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전 용돈 없인 절대 안 웃어요!”

불현듯 스치는 사강의 차가운 무표정은 그녀가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고,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용돈을 줘야겠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사강을 바라보았다.  

사강은 그에게 애정이 담긴 선물이 아니라 돈을 줄 때만 아빠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분노와 슬픔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사강의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것이 눈동자 색깔이 다른 이복동생을 직접적으로 증오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아빠에게서 온 선물이 통장에 적지 않은 숫자로 찍힐 때마다, 사강은 엄마에게 다양한 물건들을 선물했다. 반지나 목걸이처럼 애인에게나 줄 법한 값비싼 선물일 때도 있었고, 베트남의 G7커피나 인도의 ‘히말라야’ 화장품처럼 특정한 나라에 가면 승무원들이 광적으로 사 모으는 물건일 때도 있었다. 

“고맙구나. 잘 쓸게.”

엄마에게 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사강은 언제나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빠가 주는 선물이에요.”

그것이 엄마에게 얼마만큼의 위로가 되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특별한 효도라는 점에서도.   


책을 보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는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결혼도 이혼도 그런 식으로 해치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의 남자가 일 년씩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천착했고, 그에게 스타일이란 패턴의 축적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가 미디어 아트를 선택한 것도, 이 분야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움에 열광하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작 시리즈’ 같은 말을 혐오했다. 같은 제목에 번호만 붙이는 것은 그의 성품과도 맞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을 보낸 사람이 아빠라면 그것은 1년이나 이어진 ‘연작’의 형태로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긴 시간을 투자해 견고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 치밀하고 조직적일 것이다. 

결국 사강은 과거에 헤어졌던 남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사강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난 후, 농담하듯 자신에게 이런 책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 명은 됐다. 

그들 대부분은 사강을 먼저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댔고, 백화점 브로슈어 첫 페이지에 나올 법한 선물들을 보냈고, 수컷이 보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추파를 던졌다. 연애가 시작되려면 이런 요란한 행동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사강은 소개팅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비행기에서 자신에게 반해 추파를 던지는 쪽이, “커피나 한잔!”을 과감히 외치는 쪽이 훨씬 건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본능과 직관이 발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적인 구애를 받는다. 사강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십 대 여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연애의 생태계를 이해했다. 일생 동안 한 번의 예외를 빼면 사강이 먼저 좋아했던 남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헤어지자고 한 쪽은 언제나 남자들이었다. 그녀는 늘 먼저 차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가 차이는 쪽이 아니라 찬 쪽이라고 생각할걸?”

친구인 윤희는 그것이 늘 윤사강 연애 역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점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명의 남자들이 사강의 눈앞을 휭휭 지나갔었다. 

승무원이었던 우혁은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고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섹스할 때마다 사강에게 “좋았어?”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묻기 전에 사강이 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사강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우혁과의 섹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바로 섹스가 끝난 후 귓속에 속삭이는 ‘좋았어?’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관제사였던 경완은 취미로 시작한 직장인연합 합창단 베이스 파트의 독보적인 멤버였다. 그러나 사강은 곧 그 목소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활주로가 아닌 침대 위라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데이트한 몇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뀐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지 못했다.  

책을 받는 순간 누구보다 사강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한정수였다.   

그는 우혁, 경완과 다르게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유일한 남자였다. 

한정수는 그녀가 먼저 사귀자고 했던 최초의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최초이며 시작인 유일한 남자.  



사람들은 한정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항공사 직원들과 ‘외항사’라 부르는 외국 항공사 사람들까지도 그를 ‘H’라고 불렀다.

H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는 혼자 산책했고, 혼자 커피를 마셨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러 걸어 다녔다. H의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는데 세상의 소음만큼 싫은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밥 딜런이나 산울림 같은 옛날 가수들의 음악만 들었다. 그가 ‘존 레넌’의 <Hey, Jude>를 흥얼거리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목격자 이외에 한 명도 없었다. 그의 방 어딘가에 날렵하게 잘 빠진 생채기 많은 녹색 펜더(기타)가 있다는 사실을 항공사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H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기타리스트였고,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조앤 바에즈’라는 사실 역시도. 

그는 언제 어디서나 구겨지지 않은 제복을 입었고, 잘 단련된 종아리가 드러난 반바지와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입고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도록 공항 안에 있는 조깅 트랙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가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달리는 걸 멈출 때는 피트니스 센터에 후렴이 반복되는 시끄러운 후크송이 나올 때뿐이었다. 

H에 대해서라면 믿기 힘든 소문들이 많았다.   

가령 그가 어느 날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괴소문이나 울란바토르 금괴 밀수 사건 같은 게 그런 예였다. 그가 회장의 첩자라는 소문은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H는 소문에 대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정점에 있는 건 그가 지키기 힘든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란 사실이었다. 그가 준수하는 원칙은 음반으로 치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클래식’이었지만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환경에 노출된 항공업계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십오 년 동안 직접 태엽을 감아야 하는 오래된 기계식 오메가 시계를 차고, 세 시나 네 시가 아니라 세 시 십일 분이나 네 시 이십육 분처럼 정확함을 요구하는 시간에 비행팀 전체를 이끌고 브리핑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철저한 시간 엄수는 그가 요구하는 승무원의 첫 번째 자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코어북에 매번 최고 기록만을 새겨 넣는 프로 야구선수 같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어떤 타격 폼을 유지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장타자 같았다. 그는 무엇보다 원칙을 위해선 반복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스스로 고집하는 몇 가지 원칙들 때문에 그의 비행기는 젊은 부기장들에겐 존경과 동시에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일부 사람들은 H를 싫어했다. 

어떤 부류는 광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짙은 회색빛 은발과 음울한 눈빛을 가리는 보잉 선글라스는 H를 늘 비밀의 언저리에 있는 인물처럼 보이게 했다. 누구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인사과에 기록된 그의 생년월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는 결혼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와이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행을 마친 사강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픽업 버스를 기다리는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낡아 보였지만 잘 관리된 물건이 그렇듯 시대를 초월한 기품이 있었다.

사실 사강이 그를 처음 본 건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쪽 손등의 상처였다. 

피부 위에 굵은 실처럼 올라와 있는 그 상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였다. 그런 상처는 그의 손등에 한 줄 더 그어져 있었다. 사강은 그 옛날 백과사전 위에 자를 대고 반듯이 밑줄을 긋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강은 그 상처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날 밤 잠들기 직전에도 똑같은 장면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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