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촛불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지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사강은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지훈을 응시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달 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의 죽음이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보험 조사관이라는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 남자가 이렇게 묻더군요. 할아버지가 복용하고 있던 약을 알고 있냐고. 그 약을 복용량 이상 섭취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고 물었죠. 혼란스러웠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죠. 보험 조사관이 엄청나게 두꺼운 기록들을 내놓으며 제게 말했어요. 복용량 이상의 약을 섭취하는 일, 그걸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부른다고.

여든이 넘은 노인이 자살 따위 할 리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경찰과 보험사, 병원을 어떻게 오고가며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왔어요. 하지만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어요. 할머니 평생의 다짐처럼, 할아버지 역시 당신이 벌을 받아야 손자들의 미래가 열릴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걸까. 이 모든 게 결국 살아남은 형과 나 때문에 벌어진 걸까. 차라리 그때 뒈져버렸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훈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의 눈빛이 촛불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사강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더 많은 촛불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던 초 하나에 불을 붙였다.

“전 늘 이런 상상을 했어요. 너무 자주 상상해서 언젠가 정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사강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촛불 속에 잠긴 방은 기이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가구와 가구 사이에 비어 있던 공간이 사라지고 그 사이에 부드러운 비누 거품이나 증류수처럼 느껴지는 투명한 기포들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공기의 밀도는 지훈과 사강의 이야기로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곳은 방이 아니라 이제 망망대해의 검은 바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서 목적지 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난민들처럼 지훈과 사강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공항에 서 있는 비행기를 바라보다가,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라 사라지는 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낡아서 가운데가 조금 주저앉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건너편 신문을 읽는 남편에게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당신, 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게 뭔 줄 알아? 그럼 남편이 제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는 거예요. 글쎄, 여자들은 임신하면 보통 신 게 먹고 싶지 않나? 오렌지나 귤 뭐, 이런 거? 순대가 먹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당신도 그런 거야? 그럼 전 보고 있던 두꺼운 앨범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어요. 부드럽게, 하지만 아이처럼 투정하듯, 말하죠.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고생했을 때, 헛구역질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 때, 그래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을 때, 아이를 위해 천정에 미리 매달아놓은 호랑나비 모빌을 보면서, 내가 그때 가장 먹고 싶었던 건 기내식이었어, 라고. 언제나 갤리 한구석에 서서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치킨과 비프 밀(meal). 포장된 채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배달되는 기내식.

로모 카메라의 필름을 인화했던 건…… 어쩜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진을 보는 순간 알아버렸어요. 그게 어떤 사랑인지. 이렇게 예쁘고 보기 좋은 연애. 부럽고 청순한 연애. 그렇게 웃는 사람, 그렇게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이겠죠. 이지훈 씨는 좋은 손자였을 거고, 좋은 동생이었을 거고, 좋은 남자 친구였을 거예요. 무엇보다 당신은 무례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소설을 빌려주는 좋은 친구죠.”

사강이 잠시 뭔가 생각에 빠진 듯 말을 멈추었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하는 가장 큰 일이 뭔 줄 알아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서려는 사람들 저지하는 일이에요. 손님. 안전벨트 사인이 켜져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손님,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손님, 지금 화장실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세요, 손님. 어쩜 안전벨트 사인이 켜져 있는 비행기 안에서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은 승객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을지도 몰라요. 아마도.

전 제게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몰랐어요. 비행기 안에선 언제나 두통에 시달렸고 헛구역질을 느꼈으니까. 전 그게 비행 증후군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차 적응에 실패한 탓이라고, 불면증 때문이라고, 편두통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2만 피트 상공 위에서 다리 아래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을 때도, 난 그게 매달 해치워야 하는 그런 일일 거라고, 그래서 일정치 않은 불순한 그 일이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게만 느껴졌었어요. 전 통증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늘 아프고, 늘 괴롭고, 늘 힘들었으니까. 그 시절의 난 거대한 눈물주머니 같아서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으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보다 쉬운 게 아닐까. 타인을 용서하면 거룩한 자비가 되겠지만, 나 자신을 쉽게 용서해버리고 나면 그건 싸구려 자기변명이나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때 전 제가 임신한 줄도 몰랐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아이는. 그 아이는, 한 번도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이가 자궁 속에서 맨드라미 꽃씨처럼 박혀 있을 때, 몽우리 진 꽃처럼 조금씩 부풀어 피어올랐을 때, 지금처럼 어둠을 선명히 볼 수 있는 밤에나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별이 됐을 거라고, 꼬리가 긴 유성이 돼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이 됐을 거라고 믿었죠.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서 어딘가에 있을 거라구요. 날짜 변경선 위로 다시 한 번 날아가고 싶었어요.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오늘이 아닌 어제로 시계를 바꿀 수 있다면 내 영혼이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좋다고 기도했어요. 내 몸 어딘가에 살아 있는 존재가 숨 쉬고 있었다는 걸, 죽어서야 알게 하는 게 신의 뜻이란 걸, 나는 죽어도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절대로!

얼마 동안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죠.

피렌체에서 19세기 그림을 복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선량한 푸른 눈을 가진 백발의 이탈리아 여자 분이었죠. 19세기 그림들은 검열 때문에 여자의 가슴 부분을 덧칠해 지워버린 경우가 많았다더군요. 그래서 그림 속에 있는 귀족 부인들을 덧칠한 물감을 조심스레 걷어내고 닦다 보면 그림 속에 보이지 않던 부분이 드러날 때가 있다고 했어요. 그녀가 제게 속삭이더군요. 그림 속에서 사라진 건 대부분 아기들이라고. 그리고 그림 속에서 사라진 아기들은 예외 없이 희고 풍성한 가슴 속에 파묻혀 여자의 젖을 먹으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고 했어요. 초상화 속의 여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젖을 먹는 아기를 바라보기 때문에 가슴이 지워진 복원 전 그림은 한결같이 목과 어깨의 각도가 기묘하게 에로틱해 보인다고 말이죠. 그건 제가 아는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였어요.

우린 신이 아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도시 전체가 어둠에 잠겼을 때 지금처럼 가지고 있던 촛불 하나를 밝혀두는 게 전부죠. 어둠 속을 걸어서 이 작은 빛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희망이 걸어올지도 모르니까.”

사강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훈이 그녀의 젖은 뺨과 마른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잃어버린 그녀의 아이를 끌어안는 것처럼 지훈은 그녀의 가슴과 등을 끌어안았다. 사강의 눈물이 앉아 있던 지훈의 종아리에 떨어져 어두운 길을 걷던 그의 맨발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둠이 희뿌연 가로등 사이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햇빛은 이미 커튼 뒤로 바짝 다가와 밝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촛불이 필요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