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삶을 관통하는 말은 하기 힘들다.

죄책감은 말의 껍질을 깨뜨리고, 분노와 슬픔은 껍질 안의 말을 짓눌러 부셔버리기 때문이다.

지훈은 사강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전, 한 여자의 얼굴을 목격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히 자신의 비극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면, 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것은 살아남은 아기와 죽은 사위와 딸에 대한 얘기였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녀의 얼굴은 몇 년 씩 지속되는 참혹한 전쟁의 전사자 목록에서 자식을 막 발견한 사람처럼 멍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예외 없이 담담했다. 자신의 비극을 객관화시켜 자기 자신에게 기필코 이해시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도 되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족처럼 느껴지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이야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길어졌다. 그러나 장황해지기보단 오히려 선명하고 더 명료해졌다. 사고는 교통사고로, 교통사고는 교차로에서 일어난 삼중 추돌 사고로, 교차로가 있던 곳은 강릉의 해수욕장으로 가는 국도변 과수원 길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지훈은 그런 이야기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훈련이며 몸부림이라는 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사강이 시퍼런 칼을 든 채 자신의 말투와 목소리에서 슬픔을 잘라내기까지 어느 정도의 불면을 겪었는지 지훈은 상상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담담함이 실은 많은 것들을 눌러 담고 있다는 것 역시 폐부 속 깊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담담한 얼굴로 사강은 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방으로 올라가죠. 우선 발부터 씻는 게 좋겠어요. 제게 비상 약품이 있어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일이면 아플지도 몰라요. 맨발로 걷기엔 힘든 거리였어요.”

사강은 지훈의 발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녀가 호텔 복도를 천천히 걷는 뒷모습은 언제나 기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사강은 카펫이 깔린 긴 호텔 복도를 맨발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사람처럼 그녀의 발걸음은 불안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너울이 심한 배 위를 걷는 듯 그녀의 몸은 자주 움직였다. 사강의 오른쪽 손엔 굳이 자신이 들고 가길 고집한 지훈의 운동화가 들려 있었다. 지훈은 방문을 여는 사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어둠에 잠겨 서늘해져 있었다. 사강은 자신의 트렁크 안에서 초 몇 개를 꺼냈다. 그녀는 한 번에 성냥을 그어 작고 선명한 불꽃들을 만들고, 가지런히 놓아둔 양초에 빠른 속도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방 안의 스위치를 켜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늘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해 예민한 편지를 쓰는 사람처럼 우아한 동작들이었다.

빛이 방 주위에 점점 더 차오르자 방 안의 윤곽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강의 호텔방은 포장지를 막 뜯은 새 물건처럼 깨끗했다. 탁자와 침대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두꺼운 수면용 커튼은 창밖의 풍경을 단단히 차단하고 있었다. 슈트케이스가 서 있는 벽 위에는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빈 콘센트가 보였다.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기, 휴대용 독서 램프의 전선 따위가 가득 꽂혀 있는 지훈과는 대조적이었다. 언제든 짐을 싸들고 빠른 시간 안에 떠나야 하는 사람의 방 같은 단호함이 엿보였다.

“향초 냄새가 좋군요.”

지훈이 어둠 속에 서서 말했다.

“이건 세탁 건조향 향초예요. 오후의 강렬한 햇볕에 말린 빨래에서 나는 냄새가 나죠. 이건 비 온 후에 젖은 땅에서 나는 냄새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레인’이란 이름의 향초예요. 이건 ‘체리 블러섬’. 벚꽃 향기.”

사강이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향초를 여러 개 켜요. 가을에 옷을 하나둘 꺼내 입는 것처럼 향초를 하나둘 꺼내 켜고 있으면, 이런저런 기억들이 중첩되거든요.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오래전의 일, 어느 날엔 어릴 적부터 나중에 일어나면 좋겠다고 소원했던 일들까지……국경을 넘고 하늘을 나는 일.”

사강이 말을 멈추고 잠시 성냥갑 속의 성냥을 그어 향초 하나에 불을 더 붙였다. 동그랗고 빨간 성냥 머리가 검게 변할 때마다 옅은 황 냄새가 지훈의 코끝에 머물다 빠르게 사라졌다.

“냄새를 균일화시키면 세상의 어떤 낯선 장소든 자신의 방이 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그 사람이었어요.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것도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녀는 계속해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짓밟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군요.”

“읽을 수조차 없는 책들이에요.”

사강이 말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책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사람은 없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책이 선물이라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일 테니까.”

“한 번도 이 책을 다른 사람이 보냈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일 거라고. 그 사람이 내게 보낸 거라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믿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래야 덜 비참하니까, 그래야 겨우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책을 보낸 사람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바보 같았어요. 읽을 수 없는 언어라고 생각해서 책조차 펼쳐 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죠?”

지훈이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그를 바라봤다.

“졸업식 날 카네이션처럼 보이는 핑크색 장미를 잔뜩 보냈던 사람. 당신이 준 일본어 책을 펼쳐보고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판본의 63페이지에 뭔가 표식이 있을 거예요. 독일어판 마찬가지겠죠.”

“63페이지라면……”

“6월 3일.”

“당신 생일이군요.”

“아뇨. 제 출생신고일이에요. 동사무소에서 직접 신고한 사람만 알고 있는 법적인 출생신고일. 제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죠. 아빠가 태어난 날이랑 같아요.”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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