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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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강이 날짜변경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열 살 때였다. 

출판사에서 산 두꺼운 전집과 사전을 거실 안에 들여놓는 게 집 안의 품격을 유지한다고 믿는 세대에 태어난 아이는 잘못 들다가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발톱 하나쯤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닌 전화번호부 두께의 백과사전을 제일 친한 친구로 삼았다.

백과사전은 이혼한 부모님의 유물처럼 남겨졌다. 그것은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처럼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먼지를 털어주고, 찢어진 귀퉁이를 정성스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주는 정도의, 말하자면 ‘보관’이란 단어를 쓸 만한 물건이 되었다.   

아빠가 부재하던 유년 시절, 사강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리한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딸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책이라고 믿기 시작한 엄마가 강박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세계명작전집들과 거실에 놓인 거대한 사전의 영향으로 그녀는 오래된 책을 뒤적이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찾아보기 좋아하는 흔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강은 늘 헬로 키티가 그려진 ‘10센티미터 자’를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에 연필로 반듯하게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마주친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녀는 귓속에 그 단어들을 하나둘 숨겨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살이 되던 여름, 동아 백과사전 속에서 ‘날짜변경선’이라 지칭되어 있는 단어와 마주쳤다. 

 

날짜변경선: 북극과 남극을 이어 두 지역의 역일(曆日)을 임의로 구분하는 가상의 선. 본초자오선인 그리니치 천문대의 180도 정반대쪽 태평양 한가운데(경도 180도)에 동서로 나뉜 국제 날짜변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 기준선을 넘나들 때마다 하루를 가감하게 된다. 즉 이 선을 서에서 동으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늦추고, 동에서 서로 넘을 때는 날짜를 1일 빨리한다. 날짜변경선은 태평양의 중앙부를 지나 대부분은 바다의 영역에 있어, 섬이나 육지를 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즉 동일 시간대에 속한 나라가 날짜가 달라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동일 지역으로 묶어, 일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그어져 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변경선은 그녀가 사는 지구에 존재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하늘 위에서 바쁘게 시계를 ‘풀었다 조였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열 살 윤사강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투명한 날짜 경계선 위에 둥둥 떠서 시계태엽을 감고, 풀고 다시 조이는 사람들을 그녀는 상상했다. 

만약 어제와 오늘의 경계선 위에서 한쪽 발은 어제에, 다른 한쪽 발은 오늘에 닿아 있다면 지금의 나는 어제를 사는 걸까, 오늘을 사는 걸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강은 사전을 펼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슬픈 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이 아닌 ‘어제’의 날짜 경계선 위에 서 발걸음을 옮기면 거짓말처럼 없던 일이 되는 걸까?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후회가 되어 눈물처럼 흐를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강은 날짜변경선에 단박에 매혹 당했다.  

어제 누군가 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날짜변경선에선 오늘이 어제가 될 것이므로 고통스런 불행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강의 지구엔 이런 ‘마법의 선’이 존재했다. 블랙홀처럼 시간이 빨려 들어가는 그 ‘구멍’ 속을 사강은 꼭 자신의 힘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날짜변경선을 보려면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강의 미래가 결정됐다. 어린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비행기 승무원은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교수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단어 같았고, 집과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열 살 소녀의 머릿속엔 고향을 타향처럼 느끼는 외로움이 자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비행 승무원이 된 후, 윤사강이 탄 에어버스 330이 지구의 날짜변경선 위를 가뿐히 날아오르던 순간, 사강은 주먹을 쥔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피아노 줄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경계선이 몸 안 여기저기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지문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날은 사강의 생일이었다. 

태평양의 중앙부, 경도 180도의 자오선,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가 수만 마일 너머 날짜변경선 위를 날고 있을 때, 사강은 눈을 감고 자신의 생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빗금 위에 걸쳐져 사라지는 광경을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 사이로 푸른 장화를 신은 날짜 경계선의 정령들이 시계태엽을 빠르게 감고 푸는 모습이 보였다. 180도의 서경 쪽은 180도의 동경 쪽보다 하루 늦게 되는 것이므로 이제 그녀의 생일은 가볍게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짙은 구름들로 한껏 부풀어 오른 어둠 위에 거대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내식과 기내 면세품 판매가 끝난 비행기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에어버스 330의 길고 좁은 복도의 램프 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승객들은 잠들어 있었다. 

사강은 1등석에만 서비스되는 모엣 샹동 샴페인의 기포를 바라보았다. 옅은 복숭아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차갑게 와 닿았다. 그녀는 경계선 위에 놓여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생일을 향해 속삭였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구나.”

날짜 경계선을 알게 되던 열 살의 기억들이 샴페인 기포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보글거리다 톡톡 터져 나왔다. 사강은 그 어둠 속을 뒤로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어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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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다시 비행. 낯선 도시. 낯선 호텔. 시차 부적응. 수면 장애……. 불안정하지만 몇 년 동안 반복되면서 어느새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한 사강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집 앞에 의문의 상자가 놓이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처음 그 상자는 신화나 성경에 등장하는 버려진 어린 아기처럼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밤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쏟아지는 햇볕에 찔렸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왔다. 사강은 무심코 바닥에 놓인 상자를 어린 아기같이 번쩍 들어 올렸다. 상자를 흔들자 이리저리 물건이 상자 모서리에 부딪히며 서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강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책 한 권 들어 있었다. 사강은 그 책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현관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책장을 들춰보지 않은 건 그것이 외국어로 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로 써진 책 말이다.  


*  

                                   

이장희의 노래 <슬픔이여 안녕>은 ‘외로운 내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고 떠나간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로 시작한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으로 변해버려

떨어진 낙엽처럼 멍이 들고 말았네

흩어진 꽃잎처럼 조각난 추억들을

나 홀로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하려오

사랑은 이제 그만 아픔도 이젠 그만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

사랑이여 이젠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사강이 이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된 건 반복되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는 그 순간이었다. 적어도 사강의 기억에 엄마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던 어렴풋한 기억도 났다. 마침내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이라는 사실까지 기억해냈다.   

“아빠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어. 태어나기도 전에 넌 사강이었지. 아들이었어도 네 이름은 윤사강이었을 거야.” 

고민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만약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괴테나 카프카였다면? 자신의 이름이 윤괴테나 윤카프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됨으로써 부모를 저주하는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짓이었다. 

사강은 20대의 아빠를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 뛰어난 청년으로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국제적인 미술상을 받아 신문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인을 이혼녀로 만들었다. 몇 년 후엔 누구도 원치 않는 이복동생까지 안겨주었다. 그와 똑같은 눈매를 한 금발의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장아장 쫓아오는 게 자신이 자주 꾸는 악몽의 도입부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건 이토록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자에겐 아빠가 될 권리도 없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부모가 헤어진 아이들이 그렇듯, 사강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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