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오게 되리라곤 전 생각지도 못했어요. 창피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여기 온 건 잘한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겠죠? 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사강은 미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과거와 작별하고 커플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한 번의 사랑만으로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사랑 때문에 새벽녘 손목을 긋거나, 선물 받은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도 씨 말처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왜요?”
 미도가 사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부정적인 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미도는 동의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그런 거 아닌가? 긴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고 아이가 태어나고 그렇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헤어질 걸 알면서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니까.”
 “헤어질 걸 알고도 사랑한다?”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그럼요. 우린 죽을 걸 알고도 살아가잖아요.”
 “사람들이 정말 그런 걸 알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요. 저도 죽을 거고, 사강 씨도 죽을 거고. 누구나 다 죽잖아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사강은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듯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 입구의 문은 열려 있지만 처음부터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터널이었다. 환한 빛 속에 있다가 빨려들어가듯 짙은 어둠 속으로 따라 걸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상한 터널. 사강은 그 터널을 떠올리며 그 속을 걷듯 느릿느릿 말했다.
 “미도 씨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말은 쓰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하루하루 죽어간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루치의 삶을 덜어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실패한 친구에게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 전 믿지 않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같은 말이 대체 그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니었다고 털고 일어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넘어져 무릎이 깨진 사람 앞에서 ‘힘내라. 당신의 잠재력을 믿어라.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못해요.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를 얘기하면서 위로하는 게 무슨 소용이죠? 그럴 땐 그저 손을 내밀어주고 어깨를 안아주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죠.”
 사강의 목소리는 어조 없이 담담했다.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맛있는 커피를 권해주거나, 따뜻한 국을 끓여주는 쪽이 전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따뜻한 음식을 권유하는 이런 영화제가 나쁘진 않은 거네요. 그렇죠?”
 “제 생각에는요.”
 “재밌는 영화제에요. 누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걸까요?”
 “그쪽, 실연당한 건가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봤다.
 “제가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봐요? 그런 거죠?”
 미도는 굳이 자신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사강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을 상대로 뭔가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곧 사라져버렸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팔십칠 일째예요. 팔십칠 일하고 열세 시간 지났네요.”
 손목에 찬 커다란 전자시계를 바라보던 미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강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격히 내려가는 그녀의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덧니가 그녀의 입안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미안해요. 힘들겠군요.”
 “아뇨. 안 힘들어요. 저 말짱해요. 헤어지고도 잊지 못하는 사랑, 전 그런 거 수지타산 안 맞아서 못 해요.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하자, 이게 제 신조예요.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자. 물론 잘되는 것 같진 않지만.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지, 복잡하게 이런저런 이유 대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정말 질색이거든요. 죽어도 나쁜 역할은 맡지 않겠다는 못된 심보잖아요? 연애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힘든 걸 극복하는 방법은 다르니까, 곧 괜찮아지겠죠. 사실 홧김에 사표 낸 지는 일주일 됐어요.”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덜미가 조금 발개져 있었다.
 사강은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육 년 동안 같은 직장을 다녔다. 매달 25일이면 월급을 받고, 그 돈을 한 푼도 저축하지 않고 대부분 써버린 것 역시 육 년째였다. 이 사람들은 어떨까. 사강은 아침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외롭다’와 ‘괴롭다’ 사이를 형상화한 조각품들 같았다. 그 조각품에 이름을 붙이면 아마도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롭다’가 되지 않을까. 
 “세상에 얼마나 나쁜 자식들이 많은지 알고 나면 정말 연애라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어른들이 왜 연애보다 중매를 좋아하는지도 알겠고.”
 이상할 만큼 친화력이 있는 여자였다. 사강은 어느새 이 낯선 여자와 의미 없는 숫자들, 가령 기르다가 부러뜨린 손톱, 택시에서 분실한 휴대전화와 딱 한쪽만 잃어버려 착용 불가능한 귀걸이의 숫자 같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영화제 프로그램 봤어요? 영화가 네 편이던데. 전부 다 볼 거예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전 네 개 전부 다 볼 거예요. 프로그램이 정말 맘에 들어요. <화양연화>랑 <봄날은 간다>, <러브레터>하고…… 나머진 뭐였죠?”
 “<500일의 썸머>.”
 “전 그 영화는 못 봤는데. 실연당한 사람들 얘기인가 보죠?”
 “500일 동안 한 여자에 빠져 있던 남자가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졸업>을 본 후, 좋아하는 팬케이크 가게에서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얘기예요. 저도 줄거리만 읽었어요.”
 “여기 온 사람들, 전부 애인한테 차인 사람들 아닐까요? 설마, 양심이 있다면 애인을 찬 인간이 여기까지 기어오진 않았겠죠? 재수 없는 인간들!”
 미도는 잠시 분노한 표정을 짓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사강을 향해 말했다.
 “전 일 년 정도 사귀다 차였어요.”
 미도가 “그쪽은 얼마나 사귀었어요?”라고 묻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미도는 곧장 사강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쪽도 차인 거죠?”
 미도가 확신에 차 사강을 바라봤다.
 “아뇨.”
 사강이 고개를 들고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비발디의 <겨울>이 흘러 나왔다.

 

 

(6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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