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회>

사강은 언제나 호텔을 ‘DO NOT DISTURB’의 세계라고 불렀다.

자폐적인 부자가 머물기에 호텔만큼 좋은 곳은 없다.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온 사강은 여느 때처럼 문고리에 ‘PLEASE DO NOT DISTURB’ 표지를 걸고, 호텔의 방문을 닫았다.

서울에서 도쿄, 도쿄에서 다시 뉴욕으로 가는 비행 스케줄은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실질적인 비행시간만 15시간 이상인 데다가, 서울에서 도쿄까지 가는 승객과 도쿄에서 뉴욕까지 가는 승객들의 숫자가 달라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강은 여러 가지 상념에 시달렸다.

침대 옆에 붙은 전자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강은 가방을 열어 작은 용기에 든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최근 몇 달 동안 사강은 대부분 끼니를 포기했다. 잠을 자야 할 시간에 터무니없는 식욕이 생기고, 뭔가 먹어야 할 시간에는 정작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게 이유였다.

사강은 짐을 풀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빈 천장 위에는 화재 예방을 위해 달아놓은 스프링클러가 빨간 불빛을 반짝이며 작동하고 있었다. 침대의 옆자리는 누군가 누워 있길 바라는 것처럼 비어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하자 침대에서 일어난 사강은 창문을 열었다. 도쿄의 쓸쓸하고 매캐한 공기와 밤이 되자 조금씩 켜지기 시작한 창백한 네온사인 빛이 조금씩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만약 도쿄 시내에 눈에 띄게 줄어든 외국인들의 숫자만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이곳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창가에 서서 그녀는 왼손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호텔 픽업 버스를 타고 오며 바라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빠르게 걸었다. 사강은 뉴욕의 호텔방에 있는 동안 CNN과 KBS월드가 반복해서 내보내던 처참한 후쿠시마 동영상을 떠올렸다. 부서진 도시 전체가 흙탕물에 잠겨 무서운 속도로 떠밀려나가고 있었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지진대 위에 사는 기분은 어떤 걸까? 자신이 살던 집의 지붕이 어느 날 새벽 2시에 침대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면. 예고 없는 교통사고나 말기 암 선고처럼 말이다.

인간은 슬픈 쪽으로만 평등하다.

인간은……

어쩌면,

행복한 쪽으로는 늘 불평등했다.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강은 계속 지훈을 생각했다.

이지훈은 기내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커피나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그것에 무섭게 집중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노인이 손쉽게 기내식을 먹을 수 있도록 칼과 나이프의 비닐 포장을 차분히 뜯어주었다. 그는 노인을 위해 따뜻한 녹차를 주문해주기도 했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남자였다.

지훈이 대부분 독서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강은 비행기 안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훈이 앉은 쪽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가 책장의 귀퉁이를 조그만 삼각형 모양으로 접는 걸 볼 수 있었다.

지훈이 읽고 있는 책은 사강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내놓은 책이 아니라 한국어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의 기념품’으로 고른 『슬픔이여, 안녕』을 읽기 위해 한국어판을 새로 산 걸까. 그렇게까지 할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던 걸까. 혹시 그도 필름을 인화했던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그 책을 읽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윤희의 말처럼 사강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지훈을 알아보지 못한 건, 사내 교육이 있던 날 콘텐트렌즈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공항 터미널 2층 여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사강은 극심한 통증 때문에 콘택트렌즈를 뺐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기에 렌즈가 너무 작고 얇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렌즈는 이미 그녀의 손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사강은 고개를 숙이고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변기 위에 구조를 위해 마련한 뗏목처럼 렌즈가 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으로 변기의 물을 마구 휘저었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분명 얼빠진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강은 주저앉아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사강은 그날,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했다.

그것은 ‘일어난’이 아니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라면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냉정한 얼굴로 잘라 말했을 것이다.

“윤사강, 그건 이미 ‘저질러진’ 일이야.”

정수와 헤어진 날, 사강은 렌즈를 잃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새벽 물안개에 뒤덮인 음습한 저수지처럼 바뀌어 있었다. 인천공항의 현대식 시설물들 역시 사강의 눈에 무의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대기실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욕실의 불투명 유리문 안에 서 있는 것같이 도무지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사강이 넘어지지 않고 강당까지 걸어온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공항 안전요원들과 청소차를 지나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100석 규모의 강당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나 환호 이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순간 사강은 소외당한 고아처럼 위축됐다.

사강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때 사강은 그것이 불시에 타격 받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중간 중간 폭소가 터졌다. 몇몇은 질문을 던졌다. 명료하고 부드러운 강사의 목소리는 그녀의 슬픔에 확성기를 달아놓은 듯 강당 안을 울렸다.

그것이 사강이 처음 목격한 이지훈과 이지훈의 목소리였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만 들었다면, 그녀는 그를 한순간에 알아봤을 것이다.

사강은 자신이 탄 비행기 안에 앉아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있는 이지훈을 바라봤다. 사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정체불명의 책이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그녀는 뜻밖의 우연들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폐기 처분 되었을 것이라 믿었던 책 더미가, 누군가의 쓰레기통 속에 있어야 할 물건이 바로 눈앞의 저 남자 때문에 부활해 있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버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책을 보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마 동안 택배 상자조차 뜯어보지 않았단 사실을. 그래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똑같은 책을, 똑같은 상자에 넣어, 똑같은 시간에.

『슬픔이여, 안녕』은 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념일 즈음에 왔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강은 1년 동안 자신이 이 책을 ‘누가’ 보냈느냐를 골몰하다가 ‘왜’ 보냈는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녀에겐 책을 읽는다는 게 무의미했다.

어쩌면 책 안에는 정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책 안의 실질적인 메모나 밑줄이 결정적인 힌트로 작용해 이 책의 진짜 의미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외국어로 된 책을 보냈는지, 왜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인지, 『슬픔이여, 안녕』이 어떤 의미인지…….

사강은 책의 내용보다는 누가 책을 보냈느냐에 골몰하느라 자신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 받은 책을 가장 먼저 읽는다. 선물 받은 목걸이를 그 자리에서 걸고, 선물 받은 반지를 눈앞에서 끼어본다. 선물이란 그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준 사람의 욕망을 눈앞에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결국 책은 그것을 아직 읽지 않은 미지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고,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강에게 지금 책이 없었다.

평생을 통틀어 자신과 이름이 같은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고 싶은 순간에, 정작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강은 그 순간 지훈을 떠올렸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읽고 있던 사강의 소설을, 그가 가지고 있을 네 권의 책을 생각했다. 이지훈이 만약 도쿄에 계속 머물고 있다면, 그가 이틀 이상의 출장 중이라면, 그는 지금 이 시간 자신과 같은 도쿄 어딘가의 호텔에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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