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만약 세상에 공항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화의 엔딩이 지지부진해지거나 밋밋해졌을까.

연인이 헤어지고, 부녀가 안녕을 고하고, 모녀가 부둥켜안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곳으로 공항만큼 극적인 곳은 없다. 오해가 이해로, 절망이 희망으로 뒤바뀌는 마법의 장소. 어쩐지 저 닫힌 문 너머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아 가슴 벅찬 곳.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영화의 엔딩이 ‘공항’에서 끝난다는 진저리나는 진부함에도 공항 엔딩에 환호하는 것이다. 공항에서의 이별은 언제나 눈물 날 만큼 낭만적이니까 말이다.

“만약에 공항이 없었다면 작가의 절반은 원고의 끝을 어떻게 맺을까 고민하다가 머리털 꽤나 뜯었을 거야.”

미도는 팔짱을 낀 채 공항 의자에 앉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햇반과 컵라면이 없었다면 한국에 존재하는 작가의 절반은 틀림없이 굶어 죽었겠지. 하긴 작가가 아니라 언니도 거기 포함되긴 하겠네.”

미우가 시큰둥한 얼굴로 미도를 바라봤다. 연달아 면접에서 떨어진 20대 취업 준비생의 얼굴에는 영 생기가 없었다.

한때 미도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그대로 떨어져 고액의 보험금을 타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미우에겐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가끔 미도는 미우의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아주,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발권 카운터에는 트렁크를 든 여행객들과 붉은 깃발을 든 단체 여행객들이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항공사 직원이 단체 여행객들의 발권을 돕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듯 어린 여자아이의 짐이 규정보다 많이 오버되어 발권 승무원과 실랑이가 벌어진 탓에 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아이의 짐에서는 얇은 이불과 즉석밥, 고추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먼 곳에 보내는 딸이 걱정스런 엄마가 넣어줬을 것들이었다. 얼떨결에 얇은 이불과 즉석밥을 받아 든 아이의 아빠가 당황한 얼굴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을 빼내고, 다시 계량된 짐이 승무원들의 손에 실려 컨베이어 벨트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한 듯 딸의 손을 잡았다.

서울에서의 삶을 지구 반대편에까지 이식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엄격한 공항 수하물 규정에 따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공항의 엄격함이란 다름 아닌 늘어난 짐만큼 가격을 더 매기는 오버 차지(over charge)인 셈이다.

미도는 짐들이 점멸하듯 사라져가는 어두운 길목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의 일상으로 밀봉된 트렁크들이 덜컥대는 컨테이너에 실려 비행기 화물칸 안으로 줄지어 쌓여가고 있었다. 무인 카운터 앞에 서서 발권을 마친 미도는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공항 터미널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일상 탈출에 성공했으며, 모험을 떠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항만이 줄 수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였다.

빠르게 탑승 수속을 마치고, 32번 게이트로 이동하는 무빙 워크를 탄 미도의 눈에 아이맥스 스크린처럼 공항의 전경이 펼쳐졌다. 미도는 빠르게 카페와 편의점을 지나 비행기 탑승 게이트로 걸어 들어왔다. 오후 햇살이 가늘게 부서져 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비행기들이 서 있었다. 밤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비행기들이 이제 화물과 승객을 싣고 지구 저편에 있는 이국의 도시로 사람들을 집단 이동시킬 것이었다.

32번 게이트 앞 라운지에 비행기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예 좌석 몇 개를 차지하고 누워 잠을 청하는 배낭족이 있었고, 비스듬히 앉아 아이패드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는 사람도 보였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서류를 마무리 짓는지 빨려 들어갈 듯 노트북을 바라보며 바쁘게 타이핑하는 사람도 있었다.

“으. 배고파. 기내식 먹으라고 컵라면 하나 안 사주는 못된 인간. 그게 얼마나 한다고. 편의점 컵라면 가격은 공항이나 밖이나 다 똑같단 말이야!”

미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미우를 바라보았다.

“참 팔자 좋은 사람들 많지 않니? 어쩜 평일인데도 이렇게 여행을 많이 갈까.”

미도는 공항 의자에 앉아 짐을 끌고 다니는 여행객들을 바라보았다. 면세점에는 담배와 화장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급작스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전화벨 소리였다. 그 순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배터리를 빼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미도는 눈을 감았다.

“보나마나 조 부장이겠지. 나만 포상 휴가 받았다고 질투 나서, 엿 먹이려는 수작이야.”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았다. 대부분 예상보다 한층 더 수위가 높아진 채.

“어우, 우라질! 대표 전화잖아!”

미도는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우가 없는 라운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표가 예정되지 않은 자신의 휴가 일정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미도가 다시 의자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옆에 사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미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회사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너 혼자라도 일본에 가.”

“미쳤어? 이번 여행은 언니가 우긴 거잖아.”

“너라도 가. 호텔 예약 취소하면 돈 날아가.”

“언니!”

“마무리 부탁한다. 마무리 잘해줘. 넌 똘똘하니까 잘할 수 있지?”

“이럴 수가!”

미우가 두 눈을 번쩍 뜬 채 손으로 입을 막고 미도를 빤히 바라봤다.

“왜? 뭐라도 봤어?”

미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미우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살다 보니 언니가 나한테 뒷마무리를 부탁하는 날이 오다니! 그건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본다는 그런 말씀이신가?”

“야, 넌 이런 상황에서도 헛소리가 나오니? 나 먼저 갈 테니까 잘해. 내 짐 잘 찾고. 엉뚱한 데 가서 똑같은 트렁크 들고 튀어나오면 나한테 죽는다!”

“얼른 가시기나 해. 잘 가!”

미우가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불과 1분 전만 해도 미도는 자신이 도쿄행 비행기 대신, 광화문행 공항버스에 오를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구름의 전경이 아니라, 밀려온 흙더미 때문에 거대한 봉분처럼 보이는 영종도의 검은 갯벌을 보게 되리란 것도.

당연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

책을 읽고 있던 지훈은 자신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독서에 집중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것, 슬픔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권태라든지 후회, 아주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아주 행복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슬픔이여, 안녕』은 거실 어느 쪽인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안나 카레리나』처럼 소년 소녀들을 위한 세계명작전집들 사이에 꽂혀 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이라면 지훈이 유일하게 읽은 소설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처음 몇 장을 읽다가 포기해버렸지만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만은 기억했다.

폴과 로제.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당시 유행하던 초콜릿 이름 ‘로즈’와 비슷했다. 초콜릿은 광대뼈 주위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밸런타인데이 때 지훈에게 건네 준 선물이었다. 여자애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형이 전부 먹어버린 초콜릿 이름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지훈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이 책을 선택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놀랄 정도로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 집으로 책을 가지고 온 직후였다.

지훈에게 이 책은 귀를 뚫지 않으면 착용할 수 없는 귀걸이만큼이나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람들 역시 같은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스페인어나 독일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일본어 실력도 문학적인 표현을 살펴가며 읽기엔 모자랐다. 지훈은 책 표지도 제각각이고, 장정과 크기도 모두 다른 책들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책을 선물한 사람은 무슨 이유로 판본도, 출판 년도도, 언어도 다른 책을 네 권씩이나 선물했을까. 책을 구하기 위해 쏟았을 시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손끝에 만져졌다. 지훈이 선물한 폴 오스터 초판본보다 그가 쓰던 고물 타자기를 더 사랑했던 현정이나, 이 책을 거부한 익명의 사람이나 누군가의 고심 어린 선물을 폐기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지훈은 거부당한 네 권의 책을 바라봤다.

그 순간 지훈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밤이면 늘 잠이 오지 않아 고민이던 그에게 그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게이트 입구 앞에서 소설을 읽던 지훈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이었으므로 책을 읽기에는 창가 쪽 자리가 더 좋을 터였다. 옆 좌석에는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실밥이 튀어나온 검정색 중절모를 쓴 채 기내 면세품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짐처럼 보이는 커다란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곧 안전벨트 사인이 켜지고 엄청난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주로에 작은 인형 모형처럼 줄 서 있던 엔지니어들이 승객들을 향해 줄과 열을 맞춰 나란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은 비행기의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인천공항의 조각난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엔진 음과 함께 땅을 박차고 비행기 동체가 땅 위를 부유하는 순간, 그는 긴장감으로 굳어 있던 자신의 어깨가 30도쯤 부드럽게 젖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순식간에 뒤바뀌는 고도를 느꼈다. 귀가 멍해지자 옆에 앉은 노인의 잔기침이 더 늘어났다. 이제 비행기는 하늘로 떠올라 구름 속을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지훈은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고개를 돌려 멀리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행기에선 기장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을 도쿄 나리타공항까지 모실 기장 한정수입니다. 지금 도쿄의 날씨는 쾌청하며, 현지 기온은 섭씨 16도입니다. 오늘 나리타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1시간 45분이며, 현지 시각 4시 55분경에 도착 예정입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