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은 자신의 침대 위에 모두 아홉 장의 사진들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사강은 어린 시절 똑같이 생긴 ‘윌리’를 찾기 위해 수많은 윌리들에 몰입했던 때를 기억했다.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던 그녀의 상상력은 전원을 꼽고 이제 막 스위치를 누른 발전기처럼 빛을 내며 돌아갔다. 가령 돌로 낮게 쌓은 담이라든가, 댓돌이 놓인 좁은 마당, 보슬거리는 노란 꽃들이 뒤덮여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지형지물이었다. 얼핏 번들거리는 검은색 물개처럼 보이지만 이것의 정체는 낡은 잠수복을 입은 해녀일 것이다. 뿌옇게 흐리긴 해도, 이곳이 바다가 아닌 길이라는 것 역시 사강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귀엽고 작은 노란 꽃은 유채꽃일 것이다. 봄날의 유채꽃 말이다. 이 연인들은 겨울과 여름이 아닌 봄에 여행을 떠난 것이다.

사진 속 배경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춘천에 가서 닭갈비나 먹자”라고 말하며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복잡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서로의 스케줄을 맞춰야 가능했을 여행이었을 것이다. 사강의 눈은 오래된 두 연인이 걸었던 길을 함께 쫓고 있었다. 사강은 제주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해변도로 위를 일렬로 걸어가는 늙은 해녀들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중문 관광단지나 제주 민속촌, 천지연 같은 관광지를 찾아간 게 아니라는 건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강은 어깨동무를 한 채 돌담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남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비교적 잘 드러났지만 남자의 얼굴은 햇빛에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은 편이었다. 여자는 모자가 달린 후드 티를 입고 있었고, 남자 역시 비슷한 종류의 티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사강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 자신이 입력한 정보를 변경했다. 남자의 키가 평균보다 훨씬 크다면? 여자의 키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것이다.

사강은 다시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스타일은 평범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귀여운 얼굴이다. 그에 비해 남자의 얼굴은 아수라 백작처럼 둘로 나뉜 까닭에 쉽게 추리할 수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았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반바지를 입은 다리에는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어, 좋은 체격을 가진 남자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강은 그날 모임에 나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러나 이들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므로 사진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 사진만 봐선 카메라의 주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모임에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었던 남자가 카메라의 주인이라면, 주인을 찾는 일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사강은 다시 사진 속 여자의 오른쪽에 있던 푯말의 글자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1코스.

푯말에 적힌 단어는 ‘1코스’였다.

만약 그녀가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 사진은 처음 현상소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사진이 아닐 수도 있다. 사강은 인터넷을 켰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제주 올레’라는 키워드를 적어 넣고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

2007년 9월 8일 제 1코스가 개발된 이래 2010년 8월까지 총 21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으며 총 길이가 350킬로미터. 사전에는 제주의 ‘올레길’에 대한 간략한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2008년 봄 이후에 찍힌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올레 사진을 가능한 많이 검색했다. 그리고 사진 속 지형과 비슷한 지역을 비교하며 사진 속 배경을 일일이 확인했다.

제주 올레 1코스.

연인들이 찍은 사진과 제주 올레 사진을 비교하자 조금씩 사진이 의미하는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서 있는 학교는 올레 1코스가 시작되는 제주의 ‘시흥초등학교’일 것이다. 사강은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으로 이어지는 올레 지도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녀는 뿌옇게 햇빛에 날렸다는 이유로 종이봉투에 모아두었던 사진 속에서 희미하게 ‘17코스’라고 적힌 푯말 사진을 발견했다.

이들은 1코스부터 17코스까지 함께 걸은 것이다. 물론 시간상 중간에 특정한 코스를 걷지 않고 그냥 건너뛰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도보가 첫 코스에서 시작돼 마지막 코스에서 끝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제주 올레 17코스가 개장된 것은 2010년 9월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2010년 9월 이후에 찍은 사진인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의문이 사강의 머릿속에 남았다.

사진 속의 유채꽃은 이 사진이 사강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최근에 찍힌 것이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유채꽃이 언제 피더라. 사강은 노트북을 무릎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다시 인터넷을 검색했다. 유채꽃은 대개 3월이나 4월에 핀다. 예외적으로 2월에 피기도 한다. 지역마다 조금 다르지만 심지어 5월에 핀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추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강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이 사진은 한꺼번에 찍힌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찍힌 게 아닐까.

여자의 옷이 사진마다 바뀐 것은 여행 중임을 감안해 여러 벌의 옷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계절에 긴 시차를 두고 떠난 여행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추리하자 이 필름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과 시차를 두고 천천히 한 장씩 채워져나갔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가설이 세워졌다.

이 사진들은 대체 몇 년 동안이나 찍힌 것들일까. 왜 이런 식으로 필름 한 통을 채워나갔던 걸까. 어째서 힘들게 찍은 사진을 현상하지 않고 카메라 속에만 넣어두었던 걸까.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사강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모두 카메라 주인을 직접 만나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사강은 필름을 넣어둔 가방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 가방 안에 네 권이나 되는 책을 넣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나갔었다.

사강은 침대맡에 있던 작은 스탠드를 침대 정중앙에 옮겼다. 그녀는 이제 서랍에서 꺼낸 돋보기로 사진 일부를 확대해 보기 시작했다. 한 장의 사진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두 연인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은 분명 누군가 지나가던 사람이 찍어준 게 틀림없었다. 가장 소중한 사진들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던 낯선 사람의 선의에 의해 찍힌다.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며 자신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영원한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강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영화제 측의 말을 한순간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미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이들이 공유했을 감정의 일부가 그녀의 가슴속에도 이식돼 자라나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심장이 울렁거린 건 비행 시차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비밀을 몰래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촛불이 만들어내는 음영 속의 사진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사강은 꺼져가던 향초의 불을 끄고, 새 향초에 불을 켰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나간 사랑을 위해 밤새 촛불을 켜는 행위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름을 돌려주는 일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강은 이제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사강은 너무 흐릿해서 쉽게 알아볼 수 없다고 단념했던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큰 젊은 남자였다. 그녀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가했던 두 명의 남자를 기억했다. 체격이나 나이로 보아 이 남자가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있던 남자일 리는 없었다.

사강은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조금 떨어져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봤을 때 보이지 않았던 실루엣들이 자신에게 뭔가 말해주길 바라면서. 깨알 같은 점처럼 보이던 작은 도트들이 그녀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강은 자신을 향해 밝은 얼굴로 인사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뛰쳐나가던 모습도. 그녀는 책상 쪽으로 돌아와 사진 속 남자에게 말을 걸듯 읊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죠?”라고.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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