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어느 나라에 가든 어렵지 않게 시차에 적응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몽골에 가면 태어날 때부터 달리는 말을 탔던 몽골인처럼 보이고, 인도에 가면 평생 손으로 밥을 먹었던 인도인과 흡사해 보인다.

어디서도 섞이거나 스미는 사람들. 온몸에 흙과 바람의 냄새를 싣고 다니는 사람들. 당장 동네의 시장으로 달려가 그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을 사 입고, 손과 눈빛을 사용해야만 하는 그들의 인사법을 익히고, 현지인들이 신는 신발을 찾아 자신의 오래된 나이키부터 벗어 던지는 여행의 달인들. 그들 중에는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는 대신, 선의를 지닌 낯선 사람의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며 다양한 도시를 여행하는 가난한 여행자도 많다.

그들은 사람들로 들끓는 재래시장에서도 가장 오래된 공방을 찾아내고, 여행 책이나 지도에 밑줄을 그었던 것들을 직접 실행한다. 그렇게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요가와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배우고, 낙타 몰이꾼들이 가득한 자이푸르에서 낙타 모는 법을 진지하게 배운 친구를 사강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배우고 싶었던 것이 ‘짜파티’를 만드는 법이었다는 표정으로 손톱 사이에 꼬질꼬질 때가 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밀가루 반죽을 빚는 사람들 말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 우연한 여행 때문에 낯선 곳에서 삶이 결정되곤 한다.

사강은 자신 역시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호텔을 떠도는 ‘호텔 노마드’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고, 대한민국 여권을 사용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공항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무국적 보헤미안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공항 대기실 의자를 안락한 침대처럼 느끼고, 밤과 낮이 쉼 없이 바뀌는 시차에도 드릉드릉 코를 골아대며 잠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호텔의 이방인이 아니라 호텔의 주인처럼 살 수도 있었다. 바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우연히 부딪힌 사람과 기약 없는 섹스를 하고, 고향에 있는 멍청이들에 대해 떠들고, 허기가 지면 몇 시가 됐든 룸서비스로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건 어딘가에 정착하고, 작은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삶이었다. 재작년에 심은 라일락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눈으로 가늠하고 즐거워하는 삶 말이다. 작은 마당과 마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강이 원했던 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반경 안에 있는 익숙한 것들을 손으로 만져보며 코끝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겨우 네 시간 전까지만 해도 두꺼운 겨울코트를 입고 있다가, 여름용 탱크톱으로 바꿔 입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더위만큼이나 익숙해지지 않는 세계. 어떤 날은 프랑스어와 독어가, 어떤 날은 경전의 주술처럼 이어지는 이슬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삶에 편입되었다는 것에 사강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바그다드의 뜨거운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졌는데, 서울에선 폭설이 내리는 영화의 몽타주 같은 삶, 툭툭 끊어져 연속성 없이 이어지는 단절감이 곤혹스러웠다.

사강은 호텔 키를 받아 들고 막 방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정적과 어둠이 싫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호텔의 텔레비전을 켜고, 이전의 투숙객이 제멋대로 맞춰놓은 볼륨을 컨트롤했다. 사강은 언제나 소리 나는 것들의 볼륨을 최대한 줄였다. 에어컨과 텔레비전, 라디오, 전화기, 헤어드라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비행으로 예민해진 몸은 달라진 공기와 낯선 언어의 틈을 벌리며 의미를 수집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가끔 그런 것들에 부대끼며 텔레비전을 꺼놓으면 이번엔 날카로운 정적이 낯선 공기로 부풀어 오른 외로움을 찔러댔다. 눈에 보일 정도로 깨끗한 호텔의 이불과 베개에서 나는 희미한 세제 냄새도 언제나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호텔의 구김 없는 침구류들은 조금의 오차 없이 각을 맞춰 승무원 제복을 다리던 주니어 스튜어디스 시절을 연상시켰다.

사강은 호텔에서 자신의 짐을 트렁크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도시가 어디든 하루나 이틀을 넘기지 않고 곧 떠날 것이므로 옷을 꺼내 일부러 호텔의 옷장에 걸어두지 않았다. 갈아입은 속옷은 따로 분리해 지퍼백에 넣어 트렁크 속에 넣었고, 세탁 서비스를 맡길 일 따윈 절대 만들지 않았다. 화장품 역시 쓰는 즉시 트렁크 속에 든 파우치 안에 집어넣었다. 지갑이나 여권을 생각 없이 탁자 위에 놓아두는 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방에 가지런히 넣어두고 필요한 것들만 그때그때 꺼내 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을 자신도 모르게 호텔에 놔두고 갈까 봐 늘 불안했다. 사강은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호텔에 흘리고 왔다는 불안감에 로비까지 내려왔다가 호텔방에 다시 올라가길 반복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고 긴 체크 리스트를 만들곤 했다.

“처음엔 나도 그랬어. 점점 나아질 거야.”

그것이 비행을 시작하는 승무원들이 겪게 되는 증상 중 하나라고 사무장이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호텔에 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짐을 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문 앞에 ‘PLEASE DO NOT DISTURB’ 푯말을 걸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며칠을 체류하든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이지 않았다. 호텔의 하우스 키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사강이 고집한 호텔 생활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공항에서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그 나라의 시간을 체크하고, 자신이 자지 못한 잠의 총량을 계산해 먹어야 할 수면제의 양을 정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방에는 언제라도 잠들 수 있도록 두꺼운 수면용 커튼이 늘 쳐져 있었다. 스톡홀름이나 헬싱키 같은 백야의 도시에선 호텔의 커튼은 한 번도 올려지지 않았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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