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회>

9부 슬픔이여, 안녕

-언니. 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 비행기 타야 돼. 나리타공항 도착하면 전화할게. 아까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도쿄 티켓 아직도 그랜드 바긴이야! 대박 싸다고! 내일 당장 이곳으로 와. 뒷일은 걱정 말고. 홧팅!! ^^

미우에게 문자가 온 건, 서울로 진입하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였다.

미도는 간단히 답장을 쓰고 창문을 내려다봤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도로는 거의 주차장처럼 변해 있었다.

대표의 전화를 받고 미도의 머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비즈니스로 이용한 자신의 행동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었다. 미도가 변명처럼 우정을 가장했던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다가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미도는 불평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치웠던 것뿐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실질적인 리허설 없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미도는 며칠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모든 것들을 진두지휘했다. 먼저 시네마테크 옆에 있던 유기농 레스토랑의 주인을 만나 식당을 정리하는 대신 리노베이션 하는 쪽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리노베이션 비용의 일정 부분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대신, 이벤트에 필요한 메뉴를 함께 개발하자는 조건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레스토랑 이름이 반드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어야 해요. 이름만 바꾸면 식당 홍보를 위한 기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사람들이 모르던 이곳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거죠.”

오너 셰프인 주인은 미도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건강식들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계획대로 미도는 테이블과 의자의 배치부터 전부 바꾸었다. 그곳에서 감정을 고양시킬 비발디의 음악을 틀고, 물기가 많은 따뜻한 음식을 순서대로 내놓는 것 역시 그녀가 진두지휘했다.

정미도가 세심히 고른 것 중엔 레스토랑 벽 중앙에 걸린 거울도 있었다.

빈티지 가구를 파는 이태원 가구 골목을 돌며 미도는 아름답고 우아한 거울들을 사들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거울. 하지만 새벽 옹달샘처럼 선명해서 사람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까지 흡수할 것 같은 얼룩 없이 깨끗한 거울 말이다.

미도는 조찬 모임을 위해 일렬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레스토랑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보게 될 장면들을 수없이 그렸다. 그것은 마음속 가장 아픈 상처를 남김없이 건드리는 것이어야 했다. 자신들의 등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알게 하는 강력한 것이어야 했다.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고, 정지했을 리도 없으며, 세상 속의 연인들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고 밀려간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오전 일곱시가 겨우 넘은 시간. 회사원들이 즐비한 길 위에, 대학가에서나 볼 법한 젊고 아름다운 커플이 유독 많이 지나갔던 건 미도의 섭외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실연당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보게 될 거울 속 연인들의 모습은 미도가 감정을 극점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클라이맥스였다. 정미도의 사업가적 기질은 일정 정도의 죄책감을 증발시켰다. 무엇보다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는 점에 그녀는 고무되었다. 그녀가 세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은 성공적이었다. 정미도의 프리젠테이션 부제 그대로 ‘헤어져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믿기지 않게 긴 제목의 이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 트위터뿐 아니라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던 그때, 이런 아름다운 이별의 예식이 한 번 더 존재했으면 하는 요청이 미도에게 전해져왔다. 놀랍게도 소식은 글로벌 네트워크인 트위터의 특성상,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의 작은 섬에 사는 어느 빨간 머리 주근깨 소녀에게도 전해졌고, 자신이 갖게 된 실연의 기념품과 그것에 얽힌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이일 땐 한 손에 안길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두 팔로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실연의 기념품으로 남았다는 여자가 있었고, 그 개를 자신이 키우고 싶다는 세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자신에게 남게 된 세 장의 버스 카드와 직접 털실로 짠 양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지만 한여름 단 몇 시간 만에 쉬어버렸다는 김밥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이 실패였다는 점과, 그들에게 남겨진 쓸모없는 물건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터무니없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과 함께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쓸모없는 것만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트위터에 이런 문장을 남겼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겨진 실연의 기념품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을 아름답게 추억하자는 합의가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을 만들었다. 수천 개의 리트윗과 멘션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회사는 이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조찬 모임’이 성공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심스레 이번 프로젝트를 회사 내로 끌어들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셈이었다. 방송으로 비유하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아직 정규 방송으로 편입되진 않았지만 앞으로 대박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도의 메일함은 사람들의 편지와 쪽지로 가득 찼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이 모임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별을 받아들였고, 이제 슬픔을 털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실연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참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받은 위로의 증거들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미도는 자신의 트위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뵈었던 윤사강입니다. 실례이긴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모임에 참석했던 이지훈 씨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미도에게 이 쪽지보다 모임의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없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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