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이제 사강의 심장은 수시로 변하는 기압을 온몸으로 느꼈다. 심장에 연결됐던 팽팽한 힘줄들이 툭, 툭, 기타줄 끊어지듯 하나씩 잘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행기는 곧 파리의 드골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고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고,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는 평화로운 땅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가능했다. 사무장이나 기장의 보고서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기록될지 예상하는 건 훨씬 더 쉬웠다. 

    

                               * 

  

샹젤리제 거리의 맥도널드 앞에서 아빠와 거짓말처럼 부딪힌 건 3년 전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복동생 ‘폴’이 앉아 있었다. 폴은 빅맥을 먹느라 입술에 케첩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사강은 그가 폴의 양 볼에 묻은 케첩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저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강은 맥도널드가 보이는 바로 옆 카페에 자리를 잡고, 범인을 미행 중인 탐정회사의 직원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들 부자를 30분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쁜 여자들에겐 어김없이 눈이 돌아가는 아홉 살 폴. 늘씬한 여자의 다리엔 난데없이 눈빛이 꽂히는 7월의 복숭아 빛 뺨을 가진 폴. 지금 오른쪽 손에 닌텐도 게임기가 들려 있지만, 10년 후면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탱고를 추고 있을 아이였다. 아이와 대화하는 그의 모습도 이국의 춤처럼 낯설었다. 

파리에서 오래 살더니 평생 바게트만 입에 물고 산 프랑스인처럼 그는 과장된 몸짓을 사용했다. 눈썹을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다가, 지휘하듯 손을 휘저으며 손가락 열 개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랬다. 그곳엔 사강에겐 보여준 적 없는 애정이라 부를 수 있는 따스함이 고여 있었다. 사강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따스함이 놀라웠다. 

사강은 불현듯 폴과 같은 나이의 자신이 늘 “위험해! 더러워!”란 말을 듣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짙은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그건 고향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의 노스탤지어도 아니었고, 시차 적응 때문에 생긴 두통도, 피곤함도 뭣도 아닌 순수한 질투심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사강은 창피해졌다. 그녀의 뒷목은 점점 더 뻣뻣해졌다. 폴의 오른쪽 무릎과 왼쪽 손등에는 생채기가 있었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생긴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겐 건강하고 발랄한 아홉 살짜리가 마땅히 달고 살아야 할 저런 표식이 없었다. 뛰어놀다 생긴 무릎과 팔꿈치의 멍과 딱지들 대신 자신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처가 있었다. 빨간약을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인다고 나을 리 없는 것들이었다. 폴은 인간이 아닌 금붕어 친구를 두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사강이 체념하듯 카페에서 일어나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사강은 큰 목소리로 폴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줌! 쉬 마려워요, 아빠!”

“일어나자, 폴.” 

폴은 “Oui”가 아닌 “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폴의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해서 서울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들과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엄마라면 조금만 참고 집 화장실을 사용하자고 했을 것이다. 거리의 공중화장실은 더러울 것이고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다. 사강은 폴과 아빠가 맥도널드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면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 일 이후, 사강은 아빠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파리가 더 싫었다. 한때 사강에게 파리는 5600마일리지를 주는 장거리 비행 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의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 시간째 사강은 낯선 남자의 호텔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 앞에서 그녀는 아빠와 폴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일찌감치 새어버린 아빠의 백발이 H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코노미 앞뒤 좌석 사이의 거리는 약 87센티미터이다. 

비즈니스 앞뒤 좌석 간 거리는 1미터 13센티미터. 

일등석은 2미터다. 

사강은 자신의 방과 H의 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파리 리츠칼튼 호텔 1302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1304호의 방문을 노크를 하기 전, 그녀는 H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이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은 유약해 보일 것이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왜 당신을 또 봐야해?’라는 불쾌한 질문을 유발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은 비굴해 보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는 ‘다시’라는 말 때문에 변명하기 좋아하는 무능한 직원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것이다. 

기내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승객들을 상대하면서 사강은 사과하는 법에 대해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과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이 되자, 어떤 쪽으로든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과를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사강의 손에는 약봉지와 죽, 향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사강은 택시를 타고 향수 가게에 들러 자신이 가진 유로를 털어 젖은 이끼 냄새가 나는 향초를 샀다. 윤희가 말했던 그 향초였다. 사강은 약국에 들렀고, 한국 식당에서 묽게 끓인 흰죽을 샀다. 적절한 시간에 H를 깨워 약과 함께 죽을 먹이고, 그가 좋아하는 향초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가 아니라 사표를 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 시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정식으로 조종사 과정을 교육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 여자 승무원이 검은색 히잡을 두른 채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제주 비행학교 출신의 여자 조종사 선배도 사강에게 조종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곤 했었다. 

사강은 망설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 호텔 방문 앞에 약과 향초만 놓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기장님!” 

초췌한 얼굴의 H가 말없이 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사강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움켜쥐었다. 당혹스러움 때문에 사강의 목덜미와 귓불은 발개져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거구인 H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 위압적이었다. 몸에 있는 수분을 엄청나게 쏟아낸 그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것은 꼿꼿하고 반듯한 그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반쯤 덮고 있었다. 긴장감이 돌던 눈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풀어져 초점이 없이 느슨해져 있었다. 

“약을 가져왔어요. 좋아하신다고 해서 향초를…….”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묵직하게 와 닿았다.

사강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H는 사강의 눈앞에서 엎어지다시피 무너졌다.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와 향초를 담은 쇼핑백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사강은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했다. 카펫 위를 구르기 시작한 동그란 약통은 두툼한 카펫 때문에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둑한 복도는 웅크린 짐승의 뒷모습처럼 음울해 보였다. 

“정신 차려요!”

어떻게든 그의 손을 목에 감아 그를 침대까지 옮겨야 했다. 사강은 자신의 어깨에 걸치듯 늘어져 있는 H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등을 오른쪽 손으로 붙잡았다. 손등에 난 H의 흉터가 손바닥에 난 사강의 흉터와 포개지듯 꽉 맞물렸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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