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그녀가 공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공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녀가 걸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멀리서 다가오는 사강의 긴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처럼 사강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툼 레이더> 시절의 안젤리나 졸리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가죽 옷과 부츠. 그것은 자신을 청순하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젊은 여자들의 욕망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자동판매기 수프 좋아하세요?”

지훈이 사강에게 물은 첫 번째 질문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사강은 말없이 지훈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사강 좋아하세요? 왜 사강을 읽죠?”

사강이 지훈에게 물은 첫 번째 질문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어떤 설명도 없이 곧장 자신이 묻고 싶은 핵심에 다다랐다. 지훈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저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고, 집에는 책이 많았거든요.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제일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음…… 미안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몰랐어요.”

“20년 전 일이에요.”

“저도 그쯤 된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나요?”

“이혼하셨어요. 전 아빠 없이 자랐죠.”

사강이 지훈을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식의 얘기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이 이미 실연의 공동체를 경험한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충동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밀을 고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달도, 별도 없는 검은 벨벳 같은 밤.

지훈과 사강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자동판매기 양송이 버섯수프와 러시안 수프를 먹었다.

*

“그러니까 그쪽이 실연의 기념품으로 제 카메라를 가져갔군요.”

지훈이 말했다.

“그쪽은 제 책을 가져갔죠.”

사강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에 지훈은 사강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봐야 했다.

“당신이 『슬픔이여, 안녕』을 비행기에서 읽는 걸 봤어요.”

“책을 빌려주면 뭘 하려고 했죠?”

“읽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더 있겠어요?”

“그 대답은 믿기 힘든데.”

지훈이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책 한 권 읽겠다고 도쿄에 있는 사람에게 밤 11시에 전화해서 당장 만나자고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쪽이 기념품으로 내놓은 『슬픔이여, 안녕』은 네 가지의 언어로 된 다른 판본이더군요. 무려!”

그는 손가락 네 개를 활짝 펴 보였다.

“특별하고 눈에 가는 책이었어요. 전 외국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건 한국어 번역본이구요. 물론 그때 당신이 놓고 간 일본어판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권 다 원하면 둘 다 빌려드릴 수 있어요.”

“잘 됐네요. 지금 두 권 다 필요해요.”

사강이 말했다.

지훈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는 두 권의 책을 사강에게 건네 주었다. 사강은 무심히 받아든 책을 들고,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책 속에 암호라도 있나요?“

사강은 고개를 저으며 “아뇨.”라고 짧게 대답했다.

“전 일본어를 할 줄도, 읽을 줄도 몰라요. 그 책은 한 번도 읽지 않았어요.”

“애인이 준 선물 아니었어요? 그래서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은 거고.”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만약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면, 읽을 수 있는 책을 보내지 않았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전 사강을 싫어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 작가를 좋아하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신의 이름을 사랑할 만큼 좋은 부모 밑에서 모범적으로 크는 것뿐이죠. 그런 면에서 전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 이걸 돌려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사강은 들고 온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필름 회사 로고가 선명한 투명한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카메라 안에 들어 있는 필름을 돌려주려면 일단 사진을 현상해서 봐야 했어요. 누군지 알아야 돌려줄 수 있었으니까요. 일부러 사진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에요. 현상소 주인 말로는 이게 아주 오래된 필름일 거라고 말하더군요.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 같대요. 사진 상태는 좋지 않아요. 필름은 그 봉투 안에 같이 들어 있어요.”

“카메라 안에 있던 필름을 결국 인화한 거군요.”

지훈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듯 점차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나갔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사진 속의 현정이 서 있는 것처럼 정면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 몇 개가 그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강은 지훈을 말없이 바라봤다. 흩어지고 부서진 수많은 말이 독백의 형태로 각자의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침묵은 실연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언어였다. 윤사강과 이지훈 사이의 대화를 누군가 책으로 옮겨놓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많은 쉼표와 말줄임표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지훈이 마침내 팔짱을 풀고 사강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을 땐,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카메라 안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당신 겁니다.”

지훈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필름이 들어 있다는 거, 몰랐다는 건가요? 제주도 사진들이었어요.”

“제가 그걸 알고 모르고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주도 사진이든 뭐든.”

그는 뭔가 억누르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 모임에 카메라를 기념품으로 내놓는 순간, 그건 이미 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내놓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도 마찬가지구요.”

“사진은 책이나 반지하고는 달라요. 사진이라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필름을 정말 제가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훈이 사강을 응시했다.

“입장을 바꿔보죠. 만약 당신이 지금의 나였다면 그 사진들이 보고 싶었을까요?”

“저는…… 네. 아마 보고 싶었을 거예요.”

“거짓말.”

지훈이 낮게 웃었다.

“당신은 결코 그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필름 같은 걸 누가 가지고 있든 상관 안 했을 거예요. 그럴 만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 같은 데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어차피 그 자리는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하는 자리였어요. 교환이란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잔인하게 말해 개인적인 폐기였죠.”

“하지만 전 카메라를 가져간 거지 그 안에 든 필름을 가져간 게 아니에요. 사진은 카메라가 아니니까요.”

“그건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개인적인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맘이 불편하지 않아요? 그쪽 여자 친구 얼굴을 제가 알 필요까진 없잖아요. 그건 당신도 원치 않는 일 아닌가요?”

“필름을 현상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그 사진들은 없었을 겁니다. 필름 속에 영원히 봉인돼 있었겠죠. 굳이 필름을 인화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지훈이 사강을 빤히 바라봤다.

사강은 지훈의 눈을, 순식간에 새겨진 입가의 희미한 주름 두 개를 바라봤다. 필름을 현상했던 건 사강답지 않은 일이었다. 지훈의 말대로 그것은 타인의 연애 사진이었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 불순하게 끼어드는 주제넘고 멍청한 짓이었다. 조금 더 멍청한 짓은 이지훈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고, 가장 최악은 후배의 데이트 자리에 자신이 나온 것이었다.

사진 속의 연인들을 보면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어째서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진 걸까. 정말 책 때문에 이곳에 나온 걸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조차 없었다. 사강은 들고 있던 인스턴트 수프 그릇을 가만히 바라봤다. 식어버린 크림색 수프는 물기 없이 말라 응고되어 있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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