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던 레스토랑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사강 쪽으로 걸어왔다. 
 “반가워요. 전 정미도예요.”
 여자가 활짝 웃자 작은 덧니가 드러났다.
 스무 살은 넘었을까. 어쩌면 어깨에 멘 저 배낭 속에 수학이나 영어 교과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은 미도를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어깨가 강조된 검정색 파워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구겨지기 쉬운 얇은 린넨 소재의 블라우스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런 초봄엔 어울리지 않았다. 발목과 복사뼈가 전부 드러난 밑단이 짧은 팬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윤사강입니다.”
 사강의 경우, 자신의 이름은 대부분 제복의 왼쪽 가슴에 매달린 명찰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름을 얘기하며 밝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네”라고 짧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우리 직업 맞추기 할래요?”
 사강은 당황스런 얼굴로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도는 모두가 우울한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어디에서나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이 무표정이나 절망 이외의 표정이 엿보였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과 왼쪽 뺨에 팬 보조개는 가벼운 흥분 때문인지 더 빛나 보였다. 그러나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그들과 무엇이든 얘기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선 실연 후 생길 수 있는 조울증의 기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지금 조증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미소와 활기를 무장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가.
 “백화점에서 일하지 않으세요? 자동차 판매 영업을 한다거나. 제약회사 영업 직원이거나 보험일 수도 있겠구요.”
 사강이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저 학교 다닐 때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알바 한 적 있어요. 취직하려고 속성 메이크업도 배우고 그랬었는데. 그쪽은…… 비서 아니세요? 회장님 비서.”
 “제가 비서처럼 보여요?”
 “네. 적어도 저랑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강은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같이 짧게 자른 미도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저런 스타일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귀 전체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 덕분에 그녀의 귀에 달린 여러 개의 피어싱과 별 모양의 금속 귀걸이가 더 크고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사강의 눈에 들어온 건 너무 말라서 얇은 빗자루만 한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몸이었다.
 “추우세요?”
 사강이 미도에게 물었다.
 “원하면 제 재킷을 벗어드릴 수도 있어요. 전 좀 덥거든요.” 
 “안 추워요. 괜찮아요.”
 미도가 웃었다.
 “이 재킷, 안감이 두툼해서 꽤 따뜻해요. 사양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추워요!”
 미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미도는 틀림없이 추워 보였다. 떨고 있진 않았지만 입술이 파랗게 질린 걸 보면 곧 추위를 느낄 것이다. 특히 맨다리에 얇은 바지를 입었으니 그 속으로 3월 아침의 찬 공기가 잔뜩 들어와 앉았을 것이다.
 사강은 오 분이나 십 분 후, ‘춥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신체적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질문을 던진 건 타고난 예민함 때문이라기보단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다. 사강은 기내에서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마른기침을 하고, 오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사강이 미도에게 질문을 던진 건 천성적인 마음씀씀이 때문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녀의 직업병이었다.
 “아…… 이제야 알겠어요. 제 옷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도가 그제야 이해한단 얼굴로 사강을 바라보았다.
 “이 옷, 하나도 춥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전혀 춥지 않으니까. 말짱해요. 보기보단 통뼈에요, 저! 그나저나 참 특이한 모임이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게 놀랍지 않아요? 전 저만 나오면 어쩌나 되게 걱정했었거든요. 혼자서 밥 먹는 거, 처량 맞잖아요. 근데 여기 와보니 너무 안심이 돼요. 대성황이잖아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대체로 조용했다. 게다가 빈 의자를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상황에서 대성황이란 단어를 떠올린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도는 이곳의 분위기를 꽤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이 톤의 목소리가 이곳과 엇박자로 계속 어긋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생각하면 전 엄청 위로가 돼요. 적어도 나만 슬퍼할 일은 아닌 거잖아요? 왜 아픈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위로받고,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요? 안 그런가? 끼리끼리 동병상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나중에 다시 모두  커플이 되겠지만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 뜻밖에 잘생기고 예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미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저 남자, 어떤 것 같아요? 아까부터 눈에 띄던데.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미도가 남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는 레스토랑에 있던 신문을 들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사강은 남자들의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꽤나 단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명찰도 제복도 없는 사적인 공간이었고,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해져 있었다.
 쌍꺼풀 없는 남자의 눈매는 차갑지만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테 없는 동그란 안경은 남자의 차가운 느낌을 적절히 교정해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성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옅은 주름들이 보였다. 자주 웃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양쪽 입가의 옅은 세로 주름과 눈 옆에 자연스레 생긴 가로 주름들. 그러나 세 번째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강은 고개를 단호히 돌렸다. 
 하얀색 치노 팬츠와 검정색 캐시미어 터틀넥은 그와 꽤 잘 어울렸다.
 여간해서 흰색 바지를 입지 않는 보수적인 한국 남자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패턴이었다. 디자이너일까?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옷을 좋아하고, 차려입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을 줄 아는 능력은 의외로 희귀하다.
 하지만 사강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애써 무시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해,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강은 가방에 든 물건을 생각했다. 처리하기 힘든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처리해줄 전문가를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람을 전문 용어로 ‘킬러’라 부른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에선 사람을 죽이는 전문가만 존재하지 않는다. 물건, 추억, 시간을 죽이는 전문가도 필요해지는 법이다. 사강은 그것이 결국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이 결성된 것도 누군가의 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5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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