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6부 인천 국제공항

100명의 보험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한다면 어떤 얘길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별과 실연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한다면 무슨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마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 가령 고속도로 속도위반 통지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인과 헤어지고, 그녀에게 미친 듯 질주해 달려오는 남자가 낭만적이라고 생각되는 건 영화나 드라마에 한해서다. 지금 지훈이 하려는 얘기는 중앙선 침범, 속도위반, 불법유턴, 신호위반과 같은 ‘교통법령’에 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나간 이후, 지훈에게 날아온 것은 모두 여덟 통의 속도위반 통지서였다.

위반을 알리는 통지서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충청도와 경기도, 서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개 시도를 넘어 경찰서에서 날아온 것들이었다. 지훈은 위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랑에 미친 남자의 질주를 ‘불법’이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통지서에는 운전의 당사자가 이지훈임을 증명하는 인물 사진까지 친절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지훈의 실연은 정부가 증명하고, 한국도로공사가 공인한 이별처럼 보였다.

“젠장! 한 인물 나셨군!”

지훈은 자신의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속도위반 통지서 속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단속 카메라는 5분마다 범인 차량을 추적하듯 그의 차 앞을 지키고 있었다. 12킬로미터마다 설치되어 있던 무인 단속 카메라에는 그의 얼굴이 흑백 증명사진처럼 찍혀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에서 주최하는 ‘실연당한 남자의 얼굴은 이것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 출품하면 딱 평균적일 만한 사진이었다.

각각의 통지서에는 지훈이 어긴 속도 초과분이 남겨져 있었다. 48킬로미터, 34킬로미터, 53킬로미터, 26킬로미터, 45킬로미터…… 지훈은 핸드폰 계산기를 들고 내야 할 범칙금을 계산했다. 빌어먹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금액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집중해 계산하느라 땀으로 가득 찼다. 계산기를 두드린 지 몇 분 만에 그는 자신이 내야 할 범칙금을 계산했다. 1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면허 정지’가 아니라 ‘면허 취소’까지 벌점이 상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터무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맙다! 이 나쁜 년!”

실연의 기념품으로 카메라 따윌 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덟 통의 속도위반 통지서야말로 떠나간 현정이 마지막으로 선물한 완벽한 실연의 기념품이었다. 그것은 몇 개의 숫자들만으로도 이별을 공식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별 편지의 마지막 ‘추신’란엔 꺾임 없는 반듯한 필체로 이렇게 공식적인 전문이 적혀 있었다.

-과태료 미납 시 재산 압류 조치합니다

‘과태료’와 ‘미납’ 같은 용어 사이에 울렁대던 머리가 ‘조치’라는 행정 용어에 와 닿았다. 지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이별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시절의 사랑이 끝나버린 것이다.

*

“안녕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대듯 지훈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뭔가 중요한 결심이라도 하듯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미도라고 합니다.”

여자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만난 정미도는 이름을 묻기도 전에 지훈에게 악수부터 청했다. 여자가 지훈에게 했던 두 번째 말은 “반갑습니다” 같은 인사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심문받는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정현정 씨, 아시죠?”

여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 끝은 갈라져 있었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여자의 입에서 “현정이는 후회하고 있어요. 진심으로!”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말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지훈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속도위반 통지서를 여덟 장이나 받은 후 나타난 여자치곤 너무 쇼킹해서,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현정이가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여자의 얼굴은 담담했다. 조금 전 보였던 긴장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놀라울 만큼 담대해져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건 엄연한 규칙 위반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일제히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봤다. 핏기 없이 우울한 시선들을 지훈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문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지훈이 정신을 차린 건, 식당 밖으로 나가 연달아 담배를 피운 후였다. 그의 옆에는 정미도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그제야 지훈은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현정이 친구예요? 아님 동생? 선배?”

“제 이름은 정미도예요.”

“지금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흥분을 가라앉히려 해도 지훈의 말꼬리는 이미 갈아놓은 칼끝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전 현정이 친구예요. 공적이고 사적인 것 두루두루 걸쳐 있는 관계예요. 이 모든 게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공적이고 사적인 관계라는 게 대체 뭡니까? 절친한 직장 동료라도 돼요?”

“애매한 말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설명하기에 힘든 구석도 있고.”

“현정이도 이 일을 알고 있나요?”

미도는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훈 씨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직접 찾아가서 얘기하는 것으론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거죠. 여자들은…… 말하자면 남자 쪽에서 연락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아요. 침착하게 얘기하긴 하지만 결국 쿨한 척하려다 내상만 생기는 거죠. 현정이는 지훈 씨 전화를 기다렸을 겁니다. 저도 정말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과예요.”

“그걸 왜 당신이 고민합니까?”

일시에 공격을 준비했던 사람처럼 지훈이 미도를 바라보았다. 미도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미소 지었다.

“가족 같다고 해두죠. 현정이 엄마도 잘 아는 분이니까.”

“이게 고심한 결과예요? 사람 놀래켜서 뒤로 쓰러지게 하는 거?”

“의도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성공했군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어요. 현정인 그걸 실패가 아닌 실수라고 말했어요.”

미도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어조를 바꿨다. 공격적인 지훈의 태도가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그녀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차분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봤다. 표정이나 어조에 따라 얼굴 생김새의 낙차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큰 여자였다. 미도는 ‘실수’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하라는 듯 지훈을 빤히 바라봤다.

“그쪽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후회하고 있고, 정말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거죠.”

“주어가 없잖아요! 대체 누가 후회하고 힘들어한다는 거죠?”

지훈은 미도를 바라봤다.

“현정이를 다시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나지 않을 겁니다.”

이 상황을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이해시키고 싶은 사람처럼 그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훈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해요.”

미도는 흔들리는 지훈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현정인 매일 울었어요.”

“울었다구요?”

“제 앞에서도 울었고, 전화하면서도 울었고, 메일을 쓰면서도 울었어요.”

미도는 세 번이나 울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유치하고 어이없는 그 말들이 역설적이게도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훈은 미도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여자 앞에서, 그동안 꽉꽉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물길이 터지듯 쏟아져 내려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감정의 잔해들, 아름답고 황홀했던 기억들, 스스로 자책하며 무너뜨려 휩쓸려 내려갔던 추억들이 이제 그의 눈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다.

지훈은 자신이 만든 연애의 창세기를, 압도적이었던 기적의 일주일을 회상했다.

불시에 가해진 충격이 어딘가 끊기거나 꼬여 있던 그의 뇌세포와 혈관들을 자극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뻐근하고 짜릿한 통증이 달아올라 그의 온몸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밟고 지나갔다. 그는 회한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한숨 속엔 명멸하던 과거가 스며 있었다.

“곧 영화가 시작될 거예요.”

미도가 말했다.

“지금 실연의 기념품을 이곳에 내놓고 나면 그땐 정말 후회할지 몰라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중요할 거란 건 나도 알아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버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될 거예요.”

미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현정이 친구 아니죠?”

지훈이 미도를 바라봤다.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아니라는 거.”

“이지훈 씨.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봐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결국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죠.”

미도가 지훈을 바라봤다. 그때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을 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가 눈이 충혈된 채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훈은 커다란 기둥 사이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손에는 몇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극장 쪽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불룩하게 밑으로 꺼져 있던 그녀의 가방은 한결 가벼워진 듯 원래의 모양대로 부드럽게 주름져 있었다. 그 안에 있던 물건 중 일부가 사라졌고, 그것이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이라는 사실을 지훈은 쉽게 간파했다.

“꽃을 버리거나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세요?”

지훈은 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꽃밭에 버리는 겁니다.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극장 쪽으로 한두 명씩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의 손과 가방 속에는 각기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모두 한때는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물건들이었다. 지금은 처참하게 시들어버렸지만.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