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여섯 시.
 사강은 독립단편영화제의 수상작들을 상영하는 시내의 작은 시네마테크 앞에 서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작은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로가 가로
보다 훨씬 긴 간판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사강은 간판의 작은 글씨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밤에는 백열등 밑에서 시를 쓰고 낮에는 형광등 아래에서 진료를 하는 의사가 운영하는 신경정신과 병원의 간판처럼 보였다. 누군가 무심히 이곳의 간판을 지나친다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아침병원’으로 오독할 만했다. 그녀에겐 이런 이름의 식당이 있다는 걸 상상하는 일조차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인도, 아부다비나 뮌스터의 좁고 어두운 골목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름의 식당이었다. 사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휘황찬란하고 압도적인 도심의 간판들 사이에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이라고 쓴 연두색 글자들은 너무 작아서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글씨들에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오전 여섯 시 십 분.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테이크아웃 커피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얼굴 위에 와 닿았다. 사강은 간판 앞에 서 있었다. 사강은 불룩해진 가방 속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곳에 도착하게 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러하리라.
  
                                                                    *

 

 오전 여섯 시 이십 분.
 이지훈은 결국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유일한 남자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황당한 장난일지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그는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시내 쪽으로 운전을 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의 진입로에서 다시 한 번 유턴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망설였다. 그러나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졌다. 그날따라 맑은 하늘과 유달리 화사했던 아침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란 말은 그가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곳까지 온 것만은 분명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지훈은 자동차 안에서 간판을 바라보았다.
 인터넷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작고, 무심하고, 철저히 손님을 무시한 식당 간판이었다. 저런 간판을 달고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 레스토랑이 서울에선 먹기 힘든 진주 ‘꽃밥’을 파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는 몇 번의 검색을 시도했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검색한 단어는 ‘꽃밥’이었는데, 꽃밥은 진주 사람들이 부르는 비빔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여러 빛깔의 다양한 계절 나물들과 달걀노른자를 올려놓아 밥이 아니라 꽃밭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봄날에 먹는 꽃밥은 어떤 맛일까.
 4월의 꽃밭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맛일까?
 배가 전혀 고프지 않다는 게 그로선 꽤나 유감스러웠다.  

 

 지훈이 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는 아까부터 시네마테크 입구에 서 있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시네마테크 옆에 조성된 작은 정원 앞에 서 있었다.
 어깨를 덮는 긴 생머리와 동그란 이마는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서 있는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곧은 어깨와 반듯한 허리가 어딘가 절도 있어 보였다. 부드러운 검정색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는 검정색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종아리에 꼭 맞는 검정색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주름 하나 없이 쭉 뻗은 가죽의 질감은 부츠 안의 종아리가 충분히 곧고 날씬하리란 상상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입은 옷은 누군가의 몇 달치 월급일 수도 있는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강렬한 첫인상과 달리 여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존재가 희미해지는 건 실연당한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일까. 미술관의 명작 아래에 적혀 있는  ‘접근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을 본 것처럼 지훈은 여자를 바라보기 위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긴 머리를 묶었다 풀기를 반복할 때마다 길고 아름다운 목선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남자라면 응당 이런 숙녀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낼 것이다. 기꺼이 도와주려고 달려들 것이다. 주말 명동 한복판에서 봤더라도 한 눈에 알아볼 법한 여자였고, 순식간에 다가서기 쉽지 않을 거라는 열패감을 안겨주는 기묘한 느낌까지 있었다. 여자가 매고 있는 검정색 가방은 오랫동안 사용한 것인지 가죽이 구겨지듯 주름져 늘어져 있었다.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가방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한 손으로 움켜잡듯 쥐고 있었다.
 여자는 뭔가 결심한 사람처럼 레스토랑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쥐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의 플라스틱 뚜껑을 다시 열더니 바닥에 쪼그려 앉았고, 시네마테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을 바라봤다. 여자는 식어버린 커피를 밤새 얼어붙은 차가운 땅 위에 주의 깊게 붓고 있었다. 지훈은 무심한 얼굴로 흙 위에 커피를 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커피나무라도 열리길 바라는 걸까.

 

 그에게도 딸기 우유를 부으면 딸기가, 오렌지 주스를 부으면 오렌지 나무가 주렁주렁 피어오를 것이라 믿었던 엉뚱하고 황당한 여섯 살 시절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 손바닥을 맞았다. 한 살 위인 형도 그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형은 그의 궁둥이에 물파스를 듬뿍 발라 안 그래도 부풀어 발개진 엉덩이를 불쏘시개처럼 만들어놓곤 했다. 형은 외할머니 몰래 외할아버지의 자동차 주유구에 500밀리리터짜리 우유를 퍼붓는 엽기적인 장난을 쳤다. 형이 더듬거리는 말투로 “자동차도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크고 예뻐져!”라고 소리 질렀을 때, 외할머니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런 사건들은 훗날 예술가가 되는 사람들의 유별난 유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화였다.
 형은 보통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상태였다. 지훈 역시 당시에는 형의 영향을 받아 거의 정상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했다. 형이 말 대신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를 때, 그 역시 고함을 치거나 손바닥이 발개질 정도로 박수를 쳤다. 그는 형이 아침마다 먹는 하얀색 알약을 같은 개수만큼 함께 먹고 싶어 했다. 두 명의 ‘덤 앤 더머’ 앞에서 육십이 훌쩍 넘은 백발의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엄혹한 얼굴로 매를 드는 것뿐이었다.
 애써 지우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유물이나 화석처럼 특정 장소에나 가야 열어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여자가 그의 유년기의 입구에 서서 무심한 얼굴로 재생 버튼을 누른 덕분에, 그는 열린 기억의 틈새로 불어오는 과거의 바람을 느꼈다.  
 여자가 빈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쓰레기통을 배경으로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주의 깊게 관찰하던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애써 외면했던 불길함이 몰려왔다. 그는 차의 시동을 껐다. 이제야 그는 현실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훈 역시 저 이상한 이름의 레스토랑 안에 들어가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일곱 시 칠 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이 시작되는 시간은 일곱 시였다. 
 그는 이곳에 오는 누구라도 잠시 머뭇대며 믿을 수 없이 작은 저 간판을 올려볼 것이란 걸 깨달았다. 누구나 가볍게 지나칠법한 저런 작은 글자를 좇아오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지훈은 운전대를 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지훈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건 망설임과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검정색 가죽부츠를 신은 저 여자는,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3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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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 2012.09.25 20:5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재밌게 잘 읽었어요~~빨리 읽히고 좋아요~~몰입도도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