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한 번이라도 눈을 감고 오랜 시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각이 균형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각이 단지 ‘본다’는 동사만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니다.

사강은 뒤집힌 낮과 밤의 흔적들이 여권에 찍힌 낯선 도시의 스탬프처럼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승무원이 된 후, 그녀는 잠들고 싶은 시간에 잠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시간에 정작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시간과 도저히 맞추어지지 않는 낮과 밤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대표적인 증후는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이었다.

비행을 앞두면 늘 집요한 두통이 사강을 괴롭혔다. 진통제로는 멈추지 않는 두통을 견디다 못해 신경외과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사강은 그곳에서 이비인후과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으라는 납득하기 힘든 얘길 들었다. 그녀의 두통이 뇌의 문제가 아니라 청각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과 달팽이관의 림프액 때문에 생긴 문제예요.”

의사가 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 림프액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아뇨.”

“그럼?”

“윤사강 씨는 림프액이 너무 많아요. 림프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불균형이 헛구역질과 두통으로 표출되는 거죠.”

사강이 말없이 의사를 바라봤다. 해야 할 질문들은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사강의 경험에 의하면 무엇인가 많다는 건,

적은 것보다 대부분 좋지 않았다.

사강의 교정 시력은 1.5였다. 그녀는 100미터를 평균적인 여자들보다 2초 이상 빨리 달렸다. 사강은 25미터 풀을 스무 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체력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해 승무원 체력 검사에서 그녀는 한 번도 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둠 속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굽 높이가 10센티미터나 되는 웨지힐을 신고 만든 기록이 아니었다.

호텔로 걸어가는 어둠 속에서 사강은 길 한가운데에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 그대로 곤두박질할 뻔했다. 사강의 걸음은 분명한 속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와 발목에 더 힘을 주었다. 사방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폭이 좁은 플레어 롱스커트를 입은 채 균형을 잡으며 걷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녀는 실감하고 있었다.

여전히 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별조차 보이지 않은 걸까. 개기월식이라도 일어난 걸까. 역시 혼란스런 상황 속에 생기는 착시 현상 같은 걸까. 사강은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마다 다리가 휘청였다.

“한 번만 더 휘청대면 업힐 각오 해요!”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사강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넘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이들을 봤다면 “그녀는 그에게 거의 매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 속에선 절차와 의례들은 사라지고 본능적인 감각들만 살아남았다. 도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정전 속에 두 남녀가 서 있다면, 한 사람이 넘어지려 할 때 다른 한 사람이 몸을 잡아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빠른 시간 안에 빛이 있는 호텔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걷고 있었다. 사강이 생각하기에 호텔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한 것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어둠이 모든 걸 덮어버리자 지훈의 손은 자신의 몸과 연결된 것 같았다. 사강은 손바닥의 흉터가 그의 손바닥과 마주칠 때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높은 하이힐 때문에 몇 번 더 기우뚱했다.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구두는 벗고 걷는 편이 좋겠어요.”

지훈이 말했다.

“일단 내 운동화를 신어요. 맨발보단 훨씬 나을 겁니다.”

사강이 운동화를 벗고 있는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그녀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운동화가 많이 클 수도 있어요. 일단 제 어깨를 잡고 운동화에 발부터 넣어요. 하이힐 신고 이런 어둠 속에선 몇 미터 걷기도 힘들어요. 아님 지금이라도 업히시든가.”

“나한테 신발을 벗어주면 당신은 맨발이잖아요.”

“지금 내 걱정 하는 겁니까?”

가소롭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내가 벗겨주길 원해요?”

지훈이 사강의 구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끝을 뾰족한 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강은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맨발로 바닥 위에 서 있었다. 길 위에 깔린 작은 포석이 컵에 양각한 장식들처럼 발밑으로 느껴졌다. 한밤의 길은 달빛만큼 차가웠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제야 희미하게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달이었다. 너무 작아서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달은 눈 한 번 깜짝여도 사라질 듯 불안하게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운동화 끈을 당신 발에 맞춰서 더 조이면 걸을 만할 거예요.”

사강은 그의 운동화에 한쪽 발을 넣었다. 운동화에 남아 있던 온기는 어느새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서서히 퍼졌다. 따뜻한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욕조 안에 언 발을 녹이며 서 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있던 발바닥과 발끝이 저릿했다.

“어때요? 편해요?”

그는 사강의 발에 맞춰 느슨한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지훈은 여전히 무릎을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사강은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사강의 손은 그의 어깨 위에 자연스레 기대듯 올려져 있었다. 검정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기적같이 돋아난 또 다른 그림자 같았다.

“고마워요.”

사강은 급히 몸을 떼며 다리에 힘을 준 채 그의 곁에 똑바로 섰다.

사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문을 닫은 어두운 상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건물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어둠이 가득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랜턴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점멸하듯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걸었다. 눈을 감아도 몸은 누군가 부드럽게 밀어내듯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길 위에 펼쳐진 거대한 점자책을 상상했다. 겨자 씨 같은 점자들이 책 위를 흘러나와 차갑고 어두운 길 위에 쏟아지는 장면을. 사강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선연한 길의 노래를 발끝으로 느꼈다. 손과 발끝으로 거리의 모서리들과 음각들을 짚어냈다. 어둠의 귀퉁이가 몸에 와 닿아 부드럽게 반사됐다. 그녀의 어깨와 귓불 그리고 팔꿈치와 발목까지 그것은 미끈하고 윤기 있는 벨벳처럼 몸 위를 덮었다. 어둠은 닫혀 있던 그녀의 감각을 열어 또 다른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사강의 눈엔 이제 검은색과 덜 검은 색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1950년대 흑백 영화 속에 나오는 진한 화장의 여자들처럼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 속에 서 있었다. 세상이 흑백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사강은 그 속에서 나무들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지훈이 내뱉는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조금 더 명확해져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그의 숨소리를 흉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표지판이 가르쳐주는 방향이 아니라, 닫혀 있던 감각들이 말해주는 대로 그녀의 귀가 부드럽게 열렸다. 사강은 지훈의 호흡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눈을 감아도 풍경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강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맥박과 호흡은 이제 손바닥을 타고 그녀의 심장까지 와 닿았다. “오래전에…… 손을 잡고 누군가와 깊은 어둠을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사강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빛을 향해 걷고 있는 두 걸음은 점점 보폭을 맞추고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긋나던 그들의 호흡은 이제 비슷한 기울기로 흘러내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포개지듯 겹쳐졌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은 밤이었다.

짙은 구름 속에서 달이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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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7회 >

사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을 때, 얇은 손톱처럼 박혀 있던 초승달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사강은 호텔에 두고 온 점안액을 생각했다. 고질적인 안구 건조증 때문에 늘 가지고 다니는 인공 눈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비자 건조한 눈 밑이 쓰리고 따가웠다.

공원 벤치 옆의 가로등이 꺼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로수 옆에 늘어서 있던 가로등이 불시에 꺼졌다. 공원을 거대한 정원처럼 둘러싸고 있던 빽빽한 고층 맨션의 불빛들 역시 일시에 사라졌다. 산책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다 해도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라곤 벚꽃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공포에 긁혀 있었다.

사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구도 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거나 뛰지 않았다. 어둠과 함께 강박적인 침묵이 공원 안을 조금씩 조여왔다. 어둠 속에서 괴물 같은 지진이 언제든 밀려들어올까 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참을성 있게 안내 방송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대단해 보였다.

아주, 아주 미세하게 땅이 흔들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나뭇잎들이 출렁였고, 거짓말처럼 건물이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공포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인 걸까. 사강은 자신의 명찰이 달려 있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심장이 뛰듯 여전히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렸다. 그들이 앉아 있던 나무 벤치가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선 아주 작은 미동마저 쉽게 포착됐다.

사강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갑자기 폭죽이 터지듯 사강의 눈 주위가 환하게 뜨거워졌다. 사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거대한 백열등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 있었다. 분명 달이 아닌 태양이었다. 한밤중에 떠 있는 달 아닌 태양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사강은 눈을 비비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이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괜찮아요?”

지훈이 사강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진 대피 요령 매뉴얼에 의하면, 지진 시 고층 건물이 없는 이런 빈 공터가 가장 안전하다고 나와 있다. 이지훈과 함께 있는 이곳이 그녀에겐 안전지대였다. 사강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녀는 눈 앞에 뿌옇게 낀 옅은 막이 걷히며 어둠 속에서 사물들이 스스로 부유하길 기다렸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이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과 별과 구름, 하늘을 수놓던 모든 것과 벤치 옆에 있던 수프 자동판매기 의 불빛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어둠 속에선 귓가를 스치는 작은 소음의 굴곡들이 틈틈이 다 만져질 것 같았다. 아직 어둠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동공이 서서히 열렸다 닫히며 남아 있는 작은 빛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공원 안에서 사람들은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길 기다렸다. 사강은 주머니가 달린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2시 5분.

막, 어제가 사라지고 오늘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누구나 대지진이나 해일 같은 비상사태에 대한 훈련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런 훈련은 평생 동안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위험을 대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운 좋게 단 한 번의 비상 상황마저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비행 횟수에 비해 사강은 몇 배는 더 많은 불행의 확률을 손 안에 쥐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강은 그것이 늘 두려웠다.

재작년 가을, 사강이 탄 비행기가 ‘고 어라운드’ 하며 추락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 있었다. 방콕으로 향하던 비행기에는 정수가 타고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제트기류와 기상 악화로 관제탑과의 교신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행기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하며 출렁였고, 2층까지 꽉 찬 수백 명의 승객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승객들은 침착했다. 침착해지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좌석에 나란히 앉았던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기도를 했다. 몇몇은 분명 울음을 참고 있었다. 승객들의 눈에 스치는 공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비행기는 착륙을 시도하기 위해 상공 위에 떠 있었다. 이륙했던 공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안에 싣고 있던 기름을 하늘 아래로 버리기 위해서였다.

승무원들은 비상구 옆의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엄청난 진동과 함께 상하좌우로 흔들릴 때에도 사강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응시하듯 승객들의 표정을 침착하게 응시했다. 그때, 그녀는 정수와 함께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공원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안내 방송이었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듯 안내 방송 속의 여자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진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정전 상태라고 하네요.”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지훈이 방송을 들으며 사강에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대응해달래요.”

“다행이네요.”

그가 일본어를 하는 것도, 일시적인 정전 상태라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호텔 쪽으로 가죠. 제가 묵는 호텔이 이곳에서 멀지 않아요. 일본 전체가 비상사태라 정전이 생각보다 오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낮에도 도심 한복판에서 시간별로 계획 송전을 할 정도라니까, 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죠. 호텔에 가면 정전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강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켰다.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그녀의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봄날의 나비처럼 벚꽃이 앉아 있었다.

“배터리가 별로 없어요. 몇 분 못 갈 거예요.”

사강이 불길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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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5 회

그녀가 공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공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녀가 걸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멀리서 다가오는 사강의 긴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처럼 사강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툼 레이더> 시절의 안젤리나 졸리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가죽 옷과 부츠. 그것은 자신을 청순하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젊은 여자들의 욕망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자동판매기 수프 좋아하세요?”

지훈이 사강에게 물은 첫 번째 질문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사강은 말없이 지훈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사강 좋아하세요? 왜 사강을 읽죠?”

사강이 지훈에게 물은 첫 번째 질문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어떤 설명도 없이 곧장 자신이 묻고 싶은 핵심에 다다랐다. 지훈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저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고, 집에는 책이 많았거든요.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제일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음…… 미안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몰랐어요.”

“20년 전 일이에요.”

“저도 그쯤 된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나요?”

“이혼하셨어요. 전 아빠 없이 자랐죠.”

사강이 지훈을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식의 얘기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이 이미 실연의 공동체를 경험한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충동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밀을 고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달도, 별도 없는 검은 벨벳 같은 밤.

지훈과 사강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자동판매기 양송이 버섯수프와 러시안 수프를 먹었다.

*

“그러니까 그쪽이 실연의 기념품으로 제 카메라를 가져갔군요.”

지훈이 말했다.

“그쪽은 제 책을 가져갔죠.”

사강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에 지훈은 사강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봐야 했다.

“당신이 『슬픔이여, 안녕』을 비행기에서 읽는 걸 봤어요.”

“책을 빌려주면 뭘 하려고 했죠?”

“읽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더 있겠어요?”

“그 대답은 믿기 힘든데.”

지훈이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책 한 권 읽겠다고 도쿄에 있는 사람에게 밤 11시에 전화해서 당장 만나자고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쪽이 기념품으로 내놓은 『슬픔이여, 안녕』은 네 가지의 언어로 된 다른 판본이더군요. 무려!”

그는 손가락 네 개를 활짝 펴 보였다.

“특별하고 눈에 가는 책이었어요. 전 외국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건 한국어 번역본이구요. 물론 그때 당신이 놓고 간 일본어판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권 다 원하면 둘 다 빌려드릴 수 있어요.”

“잘 됐네요. 지금 두 권 다 필요해요.”

사강이 말했다.

지훈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는 두 권의 책을 사강에게 건네 주었다. 사강은 무심히 받아든 책을 들고,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책 속에 암호라도 있나요?“

사강은 고개를 저으며 “아뇨.”라고 짧게 대답했다.

“전 일본어를 할 줄도, 읽을 줄도 몰라요. 그 책은 한 번도 읽지 않았어요.”

“애인이 준 선물 아니었어요? 그래서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은 거고.”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만약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면, 읽을 수 있는 책을 보내지 않았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전 사강을 싫어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 작가를 좋아하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신의 이름을 사랑할 만큼 좋은 부모 밑에서 모범적으로 크는 것뿐이죠. 그런 면에서 전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 이걸 돌려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사강은 들고 온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필름 회사 로고가 선명한 투명한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카메라 안에 들어 있는 필름을 돌려주려면 일단 사진을 현상해서 봐야 했어요. 누군지 알아야 돌려줄 수 있었으니까요. 일부러 사진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에요. 현상소 주인 말로는 이게 아주 오래된 필름일 거라고 말하더군요.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 같대요. 사진 상태는 좋지 않아요. 필름은 그 봉투 안에 같이 들어 있어요.”

“카메라 안에 있던 필름을 결국 인화한 거군요.”

지훈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듯 점차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나갔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사진 속의 현정이 서 있는 것처럼 정면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 몇 개가 그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강은 지훈을 말없이 바라봤다. 흩어지고 부서진 수많은 말이 독백의 형태로 각자의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침묵은 실연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언어였다. 윤사강과 이지훈 사이의 대화를 누군가 책으로 옮겨놓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많은 쉼표와 말줄임표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지훈이 마침내 팔짱을 풀고 사강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을 땐,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카메라 안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당신 겁니다.”

지훈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필름이 들어 있다는 거, 몰랐다는 건가요? 제주도 사진들이었어요.”

“제가 그걸 알고 모르고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주도 사진이든 뭐든.”

그는 뭔가 억누르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 모임에 카메라를 기념품으로 내놓는 순간, 그건 이미 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내놓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도 마찬가지구요.”

“사진은 책이나 반지하고는 달라요. 사진이라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필름을 정말 제가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훈이 사강을 응시했다.

“입장을 바꿔보죠. 만약 당신이 지금의 나였다면 그 사진들이 보고 싶었을까요?”

“저는…… 네. 아마 보고 싶었을 거예요.”

“거짓말.”

지훈이 낮게 웃었다.

“당신은 결코 그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필름 같은 걸 누가 가지고 있든 상관 안 했을 거예요. 그럴 만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같은 데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어차피 그 자리는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하는 자리였어요. 교환이란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잔인하게 말해 개인적인 폐기였죠.”

“하지만 전 카메라를 가져간 거지 그 안에 든 필름을 가져간 게 아니에요. 사진은 카메라가 아니니까요.”

“그건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개인적인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맘이 불편하지 않아요? 그쪽 여자 친구 얼굴을 제가 알 필요까진 없잖아요. 그건 당신도 원치 않는 일 아닌가요?”

“필름을 현상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그 사진들은 없었을 겁니다. 필름 속에 영원히 봉인돼 있었겠죠. 굳이 필름을 인화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지훈이 사강을 빤히 바라봤다.

사강은 지훈의 눈을, 순식간에 새겨진 입가의 희미한 주름 두 개를 바라봤다. 필름을 현상했던 건 사강답지 않은 일이었다. 지훈의 말대로 그것은 타인의 연애 사진이었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 불순하게 끼어드는 주제넘고 멍청한 짓이었다. 조금 더 멍청한 짓은 이지훈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고, 가장 최악은 후배의 데이트 자리에 자신이 나온 것이었다.

사진 속의 연인들을 보면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어째서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진 걸까. 정말 책 때문에 이곳에 나온 걸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조차 없었다. 사강은 들고 있던 인스턴트 수프 그릇을 가만히 바라봤다. 식어버린 크림색 수프는 물기 없이 말라 응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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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도쿄

도쿄는 자동판매기의 도시다.

서울이 프랜차이즈 카페의 도시이고, 호치민이 시끄러운 오토바이들의 도시라면, 도쿄는 분명 전 세계에서 자동판매기가 가장 많은 도시일 것이다. 일본에선 자동판매기로 살 수 있는 게 살 수 없는 것보다 많다. 자동판매기 콘돔. 자동판매기 바나나. 속옷, 지갑, 야채, 티셔츠, DVD, 잡지, 우표, 전동칫솔, 절대 머리엔 맞지 않을 것 같은 야구 모자와 버튼이 자주 고장 나는 싸구려 삼단 우산…….

약속 장소를 확인하고 지훈은 호텔 근처 공원 반짝이는 수프 자동판매기 앞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터치 패널 방식의 수프 자동판매기는 사람처럼 우는 얼굴로 의인화되어 있었다. 버섯스프. 크램 차우더. 러시안 야채수프. 콘 스프……. 지훈은 주머니에 동전이 있는지 뒤적였다. 지훈은 동전을 넣고 버섯스프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곧 기계에서 스프를 끓여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THANK YOU!

자동판매기에서 번쩍이며 커다란 문장이 떴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던 자판기가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지훈은 뜨거운 스프를 조심스레 꺼냈다.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녹인 버터와 잘 볶은 밀가루 냄새가 났다. 그는 약지로 수프를 찍어 맛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어 수프를 찍어 먹었다. 처음보다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프 자동판매기 앞에는 모두 여섯 개의 가로등이 서 있었다.

여섯 개의 가로등 중 세 개의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었다. 드문드문 꺼진 가로등 앞에는 커다란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세 개의 나무 벤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훈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 몇 개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어린 시절 그가 자랐던 5층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벚꽃들을 연상시키는 연분홍색이었다. 그는 봄이 다가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지훈 씨 핸드폰인가요?”

모든 건 그날 밤, 지훈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지훈이 전화 속 여자에게 물었다. 지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그녀를 알고 있었다고 얘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사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분명 “문자 메시지를 남겼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나요”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지훈은 그 문자 메시지를 똑똑히 기억했다. 조금 늦게 확인하긴 했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쪽이 지금 제가 필요한 걸 가지고 있어요. 그걸 빌리고 싶은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사라졌을 부드러운 이음새에선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귓속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지훈은 핸드폰을 바짝 귀에 갖다 대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독서로 장시간 굳어 있던 허리를 펴고,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짧고 강한 심호흡을 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는 동안 여자의 목소리엔 많은 쉼표가 찍혀 있었다.

오전 일곱시에 만나자는 건 지훈이 박미소를 통해 사강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지훈은 윤사강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그녀가 시네마테크의 작은 정원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테이크아웃 커피 잔의 커피를 모두 쏟아 부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만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도쿄 행 비행기 안에서 스치듯 자신을 관찰하는 그녀를 목격한 바로 그 순간에도, 계속.

*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필름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지훈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트위터에 들어갔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윤사강의 트위터를 찾아냈다.

익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SNS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는 너무 쉽게 증명해냈다. ‘언젠가는 젊은이들이 온라인에 남긴 과거 행적들을 떨쳐내려고 자기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사람이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라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아이러니를 내포했다. 자신이 창조한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모델을 향해 그토록 위험한 예언을 할 수 있는 CEO라니.

구글 검색 엔진으로 찾아낼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지훈처럼 검색에 능한 사람이라면 출신학교 정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훈은 페이스북에 접근해 같은 이름으로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정보들을 몇 가지 더 수집했다.

그는 추정 가능한 몇 가지 가설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가령 첫인상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칼라 없는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단정하고 짧은 손톱은 그녀가 다소 보수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말하는 쪽보단 듣는 것에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능숙해 보이는 화장술이나 의식하지 않아도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펴는 자세가 말해주는 것도 일관되게 그녀의 직업이 가지는 보수적인 특수성이었다. 호텔, 백화점 명품관, 고급 레스토랑, 항공사. 몇 개의 직업군이 지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시감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장 큰 확률은 그녀가 자신의 교육생일 가능성이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우연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가 박미소에게 ‘오전 일곱시’에 만나자는 말을 꺼낸 순간,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다. 사강은 지훈에게 자신이 어떻게 그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는지 설명했다. 곧이어 사강은 미도의 트위터를 통해 처음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미도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대한 글을 처음 쓴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에 ‘정미도’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광신도들처럼 집단적인 최루성 슬픔에 잠겨 있었으므로 누군가 그녀의 실체에 대해 말해준다 해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에 빠져 현실을 왜곡했을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지훈 역시 그랬다.

“제가 당신 필름을 가지고 있어요. 돌려드리고 싶어요.”

사강이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추었다.

“이지훈 씨가 가지고 있는 사강의 책을 지금 꼭 빌려주셨으면 해요. 무례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아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뇨.”

지훈이 짧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제가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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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사강의 방에 전화벨이 울린 시각은 밤 10시쯤이었다.

사강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기 위해서였다.

“선배! 계셨잖아요!”

전화기 너머 거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서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없는 줄 알았어요. 노크해도 묵묵부답. 너무해요! 저 미소예요, 선배.”

사강은 그제야 이 호텔이 편히 쉬고 싶은 고객들을 위해 배려한 특별한 서비스를 떠올렸다. 스마트키를 꽂아 넣는 키 옆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DO NOT DISTURB’ 버튼을 누르면 방에서 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말이야?”

“저 어떡해요. 죽을 거 같아요.”

“혹시, 기장님 때문이야?”

미소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사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자신과 같은 층에 묵고 있는 정수였다. 뉴욕과 도쿄를 거쳐오는 동안 사강은 정수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부기장이 선동해 비행팀 전부 함께 뉴욕의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도 그녀는 편두통을 호소하며 일찌감치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정수는 사강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것은 정수가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여준 냉담함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익숙한 승무원들조차 그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정수의 냉정함이 오랜 시간의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상처받았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자신의 무능을 용서하는 쪽이 더 어렵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것도, 그를 뿌리쳤던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불편한 감정은 아직까지 사강을 괴롭히고 있었다. 사강은 자기 죄의 재판관이 되길 자처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를 캐묻고, 죄가 있는지 심문했다. 그녀는 자신이 최악의 연애를 선택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회사에 일할 수밖에 없는 동료였다.

1514호.

한정수의 방은 사강의 방에서 멀지 않았다. 복도를 나서기만 하면 그들은 언제든 마주칠 수 있었다. 좁고 어두운 호텔 복도에서 그의 얼굴을 외면하는 일 따윈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렌즈를 찾겠다고 변기통 속에 손을 넣어 휘젓던 그날처럼 사강은 스스로를 조금도 신뢰할 수 없었다. 불안정한 자신을 긴 밤으로부터 지켜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지금은 그것이 『슬픔이여, 안녕』이어야 한다고 온몸이 외쳐대고 있었다.

“선배, 제 말 듣고 계세요? 여보세요?”

흥분한 미소의 목소리가 호텔 내선 전화기 너머 계속 들려왔다.

“기장님 때문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인데 방에 가서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중요한 일이니?”

“일생이 달린 문제일지도 몰라요!”

“그래. 문 열어놓을게.”

사강은 미소에게 빠르게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욕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천천히 손가락 사이에 비누 거품을 내고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적셨다. 사강은 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다시 한 번 하얀색 접시 위에 담긴 새 비누를 뜯어 손을 씻었다. 생각해보면 비누 하나를 다 쓸 만큼의 시간도 정수와 보내지 못했다. 사강은 손가락 사이 가득 낀 투명한 비누 거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미소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얼굴 표정만으로 열거했다. 박미소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승무원에 선발된 건 연극배우만큼 다양한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사실 저 그날이거든요. 에스트로겐 과다 분비로 인한 정신착란인가? 아님 배란기?”

“네 감정이 아니라 이유를 말해줘야 도와줄 수 있어.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봐.”

미소는 이제 사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베개를 두 팔로 껴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미소는 습관처럼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정확하게 15분 전에요. 제가 선배 호텔방 초인종을 누른 게 전화 온 직후예요.”

“전화?”

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에서 제가 황당한 짓을 했거든요. 미친 거죠, 한마디로.”

미소 역시 자신의 감정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진지해지던 미소의 눈빛이 다시 샛길로 빠져들 듯 장황해지고 있었다.

“도쿄 왔다 갔다 하면서 방사능에 오염돼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저도 서울에서 2리터짜리 생수 챙겨 와야 할까요?”

“흥분하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해봐.”

“선배도 알다시피 이번 도쿄 비행에 승객들이 많지 않았잖아요. 유독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디 맘에 드는 사람 만나는 게 쉽나요? 소개팅 나가도 순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아요?’ ‘비행기 타서 부럽네요’ ‘국내선 타요, 국제선 타요?’ 이런 질문만 하질 않나. 매일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만 하는 게 너무 한심한 거예요. 선배도 알다시피 제가 승무원 시험 여러 번 떨어져서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거든요. 집에선 직장 있을 때 시집가라고 난리고, 우리 엄마 성격 선배는 절대, 네버! 모르실 거예요, 으, 정말 얼마나 쥐어짜는데요, 결혼해라, 결혼해라, 들들 달달 볶아치고 섞어 치고 그래서…….”

미소의 넋두리를 계속 듣고 있다간 밤을 새워도 중요한 얘긴 하나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사강은 그녀의 말을 끊고 질문 대신 이야기의 핵심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그 남자한테 휴대폰 번호를 남겼다?”

“역시……! 선배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요. 통달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무장님한테 갔으면 퉁박 먹고 머리 쥐어박혔을 거예요.”

“대담했네.”

“그 남자가 보고 있던 책에 남겼어요.”

“책이라구?”

“알아요, 알아.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

“근데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사강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하자 미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데가 있어요.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미소는 이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내뱉는 와중에도 지금의 상황을 몹시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농담하는 것 같아요. 여자 좋아하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꼭 저한테 장난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나가지 말까 봐요. 헷갈려요.”

“만나자고 했니?”

“이쪽으로 오겠대요.”

가라앉아 있던 미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의미를 뒤쫓기 위해 자주 미간을 좁혔다.

“널 만나러 온다는 데 그게 왜 문제지?”

사강이 미소를 바라봤다.

“아뇨. 진짜로 문제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 남자가 저한테 대뜸 질문을 하는 거예요. 혹시 프랑수아즈 사강 좋아해요?”

“사강을 좋아하냐고 물었다구?”

“네!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물어보니까 어쨌든 대답을 하긴 했어요. 사강이요? 제가 아는 사강은 윤사강밖에 없는데요, 라고.”

“그 남자한테 내 이름을 말했다고? 왜?”

“죄송해요, 선배. 하지만 제가 아는 사강은 선배밖에 없다구요!”

미소의 눈엔 이미 다른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 한참 동안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에 대한 얘길 하는 거예요. 뭐 거기까진 이해해요. 입국카드 쓸 때, 그 책을 받침으로 썼거든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다음 말이에요. 만나자는 거예요. 분명히 만나자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가슴이 막 뛰는데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제 귀를 다 의심했다니까요.”

미소는 잠시 길게 숨을 내쉬더니 사강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주세요. 처음 본 여자한테 오전 일곱시에 만나서 밥을 같이 먹자는 거, 선배는 이해가 되세요? 저녁이 아니라 아침 일곱시에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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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회>

사강은 언제나 호텔을 ‘DO NOT DISTURB’의 세계라고 불렀다.

자폐적인 부자가 머물기에 호텔만큼 좋은 곳은 없다.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온 사강은 여느 때처럼 문고리에 ‘PLEASE DO NOT DISTURB’ 표지를 걸고, 호텔의 방문을 닫았다.

서울에서 도쿄, 도쿄에서 다시 뉴욕으로 가는 비행 스케줄은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실질적인 비행시간만 15시간 이상인 데다가, 서울에서 도쿄까지 가는 승객과 도쿄에서 뉴욕까지 가는 승객들의 숫자가 달라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강은 여러 가지 상념에 시달렸다.

침대 옆에 붙은 전자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강은 가방을 열어 작은 용기에 든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최근 몇 달 동안 사강은 대부분 끼니를 포기했다. 잠을 자야 할 시간에 터무니없는 식욕이 생기고, 뭔가 먹어야 할 시간에는 정작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게 이유였다.

사강은 짐을 풀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빈 천장 위에는 화재 예방을 위해 달아놓은 스프링클러가 빨간 불빛을 반짝이며 작동하고 있었다. 침대의 옆자리는 누군가 누워 있길 바라는 것처럼 비어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하자 침대에서 일어난 사강은 창문을 열었다. 도쿄의 쓸쓸하고 매캐한 공기와 밤이 되자 조금씩 켜지기 시작한 창백한 네온사인 빛이 조금씩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만약 도쿄 시내에 눈에 띄게 줄어든 외국인들의 숫자만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이곳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창가에 서서 그녀는 왼손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호텔 픽업 버스를 타고 오며 바라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빠르게 걸었다. 사강은 뉴욕의 호텔방에 있는 동안 CNN과 KBS월드가 반복해서 내보내던 처참한 후쿠시마 동영상을 떠올렸다. 부서진 도시 전체가 흙탕물에 잠겨 무서운 속도로 떠밀려나가고 있었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지진대 위에 사는 기분은 어떤 걸까? 자신이 살던 집의 지붕이 어느 날 새벽 2시에 침대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면. 예고 없는 교통사고나 말기 암 선고처럼 말이다.

인간은 슬픈 쪽으로만 평등하다.

인간은……

어쩌면,

행복한 쪽으로는 늘 불평등했다.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강은 계속 지훈을 생각했다.

이지훈은 기내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커피나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그것에 무섭게 집중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노인이 손쉽게 기내식을 먹을 수 있도록 칼과 나이프의 비닐 포장을 차분히 뜯어주었다. 그는 노인을 위해 따뜻한 녹차를 주문해주기도 했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남자였다.

지훈이 대부분 독서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강은 비행기 안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훈이 앉은 쪽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가 책장의 귀퉁이를 조그만 삼각형 모양으로 접는 걸 볼 수 있었다.

지훈이 읽고 있는 책은 사강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내놓은 책이 아니라 한국어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의 기념품’으로 고른 『슬픔이여, 안녕』을 읽기 위해 한국어판을 새로 산 걸까. 그렇게까지 할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던 걸까. 혹시 그도 필름을 인화했던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그 책을 읽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윤희의 말처럼 사강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지훈을 알아보지 못한 건, 사내 교육이 있던 날 콘텐트렌즈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공항 터미널 2층 여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사강은 극심한 통증 때문에 콘택트렌즈를 뺐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기에 렌즈가 너무 작고 얇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렌즈는 이미 그녀의 손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사강은 고개를 숙이고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변기 위에 구조를 위해 마련한 뗏목처럼 렌즈가 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으로 변기의 물을 마구 휘저었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분명 얼빠진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강은 주저앉아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사강은 그날,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했다.

그것은 ‘일어난’이 아니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라면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냉정한 얼굴로 잘라 말했을 것이다.

“윤사강, 그건 이미 ‘저질러진’ 일이야.”

정수와 헤어진 날, 사강은 렌즈를 잃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새벽 물안개에 뒤덮인 음습한 저수지처럼 바뀌어 있었다. 인천공항의 현대식 시설물들 역시 사강의 눈에 무의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대기실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욕실의 불투명 유리문 안에 서 있는 것같이 도무지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사강이 넘어지지 않고 강당까지 걸어온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공항 안전요원들과 청소차를 지나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100석 규모의 강당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나 환호 이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순간 사강은 소외당한 고아처럼 위축됐다.

사강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때 사강은 그것이 불시에 타격 받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중간 중간 폭소가 터졌다. 몇몇은 질문을 던졌다. 명료하고 부드러운 강사의 목소리는 그녀의 슬픔에 확성기를 달아놓은 듯 강당 안을 울렸다.

그것이 사강이 처음 목격한 이지훈과 이지훈의 목소리였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만 들었다면, 그녀는 그를 한순간에 알아봤을 것이다.

사강은 자신이 탄 비행기 안에 앉아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있는 이지훈을 바라봤다. 사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정체불명의 책이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그녀는 뜻밖의 우연들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폐기 처분 되었을 것이라 믿었던 책 더미가, 누군가의 쓰레기통 속에 있어야 할 물건이 바로 눈앞의 저 남자 때문에 부활해 있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버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책을 보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마 동안 택배 상자조차 뜯어보지 않았단 사실을. 그래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똑같은 책을, 똑같은 상자에 넣어, 똑같은 시간에.

『슬픔이여, 안녕』은 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념일 즈음에 왔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강은 1년 동안 자신이 이 책을 ‘누가’ 보냈느냐를 골몰하다가 ‘왜’ 보냈는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녀에겐 책을 읽는다는 게 무의미했다.

어쩌면 책 안에는 정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책 안의 실질적인 메모나 밑줄이 결정적인 힌트로 작용해 이 책의 진짜 의미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외국어로 된 책을 보냈는지, 왜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인지, 『슬픔이여, 안녕』이 어떤 의미인지…….

사강은 책의 내용보다는 누가 책을 보냈느냐에 골몰하느라 자신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 받은 책을 가장 먼저 읽는다. 선물 받은 목걸이를 그 자리에서 걸고, 선물 받은 반지를 눈앞에서 끼어본다. 선물이란 그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준 사람의 욕망을 눈앞에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결국 책은 그것을 아직 읽지 않은 미지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고,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강에게 지금 책이 없었다.

평생을 통틀어 자신과 이름이 같은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고 싶은 순간에, 정작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강은 그 순간 지훈을 떠올렸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읽고 있던 사강의 소설을, 그가 가지고 있을 네 권의 책을 생각했다. 이지훈이 만약 도쿄에 계속 머물고 있다면, 그가 이틀 이상의 출장 중이라면, 그는 지금 이 시간 자신과 같은 도쿄 어딘가의 호텔에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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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어느 나라에 가든 어렵지 않게 시차에 적응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몽골에 가면 태어날 때부터 달리는 말을 탔던 몽골인처럼 보이고, 인도에 가면 평생 손으로 밥을 먹었던 인도인과 흡사해 보인다.

어디서도 섞이거나 스미는 사람들. 온몸에 흙과 바람의 냄새를 싣고 다니는 사람들. 당장 동네의 시장으로 달려가 그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을 사 입고, 손과 눈빛을 사용해야만 하는 그들의 인사법을 익히고, 현지인들이 신는 신발을 찾아 자신의 오래된 나이키부터 벗어 던지는 여행의 달인들. 그들 중에는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는 대신, 선의를 지닌 낯선 사람의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며 다양한 도시를 여행하는 가난한 여행자도 많다.

그들은 사람들로 들끓는 재래시장에서도 가장 오래된 공방을 찾아내고, 여행 책이나 지도에 밑줄을 그었던 것들을 직접 실행한다. 그렇게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요가와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배우고, 낙타 몰이꾼들이 가득한 자이푸르에서 낙타 모는 법을 진지하게 배운 친구를 사강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배우고 싶었던 것이 ‘짜파티’를 만드는 법이었다는 표정으로 손톱 사이에 꼬질꼬질 때가 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밀가루 반죽을 빚는 사람들 말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 우연한 여행 때문에 낯선 곳에서 삶이 결정되곤 한다.

사강은 자신 역시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호텔을 떠도는 ‘호텔 노마드’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고, 대한민국 여권을 사용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공항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무국적 보헤미안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공항 대기실 의자를 안락한 침대처럼 느끼고, 밤과 낮이 쉼 없이 바뀌는 시차에도 드릉드릉 코를 골아대며 잠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호텔의 이방인이 아니라 호텔의 주인처럼 살 수도 있었다. 바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우연히 부딪힌 사람과 기약 없는 섹스를 하고, 고향에 있는 멍청이들에 대해 떠들고, 허기가 지면 몇 시가 됐든 룸서비스로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건 어딘가에 정착하고, 작은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삶이었다. 재작년에 심은 라일락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눈으로 가늠하고 즐거워하는 삶 말이다. 작은 마당과 마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강이 원했던 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반경 안에 있는 익숙한 것들을 손으로 만져보며 코끝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겨우 네 시간 전까지만 해도 두꺼운 겨울코트를 입고 있다가, 여름용 탱크톱으로 바꿔 입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더위만큼이나 익숙해지지 않는 세계. 어떤 날은 프랑스어와 독어가, 어떤 날은 경전의 주술처럼 이어지는 이슬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삶에 편입되었다는 것에 사강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바그다드의 뜨거운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졌는데, 서울에선 폭설이 내리는 영화의 몽타주 같은 삶, 툭툭 끊어져 연속성 없이 이어지는 단절감이 곤혹스러웠다.

사강은 호텔 키를 받아 들고 막 방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정적과 어둠이 싫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호텔의 텔레비전을 켜고, 이전의 투숙객이 제멋대로 맞춰놓은 볼륨을 컨트롤했다. 사강은 언제나 소리 나는 것들의 볼륨을 최대한 줄였다. 에어컨과 텔레비전, 라디오, 전화기, 헤어드라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비행으로 예민해진 몸은 달라진 공기와 낯선 언어의 틈을 벌리며 의미를 수집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가끔 그런 것들에 부대끼며 텔레비전을 꺼놓으면 이번엔 날카로운 정적이 낯선 공기로 부풀어 오른 외로움을 찔러댔다. 눈에 보일 정도로 깨끗한 호텔의 이불과 베개에서 나는 희미한 세제 냄새도 언제나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호텔의 구김 없는 침구류들은 조금의 오차 없이 각을 맞춰 승무원 제복을 다리던 주니어 스튜어디스 시절을 연상시켰다.

사강은 호텔에서 자신의 짐을 트렁크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도시가 어디든 하루나 이틀을 넘기지 않고 곧 떠날 것이므로 옷을 꺼내 일부러 호텔의 옷장에 걸어두지 않았다. 갈아입은 속옷은 따로 분리해 지퍼백에 넣어 트렁크 속에 넣었고, 세탁 서비스를 맡길 일 따윈 절대 만들지 않았다. 화장품 역시 쓰는 즉시 트렁크 속에 든 파우치 안에 집어넣었다. 지갑이나 여권을 생각 없이 탁자 위에 놓아두는 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방에 가지런히 넣어두고 필요한 것들만 그때그때 꺼내 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을 자신도 모르게 호텔에 놔두고 갈까 봐 늘 불안했다. 사강은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호텔에 흘리고 왔다는 불안감에 로비까지 내려왔다가 호텔방에 다시 올라가길 반복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고 긴 체크 리스트를 만들곤 했다.

“처음엔 나도 그랬어. 점점 나아질 거야.”

그것이 비행을 시작하는 승무원들이 겪게 되는 증상 중 하나라고 사무장이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호텔에 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짐을 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문 앞에 ‘PLEASE DO NOT DISTURB’ 푯말을 걸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며칠을 체류하든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이지 않았다. 호텔의 하우스 키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사강이 고집한 호텔 생활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공항에서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그 나라의 시간을 체크하고, 자신이 자지 못한 잠의 총량을 계산해 먹어야 할 수면제의 양을 정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방에는 언제라도 잠들 수 있도록 두꺼운 수면용 커튼이 늘 쳐져 있었다. 스톡홀름이나 헬싱키 같은 백야의 도시에선 호텔의 커튼은 한 번도 올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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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다음 날, 회의를 마친 지훈은 이른 저녁 호텔에 돌아왔다.

본사와 통화한 후, 그는 일본 체류 일정을 하루 더 연장했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 마시고, 죽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그는 일찍 침대에 누워 독서 스탠드를 켰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슬픔이여, 안녕』을 끝까지 읽을 생각이었다.

도쿄 지진 때문에 생각보다 회의 일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호텔에서 아예 책을 꺼내지도 못했다. 물론 비행기에서도 생각만큼 책을 읽지 못했다. 신경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지훈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날따라 도쿄행 비행기에는 빈 좌석이 많아 보였다. 조금 더 넓은 자리로 이동해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손님들이 눈에 띄었고, 승무원들도 굳이 사람들의 이동을 막지 않는 눈치였다.

“어르신.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데 편하게 옆 통로 쪽 자리로 이동하실래요?”

지훈과 앞뒤로 텅텅 빈 좌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비어 있는 휑한 좌석들을 놔두고 딱 붙어 앉아 있는 유일한 승객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안 불편해!”

노인은 순간 적의에 찬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자리에 앉는 게 당연해!”

외할머니의 오랜 소원대로 형이 기적처럼 일흔의 노인이 된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 정한 규율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원칙주의자. 그 장소, 그 자리에서, 늘 먹던 그것이 아니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고집을 부리는 형.

노인은 오렌지 주스가 먹고 싶다거나, 물이 마시고 싶다는 얘기를 승무원이 아닌 지훈에게 말했다. 화장실을 찾아달라고 했고, 면세품을 소개한 기내 잡지에 실린 향수 가격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지훈의 눈에 노인의 목덜미와 손등에 찍힌 검버섯이 낙인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 익숙지 않은 노인에게 그것은 일종의 미아 상태였다.

지훈은 노인의 요구를 피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 고작 두 시간 정도의 비행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비행이 끝나고 입국 수속을 마치자 노인은 돌아가는 지훈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노인은 지훈에게 가방 안에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내주었다. 그는 지훈을 손을 잡고, 방향이 달라 아쉽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훈은 잠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폭설이 내리듯 한꺼번에 머리카락이 새고 구부정하게 늙어버린 형을 보는 것 같은 회한을 느꼈다.

지훈은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슬픔이여, 안녕』을 꺼냈다.

그때, 책 안에 뭔가 불룩하게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것이었다. 지훈은 책의 불룩한 부분을 손에 잡고 조심스레 책장을 펼쳐 들었다. 책에서 매끈한 검정색 볼펜 하나가 흘러나왔다. L항공사 마크가 새겨진 항공사 볼펜이었다. 지훈은 침대에 떨어진 볼펜을 침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책을 읽으려고 그가 왼쪽 상단의 맨 첫 줄에 눈을 고정했을 때,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지훈은 다시 한 번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010-6543-XXXX

책의 왼쪽 귀퉁이 위에는 볼펜으로 눌러 쓴 휴대폰 번호가 보였다.

반듯하면서 각지지 않은 통통한 모양의 숫자들로, 나이 어린 여자들의 글씨체에 가까웠다. 지훈은 그것이 지금 자신의 테이블 위에 있는 이 항공사 볼펜으로 쓴 숫자라는 걸 알아챘다. 6543? 눈에 익거나 익숙한 번호가 아니었다. 지훈은 테이블 위에 있던 검정색 볼펜을 집어 들었다. 언뜻 로켓 모양처럼 보이기도 했고, 날개를 제거한 비행기 몸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볼펜을 보자, 지훈의 머릿속에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누군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L항공사의 아이보리색 제복을 입은 여자 승무원의 모습이었다. 노인에게 볼펜을 가져다준 것도, 출국카드를 대신 써준 것도 그 승무원이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흔들리는 비행기에 서서 종이에 뭔가를 기입하려면 쟁반이나 책처럼 종이를 받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지훈은 읽고 있던 『슬픔이여, 안녕』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노인 옆에 있던 자신이 입국카드를 대신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똑같은 제복을 입고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한 여자 승무원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승무원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비행기 복도를 천천히 지나치며 자신을 관찰하듯 스쳐지나가던 여자와 벨을 누를 때마다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다가와 뜨거운 녹차와 주스를 내밀었던 여자.

더 이상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의미 없이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귀퉁이에 적힌 숫자가 책 전체에 흘러내려 문장들을 차례로 뭉개고 있었다. 침대에서의 독서는 책 안에 있던 비밀스런 숫자들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일어나 호텔 미니바에 놓인 작은 진토닉을 꺼냈다. 그는 호텔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정이 지나 내일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지훈은 당장 전화번호를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충동이었다.

책 위에 적혀 있던 번호가 아이보리색 제복을 입고 있던 여자의 살 끝 위에 와 닿는 것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훈은 텅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지훈에게 밤새도록 여자와 섹스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현정과 헤어진 후,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침이면 쌓여 있는 적당량의 성욕을 샤워 부스 안에서 해결했다. 겨울 온실처럼 느껴지는 무채색의 샤워 커튼 안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고요히 사정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거대한 관엽식물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남자에게 번호를 남긴 여자에게 연락하지 않는 건 일종의 무례함이 아닐까.

지훈은 미니바 안에 있는 보드카 하나를 더 땄다. 그는 보드카를 한숨에 들이켜고 맥주를 서너 병 더 마신 후, 호텔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 불이 드문드문 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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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7부 호텔 생활자

“꼭 옛날 사진 속을 걷는 것 같네요.”

지훈이 다나카 상과 함께 간 곳은 고층 빌딩과 거대한 광고판들이 위압적으로 들어차 있는 신주쿠가 아니었다. 그곳은 예전부터 지훈이 봐왔던 신주쿠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군데군데 벽돌이 깨져 성하지 않은 몸피의 건물들과 낡고 좁은 골목들이 다닥다닥 뒤엉켜 마치 1970년대나 1960년대 분위기로 돌연 시간이 멈춰 선 것처럼 생경했다. 기묘한 타임테이블 위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이런 오래된 골목이 간직하고 있는 특유의 모습들, 가령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한껏 고여 있어 한 시절을 연상하기에 좋을 정도의 습기와 쓸쓸한 과거의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여긴 골덴가예요. 건너편 니시 신주쿠에 비하면 올드 시티죠. 제가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구요. 시마 과장 좋아하십니까?”

다나카 상이 말했다.

“만화는 형이 더 좋아해요.”

다나카 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올드보이』에도 골덴가가 나오네요. 한잔 걸치면서 신세 한탄하기 좋은 곳이에요.”

다나카 상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바람이 불자 애써 왼쪽 관자놀이 근처에 가지런히 붙인 머리카락이 솟아올라 뒤집혔다. 얼핏 잘못 만들어진 가발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머리숱은 적어도 10퍼센트가량 줄어든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문득 최 부장이 생각났다. 다나카 상은 지훈을 보더니 더 호탕하게 웃었다.

“방사능 비 맞아서 그런 겁니다. 크하하하.”

쉰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미혼인 다나카 상은 어깨가 유독 넓어 보이는 회청색 파워 슈트에 물방울이 자글자글한 실크 넥타이를 고수했다. 덕분에 영화진흥공사에나 가야 있을 법한 80년대 필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기억하는 1980년대는 무성했던 자신의 머리숱만큼이나 풍요롭고 따사로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 그들은 골덴가에 있는 다나카 상의 단골 선술집에 들렀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고, 입구엔 일본 식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사하는 고양이 인형 대신 ‘유키’라는 이름의 진짜 고양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유키 짱은 자기가 고양이인 걸 모르는 눈치예요.”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의자 옆에는 고양이가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가자미 굽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옆 사람과 어깨가 맞닿을 정도의 좁은 거리에선 누가 하는 말이든 쉽게 섞였다. 술자리의 화제가 이번 일본 대지진이라는 건 지훈도 알 수 있었다. 당장 핸드폰 버튼 하나만 눌러도 흙더미 속에 통째로 매몰된 마을과 무너진 건물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원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일본 특유의 전력 구조 때문인지 후쿠시마 원전 여파는 꽤 커 보였다. 도쿄 시내에선 전기를 아껴 쓰자는 캠페인 휘장을 두른 공무원들과도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이 집은 녹차가 일품이에요.”

다나카 상은 지훈에게 따뜻한 녹차를 권했다.

“여기, 사케 집 아닌가요?”

“주인이 나가타 현에 커다란 녹차 밭을 가지고 있어요.”

“나가타 현이 녹차가 유명한 곳인가 보죠?”

“그곳은 쌀이 유명합니다.”

다나카 상이 지훈을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자 지훈도 따라 웃었다.

“지진 때문에 걱정이긴 하지만 잘 이겨낼 거예요. 지금은 각자의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힘들 때니까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투명한 잔에 담긴 녹차를 바라봤다. 평화로웠던 일본의 지난봄과 뜨거운 여름의 태양을 가득 담은 녹차일 것이었다. 다나카 상이 찻물을 따르는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언제 가십니까?”

“회사에 전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내일 갈 생각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하루나 이틀쯤 더 있을 수도 있어요.”

“벚꽃이 제철이라 좋을 때예요. 근데 어제 소나기가 와서 왕창 떨어졌어요. 하루만 일찍 왔어도 참 좋았을 텐데요. 정말 아름다운 벚꽃이었는데.”

그는 아쉽다는 얼굴로 지훈을 바라봤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한 시간만 일찍…… 어쩌면 일분만 일찍 왔어도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 다나카 상은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꽤 무서운 말이었다.

“호텔은 편안하십니까?”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덕분에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지훈은 서울에서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극소량의 수면만으로 버텼던 몸이 보상받길 원하는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혹시라도 자다가 침대가 흔들리거나, 전등이 내려앉아도 놀라지 마세요.”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농담이면 좋겠지만…….”

다나카 상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에요.”

호텔 방문을 열자, 어둠과 함께 깊은 정적이 밀려왔다.

지훈은 재빨리 스마트키를 꽂아 넣었다. 모던한 스타일의 침대와 침구류, 미니멀한 화장대 그리고 소파와 옷장이 모두 정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는 트렁크를 올려놓는 탁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회의 때 입을 셔츠와 슈트를 꺼내 옷장에 비치된 옷걸이에 걸고, 속옷과 양말은 서랍에 개어 넣었다. 구두와 운동화는 슬리퍼가 들어 있던 더스트 백 안에 각각 넣어 옷장 앞에 놓아두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책은 침대 옆 스탠드 옆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책꽂이가 있는 것처럼 그는 책의 높이와 두께 크기를 맞추었다.

지훈은 가방 안에서 액자 하나를 꺼냈다.

가죽으로 만든 두툼한 수첩처럼 보였지만 펼치면 어디에든 세워놓을 수 있는 액자였다. 지훈은 액자 속 사진을 보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형과 외할아버지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쓰던 독서대와 꼬마전구가 달린 스탠드도 꺼냈다. 램프는 중국 광저우의 ‘이케아’에서 9달러를 주고 산 것이었다. 짐을 푸는 지훈의 얼굴은 주름 없이 빳빳한 호텔 침구류처럼 침착해져 있었다.

강의가 있는 날, 지훈은 하루 먼저 자동차를 몰고 가 연수원 숙소에서 잠을 잤다. 대부분 지방에 있는 연수원의 이른 아침 강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연수원에 미리 도착해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조직 구성원이나 조직 문화를 이해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는 최 부장의 충고 때문이었다. 지방의 기업 연수원에 내려가는 일은 지훈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물건을 12평짜리 연수원 숙소에 알맞게 재배치하는 건 늘 중요한 일이었다.

지훈은 호텔 창밖의 어두운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벽까지 열어놓는 작은 라멘 가게와 ‘lawson’이라고 적힌 파란색 간판 불빛이 어둠 속에 작은 배처럼 떠 있었다.

지훈은 잠옷을 꺼내 입듯 호텔 옷장에 걸려 있던 호텔 이름이 수놓아진 유카타를 걸치고, 오랜 기간 호텔에 머무는 장기 투숙자처럼 침대에 누웠다.

지훈은 호텔을 ‘숙소’라고 쓰고 ‘집’이라고 읽었다.

그가 명훈을 ‘형’이라 쓰고 ‘동생’이라 읽었던 세월과 무관하지 않은 고의적인 오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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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만약 세상에 공항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화의 엔딩이 지지부진해지거나 밋밋해졌을까.

연인이 헤어지고, 부녀가 안녕을 고하고, 모녀가 부둥켜안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곳으로 공항만큼 극적인 곳은 없다. 오해가 이해로, 절망이 희망으로 뒤바뀌는 마법의 장소. 어쩐지 저 닫힌 문 너머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아 가슴 벅찬 곳.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영화의 엔딩이 ‘공항’에서 끝난다는 진저리나는 진부함에도 공항 엔딩에 환호하는 것이다. 공항에서의 이별은 언제나 눈물 날 만큼 낭만적이니까 말이다.

“만약에 공항이 없었다면 작가의 절반은 원고의 끝을 어떻게 맺을까 고민하다가 머리털 꽤나 뜯었을 거야.”

미도는 팔짱을 낀 채 공항 의자에 앉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햇반과 컵라면이 없었다면 한국에 존재하는 작가의 절반은 틀림없이 굶어 죽었겠지. 하긴 작가가 아니라 언니도 거기 포함되긴 하겠네.”

미우가 시큰둥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연달아 면접에서 떨어진 20대 취업 준비생의 얼굴에는 영 생기가 없었다.

한때 미도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그대로 떨어져 고액의 보험금을 타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미우에겐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가끔 미도는 미우의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아주,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발권 카운터에는 트렁크를 든 여행객들과 붉은 깃발을 든 단체 여행객들이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항공사 직원이 단체 여행객들의 발권을 돕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듯 어린 여자아이의 짐이 규정보다 많이 오버되어 발권 승무원과 실랑이가 벌어진 탓에 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아이의 짐에서는 얇은 이불과 즉석밥, 고추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먼 곳에 보내는 딸이 걱정스런 엄마가 넣어줬을 것들이었다. 얼떨결에 얇은 이불과 즉석밥을 받아 든 아이의 아빠가 당황한 얼굴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을 빼내고, 다시 계량된 짐이 승무원들의 손에 실려 컨베이어 벨트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한 듯 딸의 손을 잡았다.

서울에서의 삶을 지구 반대편에까지 이식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엄격한 공항 수하물 규정에 따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공항의 엄격함이란 다름 아닌 늘어난 짐만큼 가격을 더 매기는 오버 차지(over charge)인 셈이다.

미도는 짐들이 점멸하듯 사라져가는 어두운 길목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의 일상으로 밀봉된 트렁크들이 덜컥대는 컨테이너에 실려 비행기 화물칸 안으로 줄지어 쌓여가고 있었다. 무인 카운터 앞에 서서 발권을 마친 미도는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공항 터미널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일상 탈출에 성공했으며, 모험을 떠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항만이 줄 수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였다.

빠르게 탑승 수속을 마치고, 32번 게이트로 이동하는 무빙 워크를 탄 미도의 눈에 아이맥스 스크린처럼 공항의 전경이 펼쳐졌다. 미도는 빠르게 카페와 편의점을 지나 비행기 탑승 게이트로 걸어 들어왔다. 오후 햇살이 가늘게 부서져 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비행기들이 서 있었다. 밤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비행기들이 이제 화물과 승객을 싣고 지구 저편에 있는 이국의 도시로 사람들을 집단 이동시킬 것이었다.

32번 게이트 앞 라운지에 비행기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예 좌석 몇 개를 차지하고 누워 잠을 청하는 배낭족이 있었고, 비스듬히 앉아 아이패드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는 사람도 보였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서류를 마무리 짓는지 빨려 들어갈 듯 노트북을 바라보며 바쁘게 타이핑하는 사람도 있었다.

“으. 배고파. 기내식 먹으라고 컵라면 하나 안 사주는 못된 인간. 그게 얼마나 한다고. 편의점 컵라면 가격은 공항이나 밖이나 다 똑같단 말이야!”

미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미우를 바라보았다.

“참 팔자 좋은 사람들 많지 않니? 어쩜 평일인데도 이렇게 여행을 많이 갈까.”

미도는 공항 의자에 앉아 짐을 끌고 다니는 여행객들을 바라보았다. 면세점에는 담배와 화장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급작스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전화벨 소리였다. 그 순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배터리를 빼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미도는 눈을 감았다.

“보나마나 조 부장이겠지. 나만 포상 휴가 받았다고 질투 나서, 엿 먹이려는 수작이야.”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았다. 대부분 예상보다 한층 더 수위가 높아진 채.

“어우, 우라질! 대표 전화잖아!”

미도는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우가 없는 라운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표가 예정되지 않은 자신의 휴가 일정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미도가 다시 의자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옆에 사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미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회사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너 혼자라도 일본에 가.”

“미쳤어? 이번 여행은 언니가 우긴 거잖아.”

“너라도 가. 호텔 예약 취소하면 돈 날아가.”

“언니!”

“마무리 부탁한다. 마무리 잘해줘. 넌 똘똘하니까 잘할 수 있지?”

“이럴 수가!”

미우가 두 눈을 번쩍 뜬 채 손으로 입을 막고 미도를 빤히 바라봤다.

“왜? 뭐라도 봤어?”

미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미우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살다 보니 언니가 나한테 뒷마무리를 부탁하는 날이 오다니! 그건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본다는 그런 말씀이신가?”

“야, 넌 이런 상황에서도 헛소리가 나오니? 나 먼저 갈 테니까 잘해. 내 짐 잘 찾고. 엉뚱한 데 가서 똑같은 트렁크 들고 튀어나오면 나한테 죽는다!”

“얼른 가시기나 해. 잘 가!”

미우가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불과 1분 전만 해도 미도는 자신이 도쿄행 비행기 대신, 광화문행 공항버스에 오를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구름의 전경이 아니라, 밀려온 흙더미 때문에 거대한 봉분처럼 보이는 영종도의 검은 갯벌을 보게 되리란 것도.

당연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

책을 읽고 있던 지훈은 자신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독서에 집중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것, 슬픔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권태라든지 후회, 아주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아주 행복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슬픔이여, 안녕』은 거실 어느 쪽인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안나 카레리나』처럼 소년 소녀들을 위한 세계명작전집들 사이에 꽂혀 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이라면 지훈이 유일하게 읽은 소설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처음 몇 장을 읽다가 포기해버렸지만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만은 기억했다.

폴과 로제.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당시 유행하던 초콜릿 이름 ‘로즈’와 비슷했다. 초콜릿은 광대뼈 주위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밸런타인데이 때 지훈에게 건네 준 선물이었다. 여자애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형이 전부 먹어버린 초콜릿 이름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지훈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이 책을 선택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놀랄 정도로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 집으로 책을 가지고 온 직후였다.

지훈에게 이 책은 귀를 뚫지 않으면 착용할 수 없는 귀걸이만큼이나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람들 역시 같은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스페인어나 독일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일본어 실력도 문학적인 표현을 살펴가며 읽기엔 모자랐다. 지훈은 책 표지도 제각각이고, 장정과 크기도 모두 다른 책들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책을 선물한 사람은 무슨 이유로 판본도, 출판 년도도, 언어도 다른 책을 네 권씩이나 선물했을까. 책을 구하기 위해 쏟았을 시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손끝에 만져졌다. 지훈이 선물한 폴 오스터 초판본보다 그가 쓰던 고물 타자기를 더 사랑했던 현정이나, 이 책을 거부한 익명의 사람이나 누군가의 고심 어린 선물을 폐기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지훈은 거부당한 네 권의 책을 바라봤다.

그 순간 지훈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밤이면 늘 잠이 오지 않아 고민이던 그에게 그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게이트 입구 앞에서 소설을 읽던 지훈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이었으므로 책을 읽기에는 창가 쪽 자리가 더 좋을 터였다. 옆 좌석에는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실밥이 튀어나온 검정색 중절모를 쓴 채 기내 면세품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짐처럼 보이는 커다란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곧 안전벨트 사인이 켜지고 엄청난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주로에 작은 인형 모형처럼 줄 서 있던 엔지니어들이 승객들을 향해 줄과 열을 맞춰 나란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은 비행기의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인천공항의 조각난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엔진 음과 함께 땅을 박차고 비행기 동체가 땅 위를 부유하는 순간, 그는 긴장감으로 굳어 있던 자신의 어깨가 30도쯤 부드럽게 젖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순식간에 뒤바뀌는 고도를 느꼈다. 귀가 멍해지자 옆에 앉은 노인의 잔기침이 더 늘어났다. 이제 비행기는 하늘로 떠올라 구름 속을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지훈은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고개를 돌려 멀리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행기에선 기장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을 도쿄 나리타공항까지 모실 기장 한정수입니다. 지금 도쿄의 날씨는 쾌청하며, 현지 기온은 섭씨 16도입니다. 오늘 나리타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1시간 45분이며, 현지 시각 4시 55분경에 도착 예정입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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