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인권신문 | 기사 입력 0006년 8월 28일

7세 된 Y(서울 구로구)가 어린이집 친구에게 자기 가족을 소개한다. 소개받은 친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자신 앞에 서 있는 두 아저씨를 한참 동안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Y에게 묻는다. “이 사람이 아빠야? 또 이 사람도 아빠고?” Y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쪄.”라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Y의 가족으로 밝혀진 두 아저씨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자, 이번에는 친구가 직접 아저씨들에게 묻는다. “아저씨가 Y 아빠고, 아저씨가 Y 엄마 맞아요? 아니면, 둘 다 아빠예요?” 질문을 받은 두 남자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Y의 친구는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렇구나. 내가 아는 사람들은 남자가 아빠고 여자가 엄마인데, Y네 집은 엄마, 아빠 모두 남자구나.” Y가 친구를 보며 그건 아니라는 표정을 짓자, 친구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럼, 둘 다 아빠구나! 와, Y야! 넌 아빠 둘 하고 사는구나! 좋겠다. 셋이 야구도 할 수 있고! 근데 밥은 누가 차려줘? 하긴 요즘 세상에 아빠가 밥 차리는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양.” Y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두 아저씨도 Y와 함께 끄덕인다.
그러자 친구는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이제 우리 가서 놀아도 돼요? 아저씨들. 아니, Y 엄마, 아빠! 아니, 아빠, 아빠. 아이, 잘 모르겠네. 암튼 우린 이제 놀러 가도 되죠?”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Y와 친구는 두 손을 꼭 잡고 방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그렇다. Y의 부모(보호자)는 동성애자이다.
경상도 문경 출신인 Y의 아빠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만난 8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연애 경험이 없었던 Y의 아빠는 자신이 선천적으로 섹스에 대해 무심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신적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 생활이 시작되면서 둘 사이에서 Y가 태어났다. 하지만 Y가 28개월 되었을 무렵 Y의 아빠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이혼을 선택했다. 젊은 Y 엄마의 장래를 생각해 Y는 아빠가 키우기로 했다. Y 엄마는 다행히 남편을 이해했다. 두 사람이 성 정체성의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화를 자주 나눴던 사이였기에 가능했던 ‘덜(!) 슬픈’ 이별이었다. 안면 장애를 갖고 태어난 Y는 그때부터 아빠의 손에서 자랐다.
 Y가 네 살 때, Y의 아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물론, 남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아빠의 남자 애인은 마치 친엄마처럼 Y를돌봤고, 자연스럽게 세 남자는 동거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두 남자의 관계를 인정했지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살았던 그들은 편견과 구설수에 삶이 평탄한 날이 적었다. Y의 아빠와 애인은 사실혼 관계였지만, 부부로서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Y는 두 사람에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편부인 셈이다.
하지만 오는 8일이면 이 가정에도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시민결합결혼제도’가 정식으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Y 아빠와 같은 동성애 커플도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다. 이번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대만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동성 간의 결혼을 제도화한 나라가 되며, 세계적으로는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열여덟 번째 나라가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 388만 동성애자들이 간절히 바랐던 소망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미 서울에만 8,000건 이상의 서류가 접수된 상황이고, 전국적으로는 1만 8,000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이 ‘시민결합결혼제도’를 통해 정식 부부로 인정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로써 그동안 인권의 사각지대로만 여겨져왔던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진일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뿐만 아니라, 인권 문제 자체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민결합결혼제도’가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긴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Y의 사례와 같이, 가정에서 부모를 성별로만 구별할 경우,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상의 불편함, 불이익은 고스란히 Y, 즉 아이에게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현재 7세인 Y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그때 작성해야 할 서류들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현행대로라면 Y는 아빠는 있지만, 엄마는 없는 아이가 된다. 왜냐면 아이의 부모(학부형)는 반드시 남성과 여성의 조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결합결혼제도’ 시행과 함께 Y의 아빠는 법적으로 배우자가 있는 남성, 즉 유부남이 된다. 결국 Y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적으로) 아빠의 배우자를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아빠의 배우자이므로 아빠라고도 볼 수 없다. 정부는 이 문제를 점진적으로 개선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현재까지 정부는 아무런 대안도 마련한 바가 없으며, 동성애자 인권 신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시민결합결혼제도’를 반대했던 일부 보수 단체 및 종교 단체들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제도에서 한발 양보했기 때문에 (동성애자) 부모 문제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했지만, 법적으로 동성연애자들이 부모가 되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얼마 전 대표적인 보수 개신교 목사로 알려진 오○○ 목사의 ‘동성애=수간(獸姦)=시간(屍姦)’ 발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되기도 했다. 보수 개신교 단체는 “‘시민결합결혼제도’ 자체가 이미 해악이며, 만약 더 큰 악행(동성애 학부모의 법적인 인정)을 저지른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일부 보수 강경 종교단체연합에서는 ‘동성애 자체가 지옥행 직행 차표’라고 선전하고 있다. 합리적인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진영에서는 “물론 동성애자 부모를 둔 아이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동성애자들이 부모가 될 경우 평범한 아이들이 겪을 성 정체성 혼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성애 단체 ‘동무사이’에서 최근 조사한 설문의 결과를 보면, 보수 단체들의 주장을 재고해볼 만하다.
 만 12세 이하 초등학생의 경우 58.8퍼센트가 친구의 부모가 동성(애자)인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으며, 28.8퍼센트는 친구에게 설명을 들은 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으며, 8.8퍼센트만이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3.6퍼센트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답변했다. 초등학생들의 경우 오히려 성인들보다 성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동무사이’의 오○○ 간사는 동성애자 부모를 인정하는 것은 추상적인 인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거부될 경우 우리 아이들의 일부가 아무런 준비 없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부모의 인정은 재산 분할, 상속, 입양 등의 권리, 그리고 입원이나 감옥 면회, 신원보증 등 소수자들이 실질 생활에서 겪고 있는 각종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라고 설명한다.
‘동무사이’에서는 동성애자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동성애자 부모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풍토를 만듦과 동시에, 서류상으로 부(아버지)와 모(어머니)를 성별에 따라 구별했던 것을 폐지하고 부모1, 부모2로 표기하자는 것이다. 보호자1, 2도방안이 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이미 8년 전부터 ‘파트너 등록제’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이 제도는 동성同性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권 신청서 등의 각종 민원 관련 서류의 부모 인적 사항 기재란에 ‘아버지father’, ‘어머니mother’ 대신 ‘부모 parent 1’, ‘부모 parent 2’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 제도이다. 영국 정부가 부모의 성별이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성적 차별이라는 동성애 옹호 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를 옹호하는 언어학자들은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전적 의미를 재정립 혹은 확장하자고 주장한다.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발간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아버지’는 명사이며, 1) 자기를 낳아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2)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 3) 자녀의 이름 뒤에 붙여, 자기 남편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 4) 자기를 낳아준 남자처럼 삼은 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상 네 가지로 정의되고 있다. 네 가지 정의에 모두 ‘남(자)’이라는 성별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뜻을 더 추가하자는 것이 동성애 옹호 언어학자들의 주장이다. 5)자기를 낳거나 길러준 남자나 여자 중 한 명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신을 낳고, 길러준 남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는 자. 물론, 어머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임의로 추가한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며, 단지 사전적인 의미가 확장된다고 실효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예 동성애 부모를 칭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동성애자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과 별개로 보는 것이 옳다. 아동 인권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의 자식을 동성애자라고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수 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동성애자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동성애자의 자식들의 장래나 그들의 권리까지 빼앗아선 안 될 것이다. Y의 부모가 동성애자라고, Y 역시 동성애자라고 볼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아동들의 권리일지도 모른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편을 갈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아직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의 권리를 생각해볼 때다.
친구 아빠의 성별은 아이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친구와 언제, 어떻게 놀 수 있느냐이다. Y와 친구처럼 말이다. 결국,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일은 부모의 성 정체성을 구별하여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잘 어울려서 뛰놀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편견을 완전히 없앨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덜(!) 불편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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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6

 

사 랑 니

 

아동청소년문학 대표작가 이상권 신작 소설집

폭력이라는 이름 앞에 나약한 개체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

사. 랑. 니

 

책 소개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장애, 가난, 불륜, 낙태, 성폭력, 죽음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순수한 영혼들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저항!

 

『성인식』에 이은 이상권 작가의 두 번째 신작 소설집 『사랑니』. 총 다섯 편이 수록된 이번 작품집은 장애, 가난, 낙태, 죽음 등의 주제로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 날것의 현실에 생생하게 노출되어 있다. 성인들이 이런 세계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소설 속의 청소년들은 폭력의 당위에 대해 온몸으로 질문을 던지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용납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이에 저항한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길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집요한 자기 싸움의 기록이다. 작가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저희가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논쟁을 벌이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비록 서툴지만 끊임없이 생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개똥철학자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고 말한다.

 

네가 품고 있던 사랑니도 이렇게 아팠을까?

고통과 마주한 순간, 나는 네가 보고 싶다

“어디야? 지금 달려갈게.”

 

표제작 「사랑니」에서 끊임없이 주인공 진우를 괴롭히는 치통은 직‧간접적인 폭력으로 인해 나약한 개체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상징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고통을 참으며 기다려야 할 때가 많을 것이라는 할머니의 전언은 이 시대가 지배하는 폭력의 터널을 지나면서 체득해야만 하는 뼈아픈 교훈이다. 진우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니가 주는 치통을 참아내는 연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니가 주는 치통과 멀쩡한 생니까지 뽑아내는 고통을 이겨낸 후에야 진우는 비로소 낙태를 경험한 여자친구(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의 채널을 경유하고 나서야 관계적, 공감적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모든 통로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출산에 대한 가족들의 논쟁을 그린 「매운 떡볶이」, 정치화된 폭력의 현실을 나타낸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폭력을 치유하는 공간인 가족을 소재로 한 「신이 내린 안마사가 사는 집」, 나약한 삶의 태도를 과감히 버리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청소년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개 대신 남친」 또한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 청소년들은 폭력적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맞서고 아파하고 고민하고 저항한다.

 

차례

매운 떡볶이

사랑니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신이 내린 안마사가 사는 집

개 대신 남친

발표지면

해설

작가의 말

 

지은이 - 이상권

1964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 자연 속에서 뛰놀던 경험을 살려 동식물의 삶을 그린 생태 동화를 많이 썼다. 아동청소년문학 대표작가, 생태 동화작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일반문학과 아동청소년문학의 경계를 넘어 동화부터 소설까지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작품으로는 『성인식』, 『하늘을 달린다』, 『애벌레를 위하여』, 『난 할 거다』, 『발차기』,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싸움소』 등이 있다.

 

해설 - 오민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연구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역서로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다.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있다.

 

해설 중에서

이 세계는 가공할 만한 폭력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 폭력은 우리의 존재와 인간적 삶을 끝없이 위협한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가련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인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장애, 가난, 불륜, 낙태, 성폭력, 죽음이라는,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이 심각한 항목들을 어떻게 당위로 받아들일 것인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에게 당위의 작위를 주기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집요한 자기 싸움의 기록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두 손을 배 위에다 모아서 깍지를 끼고는 한껏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손은 더 떨렸다. 여전히 사랑니는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깍지를 풀고 배를 쓰다듬었다. 무엇인가 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니가 배 속에도 있는지 모른다. 지금 의사의 눈에 보이는 놈은 수많은 사랑니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진짜 우두머리는 내 배 속 아득한 곳에 숨어서 끝까지 버티라고 지령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 얼마나 아팠을까, 넌, 넌, 넌······ 자궁 속에 있는 사랑니를······ 아, 아, 아······ 난 한 번도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 네가 수술하러 가는 날까지, 내 앞에서 막 뛰어가는 너를 볼 때까지. 은근히 너를 미워하기도 했어. 왜 나를 그런 일에 끌어들이는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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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시간을 파는 상점

 

청소년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릴 디딤돌!

시간의 양면성을 재미있게 엮어낸 소설, 그 마법 같은 비밀은

 

작품 소개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영 작가의 『시간을 파는 상점』은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의 열다섯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지난해(2011년 연말)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응모작 중 단연 돋보임으로써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정된 작품이다. 당선작은 우리나라 청소년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고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 작품은 흐르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관념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놀랍도록 편안하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추리소설 기법을 살짝 빌려다가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는데, 그 흐름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은 물론이거니와 펼쳐지는 문장과 어휘의 선택은 청소년 독자에 대한 배려,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사유와 책임감이 느껴진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큰 의미가 있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하지 못하는 것, 그런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되새김질한 다음 자기만의 색깔을 입힌 훌륭함에 심사위원들은 우리 청소년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릴 디딤돌이라고 평했다.

 

스스로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절망의 시간은 희망을 속삭이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작가 김선영은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라는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상호 침투와 상호 연쇄, 우리가 보낸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사유할 때, 때마침 신문에서 예쁜 중국 여자의 사진과 함께 ‘제 시간을 팝니다’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또한 그때 한 아이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제 아들과 같은 또래였죠. 야자가 끝날 무렵 도난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에게 선생님은 ‘내일 보자’라는 말로 시간을 유예시켰던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밤사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날 스스로 죽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들한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냉장고 앞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그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결국 앞에 놓인 또는 더 멀리 놓일 시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꽃다운 아이들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발 죽지 마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다시 제가 생각하고 있던 ‘시간’과 교차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 사건은 강력한 실타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야기는 구성되었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여 4개월 정도 걸린 듯합니다. 쓰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살아 나와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연대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꿨으니까요.”

 

줄거리

주인공 온조는 인터넷 카페에 ‘크로노스’라는 닉네임을 달고 ‘시간을 파는 상점’ 을 오픈한다. 고대의 신 크로노스는 턱수염을 다보록하게 달고 있는 노인이다. 등에는 커다란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지만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하르페로 거세하고, 제 능력보다 뛰어난 아들이 태어난다는 말에 레아가 낳은 자신의 핏덩이를 심장부터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신이다. 시간의 경계를 나누고 관장하는 크로노스야말로 온조가 생각했던 물질과 환치될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의 신이었다. 시간을 분초 단위로 조각내어 철저하게 계산된 시간 운용은 반드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낳아야 하는 이 시대에 딱 맞는 신이었다. 훌륭한 소방대원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아빠의 못다 이룬 뜻을 이어받은 온조는 손님들의 의뢰를 해결해주는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 크로노스가 되었다.

 

시간이란 흐르는 것이지만, 흘러간 시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첫 번째 의뢰인의 닉네임은 ‘네곁에’. 온조의 옆반에서 일어난 PMP 분실 사건을 의뢰한다. 훔친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달라는 부탁. 작년 온조네 학교에서는 MP3 도난 사건이 있었다. 훔친 친구는 야자 시간에 바로 들통이 나고 말았고, 그 사실을 안 선생님은 내일 보자는 말로 시간을 유예시켜 버렸다. 선생님의 내일 보자는 그 말은 어떠한 협박보다도 더한 폭력이 되었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밤사이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MP3을 잃어버린 아이는 바로 전학을 갔고, 학교도 가족도 모두 이 사건을 덮어버렸다. 온조는 또다시 일어난 도난사건에 또 한 명의 친구가 그와 같은 죽음을 맞닥뜨릴까봐 몸서리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맛있게 식사를 해달라는 엉뚱한 의뢰이다. 물려받을 유산을 미리 정리하여 미국으로 이민 간 강토네는 결국 가정이 붕괴되기에 이른다. 아들 내외에게 유산을 정리해준 할아버지는 혼자서 자유롭게 세계 여행을 다니다 미국으로 아들내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시간, 한국에서 가족 모두가 돌아올 집을 지키던 할머니는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강토 아버지는 바쁘다는 이유로 죽은 어머니를 냉동고에 넣어 달라고 하고, 아들에게 분노한 할아버지는 아들을 검찰에 고소하고유학 비용을 포함한 정착금을 모조리 청구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강토는 결국 한국에 남기로 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독립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맛있게 식사하는 것이 꿈이었던 할머니의 소원을 대신하여 할아버지와의 맛있는 식사를 온조에게 의뢰한 것이다. 강토가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에게 마음을 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남편을 잃고 씩씩하게 온조를 길러온 엄마는 환사고(환경을 사랑하는 교사모임)에서 새 동반자를 만난다. 온조의 담임 불곰 선생님이 바로 그다. 불곰의 염려 가운데 시간을 파는 상점은 온조 개인 상점이 아닌 우리의 상점이 되어가며 더욱 단단해진다.

시간을 잡아두고픈 간절함으로 천국의 우편 배달부가 되어 달라는 의뢰, 자신의 친구가 되어 달라는 가네샤의 의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PMP 분실 사건으로 죽음에 이를 뻔한 친구가 밝혀지고 온조와 친구들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또다시 찾아온다…….

위기에 내몰리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답을 찾아가던 아이들은 깨닫는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시간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 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절망의 시간을 우리는 희망을 속삭이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온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용서하고 할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 온조를 초대한 강토와의 만남도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맡겨두기로 한다. 시간이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궁금하다…. 언제나 새롭게 맞이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인가.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심사평

심사평1. 이상권 (소설가)

이 작품이 우리나라 청소년문학 동네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서는 디딤돌이 될 수 있겠구나 확신이들었다. 우리 옛말을 잘 구사하면서도 요즘 청소년들의 언어를 적절하게 배합을 시켰다. 거기에다가 작가가 오랫동안 사유해서 토해내는 문장들이 조화롭게 배치가 되어 있다. 자기만의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유를 하였는지 알 수가 있었다.

 

심사평2. 박경장 (문학평론가)

『시간을 파는 상점』은 추리 기법을 차용해서인지 시작부터 눈길을 끌었다. 추리라는 숨김과 드러냄 전략이 잘 세워져 있고, 청소년 주인공을 내세워 다루기엔 만만치 않은 시간이란 주제를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다. 문장 하나하나, 사건들 하나하나에 부분과 전체 사이의 유기적인 짜임, 얽힘, 함의, 복선 등을 촘촘히 깔아놓은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무엇보다 문장이 깔끔하고 잘 다듬어져 있으며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사건 진행의 속도와 문장 호흡의 길이도 잘 어우러진다.

 

심사평3. 박권일 (문화평론가)

『시간을 파는 상점』은 다른 작품에 비해 압도적인 가독성을 보였다.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문장도 탄탄했을 뿐 아니라 작중 청소년들의 입말도 자연스러웠다. 극적 긴장감과 주제의식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끌고 나간 뚝심도 좋았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 소녀의 근사한 성장담이었다.

 

작가 소개

김선영

1966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까지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자연 속에서 사는 행운을 누렸다. 그 후 청주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학창시절 소설 읽기를 가장 재미있는 문화 활동으로 여겼다. 막연히 소설 쓰기와 같은 재미난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십대와 이십대를 보냈다.

2004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밀례’로 등단하였으며 소설집으로 『밀례』가 있다.

2011년 「시간을 파는 상점」으로 제 1회 자음과 모음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했다.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고 힘을 받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당선 소감

내 몸에 딱 맞는 옷, 청소년 소설 - 김선영

소설로 등단을 했다. 그것은 방황의 시작이었다. 소설집을 내고도 방황은 이어졌다. 소설이 과연 내게 맞는 옷인가, 때때로 물었다. 소설을 쓸 때 즐겁다기보다는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지없이 넓은 들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무변광야 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면 될 것 같았지만 막상 그 앞에 섰을 때의 막막함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때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 청소년 소설이다. 품이 딱 맞는 옷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 옷이 작다며 갑갑해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지금처럼 과감히 더 큰 옷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몸에 딱 맞는 이 옷을 입고 마음껏 놀아보리라 생각한다. 가파른 산도 오르고 파도치는 바닷가도 거닐고 고요한 호수도 걸으며 이 옷이 질릴 때까지 입어보리라 생각한다.

이번 작품을 시작할 때 스스로에게 몇 가지 주문을 넣었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 소설과 다르게 쓰자.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아보다는 나름의 자기 빛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철학을 녹여 넣어 청소년들이 쉽게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이러한 나의 고집이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카드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가 입은 그 옷이 참 잘 어울린다며 추임새를 넣어주고, 나의 고집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차 례 (심사평, 당선 소감, 수상자 인터뷰 수록)

첫 번째 의뢰인, 그놈

축 개업, 시간을 파는 상점

잘린 도마뱀 꼬리

크로노스 대 카이로스

지구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

어머니를 냉동실에 넣어주세요

천국의 우편배달부

자작나무에 부는 바람

가네샤의 제의

불곰과 살구꽃

일 년 전에 멈춘 시계

망탑봉 꼭대기에서 뿌려주세요

시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바람의 언덕

미래의 시간에 맡겨두고 싶은 일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심사평 : 이상권, 박경장, 박권일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당선 소감 : 김선영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 이상권,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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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전 용돈 없인 절대 안 웃어요!”

불현듯 스치는 사강의 차가운 무표정은 그녀가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고,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용돈을 줘야겠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그에게 애정이 담긴 선물이 아니라 돈을 줄 때만 아빠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분노와 슬픔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사강의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것이 눈동자 색깔이 다른 이복동생을 직접적으로 증오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아빠에게서 온 선물이 통장에 적지 않은 숫자로 찍힐 때마다, 사강은 엄마에게 다양한 물건들을 선물했다. 반지나 목걸이처럼 애인에게나 줄 법한 값비싼 선물일 때도 있었고, 베트남의 G7커피나 인도의 ‘히말라야’ 화장품처럼 특정한 나라에 가면 승무원들이 광적으로 사 모으는 물건일 때도 있었다. 

“고맙구나. 잘 쓸게.”

엄마에게 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사강은 언제나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빠가 주는 선물이에요.”

그것이 엄마에게 얼마만큼의 위로가 되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특별한 효도라는 점에서도.   


책을 보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결혼도 이혼도 그런 식으로 해치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의 남자가 일 년씩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천착했고, 그에게 스타일이란 패턴의 축적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가 미디어 아트를 선택한 것도, 이 분야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움에 열광하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작 시리즈’ 같은 말을 혐오했다. 같은 제목에 번호만 붙이는 것은 그의 성품과도 맞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아빠라면 그것은 1년이나 이어진 ‘연작’의 형태로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긴 시간을 투자해 견고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 치밀하고 조직적일 것이다. 

결국 사강은 과거에 헤어졌던 남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사강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난 후, 농담하듯 자신에게 이런 책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 명은 됐다. 

그들 대부분은 사강을 먼저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댔고, 백화점 브로슈어 첫 페이지에 나올 법한 선물들을 보냈고, 수컷이 보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추파를 던졌다. 연애가 시작되려면 이런 요란한 행동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사강은 소개팅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비행기에서 자신에게 반해 추파를 던지는 쪽이, “커피나 한잔!”을 과감히 외치는 쪽이 훨씬 건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본능과 직관이 발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적인 구애를 받는다. 사강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십 대 여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연애의 생태계를 이해했다. 일생 동안 한 번의 예외를 빼면 사강이 먼저 좋아했던 남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헤어지자고 한 쪽은 언제나 남자들이었다. 그녀는 늘 먼저 차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가 차이는 쪽이 아니라 찬 쪽이라고 생각할걸?”

친구인 윤희는 그것이 늘 윤사강 연애 역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점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명의 남자들이 사강의 눈앞을 휭휭 지나갔었다. 

승무원이었던 우혁은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고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섹스할 때마다 사강에게 “좋았어?”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묻기 전에 사강이 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사강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우혁과의 섹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섹스가 끝난 후 귓속에 속삭이는 ‘좋았어?’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관제사였던 경완은 취미로 시작한 직장인연합 합창단 베이스 파트의 독보적인 멤버였다. 그러나 사강은 곧 그 목소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활주로가 아닌 침대 위라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데이트한 몇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뀐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지 못했다.  

책을 받는 순간 누구보다 사강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한정수였다.   

그는 우혁, 경완과 다르게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유일한 남자였다. 

한정수는 그녀가 먼저 사귀자고 했던 최초의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최초이며 시작인 유일한 남자.  



사람들은 한정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항공사 직원들과 ‘외항사’라 부르는 외국 항공사 사람들까지도 그를 ‘H’라고 불렀다.

H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는 혼자 산책했고, 혼자 커피를 마셨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다. H의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는데 세상의 소음만큼 싫은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밥 딜런이나 산울림 같은 옛날 가수들의 음악만 들었다. 그가 ‘존 레넌’의 <Hey, Jude>를 흥얼거리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목격자 이외에 한 명도 없었다. 그의 방 어딘가에 날렵하게 잘 빠진 생채기 많은 녹색 펜더(기타)가 있다는 사실을 항공사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H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기타리스트였고,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조앤 바에즈’라는 사실 역시도. 

그는 언제 어디서나 구겨지지 않은 제복을 입었고, 잘 단련된 종아리가 드러난 반바지와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입고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도록 공항 안에 있는 조깅 트랙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가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달리는 걸 멈출 때는 피트니스 센터에 후렴이 반복되는 시끄러운 후크송이 나올 때뿐이었다. 

H에 대해서라면 믿기 힘든 소문들이 많았다.   

가령 그가 어느 날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괴소문이나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같은 게 그런 예였다. 그가 회장의 첩자라는 소문은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H는 소문에 대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정점에 있는 건 그가 지키기 힘든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란 사실이었다. 그가 준수하는 원칙은 음반으로 치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클래식’이었지만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환경에 노출된 항공업계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십오 년 동안 직접 태엽을 감아야 하는 오래된 기계식 오메가 시계를 차고, 세 시나 네 시가 아니라 세 시 십일 분이나 네 시 이십육 분처럼 정확함을 요구하는 시간에 비행팀 전체를 이끌고 브리핑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철저한 시간 엄수는 그가 요구하는 승무원의 첫 번째 자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코어북에 매번 최고 기록만을 새겨 넣는 프로 야구선수 같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어떤 타격 폼을 유지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장타자 같았다. 그는 무엇보다 원칙을 위해선 반복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스스로 고집하는 몇 가지 원칙들 때문에 그의 비행기는 젊은 부기장들에겐 존경과 동시에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일부 사람들은 H를 싫어했다. 

어떤 부류는 광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짙은 회색빛 은발과 음울한 눈빛을 가리는 보잉 선글라스는 H를 늘 비밀의 언저리에 있는 인물처럼 보이게 했다. 누구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인사과에 기록된 그의 생년월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는 결혼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와이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행을 마친 사강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픽업 버스를 기다리는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낡아 보였지만 잘 관리된 물건이 그렇듯 시대를 초월한 기품이 있었다.

사실 사강이 그를 처음 본 건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쪽 손등의 상처였다. 

피부 위에 굵은 실처럼 올라와 있는 그 상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였다. 그런 상처는 그의 손등에 한 줄 더 그어져 있었다. 사강은 그 옛날 백과사전 위에 자를 대고 반듯이 밑줄을 긋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강은 그 상처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날 밤 잠들기 직전에도 똑같은 장면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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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소년, 노하라 신노스케는 명랑했다

환경과산모신문 | 기사 입력 0000년 9월 8일

 

8년 전 전국적으로 이상한 문자메시지와 메일이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된 적이 있었다.

임산부, 노약자, 특히 심장 약한 분들은 절대 보지 마세요!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된 이후 한 임산부가 아기를 출산했는데, 안구의 흰자여야 할 부분이 검은색이고, 검은 눈동자 대신 새하얀 눈동자로 태어났대요. 심지어 이 신생아는 코도 없고, 머리는 비정상적으로 커서 몸과 머리의 비율이 거의 일대일이라네요. 무서운 방사능 피폭의 공포가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사진도 첨부합니다.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이 비정상적인 신생아의 출생이 사실이라고 즉각 확인한 뒤, 공식 발표를 했지만, 기형아의 출산은 방사능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밝혔다. 물론 일본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노하라 신노스케’라는 이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대신 ‘피폭꼬마’ 혹은 ‘피폭소년’이라고 불렀으며 이 아이를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의 상징적 인물로 여겼다. 심지어 『뉴욕 타임스』 아시아판의 표지 모델로까지 거론되었다.


산부인과 전문의 오○○ 원장(둥근산부인과, 경북 문경시 소재)은 기관지 회원들과 함께 지난 8월, 후쿠시마에 가서 피폭소년 노하라 신노스케를 직접 만나고 왔다. 오 원장은 “솔직히 신노스케 군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는데 신노스케 군이 명랑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행복해했다.”고 전했다. 언론에 알려진 것과 같이 신노스케 군의 머리는 과도하게 컸고 넓적했으며, 코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안구의 색도 비정상적이었지만, 행동이나 말투는 여느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전혀 별다른 점이 없었다고 한다. 진한 눈썹과 성적인 농담을 즐기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신노스케는 동갑내기들보다 어른스럽게 생각하며 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이다운 천진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액션가면>과 <건담> 로봇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네 살 어린 여동생 히마와리 양을 짓궂게 괴롭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 원장은 신노스케 군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울라울라(일본 애니메이션 <액션가면>의 주제음악)’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춤까지 췄다고 말하며 웃었다.
신노스케 군이 비정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명랑하게 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주변의 도움과 일본 정부가 펼치고 있는 ‘무관심’ 캠페인 덕이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수년 전부터 기형아에게 무관심하자는 이른바 ‘무관심’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 캠페인은 기형아의 외모에 무심하자, 그들을 빤히 쳐다보지 말자, 그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지 말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는 이미 신노스케 군 정도의 비정상적인 외모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신노스케 군의 아버지 요시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신노스케 군이 다니는 학교에는 자신의 아들보다 외형적으로 훨씬 심각한 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신노스케처럼 다른 장애 학생들도 별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내에서도 잘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노스케 군의 이러한 명랑한 모습을 조만간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신에이동화와 아사히 TV가 신노스케 군의 이야기를 <Crayon Shin Chan>이라는 제목의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시 방영 예정이다. 향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계획도 있다고 한다.

지난달 8일 둥근산부인과에서 기형아가 태어났는데 당시 오 원장은 신생아의 부모에게 애석함을 전혀 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 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솔직히 기쁜 일이라고 할 순 없지요. 아이의 코가 없었거든요. 콧날이 서 있어야 할 곳이 반질반질했어요. 하지만 콧구멍은 시원하게 두 개가 잘 뚫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크게 슬퍼하거나 낙담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냄새도 잘 맡을 수 있고, 기능적으로는 완벽한 상태였어요. 단지 콧대가 없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코가 없는 부위가 아주 매끈했기 때문에 미학적으로도 최악이라곤 할 수 없었어요. 매끈한 얼굴에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이는 평균치보다 약간 작은 미숙아였지만, 코 빼고는 다 정상이었어요. 특히 성기의 경우는 평균치보다 훨씬 큰 편이었어요. 심장도 팔딱팔딱 잘 뛰었고, 산모도 아주 건강했어요. 코 없는 신생아를 부모한테 보여주면서 일부러 이렇게 말했어요. ‘아드님 코 좀 보세요! 좀 작네요. 아니, 자세히 보니 아예 아무것도 없네요. 하하하. 하지만 고추 보세요. 정말 큼직하죠? 하하하. 콧살이 다 고추로 갔나 보네! 아주 장군감입니다, 장군감! 이놈 큰일 낼 놈이네! 하하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코가 없이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은 Y라고 했다.
Y의 부모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에는 큰 충격을 받고 상심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이제는 아들의 기형을 소재로 농담까지 한다. 그래도 입 없는 것보다는 코 없는 게 낫지 않겠냐며. 고추는 제대로 달렸으니, 남자구실을 하지 않겠냐며. 피폭소년보다는 Y가 훨씬 잘생겼다는 오 원장의 말에 Y의 부모들은 ‘물론’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그리고 신노스케보다 훨씬 더 명랑한 아이로 키울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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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몽상이 실험적 글쓰기를 만나다!

60여개의 신문기사로 모자이크된 특이한 가담항설

끝없이 갈라지는 패러디의 향연

아이러니와 풍자를 넘어서 가슴을 움직이는 강렬한 페이소스

농담의, 농담에 의한, 농담을 위한 진실의 잔해들

 

 

■■■ 책소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원래가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의 변주일 뿐이다. 완전히 처음 보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생경한 이야기. 소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문학적 상상력은 그러한 가설을 늘어놓으며 풍요로운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입증된다.

강병융은 장편소설 『상상인간 이야기』, 소설집 『무진장』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과 낯선 담론의 구현을 추구해왔다.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는 그가 6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로, 독립적인 60여 개의 기사와 9개의 만평이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최근 들어 젊은 작가들에 의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중간문학이 선보이고 있지만 이 작품처럼 내용과 형식이 과감한 파격을 취한 문학은 없었다. 패러디와 키치적 유머로써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문학적 시도인 이 작품은 신선한 충격과 사고의 전환을 맛보게 해줄 것이다.

무수한 조각들로 맞춰지는 하나, 그리고 수십 개의 이야기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는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듯 보이는 접근방식으로 기사, 편지, 사전항목, 그림 등 다양한 형식들을 종횡무진 나열하고 배치하는 특이한 구성을 통해 ‘Y’라는 인물의 삶을 퍼즐을 맞추듯 재구축하고 있다.

작가는 파편적인 이미지들, 단편적인 사건들, 감정의 단면들의 우연적 배치와 필연적 연결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의 ‘정체성’이 구성되는가, 또한 어떻게 하나의 ‘파국’이 완성되는가 하는 문제를 가벼우면서도 심도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우선 ‘Y’라는 인물을 하나의 기표로 보고 그 동일한 기표를 각각의 기사들 안에서 전혀 다른 맥락에 놓는다. 그리고 그러한 상이한 맥락을 통해 동일한 기표는 시시각각 스스로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또한 주변을 변화시킨다.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안에서 ‘Y’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고 와해되는 과정이, 그의 아버지 ‘강모’의 소설이 완성되는 과정, 그의 어머니 ‘장민영’의 미술작품들이 확립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같은 내용의 드라마로 완결되는 과정과 평행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그와 상통한다.

좀 더 세부적으로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를 들여다보면 몇 가지 종류의 기사 수십 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기사들은 따로 떼어 놓고 봤을 때 하나의 독립되고 완결된 서사를 이룬다. 그리고 그 단락 사이사이에 안팎 없는 이야기들은 한 축으로는 각각의 기사가 꼬리를 물듯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육십여 개의 기사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결국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는 일견 파편처럼 그려진 단면들이 어떻게 하나의 삶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거꾸로 되묻고 있는 작품이다.

농담의, 농담에 의한, 농담을 위한 진실의 잔해들

                            - 희극의 그릇에 담긴 비극의 요리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는 기사의 형식으로 유행의 패러디와 페티시, 광고, 문화 · 사회의 비판적인 시선을 폭로하고 있다. 코 없이 태어난 한 남자가 결국엔 스스로 거세를 선택하게 된다. 암울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시종일관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재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친숙한 세계의 이야기 속에 새로운 세계가 끼어들면서 비틀어 질 때 느끼는 짜릿한 일탈. 익숙한 것이 생경해지는 순간 농담의 매력은 극대화된다. 농담은 삶을 반영하는 허구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전할 수 있는 것들을 향한다. 허구와 현실이 뒤섞여 어디부터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 우리는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서로 전혀 관계가 없게 보이는 여러 뒤섞인 사실들 안에서 하나의 길을 내고 그 사이에 드러나는 몇 가지 진실들, 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처음의 낯설음을 넘어서 Y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들려오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를 통해 잡스러운 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세계가 어떤 허구적 진실성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병융의 잡학다식한 지식과 농담과 장난의 아슬아슬한 경계의 시도가 유감없이 발휘된 이 작품은 하나의 풍자 문학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 추천사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는 거짓말을 반 스푼만 보태면 매 페이지마다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절정과 황홀로 가득하다. 기발하고 해괴한 이야기의 화소(話素)들은 희유하기 이를 데 없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지적 문화적 성감대를 자극한다. 소설 속의 분절된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합종연횡한다. 강병융은 폴 오스터의 동물적인 서사 직조 능력과 코맥 매카시의 묵시론적인 위트가 행복하게 만났을 때, 어떤 소설이 쓰여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온갖 미디어처럼, 수많은 가상의 페이지터너(Page Turner)들이 나타나 책장을 넘겨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사에 대한 몰입도가 가히 폭력적인 수준인데, 이 소설은 21세기 한국소설의 사회적 감수성이 앞당겨 길어 올린 인상적인 성취인 동시에 향후의 풍속을 알려주는 풍향계다.

- 김도언(소설가)

강병융의 소설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소설을 뜻하는 옛말인 가담항설(街談巷說)을 떠올렸다. 60여개의 흥미로운 신문기사로 모자이크된 특이한 가담항설.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결코 물리지 않는 저잣거리의 이야기들. 그러나 우리는 강병융이 펼쳐놓은 가담항설을 희희낙락 정신없이 읽어나가다가 어느새 태어날 때부터 코가 없는 주인공 Y씨가 살아온 삶의 연혁(沿革)을 재구성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웃기고 애처롭고 화나고 슬픈. 독특한 소설적 실험을 선보인 작가 덕분에 독자들은 적어도 한 권 값의 소설로 두 편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 복도훈(문학평론가)

■■■ 줄거리

Y는 코가 없이 태어났다. Y의 아버지는 유명 소설가로 Y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Y의 엄마와 이혼을 한 뒤 새로운 사람(남자 파트너)을 만나 가정을 꾸린다. Y는 비록 코가 없는 장애아지만 아빠와 아마(아빠의 새로운 파트너의 명명)의 사랑을 받으며 티 없이 자란다.

초등학생이 되기 몇 달 전, Y는 운명의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D. Y는 그녀를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게 되고, 그 뒤로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나비들이 날아다닌다고 느낀다.

코가 없는 Y에게 학교생활이 평탄할 리 없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따돌림이 시작된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Y를 향한 사람들의 삐뚤어진 시선과 동급생들의 괴롭힘은 끊이질 않는다.

Y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야구와 책읽기, 그리고 유일한 친구 이상기. 그 역시 뚱뚱하다는 이유로 일진들에게 늘 당했기 때문에 둘은 쉽게 소통하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정을 키워간다.

Y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대학생활은 Y의 환상과는 크게 다르고, 차별과 따돌림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현실을 깨달은 Y는 군대에 가길 결심하지만 이마저도 좌절되어 잉여처럼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첫사랑 D에 대한 연정을 간직해오던 어느 날, Y는 노래방에서 D가 도우미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노래방에 간다. 하지만 Y의 못생긴 얼굴을 본 D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차갑게 외면하며 나가버린다. Y는 그 사건으로 크게 낙담한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Y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소녀를 보고 우발적으로 성폭행을 저지른다. 그 때문에 Y는 감옥에 가게 되고, 죄책감으로 감옥에서 화학적 거세를 자청한다.

그런데 성실한 생활을 하며 모범수로 일찍 출감한 Y는 어느 날 노래방에서 성기가 절단된 채로 발견된다.

강병융

197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학사, 석사, 박사 수료.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박사(러시아문학).

2002년 『정신과표현』 신인작품 공모에 「낙찰」이 당선되어 등단. 연작소설 『상상인간 이야기』(2005), 소설집 『무진장』(2006), 연구서 『자먀찐의 “우리들” 연구』(2010, 러시아어) 출간. 2009년 제8회 한국문학 번역 신인상 수상(노어권). 현재 명지대(소설창작), 한남대(소설창작), 뿌쉬낀하우스(러시아문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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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아빠는 수집광이었다. 

그는 오디오에 미쳐 집 안을 온통 쌀 궤짝처럼 생긴 괴상한 스피커로 가득 채우곤 했는데, 그의 수집벽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시계, 카메라, 초판본이나 장정이 독특한 희귀본 고서 같은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아빠의 수집 욕망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한 여자들이었다. 육감적인 일본 여자, 눈동자가 유달리 검은 초원의 몽골 여자, 몇 달 동안 햇빛 한 번 쏘인 적 없어 보이는 옅은 금발의 창백한 스웨덴 여자…….

어린 시절부터 사강은 늘 귓속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음을 들었다. 

그 소음들 속에는 엄마의 울음소리나 아빠의 웃음소리가 괴상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강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불시에 부모의 이혼을 맞이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기어이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집념을 키우게 된 건, 아홉 살 윤사강이 택한 최악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엄마의 양육 방식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사강은 말하는 법보다 말하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아프다고 울기보단 스스로 약국에 가는 편을 택했다. 물론 그녀가 아주 많은 말을 하는 예외적인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말을 참았던 부작용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라는 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녀의 말끝에는 잘린 전선처럼 생긴 마디들이 드러났고, 그 마디 끝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보기엔 힘든 짓눌려 너덜대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사강은 너무 말을 안 하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주변의 어른들을 걱정시키는 아이였다. 

그럴수록 엄마는 사강을 더 보호하려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사강의 신경증을 두려워했다. 엄마는 ‘하지 마!’란 말을 달고 살았다. 더러우니까, 위험하니까, 힘이 드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는 사강이 커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고기를 사랑하는 편이 더 쉬웠다.  

사강은 수족관에 있는 엔젤 피시의 밥을 직접 주었다. 엔젤 피시에게 ‘꼬마’란 이름을 지어준 것도 사강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물고기 밥은 하루에 딱 10알만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강은 자신이 배가 고플 때마다 꼬마에게 매번 한 움큼씩 먹이를 더 주었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처럼 사강은 물고기와 우정을 나누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손등을 꼬집은 일, 맨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자신의 치마를 들춰낸 일도 꼬마에게만은 말했다. 그녀는 물속을 움직이며 말없이 뻐끔거릴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꼬마의 얇고 투명한 지느러미를 사랑했다.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불룩해지는 꼬마의 입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리를 나풀거리며 헤엄치던 꼬마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이 수영단에서 막 배영을 배우던 시기였으므로 사강은 꼬마가 수족관 안에서 배영을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강은 배를 내보인 채 30분이나 둥둥 떠다니는 꼬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꼬마가 죽어버린 후였다. 

“잘 기억해둬. 사랑을 너무 많이 주면 이렇게 배가 터져 죽어버려!”

꼬마가 배를 보이며 뒤집혀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때, 플라스틱 뜰채로 물고기 사체를 건지며 엄마가 말했다. 사강은 차라리 아프게 손바닥을 맞고 싶었다. 물고기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면 벌을 받아 끔찍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얼굴 더러워지니까 울지 마라.” 

“…….”

“넌 이제 꼬마가 아니야.”

엄마는 꼬마와 똑같은 금붕어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강에게 더 이상의 물고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너도 곧 열 살이야. 알겠니?”

두 손의 주먹을 꼭 쥐고 있던 사강은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점차 누군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말하지 않게 되자, 점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사강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재능을 잃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아주 유능한 회사원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불만 없이 자족하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그것은 거꾸로 보기 드문 재능으로 승화되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짜거나 싱겁다고 고래노래 소리를 지르며 매니저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사강은 경외감을 느꼈다. 비행기에서 난동을 피우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겠다고 발작을 일으키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커피가 뜨겁지 않다고, 샐러드가 차갑지 않다고, 기내 에어컨이 너무 세다고, 약하다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격정적인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고 만나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사강이 잃어버린 승객의 콘택트렌즈를 찾아주고, 보드카를 생수병에 넣어 몰래 반입한 시끄러운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하고, 불편한 자기 자리 대신 텅 빈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 승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고객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스웨덴 여자와 살며 눈 푸른 이복동생을 낳은 아빠에게 뭘 기대한단 말인가. 지금의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딸을 낳은 엄마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올해의 스튜어디스 상’을 두 번이나 탄 사강이 뛰어난 승무원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녀의 서비스는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자연스러웠고,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러나 사강은 점점 비행기 타는 것이 두려웠다. 비행기를 타면 가슴이 죄어오고 숨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는 자주 주먹으로 흉곽 부위를 내리쳤다. 과호흡이나 공황장애 환자를 위해 기내에 설치된 산소호흡기를 떼서 입에 대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그것이 수시로 바뀌는 고도나, 헤어 제품으로 애써 고정한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조여 맸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란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비행기 조종사에게 뜻하지 않은 고소공포증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까. 도서평론가에게 불시에 난독증이 생겼다면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그녀의 일상을 점점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강은 신발장을 활짝 열었다.

상자 속에서 네 개의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 중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독일어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사강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사강은 혐오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곁에 두지 않을 권리라면 그녀는 마음껏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책들, 『슬픔이여, 안녕』은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


책은 대부분 기념일이나 기념일 전날 도착했다.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열흘 전, 생일, 여름휴가 시즌에도 책이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기념일’인지 알 수 없는 평범한 날 도착했다. 네 권의 책이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이 걸리지 않았다. 책에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선물을 보내진 않는다. 

사강은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았다. 패턴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이런 선물은 사강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습작기 학생이 쓴 플롯 없는 엉망진창인 추리소설 같았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첫 번째 일본어판 『슬픔이여, 안녕』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다. 상자에는 교토를 상징하는 황궁이 그려진 우표가 나란히 두 장 붙어 있었다. 사강은 일본어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본어라면 아주 조금 말할 수는 있었지만, 한자를 제외한 일본어를 읽을 순 없었다. 



가로가 아닌 세로로 길게 늘어선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강은 이 책이 낯설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도착한 상자 속에는 스페인어 판 『슬픔이여, 안녕』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발신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스탬프가 택배 상자 위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크리스마스 열흘 전에는 이태리 피렌체에서 『Boungiorno Tristezza』가 날아왔다. 

사강의 생일 날, 베를린에서 날아온 책에는 『Hallo von Sorrow』라는 소설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매번 사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간대가 전혀 다른 낯선 도시를 배회하며 자신에게 책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그 사람의 손가락 지문과 그림자가 이 낯선 책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 책들을 읽으라고 보낼 리 없었다. 

생일에는 코끼리나 주술사가 그려진 실크 스카프와 함께 ‘사랑하는 내 딸’로 시작하는 엄마의 축하 카드가 날아왔다. 매년 같은 생일 축하 문장과 다른 패턴의 스카프를 보내는 것이 엄마의 인사법이었고, 스카프가 들어 있던 오렌지색 박스를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이 사강의 생일날 아침 풍경이었다. 하지만 의문의 상자가 도착하기 시작한 후, 생일은 축하의 의미보단 이번에는 과연 어떤 도시에서부터 어떤 언어로 번역된 책이 날아올지를 추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강은 파리에 사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태리에 간 아빠가 피렌체를 떠돌다 두오모 근처의 헌책방에서 충동적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사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딸의 이름을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으로 지었던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사랑의 표현이 동명 소설가의 책을 보내는 일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사강에게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준 어떤 선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사강 자신이었다. 그는 딸에게 선물할 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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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


윤사강이 날짜변경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열 살 때였다. 

출판사에서 산 두꺼운 전집과 사전을 거실 안에 들여놓는 게 집 안의 품격을 유지한다고 믿는 세대에 태어난 아이는 잘못 들다가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발톱 하나쯤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닌 전화번호부 두께의 백과사전을 제일 친한 친구로 삼았다.

백과사전은 이혼한 부모님의 유물처럼 남겨졌다. 그것은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처럼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먼지를 털어주고, 찢어진 귀퉁이를 정성스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주는 정도의, 말하자면 ‘보관’이란 단어를 쓸 만한 물건이 되었다.   

아빠가 부재하던 유년 시절, 사강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리한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책이라고 믿기 시작한 엄마가 강박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세계명작전집들과 거실에 놓인 거대한 사전의 영향으로 그녀는 오래된 책을 뒤적이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찾아보기 좋아하는 흔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강은 늘 헬로 키티가 그려진 ‘10센티미터 자’를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에 연필로 반듯하게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마주친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녀는 귓속에 그 단어들을 하나둘 숨겨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살이 되던 여름, 동아 백과사전 속에서 ‘날짜변경선’이라 지칭되어 있는 단어와 마주쳤다. 

 

날짜변경선: 북극과 남극을 이어 두 지역의 역일(曆日)을 임의로 구분하는 가상의 선. 본초자오선인 그리니치 천문대의 180도 정반대쪽 태평양 한가운데(경도 180도)에 동서로 나뉜 국제 날짜변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 기준선을 넘나들 때마다 하루를 가감하게 된다. 즉 이 선을 서에서 동으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늦추고, 동에서 서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빨리한다. 날짜변경선은 태평양의 중앙부를 지나 대부분은 바다의 영역에 있어, 섬이나 육지를 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즉 동일 시간대에 속한 나라가 날짜가 달라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동일 지역으로 묶어, 일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그어져 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변경선은 그녀가 사는 지구에 존재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하늘 위에서 바쁘게 시계를 ‘풀었다 조였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열 살 윤사강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투명한 날짜 경계선 위에 둥둥 떠서 시계태엽을 감고, 풀고 다시 조이는 사람들을 그녀는 상상했다. 

만약 어제와 오늘의 경계선 위에서 한쪽 발은 어제에, 다른 한쪽 발은 오늘에 닿아 있다면 지금의 나는 어제를 사는 걸까, 오늘을 사는 걸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강은 사전을 펼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슬픈 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이 아닌 ‘어제’의 날짜 경계선 위에 서 발걸음을 옮기면 거짓말처럼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후회가 되어 눈물처럼 흐를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강은 날짜변경선에 단박에 매혹 당했다.  

어제 누군가 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날짜변경선에선 오늘이 어제가 될 것이므로 고통스런 불행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강의 지구엔 이런 ‘마법의 선’이 존재했다. 블랙홀처럼 시간이 빨려 들어가는 그 ‘구멍’ 속을 사강은 꼭 자신의 힘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날짜변경선을 보려면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강의 미래가 결정됐다. 어린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비행기 승무원은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교수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단어 같았고, 집과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열 살 소녀의 머릿속엔 고향을 타향처럼 느끼는 외로움이 자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비행 승무원이 된 후, 윤사강이 탄 에어버스 330이 지구의 날짜변경선 위를 가뿐히 날아오르던 순간, 사강은 주먹을 쥔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피아노 줄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경계선이 몸 안 여기저기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지문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날은 사강의 생일이었다. 

태평양의 중앙부, 경도 180도의 자오선,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가 수만 마일 너머 날짜변경선 위를 날고 있을 때, 사강은 눈을 감고 자신의 생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빗금 위에 걸쳐져 사라지는 광경을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 사이로 푸른 장화를 신은 날짜 경계선의 정령들이 시계태엽을 빠르게 감고 푸는 모습이 보였다. 180도의 서경 쪽은 180도의 동경 쪽보다 하루 늦게 되는 것이므로 이제 그녀의 생일은 가볍게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짙은 구름들로 한껏 부풀어 오른 어둠 위에 거대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내식과 기내 면세품 판매가 끝난 비행기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에어버스 330의 길고 좁은 복도의 램프 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승객들은 잠들어 있었다. 

사강은 1등석에만 서비스되는 모엣 샹동 샴페인의 기포를 바라보았다. 옅은 복숭아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차갑게 와 닿았다. 그녀는 경계선 위에 놓여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생일을 향해 속삭였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구나.”

날짜 경계선을 알게 되던 열 살의 기억들이 샴페인 기포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보글거리다 톡톡 터져 나왔다. 사강은 그 어둠 속을 뒤로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어제를 바라보았다.


*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다시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불안정하지만 몇 년 동안 반복되면서 어느새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한 사강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집 앞에 의문의 상자가 놓이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처음 그 상자는 신화나 성경에 등장하는 버려진 어린 아기처럼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밤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쏟아지는 햇볕에 찔렸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왔다. 사강은 무심코 바닥에 놓인 상자를 어린 아기같이 번쩍 들어 올렸다. 상자를 흔들자 이리저리 물건이 상자 모서리에 부딪히며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강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책 한 권 들어 있었다. 사강은 그 책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현관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책장을 들춰보지 않은 건 그것이 외국어로 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로 써진 책 말이다.  


*  

                                   

이장희의 노래 <슬픔이여 안녕>은 ‘외로운 내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고 떠나간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로 시작한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으로 변해버려

떨어진 낙엽처럼 멍이 들고 말았네

흩어진 꽃잎처럼 조각난 추억들을

나 홀로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하려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도 이젠 그만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사강이 이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된 건 반복되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그 순간이었다. 적어도 사강의 기억에 엄마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던 어렴풋한 기억도 났다. 마침내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해냈다.   

“아빠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어. 태어나기도 전에 넌 사강이었지. 아들이었어도 네 이름은 윤사강이었을 거야.” 

고민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만약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괴테나 카프카였다면? 자신의 이름이 윤괴테나 윤카프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됨으로써 부모를 저주하는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짓이었다. 

사강은 20대의 아빠를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 뛰어난 청년으로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국제적인 미술상을 받아 신문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인을 이혼녀로 만들었다. 몇 년 후엔 누구도 원치 않는 이복동생까지 안겨주었다. 그와 똑같은 눈매를 한 금발의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장아장 쫓아오는 게 자신이 자주 꾸는 악몽의 도입부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건 이토록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자에겐 아빠가 될 권리도 없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부모가 헤어진 아이들이 그렇듯, 사강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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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5부.  B747-400 



2009년 일본의 젠니쿠 항공사는 승객들에게 비행기 탑승 전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올 것을 권고한 적이 있다. 승객들의 소변 무게를 줄이면 이산화탄소와 연료의 소모를 줄여 지구 환경 보존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항공사 측의 의견이었다. 

같은 이유로 승무원들의 플라이트 백 무게를 줄이라는 회사 측 공문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공문이 나가기 전,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승무원들이 승진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론은 하나야. 마르고, 팔 길고, 여자보다 힘센 게이가 앞으로 항공업계를 장악할 거야! 키 작아도 팔만 길면 승객들 짐쯤이야 선반 위에 쉽게 밀어 넣을 수 있잖아? 너, 뚱뚱한 게이 본 적 있어? 난 없거든.”

첫째와 둘째 아이를 동시에 임신했던 입사 동기 윤희는 자신의 뚱뚱한 배를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었다. 

항공사에는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로드 마스터’라는 전문적인 직업이 존재한다. 비행기에 승객이 탑승하면 로드 마스터는 비행기의 ‘웨이팅 밸런스’를 체크해 승객의 짐과 화물을 나누어 배분하고 파악한다. 짐을 앞쪽에 실을 것인지, 뒤쪽에 실을 것인지에 따라 비행기의 이착륙이 달라지기도 한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비행기의 균형을 위해 승객의 좌석 위치를 바뀌는 경우도 있다. 보잉 777이나 에어버스 380처럼 거대한 비행 물체가 하늘로 떠오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사강은 균형을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런던에서, 모레는 상하이에서 뒤집힌 낮과 밤을 맞이해야 하는 게 일상이라면 균형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뿌리내리고 살려면 말이다. 사강은 십 년째 같은 몸무게를 유지했다. 잠들기 위해 똑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 같은 브랜드의 샴푸와 린스를 쓰는 것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만약 그녀의 인생에 ‘로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지금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사강은 공항 카페 라운지에 앉아 이륙을 준비 중인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어릴 땐 비행기를 바라보면 어딘가 자유롭게 떠나는 보헤미안의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하지만 승무원으로 입사한 후 한동안은 에어버스 330의 꼬리를 바라보면 ‘반 냉동 상태의 기내식은 160도 이상의 오븐에서 이십오 분 데운다’ 같은 공식이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새 떼들을 보면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승무원이 된 후엔 비행기 프로펠러 속으로 그것들이 빨려들어가거나 부딪혀 일어나는 ‘버드 스트라이크’ 같은 비행 사고가 먼저 떠올랐다.     

승무원이 된 후, 어느 도시에 가도 감흥이 십 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도쿄는 서울과 비슷하고, 스위스는 독일과 비슷해 보였다. 프라하는 로마와 비슷해 보이고, 세부는 발리와 비슷했다. 어떤 도시가 어떤 도시와 비슷해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 끊임없이 “어디 가니?”라고 묻는 증세를 승무원들은 ‘항공성 치매’라고 불렀다. 항공성 치매의 가장 안 좋은 점은, 더 이상 어떤 아름다운 도시에 가도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로모 아냐?” 

윤희가 말했다.  

“너 비행할 때 카메라도 가져가니? 난 잠자느라 호텔 밖으론 나가지도 않는데. 보기보다 낭만적이다, 윤사강. 입사 칠 년 차가 이럴 수도 있구나.” 

사강은 막 도쿄 비행을 마치고 활주로가 보이는 에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치즈가 들어간 파니니를 먹으며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는 성인 어른의 것이라기보단 조카에게 선물로 주기에 적당한 장난감처럼 보였다. 

“로모가 뭐야?”

사강이 말했다. 

“로모 몰라? 러시아에서 만든 카메라잖아. 나 이 카메라 좋아하는데.”

“왜?”

“싸잖아. 10만 원도 안 할걸?”

윤희는 사강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빼앗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로모, 색감이 되게 독특해. 사진을 찍으면 탈색된 것처럼 뿌옇게 날아가버리거든. 파스텔 톤이 된다고. 그래서 이 카메라만 고집해서 쓰는 로모 마니아도 있어. 근데 너, 필름 카메라는 좀 불편하지 않아? 현상소 찾는 것도 일이잖아. 난 되게 귀찮던데.”

“필름 카메라라구?”

카메라를 든 채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카메라 뚜껑 열면 필름 넣는 곳이 있을걸? 로모는 디지털 아니잖아.”

“필름이 없으면 이 카메라 쓸 수 없는 거니?”

“당연하지. 요즘 전문가들 빼고 누가 필름 카메라를 쓰겠냐? 디지털처럼 당장 확인해볼 수도 없고, 잘못 찍어도 지울 수도 없고, 현상하는 데 돈 들고. 그나마 현상소도 별로 없잖아.”

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사강의 머릿속에 ‘무용지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놓고 온 기념품을 가져갔을 사람이 느낄 당혹감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를 모르면 읽을 수 없는 책과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카메라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이유로 비틀즈의 <ABBEY ROAD> LP판을 선물해줬다 해도 만약 LP를 걸 턴테이블이 없다면 제아무리 값비싼 희귀 앨범이라 해도 역시 별 소용 없는 거 아닐까.  

사강은 로모 카메라를 바라봤다. 사강은 필름 카메라를 써본 적조차 없었다. 카메라에 필요한 필름을 사고, 그것을 카메라 안에 끼워 넣고, 필름 현상소에 가서 사진을 인화하는 일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필름 어디서 팔아?” 

“모르겠어. 필름 사본 지 하도 오래돼서.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팔지 않을까? 혹시 공항 안에 현상소가 있었나 모르겠네?”

윤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사강 역시 길거리에서 도저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동창을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실연을 당하고 ‘차차차’나 ‘살사’처럼 격정적인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실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실연 후 사표를 던지고 스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탄 채 지구 반대편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영화에서 우연히 본 가우디의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에 반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는 사람도 있다. 

사강은 창문 밖의 활주로를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진 듯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필름 넣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필름 카메라는 골치 아픈 기계다. 하지만 쓸모 있다는 것의 정의가 사람마다 같을 순 없다. 무용지물이라야 가치가 올라가는 세계도 있으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쓸모만큼만 인정받다가, 쓸모가 사라지면 즉각 폐기되는 삶이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경쟁이라면 그것의 반대편엔 또 다른 세계도 있는 거 아닐까. 세상엔 쓰임새가 애매해서 그저 간직할 수밖에 없는 물건도 있다.

“카메라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응.”  

사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손에 꼭 쥐었다. 

“남자?” 

“글쎄…….”

카메라를 카메라가 아닌 ‘로모’라 부르는 일. 이 ‘로모’가 누군가에겐 ‘로모’가 아닌 또 다른 애칭으로 불렸을지도 모를 가능성. 그런 것들. 살면서 가지고 있는 물건에 친근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친구처럼 생각하며 소중하게 다루는 일. 사강은 귀퉁이가 낡아 둥글어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낡은 카메라의 진짜 이름과 시간이 궁금해졌다. 

창문을 향해 막 마드리드에서 착륙한 보잉 777-200 한 대가 비행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비행기 꼬리가 아름다운 피조물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터미널 쪽을 향해 들어왔다. 사강은 가방 속에 다시 카메라를 넣었다. 그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윤희에게 중얼대고 있었다. 

“런던에서 돌아오면 당장 필름부터 사러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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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지독한 불편함이 고개를 쳐든다!

 

 

부희령 작가 첫 소설집

세계의 끝을 향해 돌진하는 ‘날것의 리얼리티’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가항력적 간극에 대한 깨달음

한때 지녔던 삶의 이상이 깨져버린 것에 대한 환멸

이 모든 생의 치부를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일말의 환상도 파고들 틈 없는 지독한 세계!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어떤 갠 날」로 등단한 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며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부희령 작가의 첫 소설집. 등단 이후 각종 지면에 발표한 7편의 단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세상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함께 현실의 서정성과 잔혹함을 절묘하게 배합해내는 작가 특유의 화법을 압축적으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의 장소이자 꿈에 불과한 ‘화양’이라는 장소에 대한 동경을 그린 「화양」, 감정 역시 돈과 교환될 수 있으리라는 위악의 어조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머니 익스체인지」, 자기 안에서 개화하는 육체적 여성성에 대한 소녀의 성장 기록 「꽃」, 내가 누군가에게 밟히거나 내가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날이 고작 일요일 하루뿐임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팔월의 월요일」, 철거가 예정된 집에서 갑작스럽게 나가야 하는 주인공의 불안했던 청춘 시절에 관한 이야기 「어떤 갠 날」, 자기의 치부와 상처에 눈감고 그것을 타인에게 숨겨야만 간신히 삶이 가능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다리 게임」, 이상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과, 불가항력적 운명의 비극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정선, 청령포」.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 그 속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부희령 작가는 세상이 본래 어떤 것인지에 대해 눈감거나 시선을 돌려버리는 이야기들 혹은 대결하더라도 심연까지 치닫지 못하고 손쉽게 화해해버리는 이야기들을 거부한다. 작가는 이 7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똑바로 응시하고 삶과 대결해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

 

세계의 끝을 향해 돌진하는 ‘날것의 리얼리티’

7편의 단편소설 속 세계, 주인공들의 삶은 하나같이 그악스럽고 비루하다. 그 속에 바로 생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리얼하고 냉정한 시선이 있고, 그 시선은 우리의 맨얼굴을 꿰뚫어본다. 가족이 있는 남자와 이혼녀와의 만남이 욕정의 쓰레기통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수밖에 없는 객관적 상황, 이혼녀라는 꼬리표와 빚보증을 잘못 서 생계를 위해 보험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자본주의의 물신인 화폐의 부질없는 흐름과 그 시스템의 생리에 환멸을 느껴 위악적 심정으로 부당한 관계를 지속하는 여자 등 소설 속 상황과 인물들은 현실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 이면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표제작 「꽃」이 이런 모습을 여실히 나타낸다. 섹스에 대한 남녀의 기대와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 소설은 성관계라는 것이 성(性)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관계의 교환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에서 육체적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판타지로 포장된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 포장을 벗겨내 날것으로 드러낸다. 한편 「사다리 게임」에서는 세상에 대한 환멸, 냉소를 통해 노골적으로 세태를 풍자한다.

지금, 여기, 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시키면서 불편함을 끄집어내는 이야기, 판타지 없는 지독한 현실을 심도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잔혹함이 일상과 현실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해설 중에서

이것들은 모두, 우리네 생과 세계의 맨얼굴에 대한 충분한 르포로 읽히기도 한다. 그들의 불행과 고뇌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불가항력적 출구 없음에 대한 탄식을 피하기 어렵다. 삶의 맨얼굴을 이야기하는 소설들, 날것의 현실이 어떤 위장도 판타지도 없이 거울처럼 비춰지는 순간들은 때때로 당혹스럽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결코 르포가 아니다. 그럼에도 르포에 가까운 리얼한 현실들이 조금의 타협도 없이 구체적으로 부감되는 것은, 근래 소설들을 떠올려볼 때 퍽 드문 것이기도 하다.

(김미정|문학평론가)

 

본문 속으로

X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잠 안 오는 밤, 왜 읽는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 내려가던 포털 게시판의 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간녀. 욕정의 쓰레기통.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법적인 부인이었고, 그 시절 내 남편도 밖에 나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때 나는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은 부인인 내가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p. 19, 「화양」 중에서)

 

여자가 기대했던 분홍빛 구름 같은 첫 섹스는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진저리나는 구멍 찾기뿐이었다. 남자에게도 첫 경험인 섹스였으므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여자의 거웃과 살덩이들을 헤집었다. 거의 해부학적인 관심에 가까운 탐구였다. 마침내 여자의 다리는 제법 큰 원을 그리기 위한 컴퍼스의 다리처럼 벌어졌고, 남자는 삽입을 시도했다. 어쩌면 어느 순간까지 여자는 남자에게 따뜻하기도 하고 상냥하기도 한 감정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고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앞에 선 남자의 모습에서는, 따뜻함일 수도 있고 상냥함일 수도 있으며, 분홍빛 구름이거나 무지갯빛 안개일 수 있는 그 무엇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p.72, 「꽃」 중에서)

 

도처에 널려 있던 거울은 당연히 모텔의 욕실에도 있었고, 그 속에는 화장이 반쯤 지워진 한 여자의 얼굴이 피곤과 상실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모란은, 자기 또한 눈두덩이 붉고 푸른 채 부어오른 모습이었다고 할지라도, 선글라스라도 끼고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65, 「사다리 게임」 중에서)

 

차례

화양

머니 익스체인지

팔월의 월요일

어떤 갠 날

사다리 게임

정선, 청령포

해설_누구에게나 ‘스트로베리 필드’가 없을 수 있겠는가 (김미정)

작가의 말

 

저자_부희령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어떤 갠 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소설 집필과 함께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청소년 소설 『고양이 소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모래 폭풍이 지날 때』, 『동물도 말을 한다』, 『트위그의 신기한 하루』, 『새로운 앨리엇』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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