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도쿄

도쿄는 자동판매기의 도시다.

서울이 프랜차이즈 카페의 도시이고, 호치민이 시끄러운 오토바이들의 도시라면, 도쿄는 분명 전 세계에서 자동판매기가 가장 많은 도시일 것이다. 일본에선 자동판매기로 살 수 있는 게 살 수 없는 것보다 많다. 자동판매기 콘돔. 자동판매기 바나나. 속옷, 지갑, 야채, 티셔츠, DVD, 잡지, 우표, 전동칫솔, 절대 머리엔 맞지 않을 것 같은 야구 모자와 버튼이 자주 고장 나는 싸구려 삼단 우산…….

약속 장소를 확인하고 지훈은 호텔 근처 공원 반짝이는 수프 자동판매기 앞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터치 패널 방식의 수프 자동판매기는 사람처럼 우는 얼굴로 의인화되어 있었다. 버섯스프. 크램 차우더. 러시안 야채수프. 콘 스프……. 지훈은 주머니에 동전이 있는지 뒤적였다. 지훈은 동전을 넣고 버섯스프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곧 기계에서 스프를 끓여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THANK YOU!

자동판매기에서 번쩍이며 커다란 문장이 떴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던 자판기가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지훈은 뜨거운 스프를 조심스레 꺼냈다.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녹인 버터와 잘 볶은 밀가루 냄새가 났다. 그는 약지로 수프를 찍어 맛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어 수프를 찍어 먹었다. 처음보다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프 자동판매기 앞에는 모두 여섯 개의 가로등이 서 있었다.

여섯 개의 가로등 중 세 개의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었다. 드문드문 꺼진 가로등 앞에는 커다란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세 개의 나무 벤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훈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 몇 개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어린 시절 그가 자랐던 5층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벚꽃들을 연상시키는 연분홍색이었다. 그는 봄이 다가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지훈 씨 핸드폰인가요?”

모든 건 그날 밤, 지훈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지훈이 전화 속 여자에게 물었다. 지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그녀를 알고 있었다고 얘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사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분명 “문자 메시지를 남겼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나요”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지훈은 그 문자 메시지를 똑똑히 기억했다. 조금 늦게 확인하긴 했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쪽이 지금 제가 필요한 걸 가지고 있어요. 그걸 빌리고 싶은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사라졌을 부드러운 이음새에선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귓속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지훈은 핸드폰을 바짝 귀에 갖다 대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독서로 장시간 굳어 있던 허리를 펴고,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짧고 강한 심호흡을 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는 동안 여자의 목소리엔 많은 쉼표가 찍혀 있었다.

오전 일곱시에 만나자는 건 지훈이 박미소를 통해 사강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지훈은 윤사강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그녀가 시네마테크의 작은 정원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테이크아웃 커피 잔의 커피를 모두 쏟아 부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만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도쿄 행 비행기 안에서 스치듯 자신을 관찰하는 그녀를 목격한 바로 그 순간에도, 계속.

*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필름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지훈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트위터에 들어갔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윤사강의 트위터를 찾아냈다.

익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SNS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는 너무 쉽게 증명해냈다. ‘언젠가는 젊은이들이 온라인에 남긴 과거 행적들을 떨쳐내려고 자기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사람이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라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아이러니를 내포했다. 자신이 창조한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모델을 향해 그토록 위험한 예언을 할 수 있는 CEO라니.

구글 검색 엔진으로 찾아낼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지훈처럼 검색에 능한 사람이라면 출신학교 정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훈은 페이스북에 접근해 같은 이름으로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정보들을 몇 가지 더 수집했다.

그는 추정 가능한 몇 가지 가설을 놓고 고심 중이었다. 가령 첫인상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칼라 없는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단정하고 짧은 손톱은 그녀가 다소 보수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말하는 쪽보단 듣는 것에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능숙해 보이는 화장술이나 의식하지 않아도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펴는 자세가 말해주는 것도 일관되게 그녀의 직업이 가지는 보수적인 특수성이었다. 호텔, 백화점 명품관, 고급 레스토랑, 항공사. 몇 개의 직업군이 지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시감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장 큰 확률은 그녀가 자신의 교육생일 가능성이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우연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가 박미소에게 ‘오전 일곱시’에 만나자는 말을 꺼낸 순간,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다. 사강은 지훈에게 자신이 어떻게 그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는지 설명했다. 곧이어 사강은 미도의 트위터를 통해 처음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미도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대한 글을 처음 쓴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에 ‘정미도’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광신도들처럼 집단적인 최루성 슬픔에 잠겨 있었으므로 누군가 그녀의 실체에 대해 말해준다 해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에 빠져 현실을 왜곡했을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지훈 역시 그랬다.

“제가 당신 필름을 가지고 있어요. 돌려드리고 싶어요.”

사강이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추었다.

“이지훈 씨가 가지고 있는 사강의 책을 지금 꼭 빌려주셨으면 해요. 무례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아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뇨.”

지훈이 짧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제가 가겠습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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