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7회 >

사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을 때, 얇은 손톱처럼 박혀 있던 초승달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사강은 호텔에 두고 온 점안액을 생각했다. 고질적인 안구 건조증 때문에 늘 가지고 다니는 인공 눈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비자 건조한 눈 밑이 쓰리고 따가웠다.

공원 벤치 옆의 가로등이 꺼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로수 옆에 늘어서 있던 가로등이 불시에 꺼졌다. 공원을 거대한 정원처럼 둘러싸고 있던 빽빽한 고층 맨션의 불빛들 역시 일시에 사라졌다. 산책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다 해도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라곤 벚꽃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공포에 긁혀 있었다.

사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구도 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거나 뛰지 않았다. 어둠과 함께 강박적인 침묵이 공원 안을 조금씩 조여왔다. 어둠 속에서 괴물 같은 지진이 언제든 밀려들어올까 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참을성 있게 안내 방송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대단해 보였다.

아주, 아주 미세하게 땅이 흔들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나뭇잎들이 출렁였고, 거짓말처럼 건물이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공포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인 걸까. 사강은 자신의 명찰이 달려 있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심장이 뛰듯 여전히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렸다. 그들이 앉아 있던 나무 벤치가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선 아주 작은 미동마저 쉽게 포착됐다.

사강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갑자기 폭죽이 터지듯 사강의 눈 주위가 환하게 뜨거워졌다. 사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거대한 백열등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 있었다. 분명 달이 아닌 태양이었다. 한밤중에 떠 있는 달 아닌 태양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사강은 눈을 비비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이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괜찮아요?”

지훈이 사강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진 대피 요령 매뉴얼에 의하면, 지진 시 고층 건물이 없는 이런 빈 공터가 가장 안전하다고 나와 있다. 이지훈과 함께 있는 이곳이 그녀에겐 안전지대였다. 사강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녀는 눈 앞에 뿌옇게 낀 옅은 막이 걷히며 어둠 속에서 사물들이 스스로 부유하길 기다렸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이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과 별과 구름, 하늘을 수놓던 모든 것과 벤치 옆에 있던 수프 자동판매기 의 불빛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어둠 속에선 귓가를 스치는 작은 소음의 굴곡들이 틈틈이 다 만져질 것 같았다. 아직 어둠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동공이 서서히 열렸다 닫히며 남아 있는 작은 빛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공원 안에서 사람들은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길 기다렸다. 사강은 주머니가 달린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2시 5분.

막, 어제가 사라지고 오늘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누구나 대지진이나 해일 같은 비상사태에 대한 훈련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런 훈련은 평생 동안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위험을 대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운 좋게 단 한 번의 비상 상황마저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비행 횟수에 비해 사강은 몇 배는 더 많은 불행의 확률을 손 안에 쥐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강은 그것이 늘 두려웠다.

재작년 가을, 사강이 탄 비행기가 ‘고 어라운드’ 하며 추락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 있었다. 방콕으로 향하던 비행기에는 정수가 타고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제트기류와 기상 악화로 관제탑과의 교신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행기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하며 출렁였고, 2층까지 꽉 찬 수백 명의 승객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승객들은 침착했다. 침착해지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좌석에 나란히 앉았던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기도를 했다. 몇몇은 분명 울음을 참고 있었다. 승객들의 눈에 스치는 공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비행기는 착륙을 시도하기 위해 상공 위에 떠 있었다. 이륙했던 공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안에 싣고 있던 기름을 하늘 아래로 버리기 위해서였다.

승무원들은 비상구 옆의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엄청난 진동과 함께 상하좌우로 흔들릴 때에도 사강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응시하듯 승객들의 표정을 침착하게 응시했다. 그때, 그녀는 정수와 함께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공원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안내 방송이었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듯 안내 방송 속의 여자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진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정전 상태라고 하네요.”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지훈이 방송을 들으며 사강에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대응해달래요.”

“다행이네요.”

그가 일본어를 하는 것도, 일시적인 정전 상태라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호텔 쪽으로 가죠. 제가 묵는 호텔이 이곳에서 멀지 않아요. 일본 전체가 비상사태라 정전이 생각보다 오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낮에도 도심 한복판에서 시간별로 계획 송전을 할 정도라니까, 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죠. 호텔에 가면 정전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강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켰다.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그녀의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봄날의 나비처럼 벚꽃이 앉아 있었다.

“배터리가 별로 없어요. 몇 분 못 갈 거예요.”

사강이 불길한 듯 말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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