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봤어요?”

지훈의 눈빛이 불빛으로 투명하게 일렁였다.

“아름답네요.”

사강은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강과 지훈이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로비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초들이 있었다. 달걀 껍질처럼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크림색, 크리스마스이브에나 쓸 법한 녹색과 빨간색 양초가 아름다운 불꽃을 가득 피워내고 있었다. 호텔 측이 급히 비품실에 있던 양초를 모두 끌어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얗고 매끈한 양초는 아무리 퍼 담아도 자꾸만 흘러넘치는 어둠의 끝을 잡아 커다란 불빛의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양초들 사이로 고여 있는 어둠은 깊고 아름다운 너울로 울렁였다. 그곳에서 사람은 짙은 그림자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강은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지상의 이런 곳에서 쉬어가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실한 목자처럼 어둠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촛불의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자신의 몸을 녹여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에 대한 경건함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세상의 양초들이 태어나 자라고, 머무는 정류장이 있다면 도쿄의 이 호텔 로비가 될 것이었다. 몇몇 투숙객들은 로비에 나와 사람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겨우 가정에서나 쓸 법한 양초가 대규모 정전을 대비한 호텔 측 준비라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차분함은 호텔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었다. 호텔에선 영어와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예고되지 않은 정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후쿠시마 원자력 누출 사고로 인해 야간에 가동할 수 있는 여분의 전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통은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꼭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성가 같았다. 그들은 촛불 쪽으로 몸을 바짝 끌어당겨 어두운 벽에 반사되는 불빛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에게 반드시 비밀을 고백해야 하는 협약이라도 맺은 사람들처럼.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호텔의 로비는 성당의 고해소처럼 어둠과 빛을 나누고 있었다.

“중요한 걸 잃어버렸나 봐요.”

지훈이 소파 쪽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사강에게 말했다. 남자가 소파 밑으로 고개를 처박고 뭔가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카펫을 깔아놓은 바닥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건지도 몰라요. 지갑이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키일지도 몰라요.”

사강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지훈을 명확히 느꼈다.

“집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어요.”

지훈이 말했다.

“그 사람이 열쇠를 찾기 위해서 한참을 헤매는 걸 이웃집 사람이 목격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갔죠. 이웃집 남자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요. 열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였죠? 그는 이웃집 남자에게 현관문이라고 대답했어요. 이웃이 이상하단 얼굴로 이 남자에게 다시 물어보죠. 정말 현관문 근처 맞아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본인 얘긴가요?”

사강이 물었다.

“아뇨. 하지만 이런 곳에 잘 어울리는 얘기죠. 남자의 대답을 들은 이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해요. 잃어버린 열쇠를 현관문 근처에서 봤다면서요? 그럼 그쪽에 가서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여기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자 남자가 이웃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해요. 이봐요, 여기가 훨씬 더 밝잖아요!”

촛불이 집어 삼킨 어둠이 빛으로 산란되며 이들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전 영문학을 공부했어요. 학생 땐 주로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이쪽 일을 하고부터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는 책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보죠. 이 이야기는 ‘대니얼 고틀립’이라는 자폐아를 손자로 둔 심리학 박사가 쓴 책이었는데, 박사가 말하길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무의식적으로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대요. 하지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많다고 충고하더군요.”

지훈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저 남자도 촛불 밑에 있을 게 아니라, 처음 자신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도요?”

“칠흑 같은 어둠 안이라 해도.”

지훈이 대답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기억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잃어버린 열쇠들은 전부 다 그곳에 모여 있더군요.”

“그쪽이 잃어버린 열쇠는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사진 속 여자 분이겠군요.”

“자기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가 적어도 한 명은 있는 여자였어요. 미국식으로 말하면 우린 모범적인 ‘존과 앤’ 커플이었어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어요. 잃어버린 지갑이나 핸드폰을 되찾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잃어버린 걸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돼요. 그 밤 트위터에 실린 글을 보고 충동적으로 아침 일곱시에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나갔던 것처럼 말이죠.”

“충동적인 결정…….”

“…….”

“전 애인과 헤어지고 일 년 동안 사표를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사강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사표를 쓴 건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어요. 사랑니를 뽑겠다는 아주 사소한 계획 하나 실천하지 못했죠. 1년이 어떤 의미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어요.”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예요.”

“당신도 그랬나요?”

사강이 지훈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힘들어서 차라리 큰 소리로 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녀는 오랫동안 촛불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집에 장미 꽃다발 하나가 왔어요. 별생각 없이 그 꽃을 거꾸로 매달아서 거실 벽에 붙여놨었는데 꽃이 떨어지는 대신 꽃대까지 바싹 마르더군요. 향기 없이, 미라처럼요.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먼지가 쌓이면서 더러워 보였어요. 과거엔 아름다웠지만 향기 없이 말라버린 꽃을 바라보는 일이나, 이미 죽어 버린 사랑을 바라보는 일이 뭐가 다르죠?”

어둠 속에 일렁이는 촛불들이 녹아 이제 조금씩 형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춰 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하나둘 사라졌다. 사강의 눈동자가 막 불이 켜진 촛불처럼 일렁였다.

밤이 깊어갔다. 촛불도 조금씩 빛이 여위고 있었다. 로비의 손님용 소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사강과 지훈뿐이었다. 사강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는 처음 수영을 배운 사람처럼 숨을 참고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부드러운 촛불 때문에 침묵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좋아한 여자가 있었어요.”

사강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이혼하겠다고 얘기한 순간, 그와 헤어졌죠. 아내에게 돌아가라고 한 말이 여자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순간 여자는 엄마를 떠올렸어요. 끔찍하게 미워하던 엄마를. ‘어쩔 수 없다’란 말. 그게 엄마와 자신의 관계라는 걸 깨달은 거죠. 어쩔 수 없이.”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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