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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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전에 방사능 때문에 애들이나 입는 우비를 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마케팅팀의 김 대리가 말했다. 그는 유달리 팔의 중간 부분이 아래로 늘어져 얼핏 한복 저고리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런 우비를 입고 있었다.

기상청에선 한반도 지역으로 부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이 방사능 청정 지역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제주를 비롯해 전국에 세슘과 요오드가 검출되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트위터를 통해 지금 내리는 비는 절대 맞으면 안 된다는 경고성 문구가 사방으로 리트윗되기 시작했다. 도쿄만큼 서울도 점점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도쿄 가기 싫어하는데. 그래도 당신은 미혼이니까. 미안.”

“괜찮아요, 강 선배.”

“대신 서울 걱정은 붙들어 매. 며칠 푹 쉬었다 오라구.”

“고마워요. 온몸에 방사능 잔뜩 묻히고 와서 꼭 포옹해드릴게요!”

지훈이 웃었다.

다들 좋아하는 도쿄 출장을 이번엔 아무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훈이 떠맡듯 가게 됐다. 도쿄에는 아시아 총괄 업무를 맡는 팀이 있었다. 일본 법인의 다나카 상을 만나는 건 오전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형식적인 보고에 가까워 복잡한 실무도 없을 것이었다. 회사에서 자주 이용하는 호텔 근처 단골 라멘집에서 두툼한 차슈를 얹은 덮밥과 라멘을 먹고, JR 야마노테센을 타고 이동하면 우에노 공원에서 흐드러진 벚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장마나 우기도 아닌데 지겨울 정도로 비가 내렸다.

지진 뉴스만큼은 아니지만 꽤 우울한 날씨였다. 속도위반 범칙금을 내기 위해 회사 근처 은행에 가던 지훈은 대형 서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자신이 자주 머물던 ‘경제경영’ 섹션에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인지, 서점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훈은 구글노믹스, 조지 소로우의 경영철학서, 스티브 잡스와 워렌 버핏의 자서전 코너를 지나 문학 섹션의 베스트셀러 목록들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는 마이클 코넬리의 신작과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발음하기 힘든 괴상한 제목의 SF소설 코너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세계명작 코너의 한 부분에서 발끝을 세워 책 한 권을 뽑아냈다. 책 표지를 넘기자 헌책방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책처럼 후루룩 먼지가 쏟아질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자 재판을 찍은 연도가 1998년에서 끝난 오래된 책이었다.

‘밤이면 편안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두꺼운 소설을 조금씩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이라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성공한 삶이 아닐까.’

살긋거리는 종이 위에 먼지를 조심스레 불어가며,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이 문장을 발견하고 서서 책을 읽었다. 그것은 강의 교재 맨 첫 줄에 써도 좋을 만한 이야기였고, 청소년들을 위한 책 읽기 클럽의 서두로 사용해도 좋을 만했다. 지훈은 먼지가 쌓인 책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낸 후, 서점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고무장화를 신은 초등학생들이 책을 들고 와글거리며 서 있었다.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하우스가 붙어 있는 서점 안에선 원두를 가는 시끄러운 소리와 헤즐넛 향이 퍼져 나왔다. 그는 거스름돈으로 서점 안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카페 소파에 등을 파묻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보거나,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얘기하는 대신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왜 카페에 왔을까?”

작년 이맘때쯤 현정은 카페에서 대화를 포기한 채 스마트폰으로 각자 다른 볼일을 보는 연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발견’이라도 한 듯 지훈을 뚫어져라 바라봤었다. 사실 그건 유별난 일이랄 수 없었다. 카페의 풍경이 바뀐 건 서울만의 일이 아니라 이미 베를린이나 북경 어디에서든 일어나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시 있잖아? 난 그 섬이 꼭 스마트폰 같아. 연애하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잖아.”

“넌 기계 예찬론자잖아?”

“예찬이 아니라 친근함의 표현인데?”

지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내가 보기엔 넌 스마트폰 중독이야. 네가 좋아하는 ‘모든지 척척박사’ 애플리케이션에 물어보지 그래? ‘연애 박사’ ‘실연 박사’ ‘짝사랑 박사’도 있지 않았나?”

“비꼬지 마! 성경만큼 좋은 애플리케이션이니까.”

“그걸 성경에 비유하다니. 너, 중증 맞아.”

“중독된다고 그걸 꼭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어. 중독은 증오에 비례해. 도박하는 사람들이 도박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잖아. 알코올중독자도 마찬가지야.”

카페의 풍경을 바라보며 지훈은 현정과의 오래된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을 혀끝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중독은 증오에 비례한다.’ 적어도 현정은 자신이 한 말을 입증해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택한 이별의 방식이 그 말의 구체적인 예시였다. 지훈은 가끔 현정이 택한 이별이 ‘실연 박사’ 애플리케이션에 나와 있는 네 번째나 다섯 번째 매뉴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훈은 책장을 넘기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레귤러 사이즈의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그가 서점 밖을 나와 빠르게 걷는 동안 그를 호출하는 두 통의 전화와 함께 도쿄 출장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관리팀의 전화가 이어졌다. 몇 분 간격으로 울리는 휴대전화가 지훈에겐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현정의 말처럼 그것은 ‘섬’이거나 ‘외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일 뿐이었다.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사들고 바쁘게 회사로 돌아오던 그때, 그의 핸드폰에 두 통의 문자 메시지가 13분 간격을 두고 도착해 있었다.

하루 수십여 통이 넘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는 그의 핸드폰 속에서 그것은 각종 스팸 문자와 업무에 관한 지시 사항, 미팅과 회의 시간을 조율하는 끝없는 릴레이 문자 속에 빠르게 휩쓸려갔다. 메시지는 과천 정부청사에서 벌어진 공개 강연회와 연달아 이어지는 미팅 때문에 꽤 긴 시간 확인 없이 잠겨 있었다. 만약 그것이 열한 개의 숫자로 나열된 번호가 아닌 익숙한 사람의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면, 신중한 이지훈이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지훈아. 만나자. 당장!!

첫 번째 문자 메시지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정이 보낸 것이었다(그는 이미 현정의 번호를 삭제한 후였다). 긴박할 때만 사용하는 두 개의 강렬한 느낌표, 부사와 동사의 뒤바뀐 위치. 그것은 현정의 말투였고 그녀의 숨소리였다. 그러나 나머지 문자 메시지에는 지훈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로모 카메라에 들어 있던 필름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윤사강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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