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비행 훈련을 받던 연습생 시절, 사강은 예기치 못한 비행기 사고로 죽은 승객들의 숫자를 헤아려본 적이 있었다.

스위스항공 111기, 이집트에어 990기, 팬암 103기에 탔던 승객들은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했다. 비행기 사고는 확률적으로 극히 미비하지만 과거 역사가 보여주듯 승객들의 전원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 사고의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인 비행기 엔진 고장이 곧바로 추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비행기는 곧바로 추락하지 않는다.

대신 부력과 중력을 이용해 일정 시간 이상을, 사실 꽤 ‘길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을 하늘 위에 떠 있다. 심지어 F-16 같은 전투기는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단지 부력과 중력을 이용해 30킬로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다.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추락의 순간을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이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와 있다”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사강은 바로 그런 공포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한 자신의 이성이 추락하는 줄도 모르고 하늘에 붕 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공포 말이다.

“선배! 저 남자 좀 보세요. 책 읽고 있는 남자요. 초록색 슈트케이스 옆.”

후배 미소가 사강에게 속삭였다.

“제 얘기 안 들리세요?”

사강은 변경된 스케줄의 ‘크루 리스트’에서 막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발견한 후였다. 두통약 몇 알로는 나아지지 않는 두통이 내내 비행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마주치지 않기 위해 1년 동안 힘든 일정을 소화해냈는데 결국 비상사태로 생긴 오차로 정수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지금 뭐라고 했어?”

사강이 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남자. 지난번 사내 교육 때 왔던 그 강사 맞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잖아요. 양복 대신 검정색 터틀넥 입고, 흰색 운동화 신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미소는 사강 옆에 있던 윤희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음…… 맞네. 잘생긴 남자는 내가 좀 오래 기억하지.”

윤희가 말했다.

“근데 저 남자, 강의할 때 풍선 들고 나타나지 않았니? 빨간색이었나?”

윤희가 동의를 구하듯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생수를 무의식적으로 입에 물었다. 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미소, 저 남자한테 관심 있나 보지?”

“그날, 강의 좋았잖아요. 자기계발은 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엔 절실한 문제란 말이에요.”

“강의가 아니라 저 남자 스타일이 맘에 들었겠지.”

“저런 타입의 남자 여자 많겠죠?”

“아님 유부남이거나! 남의 남자, 별거 없어. 여기서도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지. 사람의 눈은 점점 더 낮아지게 돼 있어. 그렇다고 유부남한테 눈독 들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안 그래?”

“어머, 선배님 무슨 말씀을! ‘인생 별거 없어. 남자 다 똑같아. 그 밥에 그 나물이야.’ 그런 말, 저 진짜 싫어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두 사람, 오늘 나리타 찍고 뉴욕 가는 일정이었나?”

윤희가 사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강 선배랑 같이 바로 뉴욕 갔다가 돌아오는 날 도쿄에서 스테이션이에요.”

“나리타에서 승무원 교대 안 해? 이상하네?”

“그건 LA 일정이잖아요.”

“나 요즘 기억력이 왜 이러지? 쌍둥이 낳고 났더니 기억력이 형편없어져. 항공성 치매겠지?”

“저도요, 저도! 다른 데는 참겠는데 뉴욕이랑 LA는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저 잠 안 와서 KBS월드에서 하는 <파리의 연인> 재방송 세 시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봤잖아요. 그게 대체 몇 년 전 드라마야. 이러다 박신양이 내 친오빤 줄 알겠어.”

미소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돈 벌어서 제가 뭘 하나 살펴보니까 월급의 반은 미친 듯이 먹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미친 듯이 다이어트 하는 데 쓰더라구요.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연애를 못 해서 그래. 그러다 너 진짜 미치겠다.”

“맞아요! 윤희 선배는 사내 연애라도 성공했잖아요. 잘생긴 부기장 있다는 소문 혹시 들은 적 있으세요?”

“없어!”

“아……!”

미소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만석 아니지? 도쿄 좌석이 비어 가는 날이 있을 줄 누가 알았니. 밀(meal) 서비스할 땐 좀 편하긴 하겠다만. 니네 밀 몇 개나 들어가?”

윤희는 미소의 말을 가볍게 건너뛰고 사강을 바라봤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윤사강, 너 왜 그래?”

사강은 대답 대신 생수를 마셨다. 아직 혀끝에 녹지 않은 두통약의 맛이 남아 있었다. 사강의 가슴이 점점 더 울렁거렸다. 다음 비행의 쇼업(show up)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속이 좀 안 좋네. 울렁거리고. 토하면 좀 나을라나?”

“그날도 그러더니.”

“그날이라니?”

“저 강사 교육 하던 날. 너 완전 이상했던 거 알아? 렌즈 잃어버렸다고 엎어져서 울질 않나. 난 니네 엄마 돌아가신 줄 알았잖아.”

“뭐?”

“승무원 교육 있던 날, 너 엄청 울었다고. 눈 퉁퉁 부어서.”

그제야 사강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터미널 3층의 탑승동으로 들어가기 전인 듯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저렇게 다리를 꼬고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집중하는 실루엣은 낯이 익었다.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남자는 점점 더 책에 빠져드는 듯했다. 사강은 배에 손을 얹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소화제 몇 알로 속이 좋아질 리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턱선과 안경이 사강의 눈 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한순간 알아보았다. 제주도 사진 속의 그 남자였다. 연인과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던 남자. 며칠 전, 충동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남겼던 바로 그 남자!

사강은 몇 주 전, 그 레스토랑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네마테크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을 그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강은 로모 카메라의 필름 주인을 알아내기 위해 긴 시간 노력했었다. 밤새 100개가 넘는 개인 트위터를 뒤져 정보를 모았고, 결국 눈앞의 남자가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여기저기 조각나 있던 퍼즐들이 자석처럼 제 위치에 와 닿아 조금씩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을 직접 보자 뿌연 유리창을 한 손으로 스윽 닦아낸 기분이었다.

손이 움직인 방향대로 고개를 돌리면 남자의 얼굴은 분명한 방식으로 회전했다. 사강은 몇 주 전 그에 대한 편견을 조용히 수집하던 절망적인 아침 일곱시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제 남자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을 알아맞히는 일은 훨씬 더 쉬워졌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공항에서 홀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사강은 친근한 동료애를 느끼곤 했었다. 이지훈에게 지금 시간은 비행기가 아니라 책 속의 인물들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사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두 개의 시간들이 충돌하는 교통사고 현장에 초보 감식반원처럼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분명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사강은 자신의 가방 속에 든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모두 공항 현상소에서 인화한 사진들이었다.

『슬픔이여, 안녕』과 ‘아홉 장의 사진’.

그러니까 그것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시간들 속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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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

“제 생전에 방사능 때문에 애들이나 입는 우비를 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마케팅팀의 김 대리가 말했다. 그는 유달리 팔의 중간 부분이 아래로 늘어져 얼핏 한복 저고리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런 우비를 입고 있었다.

기상청에선 한반도 지역으로 부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이 방사능 청정 지역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제주를 비롯해 전국에 세슘과 요오드가 검출되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트위터를 통해 지금 내리는 비는 절대 맞으면 안 된다는 경고성 문구가 사방으로 리트윗되기 시작했다. 도쿄만큼 서울도 점점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도쿄 가기 싫어하는데. 그래도 당신은 미혼이니까. 미안.”

“괜찮아요, 강 선배.”

“대신 서울 걱정은 붙들어 매. 며칠 푹 쉬었다 오라구.”

“고마워요. 온몸에 방사능 잔뜩 묻히고 와서 꼭 포옹해드릴게요!”

지훈이 웃었다.

다들 좋아하는 도쿄 출장을 이번엔 아무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훈이 떠맡듯 가게 됐다. 도쿄에는 아시아 총괄 업무를 맡는 팀이 있었다. 일본 법인의 다나카 상을 만나는 건 오전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형식적인 보고에 가까워 복잡한 실무도 없을 것이었다. 회사에서 자주 이용하는 호텔 근처 단골 라멘집에서 두툼한 차슈를 얹은 덮밥과 라멘을 먹고, JR 야마노테센을 타고 이동하면 우에노 공원에서 흐드러진 벚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장마나 우기도 아닌데 지겨울 정도로 비가 내렸다.

지진 뉴스만큼은 아니지만 꽤 우울한 날씨였다. 속도위반 범칙금을 내기 위해 회사 근처 은행에 가던 지훈은 대형 서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자신이 자주 머물던 ‘경제경영’ 섹션에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인지, 서점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훈은 구글노믹스, 조지 소로우의 경영철학서, 스티브 잡스와 워렌 버핏의 자서전 코너를 지나 문학 섹션의 베스트셀러 목록들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는 마이클 코넬리의 신작과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발음하기 힘든 괴상한 제목의 SF소설 코너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세계명작 코너의 한 부분에서 발끝을 세워 책 한 권을 뽑아냈다. 책 표지를 넘기자 헌책방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책처럼 후루룩 먼지가 쏟아질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자 재판을 찍은 연도가 1998년에서 끝난 오래된 책이었다.

‘밤이면 편안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두꺼운 소설을 조금씩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이라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성공한 삶이 아닐까.’

살긋거리는 종이 위에 먼지를 조심스레 불어가며,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이 문장을 발견하고 서서 책을 읽었다. 그것은 강의 교재 맨 첫 줄에 써도 좋을 만한 이야기였고, 청소년들을 위한 책 읽기 클럽의 서두로 사용해도 좋을 만했다. 지훈은 먼지가 쌓인 책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낸 후, 서점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고무장화를 신은 초등학생들이 책을 들고 와글거리며 서 있었다.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하우스가 붙어 있는 서점 안에선 원두를 가는 시끄러운 소리와 헤즐넛 향이 퍼져 나왔다. 그는 거스름돈으로 서점 안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카페 소파에 등을 파묻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보거나,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얘기하는 대신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왜 카페에 왔을까?”

작년 이맘때쯤 현정은 카페에서 대화를 포기한 채 스마트폰으로 각자 다른 볼일을 보는 연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발견’이라도 한 듯 지훈을 뚫어져라 바라봤었다. 사실 그건 유별난 일이랄 수 없었다. 카페의 풍경이 바뀐 건 서울만의 일이 아니라 이미 베를린이나 북경 어디에서든 일어나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시 있잖아? 난 그 섬이 꼭 스마트폰 같아. 연애하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잖아.”

“넌 기계 예찬론자잖아?”

“예찬이 아니라 친근함의 표현인데?”

지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내가 보기엔 넌 스마트폰 중독이야. 네가 좋아하는 ‘모든지 척척박사’ 애플리케이션에 물어보지 그래? ‘연애 박사’ ‘실연 박사’ ‘짝사랑 박사’도 있지 않았나?”

“비꼬지 마! 성경만큼 좋은 애플리케이션이니까.”

“그걸 성경에 비유하다니. 너, 중증 맞아.”

“중독된다고 그걸 꼭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어. 중독은 증오에 비례해. 도박하는 사람들이 도박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잖아. 알코올중독자도 마찬가지야.”

카페의 풍경을 바라보며 지훈은 현정과의 오래된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을 혀끝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중독은 증오에 비례한다.’ 적어도 현정은 자신이 한 말을 입증해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택한 이별의 방식이 그 말의 구체적인 예시였다. 지훈은 가끔 현정이 택한 이별이 ‘실연 박사’ 애플리케이션에 나와 있는 네 번째나 다섯 번째 매뉴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훈은 책장을 넘기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레귤러 사이즈의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그가 서점 밖을 나와 빠르게 걷는 동안 그를 호출하는 두 통의 전화와 함께 도쿄 출장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관리팀의 전화가 이어졌다. 몇 분 간격으로 울리는 휴대전화가 지훈에겐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현정의 말처럼 그것은 ‘섬’이거나 ‘외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일 뿐이었다.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사들고 바쁘게 회사로 돌아오던 그때, 그의 핸드폰에 두 통의 문자 메시지가 13분 간격을 두고 도착해 있었다.

하루 수십여 통이 넘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는 그의 핸드폰 속에서 그것은 각종 스팸 문자와 업무에 관한 지시 사항, 미팅과 회의 시간을 조율하는 끝없는 릴레이 문자 속에 빠르게 휩쓸려갔다. 메시지는 과천 정부청사에서 벌어진 공개 강연회와 연달아 이어지는 미팅 때문에 꽤 긴 시간 확인 없이 잠겨 있었다. 만약 그것이 열한 개의 숫자로 나열된 번호가 아닌 익숙한 사람의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면, 신중한 이지훈이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지훈아. 만나자. 당장!!

첫 번째 문자 메시지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정이 보낸 것이었다(그는 이미 현정의 번호를 삭제한 후였다). 긴박할 때만 사용하는 두 개의 강렬한 느낌표, 부사와 동사의 뒤바뀐 위치. 그것은 현정의 말투였고 그녀의 숨소리였다. 그러나 나머지 문자 메시지에는 지훈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필름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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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6부 인천 국제공항

100명의 보험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한다면 어떤 얘길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별과 실연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한다면 무슨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마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 가령 고속도로 속도위반 통지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인과 헤어지고, 그녀에게 미친 듯 질주해 달려오는 남자가 낭만적이라고 생각되는 건 영화나 드라마에 한해서다. 지금 지훈이 하려는 얘기는 중앙선 침범, 속도위반, 불법유턴, 신호위반과 같은 ‘교통법령’에 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나간 이후, 지훈에게 날아온 것은 모두 여덟 통의 속도위반 통지서였다.

위반을 알리는 통지서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충청도와 경기도, 서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개 시도를 넘어 경찰서에서 날아온 것들이었다. 지훈은 위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랑에 미친 남자의 질주를 ‘불법’이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통지서에는 운전의 당사자가 이지훈임을 증명하는 인물 사진까지 친절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지훈의 실연은 정부가 증명하고, 한국도로공사가 공인한 이별처럼 보였다.

“젠장! 한 인물 나셨군!”

지훈은 자신의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속도위반 통지서 속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단속 카메라는 5분마다 범인 차량을 추적하듯 그의 차 앞을 지키고 있었다. 12킬로미터마다 설치되어 있던 무인 단속 카메라에는 그의 얼굴이 흑백 증명사진처럼 찍혀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에서 주최하는 ‘실연당한 남자의 얼굴은 이것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 출품하면 딱 평균적일 만한 사진이었다.

각각의 통지서에는 지훈이 어긴 속도 초과분이 남겨져 있었다. 48킬로미터, 34킬로미터, 53킬로미터, 26킬로미터, 45킬로미터…… 지훈은 핸드폰 계산기를 들고 내야 할 범칙금을 계산했다. 빌어먹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금액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집중해 계산하느라 땀으로 가득 찼다. 계산기를 두드린 지 몇 분 만에 그는 자신이 내야 할 범칙금을 계산했다. 1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면허 정지’가 아니라 ‘면허 취소’까지 벌점이 상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터무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맙다! 이 나쁜 년!”

실연의 기념품으로 카메라 따윌 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덟 통의 속도위반 통지서야말로 떠나간 현정이 마지막으로 선물한 완벽한 실연의 기념품이었다. 그것은 몇 개의 숫자들만으로도 이별을 공식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별 편지의 마지막 ‘추신’란엔 꺾임 없는 반듯한 필체로 이렇게 공식적인 전문이 적혀 있었다.

-과태료 미납 시 재산 압류 조치합니다

‘과태료’와 ‘미납’ 같은 용어 사이에 울렁대던 머리가 ‘조치’라는 행정 용어에 와 닿았다. 지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이별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시절의 사랑이 끝나버린 것이다.

*

“안녕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대듯 지훈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뭔가 중요한 결심이라도 하듯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미도라고 합니다.”

여자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만난 정미도는 이름을 묻기도 전에 지훈에게 악수부터 청했다. 여자가 지훈에게 했던 두 번째 말은 “반갑습니다” 같은 인사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심문받는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정현정 씨, 아시죠?”

여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 끝은 갈라져 있었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여자의 입에서 “현정이는 후회하고 있어요. 진심으로!”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말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지훈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속도위반 통지서를 여덟 장이나 받은 후 나타난 여자치곤 너무 쇼킹해서,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현정이가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여자의 얼굴은 담담했다. 조금 전 보였던 긴장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놀라울 만큼 담대해져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건 엄연한 규칙 위반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일제히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봤다. 핏기 없이 우울한 시선들을 지훈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문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지훈이 정신을 차린 건, 식당 밖으로 나가 연달아 담배를 피운 후였다. 그의 옆에는 정미도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그제야 지훈은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현정이 친구예요? 아님 동생? 선배?”

“제 이름은 정미도예요.”

“지금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흥분을 가라앉히려 해도 지훈의 말꼬리는 이미 갈아놓은 칼끝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전 현정이 친구예요. 공적이고 사적인 것 두루두루 걸쳐 있는 관계예요. 이 모든 게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공적이고 사적인 관계라는 게 대체 뭡니까? 절친한 직장 동료라도 돼요?”

“애매한 말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설명하기에 힘든 구석도 있고.”

“현정이도 이 일을 알고 있나요?”

미도는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훈 씨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직접 찾아가서 얘기하는 것으론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거죠. 여자들은…… 말하자면 남자 쪽에서 연락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아요. 침착하게 얘기하긴 하지만 결국 쿨한 척하려다 내상만 생기는 거죠. 현정이는 지훈 씨 전화를 기다렸을 겁니다. 저도 정말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과예요.”

“그걸 왜 당신이 고민합니까?”

일시에 공격을 준비했던 사람처럼 지훈이 미도를 바라보았다. 미도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미소 지었다.

“가족 같다고 해두죠. 현정이 엄마도 잘 아는 분이니까.”

“이게 고심한 결과예요? 사람 놀래켜서 뒤로 쓰러지게 하는 거?”

“의도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성공했군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어요. 현정인 그걸 실패가 아닌 실수라고 말했어요.”

미도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어조를 바꿨다. 공격적인 지훈의 태도가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그녀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차분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봤다. 표정이나 어조에 따라 얼굴 생김새의 낙차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큰 여자였다. 미도는 ‘실수’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하라는 듯 지훈을 빤히 바라봤다.

“그쪽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후회하고 있고, 정말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거죠.”

“주어가 없잖아요! 대체 누가 후회하고 힘들어한다는 거죠?”

지훈은 미도를 바라봤다.

“현정이를 다시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나지 않을 겁니다.”

이 상황을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이해시키고 싶은 사람처럼 그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훈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해요.”

미도는 흔들리는 지훈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현정인 매일 울었어요.”

“울었다구요?”

“제 앞에서도 울었고, 전화하면서도 울었고, 메일을 쓰면서도 울었어요.”

미도는 세 번이나 울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유치하고 어이없는 그 말들이 역설적이게도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훈은 미도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여자 앞에서, 그동안 꽉꽉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물길이 터지듯 쏟아져 내려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감정의 잔해들, 아름답고 황홀했던 기억들, 스스로 자책하며 무너뜨려 휩쓸려 내려갔던 추억들이 이제 그의 눈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다.

지훈은 자신이 만든 연애의 창세기를, 압도적이었던 기적의 일주일을 회상했다.

불시에 가해진 충격이 어딘가 끊기거나 꼬여 있던 그의 뇌세포와 혈관들을 자극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뻐근하고 짜릿한 통증이 달아올라 그의 온몸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밟고 지나갔다. 그는 회한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한숨 속엔 명멸하던 과거가 스며 있었다.

“곧 영화가 시작될 거예요.”

미도가 말했다.

“지금 실연의 기념품을 이곳에 내놓고 나면 그땐 정말 후회할지 몰라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중요할 거란 건 나도 알아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버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될 거예요.”

미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현정이 친구 아니죠?”

지훈이 미도를 바라봤다.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아니라는 거.”

“이지훈 씨.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봐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결국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죠.”

미도가 지훈을 바라봤다. 그때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을 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가 눈이 충혈된 채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훈은 커다란 기둥 사이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손에는 몇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극장 쪽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불룩하게 밑으로 꺼져 있던 그녀의 가방은 한결 가벼워진 듯 원래의 모양대로 부드럽게 주름져 있었다. 그 안에 있던 물건 중 일부가 사라졌고, 그것이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이라는 사실을 지훈은 쉽게 간파했다.

“꽃을 버리거나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세요?”

지훈은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꽃밭에 버리는 겁니다.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극장 쪽으로 한두 명씩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의 손과 가방 속에는 각기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모두 한때는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물건들이었다. 지금은 처참하게 시들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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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은 자신의 침대 위에 모두 아홉 장의 사진들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사강은 어린 시절 똑같이 생긴 ‘윌리’를 찾기 위해 수많은 윌리들에 몰입했던 때를 기억했다.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던 그녀의 상상력은 전원을 꼽고 이제 막 스위치를 누른 발전기처럼 빛을 내며 돌아갔다. 가령 돌로 낮게 쌓은 담이라든가, 댓돌이 놓인 좁은 마당, 보슬거리는 노란 꽃들이 뒤덮여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지형지물이었다. 얼핏 번들거리는 검은색 물개처럼 보이지만 이것의 정체는 낡은 잠수복을 입은 해녀일 것이다. 뿌옇게 흐리긴 해도, 이곳이 바다가 아닌 길이라는 것 역시 사강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귀엽고 작은 노란 꽃은 유채꽃일 것이다. 봄날의 유채꽃 말이다. 이 연인들은 겨울과 여름이 아닌 봄에 여행을 떠난 것이다.

사진 속 배경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춘천에 가서 닭갈비나 먹자”라고 말하며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복잡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서로의 스케줄을 맞춰야 가능했을 여행이었을 것이다. 사강의 눈은 오래된 두 연인이 걸었던 길을 함께 쫓고 있었다. 사강은 제주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해변도로 위를 일렬로 걸어가는 늙은 해녀들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중문 관광단지나 제주 민속촌, 천지연 같은 관광지를 찾아간 게 아니라는 건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강은 어깨동무를 한 채 돌담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남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비교적 잘 드러났지만 남자의 얼굴은 햇빛에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은 편이었다. 여자는 모자가 달린 후드 티를 입고 있었고, 남자 역시 비슷한 종류의 티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사강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 자신이 입력한 정보를 변경했다. 남자의 키가 평균보다 훨씬 크다면? 여자의 키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것이다.

사강은 다시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스타일은 평범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귀여운 얼굴이다. 그에 비해 남자의 얼굴은 아수라 백작처럼 둘로 나뉜 까닭에 쉽게 추리할 수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았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반바지를 입은 다리에는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어, 좋은 체격을 가진 남자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강은 그날 모임에 나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러나 이들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므로 사진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 사진만 봐선 카메라의 주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모임에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었던 남자가 카메라의 주인이라면, 주인을 찾는 일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사강은 다시 사진 속 여자의 오른쪽에 있던 푯말의 글자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1코스.

푯말에 적힌 단어는 ‘1코스’였다.

만약 그녀가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 사진은 처음 현상소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사진이 아닐 수도 있다. 사강은 인터넷을 켰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제주 올레’라는 키워드를 적어 넣고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

2007년 9월 8일 제 1코스가 개발된 이래 2010년 8월까지 총 21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으며 총 길이가 350킬로미터. 사전에는 제주의 ‘올레길’에 대한 간략한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2008년 봄 이후에 찍힌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올레 사진을 가능한 많이 검색했다. 그리고 사진 속 지형과 비슷한 지역을 비교하며 사진 속 배경을 일일이 확인했다.

제주 올레 1코스.

연인들이 찍은 사진과 제주 올레 사진을 비교하자 조금씩 사진이 의미하는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서 있는 학교는 올레 1코스가 시작되는 제주의 ‘시흥초등학교’일 것이다. 사강은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으로 이어지는 올레 지도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녀는 뿌옇게 햇빛에 날렸다는 이유로 종이봉투에 모아두었던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17코스’라고 적힌 푯말 사진을 발견했다.

이들은 1코스부터 17코스까지 함께 걸은 것이다. 물론 시간상 중간에 특정한 코스를 걷지 않고 그냥 건너뛰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도보가 첫 코스에서 시작돼 마지막 코스에서 끝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제주 올레 17코스가 개장된 것은 2010년 9월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2010년 9월 이후에 찍은 사진인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의문이 사강의 머릿속에 남았다.

사진 속의 유채꽃은 이 사진이 사강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최근에 찍힌 것이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유채꽃이 언제 피더라. 사강은 노트북을 무릎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다시 인터넷을 검색했다. 유채꽃은 대개 3월이나 4월에 핀다. 예외적으로 2월에 피기도 한다. 지역마다 조금 다르지만 심지어 5월에 핀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추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강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이 사진은 한꺼번에 찍힌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찍힌 게 아닐까.

여자의 옷이 사진마다 바뀐 것은 여행 중임을 감안해 여러 벌의 옷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계절에 긴 시차를 두고 떠난 여행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추리하자 이 필름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과 시차를 두고 천천히 한 장씩 채워져나갔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가설이 세워졌다.

이 사진들은 대체 몇 년 동안이나 찍힌 것들일까. 왜 이런 식으로 필름 한 통을 채워나갔던 걸까. 어째서 힘들게 찍은 사진을 현상하지 않고 카메라 속에만 넣어두었던 걸까.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사강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모두 카메라 주인을 직접 만나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사강은 필름을 넣어둔 가방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 가방 안에 네 권이나 되는 책을 넣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나갔었다.

사강은 침대맡에 있던 작은 스탠드를 침대 정중앙에 옮겼다. 그녀는 이제 서랍에서 꺼낸 돋보기로 사진 일부를 확대해 보기 시작했다. 한 장의 사진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두 연인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은 분명 누군가 지나가던 사람이 찍어준 게 틀림없었다. 가장 소중한 사진들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던 낯선 사람의 선의에 의해 찍힌다.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며 자신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영원한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강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영화제 측의 말을 한순간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미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이들이 공유했을 감정의 일부가 그녀의 가슴속에도 이식돼 자라나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심장이 울렁거린 건 비행 시차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비밀을 몰래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촛불이 만들어내는 음영 속의 사진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사강은 꺼져가던 향초의 불을 끄고, 새 향초에 불을 켰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나간 사랑을 위해 밤새 촛불을 켜는 행위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름을 돌려주는 일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강은 이제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사강은 너무 흐릿해서 쉽게 알아볼 수 없다고 단념했던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큰 젊은 남자였다. 그녀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가했던 두 명의 남자를 기억했다. 체격이나 나이로 보아 이 남자가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있던 남자일 리는 없었다.

사강은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조금 떨어져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봤을 때 보이지 않았던 실루엣들이 자신에게 뭔가 말해주길 바라면서. 깨알 같은 점처럼 보이던 작은 도트들이 그녀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강은 자신을 향해 밝은 얼굴로 인사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뛰쳐나가던 모습도. 그녀는 책상 쪽으로 돌아와 사진 속 남자에게 말을 걸듯 읊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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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 

   

 사강은 자신에게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정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수를 의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얼마든지 피렌체로 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도쿄라면 미주나 유럽을 돌며 셀 수도 없이 경유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화폐 단위가 제각각인 나라를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한정수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사강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된 소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읽을 수도 없으므로 책이라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웠다.  

 사강은 이 소설들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기로 결심했다. 같은 책이었지만 표지가 다르고 장정과 판본도 제각각인 다른 책이었다. 결국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사강은 이 책이 영화제 주최 측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모 카메라의 주인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누군가 실연의 기념품을 ‘대신’ 처리해준다는 것이었지만, 반지나 목걸이처럼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낡고 생채기 많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누구도 가져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로모에 필름이 들어 있는데, 혹시 아셨어요?”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공항 인근 현상소 직원이 사강에게 말했다.

 “필름이요?”

 “어떻게 할까요? 인화해드려요?” 

 사강은 커다란 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많은 가족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아기와 아빠, 아기와 엄마, 아기와 가족들…… 그리고 성장한 채 웃고 있는 또 다른 가족들…….  

 “이거, 꽤 오래된 필름 같네요. 적어도 몇 년은 된 것 같은데요.” 

 현상소 직원은 로모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사강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 산 35밀리미터 필름 세 통을 그녀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7, 8년은 된 것 같은데요?”    

 “7, 8년?”

 사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혹시 필름을 인화하면 필름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건가요?” 

 “필름이야 당연히 돌려드리죠. 필요 없으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사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상소 창밖을 멍하게 바라봤다. 

 카메라 주인은 이 로모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필름은 우연히 이곳에 남겨졌을 것이다. 사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 있는 필름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방치하진 않았을 테니까. 누구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찍혀 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남기진 않는다.  

 사강은 긁힌 자국이 남아 있는 카메라의 낡은 플라스틱 바디를 바라봤다. 단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것은 충분히 낡아서 별 쓸모 없어 보이는 카메라였지, 카메라 안에 든 필름이 아니었다. 필름 속 사진은 시간이 기록된 내밀한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일기장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을 리 없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이 필름을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의 머릿속에 든 첫 번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의 주인을 찾기 위해선 사진부터 인화해야 했다. 사진 속에 필름 주인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가 올라온 트위터를 역추적하면 카메라 주인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스물두 명이었다. 추적이 가능한 숫자였다. 카메라 주인이 트위터 프로필에 얼굴 사진을 첨부한 사람이라면 찾는 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인화해주세요.”

 창밖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30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따뜻한 녹차라도 드릴까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사강은 주인의 시선을 좇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에 젖어 연두색이 한껏 도드라진 버드나무 사이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버드나무를 미친 여자가 머리 푼 것 같은 모양이라 불길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사연 많은 여자의 긴 머리칼을 감싸는 오색 빛깔 머리띠 같았다. 

 자기 몫의 사랑이 이미 죽어버렸는데도 실연의 기념품들은 왜 이리 유난스레 반짝이는 걸까. 사랑이 사산된 후 남은 실패의 증거물인데도 말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속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차 때문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늑골 부근까지 통증이 뻐근히 내려왔다. 

 “예상대로 문제가 있는 필름이었어요.”

 주인이 심란한 얼굴로 사강을 바라봤다.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필름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지금 보니까 몇 장 빼면 대부분 상했어요. 보관하기 힘든 사진들일 텐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이 사강에게 되묻고 있었다. 

 사강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사진들을 손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 길게 늘어선 양떼구름과 하늘이 반쯤 지워진 풍경, 뿌옇게 사라진 오솔길, 학교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흐릿하게 번진 남자의 희미한 얼굴…… 이 사진 속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사진 속 연인이 궁금해졌다.  


 저녁으로 간단히 야채카레를 만들어 먹은 후, 사강은 몇 시간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모 카메라의 특징을 감안한다 해도, 사진들은 심하게 색이 바랬다. 가장 치명적인 건 누군가의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이었다. 사진의 구체적인 ‘상’은 대부분 날아가고 추상적인 색깔과 형체, 실루엣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나마 구체적인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사강이 고심 끝에 골라낸 아홉 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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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


 “아내는 요리사야.”  

 프라하의 한 호텔에서 트렁크를 열며 어느 날 정수가 말했다. 

 “망해가는 레스토랑의 요리사. 곧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지.”

 ‘망해가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는’ 같은 파멸의 문장들. 사강에겐 좋은 징조였다.

 “늘 건강식을 고집했어. 아마도 그게 그 레스토랑이 망해갔던 첫 번째 이유였을 거야. 칼로리가 낮은 음식이 건강에 도움이 될진 몰라도 대부분 맛은 없으니까. 나와 다르게 낭만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지.”

 좋은 징조는 점점 불길한 모습을 띠며 사강의 눈앞에 다가왔다. 정수는 잠시 뜸을 들이듯 트렁크 안의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기억나는 유별난 요리 이름이 하나 있는데…… 아마 ‘내일의 달걀찜’이라고 이름 붙인 요리였지. 달걀찜에 저민 닭고기가 들어 있는 괴상한 요리였어. 난 그걸 요리계의 근친상간이라고 놀려댔고.”

 심지어 정수는 아주 조금 웃기까지 시작했다. 

 “아마 지금 내가 그 식당 이름을 얘기한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못할 거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이름의 식당일 테니까. 오전 일곱시부터 문을 연다는 것도 이해하기 쉽진 않지. 이른 아침부터 산을 타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위한 식당도 아니었거든.”  

 사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건 아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사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짐 정리를 좀 해야겠어. 탁자 위에 참치 샌드위치가 있는데 좀 먹지그래?”

 정수는 탁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사강에게 말했다. 사강은 말없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날 휘장이 달린 그의 캡틴 제복은 활짝 열어놓은 옷장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호텔의 침대 정중앙에 커다란 트렁크가 누워 있었고, 젖혀진 트렁크의 짐들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침대 위에 널려 있었다. 정수는 트렁크 어딘가에서 계속 짐을 꺼내고 있었다. 속옷이나 간단한 상비약이 아니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물건들, 가령 보통 사람들의 여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절대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나온 대부분의 것들은 오랜 시간 햇빛에 바짝 말린 건어물처럼 압축되어 있었다. 

 “옷이 하나도 안 구겨지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비결이라도 있어요?”

 사강이 정수의 트렁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트렁크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간 그의 옷들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채 가방 밖으로 가뿐히 빠져나왔다. 속옷과 양말, 손수건과 검정색 피케셔츠가 나왔고, 음악 잡지와 항공 관련 잡지들이 나왔다. 그는 은색 스틸 액자에 넣은 그림과 사진을 꺼냈다.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사강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이 모든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의 트렁크에서 마침내 접어서 사용할 수 있는 베개가 나왔을 때, 사강은 정수가 벌이는 이 놀라운 ‘트렁크 쇼’의 클라이맥스를 보았다. 텅 비어 있던 호텔의 옷장은 서울에서 입던 익숙한 옷들로 채워졌고, 호텔 매뉴얼북이 놓여 있던 창가의 테이블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놓인 개인 탁자로 변신했다. 욕실에는 호텔용 세면도구가 아니라 그가 늘 사용하는 칫솔과 치약 비누가 나란히 놓였다. 

 사강은 모든 일이 특별한 규칙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수는 호텔을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처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가져온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모든 걸 트렁크 안에 넣고, 필요한 것만 꺼내 쓰는 사강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세계를 떠도는 직업 여행자의 삶이 일상이 되려면 바로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집을 옮겨놓듯 호텔을 사유화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사강은 불현듯 깨달았다. 일 년의 반 이상을 낯선 도시의 호텔 방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고향 집의 익숙한 풍경과 냄새를 복사해 그곳에 가져와야 한다는 걸, 한정수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야만 때때로 밀려드는 노스탤지어의 공습을, 칼끝처럼 와 닿는 낯선 언어와 불면의 고통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벌어져 채워지지 않는 뒤바뀐 오전과 오후의 시차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여행자의 운명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여행의 기술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곳과 저곳을 떠돌며 호텔 노마드로 생활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이걸 쓰면 방콕이든 델리든 뉴욕이든 동일한 공기를 만들 수 있어. 네가 좋아하는 향을 기억하고, 쉽게 잠들었던 냄새를 기록하는 게 중요해. 낯선 공기 속에서 편하게 쉬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수가 샌드위치를 들고 있던 사강에게 내민 것은 옅은 녹색 향초였다.

 “이름이 재밌어. ‘비 온 후 이끼’거든.”

 정수는 향초를 삼나무 숲에 비가 쏟아진 후, 나무 밑동에서 올라오는 이끼 냄새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조향사가 만든 인공적인 조합일 테지만, 사강은 향초가 구현하는 세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동물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젖은 흙냄새, 비 온 뒤 오래된 삼나무 숲으로 부는 바람의 냄새, 숲 속의 이끼들이 내뿜는 산소의 냄새. 

 냄새의 균질화. 

 호텔 침대에서 나는 옅은 세제 냄새와 막 청소한 카펫에서 나는 옅은 소독약 냄새를 없애고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로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기술. 

 사강은 향초가 자신이 누워 있는 작은 공간을 자신이 상상했던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눈을 감으면 천년이 넘은 삼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비에 젓은 융단처럼 폭신한 이끼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사강은 늘 같은 브랜드의 향초를 피웠다. 


 “윤사강, 당신은 내일 죽는다면 뭘 하고 싶어?”

 뉴욕의 호텔에서 정수가 다시 짐을 풀며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거예요. 정말 맛있는 걸 침대에서 먹고, 먹여주고, 다시 잘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타처럼 날 연주해주길 원해요. 기왕이면…… 그래요. 지미 헨드릭스가 좋겠네요."

 “난 지미 페이지 쪽이 더 좋은데.”

 “마지막 섹스는 혁명가처럼 하고 싶어요.”

 “지미는 27살에 죽었어. 체 게바라는 40살도 못 돼서 죽었고.”

 “당신은 이미 마흔 살이 넘었어요.”

 “난 혁명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요절했어. 내 친구들도 그랬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봤다. 정수는 잘 때도 풀지 않는 손목시계를 습관처럼 다시 바라봤다. 

 “울란바토르 일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지? 지금도 알고 싶어?”

 정수가 물었다. 사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날, 나는 몹시 피곤했어. 48시간째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지. 그래서 비행기에서 승무원들을 향해 난동을 부리는 그 작자들을 도저히 참고 봐줄 수가 없었어.”

 항문에 금괴를 끼어 밀수하려던 정신 나간 남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사강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탔던 비행기가 정수가 몰던 보잉 747-400이었고, 그가 고집한 원칙주의 때문에 사상 최대의 금괴 밀수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건 그녀의 관심과 별개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의 내막은 곧 이륙을 앞둔 L항공사 비행기에 울란바토르 경찰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승객 중 몇 명이 긴급 체포되었고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바로 서울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사업상 계약을 들먹이며 비행기가 자신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듯한 법무법인의 이름을 대며 소송할 것이란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는 그들을 단 1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즉각 이륙을 결정했다. 

 사강은 신문에서 울란바토르 경찰들에 의해 체포된 채 끌려가는 밀수업자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들이 숨겨 가려던 금괴가 고스란히 그들이 앉았던 비행기 좌석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보았다. 뉴스는 조종사가 정시 출발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날, 울란바토르에 넘겨졌을지도 모를 금괴는 대한민국 세관에 의해 안전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내 오메가 알지? 두 도시의 시간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편리한 기계지. 정시에 울란바토르를 떠나면 인천에 새벽 다섯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어.”

 “잠깐만요. 새벽 다섯시라면…….” 

 “오전 다섯시는 조종사들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야. 택시를 타도 관리팀에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이거든. 난 집까지 편하게 가고 싶었어.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한 날이었거든.”

 “설마! 모든 게 택시비 때문이었다구요?”

 사강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일이지.”

 “그 일로 회사에서 주는 상도 받았잖아요.”

 “받기 싫다고 설명하는 게 훨씬 더 귀찮았으니까.”

 “상금도 있었잖아요.”

 “공항버스 대신 택시 탈 정도였어.”

 “맙소사! 그 일로 당신의 원칙주의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부기장을 세 명이나 봤어요.”

 마침내 사강은 그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정수는 잠시 사강을 바라보더니 웃고 있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의 옷깃을 여미고 목덜미와 깊게 팬 쇄골에도 부드럽게 키스했다. 셔츠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푸는 정수의 손길이 느껴졌다. 브래지어의 와이어를 천천히 쇄골 쪽으로 밀어 올리는 동안 그녀의 젖꼭지에 그의 혀끝이 살짝 와 닿았다. 

 사강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목을 감싸고 있는 혈관을 따라 뛰고 있는 맥박을 느꼈다. 맥박이 뛰는 지점을 바라보는 동안 손바닥의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열다섯 살에 새겨진 상처는 이제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사강은 오래된 흉터를 뚫고 맥박이 뛰는 근처까지 자라난 생명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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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사강은 그의 얼굴과 팔을 젖은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닦았다. 그녀는 바짝 말라 보풀처럼 일어난 그의 입술에 바셀린을 바르고, 티스푼으로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사강은 룸서비스로 해열제와 가습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가습기를 올려놓았다. 가습기의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항균 마크가 적힌 분무를 통해 습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강은 습기가 건조한 호텔방 모서리를 따라 골고루 흐르도록 분무기를 조절했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받아둔 ‘응급처치 119’ 애플리케이션을 찾아냈다. 그녀는 알레르기 환자의 급작스런 발진과 발열 상황에 관한 카테고리를 읽다가, 고추와 굴 알레르기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찾아냈다. 

 H의 손등에 피었던 붉은색 반점도 이전보다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 낮게 웅크리고 앉아 그의 가슴에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갖다 댔다. 사강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그의 심장 박동을 체크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호흡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복잡한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가는 통로들을 그려보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며 북태평양의 아득한 창공을 날고 있는 고요한 밤, 사강이 들었던 보잉 747-400의 엔진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녀는 다시 그의 심장 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행기 엔진 소리처럼 들리던 이명은 그의 심장 혈관과 연결되어 있을 심장박동 소리와 포개어졌다.

 누군가 문을 열고 틀어놓은 듯한 음악 소리가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is love,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존 레논의 <러브>였다. 사강은 끊임없이 사랑이 반복되는 레논의 속삭임을 들었다. 보통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는 이제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긴장감 때문에 뻣뻣해 보였던 얼굴과 눈가엔 순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게 구부러진 속눈썹은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천진함을 드리웠다. 호흡이 일정해졌고 가팔랐던 들숨과 날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사강은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봤다. 사강은 가습기에 물을 한 번 더 채웠다. 모든 게 채워지고, 제 위치에 돌아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정수의 침대맡에 젖은 이끼 냄새가 난다는 향초를 켰다. 그것이 그의 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건조한 기내에 시달린 사강의 눈은 이제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뻑뻑해져 있었다. 그의 몸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본 후,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24시간 째 긴장 속에 깨어 있던 그녀의 눈꺼풀은 어느새 감겨 있었고, 그녀는 정수의 방에 있던 하늘색 패브릭 소파 위에서 잠들었다. 꿈 없는 평온한 잠이 그녀의 온몸을 담요처럼 덮었다.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뒤척임 없이 잤다. 때때로 어떤 것에 깊게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천천히 닫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켜놓은 향초의 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사강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호텔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미몽 중에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그녀가 옅은 꿈속에서 벗어나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사강은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그가 소파 옆에 앉아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열이 있군.” 

 H가 말했다. 

 “계속 자는 게 좋겠어.”

 테이블에는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 


 한정수가 모는 보잉 747-400은 여객기는 물론 화물기로도 사용되는 CARGO 기종이었다.

 그는 때때로 평상복을 입고 승객으로 탑승해 앵커리지나 스톡홀름 같은 중간 기착지까지 날아가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로 갈아타고, 화물을 실어 날랐다. 레일이 깔린 화물칸 가득 공업용 소금과 구리나 망간을 싣고 도쿄로 향했고, 칠레에선 냉동육과 와인을 싣고 상하이로 날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살아 있는 수백 마리의 닭들을 화물칸에 운송하기도 했는데, 수면 마취제의 양을 잘못 판단해 주사한 탓에 비행 중간에 깨어난 닭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인도 남부의 고아에서 온 코끼리를 화물칸에 실은 적이 있었어. 오사카에 새로 생기는 동물원에 보내질 코끼리였지.”

 그가 운행하는 747-400의 어퍼 덱(upper deck)에는 모두 6개의 좌석과 승무원들이 쉴 수 있는 벙크가 있었다. 비행기로 코끼리를 수송하느라 긴장했던 조련사는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이르자 좌석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조련사는 커다란 매부리코를 가진 바짝 마른 인도 사람이었는데, 너무 말라서 벨트 없이는 어떤 바지도 입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수는 그가 습관처럼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수시로 화물칸으로 연결된 비상계단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취시킨 코끼리의 상태를 살피는 그의 눈은 벵갈 호랑이처럼 매섭게 반짝였다. 

 정수는 정해진 시간마다 부기장과 교대해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벙크에서 쉬는 대신 화물칸에 잠들어 있는 코끼리를 보기 위해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따뜻한 지역에서 온 코끼리라 온도와 습도가 특히 중요했다. 습도를 맞추기 위해 조련사가 코끼리 옆에 놓은 찌그러진 은색 물주전자가 그의 눈에 보였다. 코끼리는 조종석 가장 가까운 구역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화물칸을 천천히 걸어 코끼리가 있는 구역까지 근접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믿을 수 없이 커다란 덩치의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있었어. 태국에서 본 비스듬히 누워 있는 불상처럼. 코를 말아 감고 잠들어 있었어. 코끼리는 사람 앞에선 잘 자지 않는다더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 거대한 동물이 절대 잠을 자지 않는 영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대.”

 “코끼리가 승객인 비행기는 잘 상상이 되질 않네요.”

 사강이 그를 바라보자 정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코끼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런 커다란 몸집의 네발 동물들만 있는 세상에 나만 유일하게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면 어떨까. 승객이 없는 비행기 안이라는 게 꽤나 외로워서 드는 생각이었을 거야.”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외로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가 느꼈던 도리 없는 고독이 그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그 외로움의 기울기가 너무나 비슷해 그녀의 마음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어떻게 된 거예요?”

 울지 않으려면 어떤 질문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강은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알고 싶어요”라고.

 “진실을 말인가? 듣고 나면 놀랄 텐데?”

 정수가 사강을 빤히 바라봤다.   

 아홉시 뉴스에도 방송되었던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그가 왜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평생 저주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자국민을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를 돌려 황급히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는지 따윈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에 사강은 항공사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몇몇이 특히 더 알고 싶어 했던 이런 질문을 말이다. 

 “당신 아내는 어떤 사람이죠?”    

 사강이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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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이제 사강의 심장은 수시로 변하는 기압을 온몸으로 느꼈다. 심장에 연결됐던 팽팽한 힘줄들이 툭, 툭, 기타줄 끊어지듯 하나씩 잘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행기는 곧 파리의 드골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고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고,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는 평화로운 땅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가능했다. 사무장이나 기장의 보고서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기록될지 예상하는 건 훨씬 더 쉬웠다. 

    

                               * 

  

샹젤리제 거리의 맥도널드 앞에서 아빠와 거짓말처럼 부딪힌 건 3년 전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복동생 ‘폴’이 앉아 있었다. 폴은 빅맥을 먹느라 입술에 케첩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사강은 그가 폴의 양 볼에 묻은 케첩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저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강은 맥도널드가 보이는 바로 옆 카페에 자리를 잡고, 범인을 미행 중인 탐정회사의 직원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들 부자를 30분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쁜 여자들에겐 어김없이 눈이 돌아가는 아홉 살 폴. 늘씬한 여자의 다리엔 난데없이 눈빛이 꽂히는 7월의 복숭아 빛 뺨을 가진 폴. 지금 오른쪽 손에 닌텐도 게임기가 들려 있지만, 10년 후면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탱고를 추고 있을 아이였다. 아이와 대화하는 그의 모습도 이국의 춤처럼 낯설었다. 

파리에서 오래 살더니 평생 바게트만 입에 물고 산 프랑스인처럼 그는 과장된 몸짓을 사용했다. 눈썹을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다가, 지휘하듯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 열 개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랬다. 그곳엔 사강에겐 보여준 적 없는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 따스함이 고여 있었다. 사강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따스함이 놀라웠다. 

사강은 불현듯 폴과 같은 나이의 자신이 늘 “위험해! 더러워!”란 말을 듣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짙은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그건 고향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의 노스탤지어도 아니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생긴 두통도, 피곤함도 뭣도 아닌 순수한 질투심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사강은 창피해졌다. 그녀의 뒷목은 점점 더 뻣뻣해졌다. 폴의 오른쪽 무릎과 왼쪽 손등에는 생채기가 있었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생긴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겐 건강하고 발랄한 아홉 살짜리가 마땅히 달고 살아야 할 저런 표식이 없었다. 뛰어놀다 생긴 무릎과 팔꿈치의 멍과 딱지들 대신 자신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처가 있었다. 빨간약을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인다고 나을 리 없는 것들이었다. 폴은 인간이 아닌 금붕어 친구를 두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사강이 체념하듯 카페에서 일어나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사강은 큰 목소리로 폴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줌! 쉬 마려워요, 아빠!”

“일어나자, 폴.” 

폴은 “Oui”가 아닌 “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폴의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해서 서울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들과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엄마라면 조금만 참고 집 화장실을 사용하자고 했을 것이다. 거리의 공중화장실은 더러울 것이고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다. 사강은 폴과 아빠가 맥도널드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면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 일 이후, 사강은 아빠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파리가 더 싫었다. 한때 사강에게 파리는 5600마일리지를 주는 장거리 비행 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의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 시간째 사강은 낯선 남자의 호텔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 앞에서 그녀는 아빠와 폴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일찌감치 새어버린 아빠의 백발이 H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코노미 앞뒤 좌석 사이의 거리는 약 87센티미터이다. 

비즈니스 앞뒤 좌석 간 거리는 1미터 13센티미터. 

일등석은 2미터다. 

사강은 자신의 방과 H의 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파리 리츠칼튼 호텔 1302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1304호의 방문을 노크를 하기 전, 그녀는 H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이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은 유약해 보일 것이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왜 당신을 또 봐야해?’라는 불쾌한 질문을 유발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은 비굴해 보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는 ‘다시’라는 말 때문에 변명하기 좋아하는 무능한 직원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것이다. 

기내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승객들을 상대하면서 사강은 사과하는 법에 대해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과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이 되자, 어떤 쪽으로든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과를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사강의 손에는 약봉지와 죽, 향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사강은 택시를 타고 향수 가게에 들러 자신이 가진 유로를 털어 젖은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를 샀다. 윤희가 말했던 그 향초였다. 사강은 약국에 들렀고, 한국 식당에서 묽게 끓인 흰죽을 샀다. 적절한 시간에 H를 깨워 약과 함께 죽을 먹이고, 그가 좋아하는 향초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가 아니라 사표를 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 시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정식으로 조종사 과정을 교육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 여자 승무원이 검은색 히잡을 두른 채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제주 비행학교 출신의 여자 조종사 선배도 사강에게 조종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곤 했었다. 

사강은 망설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호텔 방문 앞에 약과 향초만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기장님!” 

초췌한 얼굴의 H가 말없이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사강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움켜쥐었다. 당혹스러움 때문에 사강의 목덜미와 귓불은 발개져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거구인 H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 위압적이었다. 몸에 있는 수분을 엄청나게 쏟아낸 그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것은 꼿꼿하고 반듯한 그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반쯤 덮고 있었다. 긴장감이 돌던 눈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풀어져 초점이 없이 느슨해져 있었다. 

“약을 가져왔어요. 좋아하신다고 해서 향초를…….”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묵직하게 와 닿았다.

사강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H는 사강의 눈앞에서 엎어지다시피 무너졌다.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와 향초를 담은 쇼핑백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사강은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했다. 카펫 위를 구르기 시작한 동그란 약통은 두툼한 카펫 때문에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둑한 복도는 웅크린 짐승의 뒷모습처럼 음울해 보였다. 

“정신 차려요!”

어떻게든 그의 손을 목에 감아 그를 침대까지 옮겨야 했다. 사강은 자신의 어깨에 걸치듯 늘어져 있는 H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등을 오른쪽 손으로 붙잡았다. 손등에 난 H의 흉터가 손바닥에 난 사강의 흉터와 포개지듯 꽉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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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윤희는 비밀스런 얘기라도 꺼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사강을 바라보았다.

“H 말이야. 비행 끝나면 늘 호텔에만 있잖아. 근데 언젠가 파리 라데팡스에 쇼핑 갔다가 ‘세포라’에서 H랑 마주친 적이 있었어. H가 향수나 화장품을 사러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세포라에 온다는 게 넌 상상이나 되니?”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근데 정말 이상했던 게 뭔 줄 알아? 상점 하나를 전부 거덜 낼 모양인지 향초만 잔뜩 사가지고 가는 거야.”    

“향초?”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장 압권은…… 그 산더미 같은 향초가 전부 똑같은 제품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포라 세일 날.”

“나 파리 가, H랑. 이달 말.”

사강이 말했다.

“어쩌니?”

“상관없어. 절대로 같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방법은 찾은 거야? 스케줄러한테 말했어?” 

“응.”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나를 정말 싫어해.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등신!’이란 말까지 했었어.”

“거야, 너무 뜨거워서 발작하듯 한 말일걸? 누구라도 그렇잖아. 감탄사처럼 아프다는 말 대신 욕 나오는 거.”

윤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브리핑하는 시간에 날 보면 아마 뒷목 잡고 경기할걸?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돼. 스케줄 바꿔줄 거지? 넌 적을 많이 아니까 그만큼 상대하기도 쉬울 거야. 그렇지? 난 병가 낼 생각이야.”

사강이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지저분한 퀵턴(Quick turn) 일정을 처리해주면 몰라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내가 너 대신 뭄바이까지 뛴 거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알지? 인도 뭄바이!”

“네 입에서 그 말 나올 줄 알았는데 얼마나 싫으면 이러겠니? H가 나도 진짜 미워해!” 

“설마, 나 만큼이겠니?”

사강이 윤희를 빤히 바라봤다.  

“별일 없을 거야, 내가 기도할게.”

“이게 기도까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아멘!”  

 

                                           *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개적인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윤희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H를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강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불평 없이 해치운다는 말은 그녀가 직업적인 신념처럼 여겨왔던 것이었다. 비행기가 20분 정도 하늘을 날아 순항 고도에 이르자 곧 안전벨트 사인이 풀렸다. 승객들에게 담요와 함께 음료 서비스가 나가는 동안에도 사강은 스스로에게 ‘불평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29찰리 손님-오렌지 주스, 14찰리-여분 담요 한 장 더, 3브라보-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물수건. 15알파-천식이 있는 손님이므로 자리 다시 한 번 확인할 것. 특히 두 명의 ‘2알파’와 ‘2찰리’는 모두 VIP로 파리의 국제회의로 가는 여당 국회위원들이므로 비행 중 불편함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 쓸 것.  

사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장을 한 채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길 기다렸다. 고령의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기내식으로 준비한 비빔밥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것만 빼면 늘 이어지는 보통의 비행이었다.  

마침내 칵핏에서 콜이 울렸다. 저녁 식사를 부탁하는 부기장의 콜이었다. 

“기장님은 라면. 저랑 부기장 한 명은 비프랑 치킨입니다!”

기장과 부기장은 항공법 규정상 같은 기내식을 먹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음식을 먹고 탈이 나게 되면 남은 한 명은 비행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이 라면을 먹더라도 한 명이 봉지 라면을 먹으면, 다른 한 명은 컵라면을 먹는 것이 규정이었다. 사실 라면은 끔찍하리만치 건조한 기내에서 먹을 수 있는 인기 메뉴였다. 

사강은 갤리 안에서 기장과 부기장의 기내식을 따로 준비했다. 특별히 H에게 내갈 기내식에는 따로 서비스되지 않는 로열 밀크티를 만들었다. 그가 차가운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는 정보를 준 건 윤희였다. 사강은 라면에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준비한 냉동 야채가 아닌 신선한 야채를 가득 넣었다. 엄밀히 채소는 기내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었다. 하지만 비행을 책임진 캡틴을 위한 것이었고, 이 정도의 불법은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했다.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잘게 자른 꽈리고추가 들어 있는 야채라면. 사강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라면을 바라봤다.

  

사강이 서비스한 기내식을 먹은 지 10분 만에 한정수의 얼굴에 하나둘씩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벌레에 물린 것처럼 표시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에 H는 별생각 없이 손톱으로 몇 차례 자신의 왼쪽 뺨과 눈 밑 주위를 긁었다.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극심한 가려움이 얼굴에서 목과 오른쪽 어깨로 퍼졌을 즈음, 그는 이제 에어컨이 나오는 조종석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긁은 자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인지했다. 

알레르기의 이유는 알레르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H의 갑작스런 설사와 구토 발진에는 딱 한 가지만 존재했다. 분명한 건, 그것이 사강의 소망대로 단순한 복통이나 운 나쁘게 찾아온 우연한 장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지 1시간 20분 후, H는 기내 화장실 변기 안에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냈다. 그의 온몸엔 갑각류의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 주위는 거대한 선충에 물린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일단 새콤으로 항보실(항공 의료원)에 연락할게요! 일단 저한테 맡기고 좌석에 가서 쉬세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기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H는 더 이상 조종석을 지킬 수 없었다.  

곧 의사를 찾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 안에는 불임 시술에 관한 학회 차 파리에 가는 산부인과 의사와 휴가 차 비행기를 탄 흉부외과 의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먼저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은 H에겐 응급 처방이 내려졌다.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탈수 증세를 막기 위해 소량의 소금과 설탕을 섞어 만든 전해질 용액을 계속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건, 식은땀을 몇 리터쯤 쏟아낸 기장이 초인적인 힘으로 착륙 직전에 조종석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H의 얼굴을 특징짓는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H는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H의 손등에 남아 있던 흉터 위에는 좁쌀 같은 열꽃이 피어 번져 있었다. 사강은 이제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땅콩이나 우유 알레르기는 들어봤어도 고추 알레르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부기장님 말로는 그냥 고추 알레르기가 아니라 꽈리고추 알레르기래요.”

“근데 알레르기가 그렇게 괴상할 수도 있는 거니?”

“알레르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잖아. 조개나 땅콩 알레르기로 죽었단 사람 본 적 있어.”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지. 이런 특별 케이스의 경우,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죽게 되겠지.”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야. 이건 누가 봐도 고의적이지. 이런 경우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사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복수라고 해!”

사강의 눈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그것이 흐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결국 사강이 라면에 넣은 꽈리고추가 문제였다. 

그녀는 고추씨가 지저분하게 라면에 뜨지 않게 하기 위해 통째로 꽈리고추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아주 얇게 다져 씨를 덜어냈다. 제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잔뜩 들어간 라면에서 작은 고추 조각 몇 개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선의였든 비행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불행 속에 몰아넣은 이상, 동료들은 앞으로 사강이 앞으로 쓰게 될 시말서의 종류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시말서도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 

검역되지 않은 식료품을 기내에 반입한 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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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항공사에는 다양한 경로로 들어온 조종사들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인 항공대 출신.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간에 진로를 변경해 제주도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제주 비행훈련원 출신, 일명 ‘제비’들과 H처럼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항공대를 나와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항공대를 나와 제주 비행훈련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 세 카테고리 안에서 조종사들의 경로가 분류된다. 

어린 나이에 조종사가 되는 건, 대부분 제비 출신들이다. 

수년간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 비행 조종사가 된 여성 조종사도 있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 ‘비행’에 대한 책을 쓴다면 대부분은 자유분방한 ‘제비’일 것이다. 정해진 비행 스케줄이 바뀌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는 어김없이 연륜이 있는 공군 출신의 조종사들이다. 바로 그때가 ‘비행 사고’가 일어나는 최적의 시간임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H는 최정예 전투기인 F16 조종사였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동기가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버티고 현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교관이었던 선배 한 명을 비행 사고로 잃은 건 그로부터 6년 후였는데, 훈련 중 많은 비행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버티고 현상은 수만 피트로 고도가 높아지면 신체 균형이 붕괴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비행 사고였다. 동료의 죽음. 그것은 공군 출신 조종사들이 가진 공동의 트라우마였다.

사강은 H의 손등에 난 흉터가 그때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쌍둥이처럼 비슷한 흉터가 그녀의 손바닥에 있었다.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에 난 흉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소송으로 혼란스럽던 어느 날,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면도칼로 손바닥의 생명선을 따라 빗금을 그었다. 자신의 생명선이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피가 흘러 자신의 팔목을 적시고, 무릎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문을 열어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린 문으로 엄마가 달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때 흘러내리는 피는 붉지 않다. 마치 눈물에 희석된 것처럼.

그러므로 어느 날 사무장이 “이봐, 주니어. 내가 곧 H에 대해 알게 해줄게. 이번 비행에선 네가 칵핏에 음식을 서비스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H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일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장님이 건조한 걸 정말 싫어하시니까, 칵핏에서 콜 오기 전에 자주 차를 갖다 드리도록 해. 커피는 절대 안 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온도를 아주 잘 맞춰야 해. 딱 한마디만 해줄게. 무조건 뜨겁게 만들어야 돼! 최대한 뜨겁게! 기장님은 미지근한 걸 제일 싫어해. 물은 아주 차가워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차갑고 뜨겁게. 그것만 기억해둬.”

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H는 경력이 많은 시니어 승무원들도 힘들어했다. 

예정보다 지연되기 일쑤인 비행기 출발 시간을 트집 잡고, 기내식을 혐오하는 일부 일등석 승객을 손쉽게 누그러뜨렸던 친절과 노하우도 까다로운 H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그가 훌륭한 조종사인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좋은 동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사강. 내가 보기엔 넌 승무원 매뉴얼북 그대로라 정말 잘할 것 같아. 매뉴얼대로! 그게 기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고전적인 훈육법은 국경이나 인종을 떠나 예외 없이 비슷하다.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멍청한 악질이 아닌 이상, 누구도 처음부터 후배를 닦달하진 않는다. 당근을 많이 준 토끼가 배불러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순간, 채찍을 들이대며 호통을 치는 쪽이 효과적이고 더 큰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강 역시 H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유달리 먼지가 잘 보이는 칵핏에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도 부기장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사무장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잘 만들 순 없어도 최대한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H의 명성이 막 열정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한 신입사원의 모험 정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종석에서 나온 사강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강은 쟁반을 든 채 갤리 안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강이 조종석에 들고 간 쟁반 위의 찻잔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사강의 앞치마는 3분의 1이나 물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손등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윤사강, 괜찮아?”

어느새 기내 복도에서 면세품 카트를 밀다가 갤리로 돌아온 승무원들이 사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불안전한 기류 때문에 올려놓은 집기들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류에 익숙한 승무원들은 누구 하나 비틀거리지 않고 꼿꼿이 그곳에 서 있었다. 사강은 젖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검정색 비행 슈즈에도 물이 튀어 있었다. 몇 분 사이 손등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  

“너 손은 왜 그래? 데었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윤사강이 H에게 특별한 예외가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악랄한 동료애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라는 듯 말이다. 

“선배님! 어떡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미소가 재빨리 그녀의 손등에 얼음을 끼운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 안에 얼음을 몇 개 더 쥐고 있었다.  

“기장님…… 괜찮으시겠죠?” 

사강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런던에 도착하면 사표부터 써야 할 거예요, 저.”

“무슨 소리냐구!”

“윤사강, 너 사고 친 거야?”

사무장이 물었다.

“제가 뜨거운 차를 쏟았어요. 거기에. 정중앙.”

사람들이 일제히 사강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변명처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칵핏으로 얼음이랑 물수건 보내, 당장!”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강의 손등에 물수건을 얹었던 미소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틀어막고 어깨가 흔들리도록 웃었다. 발밑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선 ‘떨어진다’라는 말은 금기어다. “나 공항에 다섯시에 떨어져!” 같은 일상적인 말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사강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추락이었다. 

 

매달 21일 승무원들은 한 달 치 비행 스케줄 표를 받는다.

그때, 자신과 비행할 ‘크루 리스트’도 함께 받는다.  

사강은 H의 747-400을 타고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에 가는 일이 없도록 매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난 건 1년 동안이었다. CARGO 기종인 그의 비행기가 승객이 아니라 종종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팀인 윤희가 네 번이나 H의 비행기를 타는 동안 그녀에게는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그날, 사강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표를 읽고 또 읽었다. 

‘드디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녹차 때문에 생긴 얼룩진 자신의 앞치마를 빨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윤희가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객에게 받은 첫 번째 항의 레터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강이 사무장의 충고대로 팔팔 끓는 물에 녹차 티백을 넣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던 녹차가 그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몸의 정중앙에 낙하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난기류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스캔들과 소문을 먹어치우는 회사의 빅 마우스들은 ‘H의 장엄한 소시지를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되는 맹랑한 꼬마가 끓는 물에 삶았다’고 표현했다. ‘운동광인 H가 그날 이후 클럽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돌았다.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사강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표는 말도 안 돼! 그거, 등신 인증이라고! H를 피하면 너만 손해야. 어차피 부딪히게 될 직장 상사라고. 그건 누가 뭐래도 실수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윤희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H 얘기를 종종 꺼냈다. 대부분은 그와 함께 비행하며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가끔은 다른 종류의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H는…… 어떤 땐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질 않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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