 알게 됐어요. 제 인생의 대부분이 날아가버렸다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현정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톱 끝을 깨물었다. 강박증을 손톱을 뜯는 것으로 이완시키는 여자들처럼 지독하게 짧고 뭉툭한 손톱이었다.

“전 그냥 애인을 잃은 게 아니에요. 지훈이는 저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었고, 우린 같은 학번 친구이기도 해요.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MT를 갔고, 취업 준비를 했어요. 함께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죠. 지훈이는 제가 가장 힘들 때 아빠나 엄마처럼 늘 제 곁에 있었어요. 고민이 있을 땐 가장 합리적인 충고를 해주는 선배였고, 웃고 싶을 땐 어이없는 농담으로 절 웃게 만들어줬죠. 기억나지 않는 영화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가 있으면 저는 늘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걔 누구였지? 사랑니 뽑다가 죽을 뻔했다고 말했던 우리 반 남자애 있잖아. 그 영화가 뭐였지? 우리 그때, 크리스마스 때 명동교자에서 칼국수 먹고 오다가 봤던 짐 캐리 나오는 영화 있잖아. 저 대신 기억해주고, 저 대신 설명해주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은…….”

“…….”

“퇴근길에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그걸 알게 됐어요. 지훈이를 통과하지 않고 제 청춘을 이해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전 정말 고아가 된 거예요. 세상 어떤 고아원에서도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 천지에 고아가 된 거죠.” 

현정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지훈이란 이름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요.” 

“뭐죠?”

“실은 두 가지예요.”

현정이 미도를 바라봤다.

“여기 절 가입시킨 나이 든 여자 말이에요. 기억날 거예요. 워낙 요란하게 눈에 띄니까.”

“어머니 말씀이군요. 연애를 반대하시나요?” 

미도의 질문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현정의 말 사이에 있는 행간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도는 현정에게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엄마가 그쪽으로 전화를 하면 다 알고 있다고 말하세요. 사실이든 아니든 저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는 듯한 태도를 확실히 견지하는 게 좋아요. 대비책이나 답이 없다고 생각되면 아마 그쪽을 있는 힘껏 물어뜯을 거예요. 하지만 지훈이의 형에 대해 묻는다면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세요. 나머진 제게 맡기세요.”

“그게 무슨 뜻이죠?”

미도가 현정을 바라봤다.

“이지훈 씨한테 형이 있나요?”

그때, 현정의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현정은 당혹스런 얼굴로 “잠시만요”라고 말하며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의 핸드폰도 거의 동시에 울렸다. 소개팅 다섯 번 만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 고객의 전화였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긴 채 공중에 사라졌다. 오 분 후 현정이 다시 카페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가봐야 해요.”

현정이 일어나며 미도에게 악수를 청했다.  

“학교에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 선생님들이 많아요. 소개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현정이 자리에 일어나며 미도에게 스치듯 말했다. 미도는 멀어져가는 현정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정현정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몰아가는 능력이 있었다. 

회원을 들먹이다니! 

엄마를 닮은 아주 영리한 여자였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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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


정현정은 미도의 고객 리스트 중 단연 최고의 고객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 ‘올해의 개매너’라는 우스꽝스런 상이 있었다면, 단연 그녀가 반짝이는 트로피를 받고 영광의 우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현정의 사진을 봤을 때, 미도는 그녀가 남자들에게 꽤 많은 인기를 얻을 거라고 확신했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공무원 연금이라니! 남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직업이었다.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만큼 학벌도 부모 재력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던 남자들은 한결같이 당황한 목소리로 미도에게 불쾌함을 표현했다. 

“뭐, 이런 날라리 같은 여자를 봤나!” 

“소개팅에 자주색 망사 스타킹 신고 나온 거 알아요? 정말 교사 맞아요?”

미도는 고객의 불평 전화에 시달렸다. 회사 웹사이트 게시판에는 태도가 불량한 악성 고객으로 현정의 실명과 학교 이름이 등장해 회사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결혼정보회사 사람들은 그런 악성 고객들에게 제각각 암호 같은 이름을 붙였는데 현정의 별명은 ‘십 분’이었다. 그녀는 십 분 안에 자신이 만났던 모든 남자들을 퇴짜 놓았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문자메시지에 보낸 하트가 너무 많아서, 귓불이 작아서, 코가 커서, 입술이 두꺼워서, 구두 색깔이 불길해서 그녀는 남자를 퇴짜 놓았다. 귓불이 작으면서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데다가 구두 색깔까지 불길한 남자가 나타난 것도 기적이었지만, 모든 걸 기억하고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는 현정의 기억력에 미도는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그것은 정현정이 백 일 안에 성취한 결과물이자, 정미도가 몇 년 동안 구축했던 백 건이 훌쩍 넘는 커플 메이킹 성과들을 한낱 과거의 유물로 추락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미도가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었던 클레임은 들어온 지 오 분 만에 남자가 자신은 머릿속에 난 ‘가마’가 두 개라 결혼을 또 한 번 할 팔자라고 장담했던 대학병원 흉부외과 의사 한 사람뿐이었다. 현정은 그 얘길 하다가 “그 남자가 직접 머리를 까더니, 가마 두 개를 보여주더라구요, 글쎄. 너무 웃기고 황당하지 않아요?”라고 말해 미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 일 이후, 미도는 현정이 모든 일을 고의적으로 망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미도는 그제야 현정뿐만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실연 이후, 미도가 결심한 건 너무 일만 하느라 친구를 등한시하진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미도가 선택한 전략은 자신의 고객을 최고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일이 고객들의 이름과 취미를 기억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엔 손쉬운 집단 문자 대신 일일이 전화를 하거나 손으로 안부를 묻는 카드를 보냈다. 진심을 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절실할 때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미도의 친구들은 그러므로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해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좋은 성과와 인센티브로 돌아왔다.  


이 년 전, 정현정을 노블레스 클럽에 가입시킨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미도는 회사 신원확인팀의 막강한 정보력을 이용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던 현정의 어머니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이유로 이들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가히 무궁무진했다. 가령 아파트가 좋은지 빌라가 좋은지 오피스텔이 좋은지 같은 개인적인 주택 구입 성향과 어떤 회사의 어떤 차종을 좋아하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도 쉽게 밝혀낼 수 있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보석을 선택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온몸에 달고 있었던 그녀의 모친은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업자)였다. 무엇보다 미도의 눈에 확실히 띄는 대목이 하나 존재했다. 

그녀가 번 가장 큰 재산은 인상적이게도 고시원과 도시형 생활주택을 통해 나왔다. 교통이 좋고 상권이 발달한 역세권에는 종종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녀가 직접 개발한 전국 고시원과 원룸의 숫자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미도가 머물고 있던 ‘승리 고시원’의 건물주가 실은 현정의 엄마라는 사실 역시 현정과 미도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인맥을 중요시하는 정미도에게 그것은 아주 확실한 인증 마크였다. 게다가 결혼에 관련된 엄마와 딸의 갈등에 대한 논문이 있다면 미도는 꽤 훌륭한 발제자가 될 것이었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현정은 “안녕하세요. 커플매니저 정미도입니다”로 시작하는 미도의 전화를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통화 때문에 미도의 전화번호는 현정의 휴대전화에 스팸 번호로 즉각 분류되었다. 삭제가 아니라 스팸 번호로 등록함으로써 다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정현정은 주관이 명확한 단호한 여자였다. 

현정이 갑자기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전화한 건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예상 밖이었다. 

현정의 전화에 한동안 미도는 심란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현정이 그날, 이승철의 <네버 엔딩 스토리>가 울려 퍼지는 독일식 호프집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SOS’를 쳤을 때, 미도는 그녀를 도와 환상의 커플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꼭 직업윤리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전 제 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길 원해요.”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미도의 관심이 아니었다. 바람을 피웠건, 권태기 때문이었건, 남자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았건 개인 사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헤어진 남자를 어째서 다시 찾고 싶어 하는지 아는 건 중요했다. 미도는 결국 “왜 다시 만나고 싶어 하죠?”라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현정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야만 자신도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현정은 자신이 퇴짜 놓은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뻔뻔함과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다가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손수건이 부족할 정도였다. 실연 앞에서 그녀의 눈은 애처로울 정도로 충혈되었다. 미도는 현정에게 완벽히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상상력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드물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몰래카메라가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건, 그것이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 고객들에게 가장 먼저 심어주어야 할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종류의 속임수였다. 

‘이 사람은 돈을 내고 만난 사람이 아니라 기막힌 우연이 만들어낸 운명이다’라는 판타지. 그것이 상황을 컨트롤하는 사람에 의해 조작됐다 해도, 그 안에는 일정 정도의 우연이 개입한다. 드라마 작가는 그것을 방송에서 보여주지만, 미도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진짜로 만들어냈다.

“현정 씨는 운이 참 좋네요.” 

“네?”

“전 타고난 기획자거든요.” 

미도가 웃으며 현정을 바라봤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친구를 고객으로 둔 커플 매니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이승철의 목소리가 절절하던 그날, 현정과 함께 듣던 <네버 엔딩 스토리>는 그런 자신들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치는 응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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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그만둬. 무리야, 도저히 무리.”

미우가 말했다.

“미쳤니? 이게 어떤 기회인데. 돈 많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지휘자가 됐는데 내가 그걸 왜 포기해? 회사 돈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신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런 경험은 앞으로 내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언니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건 실연당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잖아. 모든 게 결혼정보회사 이벤트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 회사 잇속을 위해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는 거야. 부도덕해! 질이 나쁘다고!” 

“줄리아드 음대 기계공학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사 빠졌니, 너? 부도덕이란 말이 뭔 줄이나 알고 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아직 징징대는 어린애라는 거야. 세상은 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전부 사기꾼에 악당들이야.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악당들이라고. 내가 하는 일은 최소한 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단 정당해. 돈을 뺏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야. 난 일시적인 장애를 돕고자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실연 때문에 엄청나게 멍청해진 사람들이라구!”

“언니!”

“그 사람들, 마음의 장애인이야. 정신적인 회로가 끊기거나 꼬였는데 사람이 멀쩡할 리 있니?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속이는 거고, 언니가 하는 짓은 양아치 짓이야. 결국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등쳐 먹겠다는 거잖아. 자기 합리화하지 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혹시 그걸 사람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대로 된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면접관한테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으면 그 사람이 감동받아 널 뽑아주겠어? 회사가 무슨 납골당이냐? 뼈는 묻길 왜 묻어!” 

“치사하게! 갑자기 면접 얘길 왜 하는 건데?”

미우가 발끈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면접에 스무 번 넘게 떨어졌으면 너도 느끼는 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백날 편의점 알바 해봐라, 거기서 등록금이 나오고, 용돈이 나오는지. 넌 모르면 가만있어. 이게 단지 내 잇속만을 위한 일은 아니라는 거야. 훨씬 더 고귀한 뜻이 담겨 있으니까.” 

미도는 미우가 이해하기 힘든 얘길 하며 조용히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옆에 있던 초록색 스탠드의 불을 켰다. 고객 리스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미우는 침대에 누워 읽고 있던 신문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나 내일 최종 면접이야.”

“알아.”

“잘하라고 말 안 해줄 거야?”

“말 안 해도 잘할 거잖아.”

“언젠 스무 번이나 떨어졌다고 비꼬더니!”

“그건 네가 네 스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사에만 지원했기 때문에 그래. 정신 차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실연당한 사람들 말고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을 위로해주는 건 불가능한 거냐?”

미우가 뭔가 억울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 게 위로라고.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이 진짜 위로를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위험성을 미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그래서 난장판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최초의 제안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분노에 차 회사를 상대로 고소라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다. 

미도는 회사 법무팀에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의했다. 보안상 그런 상황이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므로 준비는 해둬야 했다. 위험 요소가 많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갖는 열매도 크고 달다. 어떤 위험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세상의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세상엔 공짜 점심 따위는 없으니까.

미도는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며 ‘특별관리’라고 적혀 있는 컴퓨터의 작은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를 열자 몇 명의 고객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나타났다.  

정현정.

미도는 현정의 이름을 클릭했다. 증명사진과 함께 나이와 키, 학교와 주소 등을 기록한 구체적인 개인 정보들이 화면에 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거야.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미도가 열어놓았던 노트북의 창들을 닫으며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르네 마그리트의 화집을 넘겨보던 미우가 미도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그치?”

“응. 이번 회사엔 진짜 합격이야!”

“아님 백수가 되겠지.”

“너무하다.”

“비올라 들고 음대 들어갔던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갑자기 의대에 들어가고, 다시 적성에 안 맞는다고 천문학과에 들어가는 것만큼 나쁠 일이 또 어디 있겠니? 가장 나쁜 건 나처럼 그런 인간의 언니가 되는 일이야!”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미도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미도는 짜증스런 얼굴로 미우를 바라봤다. 건조하게 튼 입술 사이로 일어난 보풀들, 지문이 잔뜩 묻은 안경을 끼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폼이 고등학생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미도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우가 의대에 들어가면 앞으로 병실 잡을 걱정은 안 하고 살 줄 알았다. 비올라든 깽깽이든 하기만 하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미우가 머리 하나는 타고나게 좋아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은 지역 수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화났냐? 미안.”

미우가 베개를 앞에 두고 넙죽 절을 하며 미도를 바라봤다. 앞으로 묶은 야자수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듯 앞뒤로 달랑거렸다.  

“미안하단 말은 어쩜 밥 먹듯 저렇게 잘하는지. 넌 자존심도 없냐?”

“응. 그게 얹혀사는 사람의 예의지.”

미도는 미우를 노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고시원은 너무 작아서 싸움을 하기에도, 애정을 나누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살려면 무조건 크기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도 작게, 기쁨도 작게, 희망도 좌절도 작게, 작게! 그것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안 하는 내 미래를 언니가 왜 걱정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언니는 발터 벤야민처럼 토성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느리게 공전해야 하는데, 밥벌이 때문에 타고난 기질을 누르고 빠르게 휘몰아치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야. 점점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지는 거지. 특히 얼굴 누렇게 뜨고 현기증 자주 나는 거. 오늘 너무 피곤해 보인다.”

천문학과를 나온 미우가 토성이며 화성 공전 자전 타령을 할 때마다 미도는 지구처럼 자기 몸도 10도쯤 기우뚱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토성은 무슨. 간 때문이야!” 

미우가 웃었다. 크게 웃으면 옆방에 사는 총무가 달려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들 자매는 리모컨 볼륨 1 정도로 소리를 조금씩 죽이며 히죽거렸다.  

미도는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번 프로젝트는 미도에게 일어난 가장 기이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정말 그런 모임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나올까. 며칠 후, 대표가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참가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것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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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팀장들 모두가 일제히 대표를 바라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디서건 늘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덕분에 표정을 읽기 힘든 사장의 얼굴에 얼핏 미소 비슷한 것이 점처럼 찍혔다 사라졌다. 그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미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란 사람들은 원래 칭찬에 목말라 있고, 장점과 강점 같은 단어에 눈먼 존재들이라는 걸 미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위치한 회사라는 게 장점이죠. 그런 분위기 때문에 타사에 비해 회사라는 딱딱한 느낌이 덜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 준다는 강점이 있어요. 바빠서 잘 가진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의 지하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도 있더군요.”

회장은 처치 곤란이라며 당장 없애고 싶어 하지만 전직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아들이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풍문 속의 독립영화관이었다. 미도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표를 바라봤다.  

뉴욕의 NYU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관객이 거의 들지 않은 망한 영화 몇 편을 찍기도 했던 대표의 눈빛이 검정색 선글라스 속에서 반짝였다. 짙은 그림자처럼 늘 표정을 감추어주던 선글라스는 역설적으로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대표는 무심히 몸을 틀어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가 의자를 살짝 끌어당길 때마다 팀장들의 눈도 바쁘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미도는 잠시 테이블 옆에 있던 생수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했다. 

“생수가 800원짜리 생수통에 담겨 있으면 그냥 800원짜리 편의점 생수가 되겠죠. 하지만 아티스트가 특별히 디자인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이름의 병에 담는다면 그 가치가 얼마로 올라갈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고객에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제 ‘스토리’는 우리 업계 최고의 화두가 될 거예요.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나와서 비빔밥 한 그릇에도 이야기를 담자고 목 터지게 외치는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 팀들의 화합이 아주 중요해요. 분열되지 않고 서로 똘똘 뭉쳐서 이번 기회에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고객들을 확보하는 겁니다. 이런 기획이 아니라면 절대로 결혼정보회사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도도한 고객들 말이죠. 우리에게 열광하는 만큼 우릴 경멸하고 혐오하고 심지어 경박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미도는 조 부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기술에 접목되어야 할 것이 휴머니즘과 인문학이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매칭 계획서나 던져주고, 전화 몇 통 해대면서 우리 회사랑 제휴된 회사가 500개다 600개다 같은 광고 정도로 사람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는 결혼 비즈니스에 눈물이 넘쳐나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접목시키는 거예요. 이 감수성 넘치는 고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서비스를 받게 될 거고, 미래에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들이 될 겁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어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전 이렇게 되돌려 말하겠습니다. 행복한 커플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커플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우리의 타깃은 이미 헤어져서 불행한 커플들이에요. 제각각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미도는 마우스를 클릭해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 파일을 열기 시작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이것이 이번 비밀 프로젝트의 제목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가능하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제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L 결혼정보회사의 대표이사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망한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러나 세상에 망한 영화감독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치열한 영화계에서 입봉조차 못한 조감독 출신들이 즐비한 지금, 그가 말아먹은 영화가 중요해질 일 따윈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원 숫자만 400명이 넘는 이 거대한 회사 사람들에게는 ‘망한 영화감독 출신의 결혼정보회사 대표’라는 긴 이름만큼 부조리한 직함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표는 가끔씩 나타났지만 사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로 예의 발랐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뉴욕 양키tm 야구 모자를 쓴 채 양복을 입는 등 단번에 ‘워스트 드레서’에 등극할 괴상망측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물론 그가 누가 봐도 형편없는 야구 영화를 만들었다가 쫄딱 망해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도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야구 모자를 시도 때도 없이 쓴다거나, 번식욕이 유달리 강한 회장의 배다른 자식일 거란 루머는 막 입사한 신입사원들까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도의 이번 프로젝트는 ‘원탁의 기사’ 단 네 명만 참석해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원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진들에겐 무늬만 사장이라고 생각했던 대표가 회의 중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빅뉴스였다. 그런 대표가 한 번도 벗지 않던 선글라스를 벗고 박수까지 쳤다는 믿기 힘든 소식은 삽시간에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물론 회사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건 이 회의를 주재했던 사람이 정미도라는 사실이었다.   

미도가 한때 영화감독이었던 대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벤트로 ‘시네마테크’와 영화를 이용한 영악한 마케팅을 펼쳤다는 건, 그녀를 시기하는 쪽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미도의 이해할 수 없는 레이어드 룩, 일명 ‘덕지덕지 패션’ 역시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란 말도 흘러나왔다. 팀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미도는 ‘마녀’와 ‘악녀’, ‘천재’로 각기 이름을 달리하며 회오리 같은 소문 속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  

소문과 악명!

이것이야 말로 회사 생활의 꽃 중에 꽃이다. 악명은 정미도에게 회사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었다. 미도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진행해나갔다. 그녀는 즉시 시네마테크 관계자를 만났다. 다음 날 지독한 경영난으로 레스토랑을 포기하려는 유기농 레스토랑 주인을 만나 포섭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해 정기화될 경우 회사가 얻게 될, 이익과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권위와 명성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는 미도가 지켜온 원칙 중 하나였다. 뜸들이다가 김새는 일은 쌔고 쌨다. 당장 돈이 없어 내일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감각이 그녀에게 준 것은 ‘핵심이 아닌 것은 전부 지워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시원에 도착한 미도가 이 화려한 성과에 대해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단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정미도! 이 천하의 사기꾼!”

그것이 동생 미우의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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