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비행 훈련을 받던 연습생 시절, 사강은 예기치 못한 비행기 사고로 죽은 승객들의 숫자를 헤아려본 적이 있었다.

스위스항공 111기, 이집트에어 990기, 팬암 103기에 탔던 승객들은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했다. 비행기 사고는 확률적으로 극히 미비하지만 과거 역사가 보여주듯 승객들의 전원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 사고의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인 비행기 엔진 고장이 곧바로 추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비행기는 곧바로 추락하지 않는다.

대신 부력과 중력을 이용해 일정 시간 이상을, 사실 꽤 ‘길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을 하늘 위에 떠 있다. 심지어 F-16 같은 전투기는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단지 부력과 중력을 이용해 30킬로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다.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추락의 순간을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이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와 있다”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사강은 바로 그런 공포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한 자신의 이성이 추락하는 줄도 모르고 하늘에 붕 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공포 말이다.

“선배! 저 남자 좀 보세요. 책 읽고 있는 남자요. 초록색 슈트케이스 옆.”

후배 미소가 사강에게 속삭였다.

“제 얘기 안 들리세요?”

사강은 변경된 스케줄의 ‘크루 리스트’에서 막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발견한 후였다. 두통약 몇 알로는 나아지지 않는 두통이 내내 비행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마주치지 않기 위해 1년 동안 힘든 일정을 소화해냈는데 결국 비상사태로 생긴 오차로 정수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지금 뭐라고 했어?”

사강이 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남자. 지난번 사내 교육 때 왔던 그 강사 맞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잖아요. 양복 대신 검정색 터틀넥 입고, 흰색 운동화 신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미소는 사강 옆에 있던 윤희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음…… 맞네. 잘생긴 남자는 내가 좀 오래 기억하지.”

윤희가 말했다.

“근데 저 남자, 강의할 때 풍선 들고 나타나지 않았니? 빨간색이었나?”

윤희가 동의를 구하듯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생수를 무의식적으로 입에 물었다. 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미소, 저 남자한테 관심 있나 보지?”

“그날, 강의 좋았잖아요. 자기계발은 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엔 절실한 문제란 말이에요.”

“강의가 아니라 저 남자 스타일이 맘에 들었겠지.”

“저런 타입의 남자 여자 많겠죠?”

“아님 유부남이거나! 남의 남자, 별거 없어. 여기서도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지. 사람의 눈은 점점 더 낮아지게 돼 있어. 그렇다고 유부남한테 눈독 들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안 그래?”

“어머, 선배님 무슨 말씀을! ‘인생 별거 없어. 남자 다 똑같아. 그 밥에 그 나물이야.’ 그런 말, 저 진짜 싫어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두 사람, 오늘 나리타 찍고 뉴욕 가는 일정이었나?”

윤희가 사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강 선배랑 같이 바로 뉴욕 갔다가 돌아오는 날 도쿄에서 스테이션이에요.”

“나리타에서 승무원 교대 안 해? 이상하네?”

“그건 LA 일정이잖아요.”

“나 요즘 기억력이 왜 이러지? 쌍둥이 낳고 났더니 기억력이 형편없어져. 항공성 치매겠지?”

“저도요, 저도! 다른 데는 참겠는데 뉴욕이랑 LA는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저 잠 안 와서 KBS월드에서 하는 <파리의 연인> 재방송 세 시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봤잖아요. 그게 대체 몇 년 전 드라마야. 이러다 박신양이 내 친오빤 줄 알겠어.”

미소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돈 벌어서 제가 뭘 하나 살펴보니까 월급의 반은 미친 듯이 먹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미친 듯이 다이어트 하는 데 쓰더라구요.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연애를 못 해서 그래. 그러다 너 진짜 미치겠다.”

“맞아요! 윤희 선배는 사내 연애라도 성공했잖아요. 잘생긴 부기장 있다는 소문 혹시 들은 적 있으세요?”

“없어!”

“아……!”

미소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만석 아니지? 도쿄 좌석이 비어 가는 날이 있을 줄 누가 알았니. 밀(meal) 서비스할 땐 좀 편하긴 하겠다만. 니네 밀 몇 개나 들어가?”

윤희는 미소의 말을 가볍게 건너뛰고 사강을 바라봤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윤사강, 너 왜 그래?”

사강은 대답 대신 생수를 마셨다. 아직 혀끝에 녹지 않은 두통약의 맛이 남아 있었다. 사강의 가슴이 점점 더 울렁거렸다. 다음 비행의 쇼업(show up)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속이 좀 안 좋네. 울렁거리고. 토하면 좀 나을라나?”

“그날도 그러더니.”

“그날이라니?”

“저 강사 교육 하던 날. 너 완전 이상했던 거 알아? 렌즈 잃어버렸다고 엎어져서 울질 않나. 난 니네 엄마 돌아가신 줄 알았잖아.”

“뭐?”

“승무원 교육 있던 날, 너 엄청 울었다고. 눈 퉁퉁 부어서.”

그제야 사강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터미널 3층의 탑승동으로 들어가기 전인 듯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저렇게 다리를 꼬고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집중하는 실루엣은 낯이 익었다.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남자는 점점 더 책에 빠져드는 듯했다. 사강은 배에 손을 얹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소화제 몇 알로 속이 좋아질 리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턱선과 안경이 사강의 눈 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한순간 알아보았다. 제주도 사진 속의 그 남자였다. 연인과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던 남자. 며칠 전, 충동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남겼던 바로 그 남자!

사강은 몇 주 전, 그 레스토랑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네마테크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을 그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강은 로모 카메라의 필름 주인을 알아내기 위해 긴 시간 노력했었다. 밤새 100개가 넘는 개인 트위터를 뒤져 정보를 모았고, 결국 눈앞의 남자가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여기저기 조각나 있던 퍼즐들이 자석처럼 제 위치에 와 닿아 조금씩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을 직접 보자 뿌연 유리창을 한 손으로 스윽 닦아낸 기분이었다.

손이 움직인 방향대로 고개를 돌리면 남자의 얼굴은 분명한 방식으로 회전했다. 사강은 몇 주 전 그에 대한 편견을 조용히 수집하던 절망적인 아침 일곱시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제 남자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을 알아맞히는 일은 훨씬 더 쉬워졌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공항에서 홀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사강은 친근한 동료애를 느끼곤 했었다. 이지훈에게 지금 시간은 비행기가 아니라 책 속의 인물들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사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두 개의 시간들이 충돌하는 교통사고 현장에 초보 감식반원처럼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분명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사강은 자신의 가방 속에 든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모두 공항 현상소에서 인화한 사진들이었다.

『슬픔이여, 안녕』과 ‘아홉 장의 사진’.

그러니까 그것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시간들 속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였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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