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한 번이라도 눈을 감고 오랜 시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각이 균형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각이 단지 ‘본다’는 동사만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니다.

사강은 뒤집힌 낮과 밤의 흔적들이 여권에 찍힌 낯선 도시의 스탬프처럼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승무원이 된 후, 그녀는 잠들고 싶은 시간에 잠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시간에 정작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시간과 도저히 맞추어지지 않는 낮과 밤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대표적인 증후는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이었다.

비행을 앞두면 늘 집요한 두통이 사강을 괴롭혔다. 진통제로는 멈추지 않는 두통을 견디다 못해 신경외과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사강은 그곳에서 이비인후과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으라는 납득하기 힘든 얘길 들었다. 그녀의 두통이 뇌의 문제가 아니라 청각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과 달팽이관의 림프액 때문에 생긴 문제예요.”

의사가 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 림프액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아뇨.”

“그럼?”

“윤사강 씨는 림프액이 너무 많아요. 림프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불균형이 헛구역질과 두통으로 표출되는 거죠.”

사강이 말없이 의사를 바라봤다. 해야 할 질문들은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사강의 경험에 의하면 무엇인가 많다는 건,

적은 것보다 대부분 좋지 않았다.

사강의 교정 시력은 1.5였다. 그녀는 100미터를 평균적인 여자들보다 2초 이상 빨리 달렸다. 사강은 25미터 풀을 스무 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체력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해 승무원 체력 검사에서 그녀는 한 번도 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둠 속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굽 높이가 10센티미터나 되는 웨지힐을 신고 만든 기록이 아니었다.

호텔로 걸어가는 어둠 속에서 사강은 길 한가운데에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 그대로 곤두박질할 뻔했다. 사강의 걸음은 분명한 속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와 발목에 더 힘을 주었다. 사방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폭이 좁은 플레어 롱스커트를 입은 채 균형을 잡으며 걷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녀는 실감하고 있었다.

여전히 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별조차 보이지 않은 걸까. 개기월식이라도 일어난 걸까. 역시 혼란스런 상황 속에 생기는 착시 현상 같은 걸까. 사강은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마다 다리가 휘청였다.

“한 번만 더 휘청대면 업힐 각오 해요!”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사강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넘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이들을 봤다면 “그녀는 그에게 거의 매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 속에선 절차와 의례들은 사라지고 본능적인 감각들만 살아남았다. 도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정전 속에 두 남녀가 서 있다면, 한 사람이 넘어지려 할 때 다른 한 사람이 몸을 잡아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빠른 시간 안에 빛이 있는 호텔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걷고 있었다. 사강이 생각하기에 호텔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한 것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어둠이 모든 걸 덮어버리자 지훈의 손은 자신의 몸과 연결된 것 같았다. 사강은 손바닥의 흉터가 그의 손바닥과 마주칠 때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높은 하이힐 때문에 몇 번 더 기우뚱했다.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구두는 벗고 걷는 편이 좋겠어요.”

지훈이 말했다.

“일단 내 운동화를 신어요. 맨발보단 훨씬 나을 겁니다.”

사강이 운동화를 벗고 있는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그녀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운동화가 많이 클 수도 있어요. 일단 제 어깨를 잡고 운동화에 발부터 넣어요. 하이힐 신고 이런 어둠 속에선 몇 미터 걷기도 힘들어요. 아님 지금이라도 업히시든가.”

“나한테 신발을 벗어주면 당신은 맨발이잖아요.”

“지금 내 걱정 하는 겁니까?”

가소롭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내가 벗겨주길 원해요?”

지훈이 사강의 구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끝을 뾰족한 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강은 구두를 벗었다. 그녀는 맨발로 바닥 위에 서 있었다. 길 위에 깔린 작은 포석이 컵에 양각한 장식들처럼 발밑으로 느껴졌다. 한밤의 길은 달빛만큼 차가웠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제야 희미하게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달이었다. 너무 작아서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달은 눈 한 번 깜짝여도 사라질 듯 불안하게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운동화 끈을 당신 발에 맞춰서 더 조이면 걸을 만할 거예요.”

사강은 그의 운동화에 한쪽 발을 넣었다. 운동화에 남아 있던 온기는 어느새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서서히 퍼졌다. 따뜻한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욕조 안에 언 발을 녹이며 서 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있던 발바닥과 발끝이 저릿했다.

“어때요? 편해요?”

그는 사강의 발에 맞춰 느슨한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지훈은 여전히 무릎을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사강은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사강의 손은 그의 어깨 위에 자연스레 기대듯 올려져 있었다. 검정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기적같이 돋아난 또 다른 그림자 같았다.

“고마워요.”

사강은 급히 몸을 떼며 다리에 힘을 준 채 그의 곁에 똑바로 섰다.

사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문을 닫은 어두운 상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건물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어둠이 가득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랜턴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점멸하듯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걸었다. 눈을 감아도 몸은 누군가 부드럽게 밀어내듯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길 위에 펼쳐진 거대한 점자책을 상상했다. 겨자 씨 같은 점자들이 책 위를 흘러나와 차갑고 어두운 길 위에 쏟아지는 장면을. 사강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선연한 길의 노래를 발끝으로 느꼈다. 손과 발끝으로 거리의 모서리들과 음각들을 짚어냈다. 어둠의 귀퉁이가 몸에 와 닿아 부드럽게 반사됐다. 그녀의 어깨와 귓불 그리고 팔꿈치와 발목까지 그것은 미끈하고 윤기 있는 벨벳처럼 몸 위를 덮었다. 어둠은 닫혀 있던 그녀의 감각을 열어 또 다른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사강의 눈엔 이제 검은색과 덜 검은 색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1950년대 흑백 영화 속에 나오는 진한 화장의 여자들처럼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 속에 서 있었다. 세상이 흑백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사강은 그 속에서 나무들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지훈이 내뱉는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조금 더 명확해져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그의 숨소리를 흉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표지판이 가르쳐주는 방향이 아니라, 닫혀 있던 감각들이 말해주는 대로 그녀의 귀가 부드럽게 열렸다. 사강은 지훈의 호흡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눈을 감아도 풍경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강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맥박과 호흡은 이제 손바닥을 타고 그녀의 심장까지 와 닿았다. “오래전에…… 손을 잡고 누군가와 깊은 어둠을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사강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빛을 향해 걷고 있는 두 걸음은 점점 보폭을 맞추고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긋나던 그들의 호흡은 이제 비슷한 기울기로 흘러내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포개지듯 겹쳐졌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은 밤이었다.

짙은 구름 속에서 달이 기울고 있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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