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 

   

 사강은 자신에게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정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수를 의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러 도시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얼마든지 피렌체로 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도쿄라면 미주나 유럽을 돌며 셀 수도 없이 경유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화폐 단위가 제각각인 나라를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한정수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사강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된 소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읽을 수도 없으므로 책이라기보단 장식품에 가까웠다.  

 사강은 이 소설들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기로 결심했다. 같은 책이었지만 표지가 다르고 장정과 판본도 제각각인 다른 책이었다. 결국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사강은 이 책이 영화제 주최 측에 의해 버려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모 카메라의 주인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누군가 실연의 기념품을 ‘대신’ 처리해준다는 것이었지만, 반지나 목걸이처럼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낡고 생채기 많은 플라스틱 카메라를 누구도 가져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로모에 필름이 들어 있는데, 혹시 아셨어요?”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공항 인근 현상소 직원이 사강에게 말했다.

 “필름이요?”

 “어떻게 할까요? 인화해드려요?” 

 사강은 커다란 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많은 가족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아기와 아빠, 아기와 엄마, 아기와 가족들…… 그리고 성장한 채 웃고 있는 또 다른 가족들…….  

 “이거, 꽤 오래된 필름 같네요. 적어도 몇 년은 된 것 같은데요.” 

 현상소 직원은 로모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사강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 산 35밀리미터 필름 세 통을 그녀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최소한 7, 8년은 된 것 같은데요?”    

 “7, 8년?”

 사강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혹시 필름을 인화하면 필름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건가요?” 

 “필름이야 당연히 돌려드리죠. 필요 없으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사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상소 창밖을 멍하게 바라봤다. 

 카메라 주인은 이 로모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필름은 우연히 이곳에 남겨졌을 것이다. 사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 있는 필름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방치하진 않았을 테니까. 누구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찍혀 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남기진 않는다.  

 사강은 긁힌 자국이 남아 있는 카메라의 낡은 플라스틱 바디를 바라봤다. 단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것은 충분히 낡아서 별 쓸모 없어 보이는 카메라였지, 카메라 안에 든 필름이 아니었다. 필름 속 사진은 시간이 기록된 내밀한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일기장을 실연의 기념품으로 내놓을 리 없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이 필름을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강의 머릿속에 든 첫 번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의 주인을 찾기 위해선 사진부터 인화해야 했다. 사진 속에 필름 주인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가 올라온 트위터를 역추적하면 카메라 주인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스물두 명이었다. 추적이 가능한 숫자였다. 카메라 주인이 트위터 프로필에 얼굴 사진을 첨부한 사람이라면 찾는 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인화해주세요.”

 창밖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30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따뜻한 녹차라도 드릴까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사강은 주인의 시선을 좇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에 젖어 연두색이 한껏 도드라진 버드나무 사이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버드나무를 미친 여자가 머리 푼 것 같은 모양이라 불길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사연 많은 여자의 긴 머리칼을 감싸는 오색 빛깔 머리띠 같았다. 

 자기 몫의 사랑이 이미 죽어버렸는데도 실연의 기념품들은 왜 이리 유난스레 반짝이는 걸까. 사랑이 사산된 후 남은 실패의 증거물인데도 말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속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차 때문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늑골 부근까지 통증이 뻐근히 내려왔다. 

 “예상대로 문제가 있는 필름이었어요.”

 주인이 심란한 얼굴로 사강을 바라봤다.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필름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지금 보니까 몇 장 빼면 대부분 상했어요. 보관하기 힘든 사진들일 텐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이 사강에게 되묻고 있었다. 

 사강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사진들을 손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 길게 늘어선 양떼구름과 하늘이 반쯤 지워진 풍경, 뿌옇게 사라진 오솔길, 학교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흐릿하게 번진 남자의 희미한 얼굴…… 이 사진 속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사진 속 연인이 궁금해졌다.  


 저녁으로 간단히 야채카레를 만들어 먹은 후, 사강은 몇 시간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모 카메라의 특징을 감안한다 해도, 사진들은 심하게 색이 바랬다. 가장 치명적인 건 누군가의 실수로 필름에 햇빛이 들어간 것이었다. 사진의 구체적인 ‘상’은 대부분 날아가고 추상적인 색깔과 형체, 실루엣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나마 구체적인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사강이 고심 끝에 골라낸 아홉 장뿐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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