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팀장들 모두가 일제히 대표를 바라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디서건 늘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덕분에 표정을 읽기 힘든 사장의 얼굴에 얼핏 미소 비슷한 것이 점처럼 찍혔다 사라졌다. 그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미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란 사람들은 원래 칭찬에 목말라 있고, 장점과 강점 같은 단어에 눈먼 존재들이라는 걸 미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위치한 회사라는 게 장점이죠. 그런 분위기 때문에 타사에 비해 회사라는 딱딱한 느낌이 덜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 준다는 강점이 있어요. 바빠서 잘 가진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의 지하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도 있더군요.”

회장은 처치 곤란이라며 당장 없애고 싶어 하지만 전직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아들이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풍문 속의 독립영화관이었다. 미도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표를 바라봤다.  

뉴욕의 NYU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관객이 거의 들지 않은 망한 영화 몇 편을 찍기도 했던 대표의 눈빛이 검정색 선글라스 속에서 반짝였다. 짙은 그림자처럼 늘 표정을 감추어주던 선글라스는 역설적으로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대표는 무심히 몸을 틀어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가 의자를 살짝 끌어당길 때마다 팀장들의 눈도 바쁘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미도는 잠시 테이블 옆에 있던 생수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했다. 

“생수가 800원짜리 생수통에 담겨 있으면 그냥 800원짜리 편의점 생수가 되겠죠. 하지만 아티스트가 특별히 디자인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이름의 병에 담는다면 그 가치가 얼마로 올라갈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고객에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제 ‘스토리’는 우리 업계 최고의 화두가 될 거예요.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나와서 비빔밥 한 그릇에도 이야기를 담자고 목 터지게 외치는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 팀들의 화합이 아주 중요해요. 분열되지 않고 서로 똘똘 뭉쳐서 이번 기회에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고객들을 확보하는 겁니다. 이런 기획이 아니라면 절대로 결혼정보회사 따윈 쳐다보지도 않을 도도한 고객들 말이죠. 우리에게 열광하는 만큼 우릴 경멸하고 혐오하고 심지어 경박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미도는 조 부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기술에 접목되어야 할 것이 휴머니즘과 인문학이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매칭 계획서나 던져주고, 전화 몇 통 해대면서 우리 회사랑 제휴된 회사가 500개다 600개다 같은 광고 정도로 사람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는 결혼 비즈니스에 눈물이 넘쳐나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접목시키는 거예요. 이 감수성 넘치는 고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서비스를 받게 될 거고, 미래에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들이 될 겁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어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전 이렇게 되돌려 말하겠습니다. 행복한 커플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커플은 제각각 다르게 불행하다! 우리의 타깃은 이미 헤어져서 불행한 커플들이에요. 제각각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미도는 마우스를 클릭해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 파일을 열기 시작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이것이 이번 비밀 프로젝트의 제목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가능하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제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L 결혼정보회사의 대표이사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망한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러나 세상에 망한 영화감독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치열한 영화계에서 입봉조차 못한 조감독 출신들이 즐비한 지금, 그가 말아먹은 영화가 중요해질 일 따윈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원 숫자만 400명이 넘는 이 거대한 회사 사람들에게는 ‘망한 영화감독 출신의 결혼정보회사 대표’라는 긴 이름만큼 부조리한 직함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표는 가끔씩 나타났지만 사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로 예의 발랐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뉴욕 양키tm 야구 모자를 쓴 채 양복을 입는 등 단번에 ‘워스트 드레서’에 등극할 괴상망측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물론 그가 누가 봐도 형편없는 야구 영화를 만들었다가 쫄딱 망해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도대체 어울리지도 않는 야구 모자를 시도 때도 없이 쓴다거나, 번식욕이 유달리 강한 회장의 배다른 자식일 거란 루머는 막 입사한 신입사원들까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도의 이번 프로젝트는 ‘원탁의 기사’ 단 네 명만 참석해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원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진들에겐 무늬만 사장이라고 생각했던 대표가 회의 중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빅뉴스였다. 그런 대표가 한 번도 벗지 않던 선글라스를 벗고 박수까지 쳤다는 믿기 힘든 소식은 삽시간에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물론 회사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건 이 회의를 주재했던 사람이 정미도라는 사실이었다.   

미도가 한때 영화감독이었던 대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벤트로 ‘시네마테크’와 영화를 이용한 영악한 마케팅을 펼쳤다는 건, 그녀를 시기하는 쪽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미도의 이해할 수 없는 레이어드 룩, 일명 ‘덕지덕지 패션’ 역시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란 말도 흘러나왔다. 팀의 위치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미도는 ‘마녀’와 ‘악녀’, ‘천재’로 각기 이름을 달리하며 회오리 같은 소문 속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  

소문과 악명!

이것이야 말로 회사 생활의 꽃 중에 꽃이다. 악명은 정미도에게 회사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었다. 미도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진행해나갔다. 그녀는 즉시 시네마테크 관계자를 만났다. 다음 날 지독한 경영난으로 레스토랑을 포기하려는 유기농 레스토랑 주인을 만나 포섭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해 정기화될 경우 회사가 얻게 될, 이익과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권위와 명성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는 미도가 지켜온 원칙 중 하나였다. 뜸들이다가 김새는 일은 쌔고 쌨다. 당장 돈이 없어 내일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감각이 그녀에게 준 것은 ‘핵심이 아닌 것은 전부 지워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시원에 도착한 미도가 이 화려한 성과에 대해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단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정미도! 이 천하의 사기꾼!”

그것이 동생 미우의 평가였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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