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윤희는 비밀스런 얘기라도 꺼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사강을 바라보았다.

“H 말이야. 비행 끝나면 늘 호텔에만 있잖아. 근데 언젠가 파리 라데팡스에 쇼핑 갔다가 ‘세포라’에서 H랑 마주친 적이 있었어. H가 향수나 화장품을 사러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세포라에 온다는 게 넌 상상이나 되니?”

사강이 윤희를 바라봤다.

“근데 정말 이상했던 게 뭔 줄 알아? 상점 하나를 전부 거덜 낼 모양인지 향초만 잔뜩 사가지고 가는 거야.”    

“향초?”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장 압권은…… 그 산더미 같은 향초가 전부 똑같은 제품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포라 세일 날.”

“나 파리 가, H랑. 이달 말.”

사강이 말했다.

“어쩌니?”

“상관없어. 절대로 같이 갈 일은 없을 테니까.”

“방법은 찾은 거야? 스케줄러한테 말했어?” 

“응.”

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나를 정말 싫어해.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등신!’이란 말까지 했었어.”

“거야, 너무 뜨거워서 발작하듯 한 말일걸? 누구라도 그렇잖아. 감탄사처럼 아프다는 말 대신 욕 나오는 거.”

윤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브리핑하는 시간에 날 보면 아마 뒷목 잡고 경기할걸?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돼. 스케줄 바꿔줄 거지? 넌 적을 많이 아니까 그만큼 상대하기도 쉬울 거야. 그렇지? 난 병가 낼 생각이야.”

사강이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지저분한 퀵턴(Quick turn) 일정을 처리해주면 몰라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내가 너 대신 뭄바이까지 뛴 거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알지? 인도 뭄바이!”

“네 입에서 그 말 나올 줄 알았는데 얼마나 싫으면 이러겠니? H가 나도 진짜 미워해!” 

“설마, 나 만큼이겠니?”

사강이 윤희를 빤히 바라봤다.  

“별일 없을 거야, 내가 기도할게.”

“이게 기도까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아멘!”  

 

                                           * 


그것은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개적인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윤희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었다. H를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강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불평 없이 해치운다는 말은 그녀가 직업적인 신념처럼 여겨왔던 것이었다. 비행기가 20분 정도 하늘을 날아 순항 고도에 이르자 곧 안전벨트 사인이 풀렸다. 승객들에게 담요와 함께 음료 서비스가 나가는 동안에도 사강은 스스로에게 ‘불평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29찰리 손님-오렌지 주스, 14찰리-여분 담요 한 장 더, 3브라보-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물수건. 15알파-천식이 있는 손님이므로 자리 다시 한 번 확인할 것. 특히 두 명의 ‘2알파’와 ‘2찰리’는 모두 VIP로 파리의 국제회의로 가는 여당 국회위원들이므로 비행 중 불편함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 쓸 것.  

사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장을 한 채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길 기다렸다. 고령의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기내식으로 준비한 비빔밥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것만 빼면 늘 이어지는 보통의 비행이었다.  

마침내 칵핏에서 콜이 울렸다. 저녁 식사를 부탁하는 부기장의 콜이었다. 

“기장님은 라면. 저랑 부기장 한 명은 비프랑 치킨입니다!”

기장과 부기장은 항공법 규정상 같은 기내식을 먹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음식을 먹고 탈이 나게 되면 남은 한 명은 비행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이 라면을 먹더라도 한 명이 봉지 라면을 먹으면, 다른 한 명은 컵라면을 먹는 것이 규정이었다. 사실 라면은 끔찍하리만치 건조한 기내에서 먹을 수 있는 인기 메뉴였다. 

사강은 갤리 안에서 기장과 부기장의 기내식을 따로 준비했다. 특별히 H에게 내갈 기내식에는 따로 서비스되지 않는 로열 밀크티를 만들었다. 그가 차가운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는 정보를 준 건 윤희였다. 사강은 라면에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준비한 냉동 야채가 아닌 신선한 야채를 가득 넣었다. 엄밀히 채소는 기내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었다. 하지만 비행을 책임진 캡틴을 위한 것이었고, 이 정도의 불법은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했다. 파프리카와 브로콜리, 잘게 자른 꽈리고추가 들어 있는 야채라면. 사강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라면을 바라봤다.

  

사강이 서비스한 기내식을 먹은 지 10분 만에 한정수의 얼굴에 하나둘씩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벌레에 물린 것처럼 표시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에 H는 별생각 없이 손톱으로 몇 차례 자신의 왼쪽 뺨과 눈 밑 주위를 긁었다. 분명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극심한 가려움이 얼굴에서 목과 오른쪽 어깨로 퍼졌을 즈음, 그는 이제 에어컨이 나오는 조종석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긁은 자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인지했다. 

알레르기의 이유는 알레르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H의 갑작스런 설사와 구토 발진에는 딱 한 가지만 존재했다. 분명한 건, 그것이 사강의 소망대로 단순한 복통이나 운 나쁘게 찾아온 우연한 장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지 1시간 20분 후, H는 기내 화장실 변기 안에 먹은 것을 전부 다 게워냈다. 그의 온몸엔 갑각류의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고, 핏발 선 눈동자 주위는 거대한 선충에 물린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일단 새콤으로 항보실(항공 의료원)에 연락할게요! 일단 저한테 맡기고 좌석에 가서 쉬세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기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H는 더 이상 조종석을 지킬 수 없었다.  

곧 의사를 찾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 안에는 불임 시술에 관한 학회 차 파리에 가는 산부인과 의사와 휴가 차 비행기를 탄 흉부외과 의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먼저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은 H에겐 응급 처방이 내려졌다.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탈수 증세를 막기 위해 소량의 소금과 설탕을 섞어 만든 전해질 용액을 계속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건, 식은땀을 몇 리터쯤 쏟아낸 기장이 초인적인 힘으로 착륙 직전에 조종석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H의 얼굴을 특징짓는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H는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H의 손등에 남아 있던 흉터 위에는 좁쌀 같은 열꽃이 피어 번져 있었다. 사강은 이제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땅콩이나 우유 알레르기는 들어봤어도 고추 알레르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부기장님 말로는 그냥 고추 알레르기가 아니라 꽈리고추 알레르기래요.”

“근데 알레르기가 그렇게 괴상할 수도 있는 거니?”

“알레르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잖아. 조개나 땅콩 알레르기로 죽었단 사람 본 적 있어.”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지. 이런 특별 케이스의 경우,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죽게 되겠지.”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야. 이건 누가 봐도 고의적이지. 이런 경우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사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복수라고 해!”

사강의 눈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그것이 흐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결국 사강이 라면에 넣은 꽈리고추가 문제였다. 

그녀는 고추씨가 지저분하게 라면에 뜨지 않게 하기 위해 통째로 꽈리고추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아주 얇게 다져 씨를 덜어냈다. 제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잔뜩 들어간 라면에서 작은 고추 조각 몇 개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선의였든 비행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불행 속에 몰아넣은 이상, 동료들은 앞으로 사강이 앞으로 쓰게 될 시말서의 종류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시말서도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 

검역되지 않은 식료품을 기내에 반입한 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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