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다음 날, 회의를 마친 지훈은 이른 저녁 호텔에 돌아왔다.

본사와 통화한 후, 그는 일본 체류 일정을 하루 더 연장했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 마시고, 죽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그는 일찍 침대에 누워 독서 스탠드를 켰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슬픔이여, 안녕』을 끝까지 읽을 생각이었다.

도쿄 지진 때문에 생각보다 회의 일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호텔에서 아예 책을 꺼내지도 못했다. 물론 비행기에서도 생각만큼 책을 읽지 못했다. 신경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지훈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날따라 도쿄행 비행기에는 빈 좌석이 많아 보였다. 조금 더 넓은 자리로 이동해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손님들이 눈에 띄었고, 승무원들도 굳이 사람들의 이동을 막지 않는 눈치였다.

“어르신.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데 편하게 옆 통로 쪽 자리로 이동하실래요?”

지훈과 앞뒤로 텅텅 빈 좌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비어 있는 휑한 좌석들을 놔두고 딱 붙어 앉아 있는 유일한 승객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안 불편해!”

노인은 순간 적의에 찬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자리에 앉는 게 당연해!”

외할머니의 오랜 소원대로 형이 기적처럼 일흔의 노인이 된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 정한 규율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원칙주의자. 그 장소, 그 자리에서, 늘 먹던 그것이 아니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고집을 부리는 형.

노인은 오렌지 주스가 먹고 싶다거나, 물이 마시고 싶다는 얘기를 승무원이 아닌 지훈에게 말했다. 화장실을 찾아달라고 했고, 면세품을 소개한 기내 잡지에 실린 향수 가격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지훈의 눈에 노인의 목덜미와 손등에 찍힌 검버섯이 낙인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 익숙지 않은 노인에게 그것은 일종의 미아 상태였다.

지훈은 노인의 요구를 피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 고작 두 시간 정도의 비행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비행이 끝나고 입국 수속을 마치자 노인은 돌아가는 지훈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노인은 지훈에게 가방 안에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내주었다. 그는 지훈을 손을 잡고, 방향이 달라 아쉽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훈은 잠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폭설이 내리듯 한꺼번에 머리카락이 새고 구부정하게 늙어버린 형을 보는 것 같은 회한을 느꼈다.

지훈은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슬픔이여, 안녕』을 꺼냈다.

그때, 책 안에 뭔가 불룩하게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것이었다. 지훈은 책의 불룩한 부분을 손에 잡고 조심스레 책장을 펼쳐 들었다. 책에서 매끈한 검정색 볼펜 하나가 흘러나왔다. L항공사 마크가 새겨진 항공사 볼펜이었다. 지훈은 침대에 떨어진 볼펜을 침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책을 읽으려고 그가 왼쪽 상단의 맨 첫 줄에 눈을 고정했을 때,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지훈은 다시 한 번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010-6543-XXXX

책의 왼쪽 귀퉁이 위에는 볼펜으로 눌러 쓴 휴대폰 번호가 보였다.

반듯하면서 각지지 않은 통통한 모양의 숫자들로, 나이 어린 여자들의 글씨체에 가까웠다. 지훈은 그것이 지금 자신의 테이블 위에 있는 이 항공사 볼펜으로 쓴 숫자라는 걸 알아챘다. 6543? 눈에 익거나 익숙한 번호가 아니었다. 지훈은 테이블 위에 있던 검정색 볼펜을 집어 들었다. 언뜻 로켓 모양처럼 보이기도 했고, 날개를 제거한 비행기 몸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볼펜을 보자, 지훈의 머릿속에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누군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L항공사의 아이보리색 제복을 입은 여자 승무원의 모습이었다. 노인에게 볼펜을 가져다준 것도, 출국카드를 대신 써준 것도 그 승무원이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흔들리는 비행기에 서서 종이에 뭔가를 기입하려면 쟁반이나 책처럼 종이를 받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지훈은 읽고 있던 『슬픔이여, 안녕』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노인 옆에 있던 자신이 입국카드를 대신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똑같은 제복을 입고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한 여자 승무원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승무원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비행기 복도를 천천히 지나치며 자신을 관찰하듯 스쳐지나가던 여자와 벨을 누를 때마다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다가와 뜨거운 녹차와 주스를 내밀었던 여자.

더 이상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의미 없이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귀퉁이에 적힌 숫자가 책 전체에 흘러내려 문장들을 차례로 뭉개고 있었다. 침대에서의 독서는 책 안에 있던 비밀스런 숫자들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일어나 호텔 미니바에 놓인 작은 진토닉을 꺼냈다. 그는 호텔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정이 지나 내일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지훈은 당장 전화번호를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충동이었다.

책 위에 적혀 있던 번호가 아이보리색 제복을 입고 있던 여자의 살 끝 위에 와 닿는 것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훈은 텅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지훈에게 밤새도록 여자와 섹스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현정과 헤어진 후,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침이면 쌓여 있는 적당량의 성욕을 샤워 부스 안에서 해결했다. 겨울 온실처럼 느껴지는 무채색의 샤워 커튼 안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고요히 사정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거대한 관엽식물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남자에게 번호를 남긴 여자에게 연락하지 않는 건 일종의 무례함이 아닐까.

지훈은 미니바 안에 있는 보드카 하나를 더 땄다. 그는 보드카를 한숨에 들이켜고 맥주를 서너 병 더 마신 후, 호텔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 불이 드문드문 꺼져 있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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