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항공사에는 다양한 경로로 들어온 조종사들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인 항공대 출신. 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간에 진로를 변경해 제주도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제주 비행훈련원 출신, 일명 ‘제비’들과 H처럼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항공대를 나와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항공대를 나와 제주 비행훈련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 세 카테고리 안에서 조종사들의 경로가 분류된다. 

어린 나이에 조종사가 되는 건, 대부분 제비 출신들이다. 

수년간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 비행 조종사가 된 여성 조종사도 있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 ‘비행’에 대한 책을 쓴다면 대부분은 자유분방한 ‘제비’일 것이다. 정해진 비행 스케줄이 바뀌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는 어김없이 연륜이 있는 공군 출신의 조종사들이다. 바로 그때가 ‘비행 사고’가 일어나는 최적의 시간임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H는 최정예 전투기인 F16 조종사였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동기가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버티고 현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교관이었던 선배 한 명을 비행 사고로 잃은 건 그로부터 6년 후였는데, 훈련 중 많은 비행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버티고 현상은 수만 피트로 고도가 높아지면 신체 균형이 붕괴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비행 사고였다. 동료의 죽음. 그것은 공군 출신 조종사들이 가진 공동의 트라우마였다.

사강은 H의 손등에 난 흉터가 그때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강은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쌍둥이처럼 비슷한 흉터가 그녀의 손바닥에 있었다.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에 난 흉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소송으로 혼란스럽던 어느 날, 사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면도칼로 손바닥의 생명선을 따라 빗금을 그었다. 자신의 생명선이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새끼손가락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피가 흘러 자신의 팔목을 적시고, 무릎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문을 열어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열린 문으로 엄마가 달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때 흘러내리는 피는 붉지 않다. 마치 눈물에 희석된 것처럼.

그러므로 어느 날 사무장이 “이봐, 주니어. 내가 곧 H에 대해 알게 해줄게. 이번 비행에선 네가 칵핏에 음식을 서비스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H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일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장님이 건조한 걸 정말 싫어하시니까, 칵핏에서 콜 오기 전에 자주 차를 갖다 드리도록 해. 커피는 절대 안 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온도를 아주 잘 맞춰야 해. 딱 한마디만 해줄게. 무조건 뜨겁게 만들어야 돼! 최대한 뜨겁게! 기장님은 미지근한 걸 제일 싫어해. 물은 아주 차가워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차갑고 뜨겁게. 그것만 기억해둬.”

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H는 경력이 많은 시니어 승무원들도 힘들어했다. 

예정보다 지연되기 일쑤인 비행기 출발 시간을 트집 잡고, 기내식을 혐오하는 일부 일등석 승객을 손쉽게 누그러뜨렸던 친절과 노하우도 까다로운 H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그가 훌륭한 조종사인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좋은 동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사강. 내가 보기엔 넌 승무원 매뉴얼북 그대로라 정말 잘할 것 같아. 매뉴얼대로! 그게 기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고전적인 훈육법은 국경이나 인종을 떠나 예외 없이 비슷하다.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멍청한 악질이 아닌 이상, 누구도 처음부터 후배를 닦달하진 않는다. 당근을 많이 준 토끼가 배불러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순간, 채찍을 들이대며 호통을 치는 쪽이 효과적이고 더 큰 교훈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강 역시 H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유달리 먼지가 잘 보이는 칵핏에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도 부기장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강은 다시 한 번 사무장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잘 만들 순 없어도 최대한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H의 명성이 막 열정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한 신입사원의 모험 정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종석에서 나온 사강은 질린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강은 쟁반을 든 채 갤리 안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강이 조종석에 들고 간 쟁반 위의 찻잔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사강의 앞치마는 3분의 1이나 물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손등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윤사강, 괜찮아?”

어느새 기내 복도에서 면세품 카트를 밀다가 갤리로 돌아온 승무원들이 사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불안전한 기류 때문에 올려놓은 집기들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류에 익숙한 승무원들은 누구 하나 비틀거리지 않고 꼿꼿이 그곳에 서 있었다. 사강은 젖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검정색 비행 슈즈에도 물이 튀어 있었다. 몇 분 사이 손등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  

“너 손은 왜 그래? 데었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윤사강이 H에게 특별한 예외가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악랄한 동료애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라는 듯 말이다. 

“선배님! 어떡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미소가 재빨리 그녀의 손등에 얼음을 끼운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손 안에 얼음을 몇 개 더 쥐고 있었다.  

“기장님…… 괜찮으시겠죠?” 

사강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런던에 도착하면 사표부터 써야 할 거예요, 저.”

“무슨 소리냐구!”

“윤사강, 너 사고 친 거야?”

사무장이 물었다.

“제가 뜨거운 차를 쏟았어요. 거기에. 정중앙.”

사람들이 일제히 사강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변명처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칵핏으로 얼음이랑 물수건 보내, 당장!”

사무장이 사강을 노려보았다. 

사강의 손등에 물수건을 얹었던 미소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틀어막고 어깨가 흔들리도록 웃었다. 발밑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선 ‘떨어진다’라는 말은 금기어다. “나 공항에 다섯시에 떨어져!” 같은 일상적인 말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사강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추락이었다. 

 

매달 21일 승무원들은 한 달 치 비행 스케줄 표를 받는다.

그때, 자신과 비행할 ‘크루 리스트’도 함께 받는다.  

사강은 H의 747-400을 타고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에 가는 일이 없도록 매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난 건 1년 동안이었다. CARGO 기종인 그의 비행기가 승객이 아니라 종종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팀인 윤희가 네 번이나 H의 비행기를 타는 동안 그녀에게는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그날, 사강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표를 읽고 또 읽었다. 

‘드디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녹차 때문에 생긴 얼룩진 자신의 앞치마를 빨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윤희가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객에게 받은 첫 번째 항의 레터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강이 사무장의 충고대로 팔팔 끓는 물에 녹차 티백을 넣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던 녹차가 그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몸의 정중앙에 낙하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난기류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스캔들과 소문을 먹어치우는 회사의 빅 마우스들은 ‘H의 장엄한 소시지를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되는 맹랑한 꼬마가 끓는 물에 삶았다’고 표현했다. ‘운동광인 H가 그날 이후 클럽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돌았다.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사강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표는 말도 안 돼! 그거, 등신 인증이라고! H를 피하면 너만 손해야. 어차피 부딪히게 될 직장 상사라고. 그건 누가 뭐래도 실수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윤희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로 H 얘기를 종종 꺼냈다. 대부분은 그와 함께 비행하며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가끔은 다른 종류의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H는…… 어떤 땐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질 않아.”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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