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사강의 방에 전화벨이 울린 시각은 밤 10시쯤이었다.

사강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기 위해서였다.

“선배! 계셨잖아요!”

전화기 너머 거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서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없는 줄 알았어요. 노크해도 묵묵부답. 너무해요! 저 미소예요, 선배.”

사강은 그제야 이 호텔이 편히 쉬고 싶은 고객들을 위해 배려한 특별한 서비스를 떠올렸다. 스마트키를 꽂아 넣는 키 옆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DO NOT DISTURB’ 버튼을 누르면 방에서 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말이야?”

“저 어떡해요. 죽을 거 같아요.”

“혹시, 기장님 때문이야?”

미소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사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자신과 같은 층에 묵고 있는 정수였다. 뉴욕과 도쿄를 거쳐오는 동안 사강은 정수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부기장이 선동해 비행팀 전부 함께 뉴욕의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도 그녀는 편두통을 호소하며 일찌감치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정수는 사강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것은 정수가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여준 냉담함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익숙한 승무원들조차 그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정수의 냉정함이 오랜 시간의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상처받았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자신의 무능을 용서하는 쪽이 더 어렵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것도, 그를 뿌리쳤던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불편한 감정은 아직까지 사강을 괴롭히고 있었다. 사강은 자기 죄의 재판관이 되길 자처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를 캐묻고, 죄가 있는지 심문했다. 그녀는 자신이 최악의 연애를 선택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회사에 일할 수밖에 없는 동료였다.

1514호.

한정수의 방은 사강의 방에서 멀지 않았다. 복도를 나서기만 하면 그들은 언제든 마주칠 수 있었다. 좁고 어두운 호텔 복도에서 그의 얼굴을 외면하는 일 따윈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렌즈를 찾겠다고 변기통 속에 손을 넣어 휘젓던 그날처럼 사강은 스스로를 조금도 신뢰할 수 없었다. 불안정한 자신을 긴 밤으로부터 지켜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지금은 그것이 『슬픔이여, 안녕』이어야 한다고 온몸이 외쳐대고 있었다.

“선배, 제 말 듣고 계세요? 여보세요?”

흥분한 미소의 목소리가 호텔 내선 전화기 너머 계속 들려왔다.

“기장님 때문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인데 방에 가서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중요한 일이니?”

“일생이 달린 문제일지도 몰라요!”

“그래. 문 열어놓을게.”

사강은 미소에게 빠르게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욕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천천히 손가락 사이에 비누 거품을 내고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적셨다. 사강은 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다시 한 번 하얀색 접시 위에 담긴 새 비누를 뜯어 손을 씻었다. 생각해보면 비누 하나를 다 쓸 만큼의 시간도 정수와 보내지 못했다. 사강은 손가락 사이 가득 낀 투명한 비누 거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미소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얼굴 표정만으로 열거했다. 박미소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승무원에 선발된 건 연극배우만큼 다양한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사실 저 그날이거든요. 에스트로겐 과다 분비로 인한 정신착란인가? 아님 배란기?”

“네 감정이 아니라 이유를 말해줘야 도와줄 수 있어.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봐.”

미소는 이제 사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베개를 두 팔로 껴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미소는 습관처럼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정확하게 15분 전에요. 제가 선배 호텔방 초인종을 누른 게 전화 온 직후예요.”

“전화?”

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에서 제가 황당한 짓을 했거든요. 미친 거죠, 한마디로.”

미소 역시 자신의 감정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진지해지던 미소의 눈빛이 다시 샛길로 빠져들 듯 장황해지고 있었다.

“도쿄 왔다 갔다 하면서 방사능에 오염돼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저도 서울에서 2리터짜리 생수 챙겨 와야 할까요?”

“흥분하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해봐.”

“선배도 알다시피 이번 도쿄 비행에 승객들이 많지 않았잖아요. 유독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디 맘에 드는 사람 만나는 게 쉽나요? 소개팅 나가도 순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아요?’ ‘비행기 타서 부럽네요’ ‘국내선 타요, 국제선 타요?’ 이런 질문만 하질 않나. 매일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만 하는 게 너무 한심한 거예요. 선배도 알다시피 제가 승무원 시험 여러 번 떨어져서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거든요. 집에선 직장 있을 때 시집가라고 난리고, 우리 엄마 성격 선배는 절대, 네버! 모르실 거예요, 으, 정말 얼마나 쥐어짜는데요, 결혼해라, 결혼해라, 들들 달달 볶아치고 섞어 치고 그래서…….”

미소의 넋두리를 계속 듣고 있다간 밤을 새워도 중요한 얘긴 하나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사강은 그녀의 말을 끊고 질문 대신 이야기의 핵심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그 남자한테 휴대폰 번호를 남겼다?”

“역시……! 선배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요. 통달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무장님한테 갔으면 퉁박 먹고 머리 쥐어박혔을 거예요.”

“대담했네.”

“그 남자가 보고 있던 책에 남겼어요.”

“책이라구?”

“알아요, 알아.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

“근데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사강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하자 미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데가 있어요.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미소는 이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내뱉는 와중에도 지금의 상황을 몹시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농담하는 것 같아요. 여자 좋아하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꼭 저한테 장난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나가지 말까 봐요. 헷갈려요.”

“만나자고 했니?”

“이쪽으로 오겠대요.”

가라앉아 있던 미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의미를 뒤쫓기 위해 자주 미간을 좁혔다.

“널 만나러 온다는 데 그게 왜 문제지?”

사강이 미소를 바라봤다.

“아뇨. 진짜로 문제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 남자가 저한테 대뜸 질문을 하는 거예요. 혹시 프랑수아즈 사강 좋아해요?”

“사강을 좋아하냐고 물었다구?”

“네!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물어보니까 어쨌든 대답을 하긴 했어요. 사강이요? 제가 아는 사강은 윤사강밖에 없는데요, 라고.”

“그 남자한테 내 이름을 말했다고? 왜?”

“죄송해요, 선배. 하지만 제가 아는 사강은 선배밖에 없다구요!”

미소의 눈엔 이미 다른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 한참 동안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에 대한 얘길 하는 거예요. 뭐 거기까진 이해해요. 입국카드 쓸 때, 그 책을 받침으로 썼거든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다음 말이에요. 만나자는 거예요. 분명히 만나자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가슴이 막 뛰는데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제 귀를 다 의심했다니까요.”

미소는 잠시 길게 숨을 내쉬더니 사강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주세요. 처음 본 여자한테 오전 일곱시에 만나서 밥을 같이 먹자는 거, 선배는 이해가 되세요? 저녁이 아니라 아침 일곱시에 말이에요!”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