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모두 123쌍의 커플들


‘눈에 보이는 것을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 
이것은 정미도가 오랫동안 주거할 집을 고를 때 고수한 생활 철칙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보일러나 싱크대의 수도꼭지, 화장실 배수구 등은 반드시 작동시켜야 한다. 물을 틀고, 잠그고, 물을 다시 틀어 흘려보내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며 한밤중에 마트에서 ‘뚫어펑’을 사느라 낭패를 보기 싫다면 말이다. 작은 냉장고가 있다면 당연히 열어봐야 한다. 고무 패킹이 떨어져 나간 냉장고는 전기를 잡아먹는 하마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확인하지 않아 집을 계약해버리면 집주인은 고장 난 것을 고치는 데 인색해진다. 장인어른이 생일이라거나, 장모님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없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일 따위를 들먹이며 곰팡이 핀 천장이나 터진 보일러를 방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입자를 나 몰라라 하는 막가파 주인을 대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입안에 백 년 묵은 걸레를 문 것처럼 쌍욕을 해대고, 반복적으로 행패를 부림으로써 주인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사이코를 만났군!”이라고 분명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 시원한 해결 방법엔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 결국, 주변보다 싼 시세의 재계약은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한 가지는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순응주의는 막 서울로 올라온 스무 살 정미도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
하수구는 막힌 채로,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싱크대는 졸졸 흘러나오는 채로, 터진 보일러는 “돈 아끼는 셈 치지!”라고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돌리지 않는 것. 그렇게 미도는 FM 91.9 주파수만 잘 나오는 라디오를 고장 난 채 사용했고, 막힌 하수구 역시 막힌 채 사용했다. 그녀는 한 번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2구 가스레인지를 한 번에 서른 번 넘게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통 사람들에게 없는 비범한 인내심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장시간 웅크리고 앉아 부패한 음식물 찌꺼기 냄새를 풍기는 하수구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펜치로 자른 철제 옷걸이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집어내는 일이나, 배고픔을 참아가며 가스레인지를 수십 번씩 돌리는 일이나,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방에서 영하 10도의 겨울을 나는 일은 모두 극기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장 난 것투성이인 집에서 살다 보니, 스스로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도가 순응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삶의 노선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그때였다.
불평 없이 고장 난 걸 ‘참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착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년은 정말 머리가 고장 난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친절함을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착각하는 인간들을 미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계약하기 전에 친절히 구는 집주인은 더 의심해야 마땅했고, ‘전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고객일수록 더 유심히 주목해야 하며, ‘난 뒤끝 없어!’라고 주장하는 상사들에겐 절대 속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이라고 집이 빠졌는데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그물거리는 악덕 주인에게는 나이와 별개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도리다.
“돈 내놔! 이 개 호로 새끼야! 당장 성추행범으로 형사 고소해버리기 전에!”
그게 미도가 살아온 삶이었다.
 
미도는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이벤트기획부와 웨딩사업부 합동 프레젠테이션에 사용할 자신의 안테나를 챙겼다. 안테나는 그녀의 첫 번째 집주인이 선심 쓰듯 내어준 텔레비전 위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훗날 그녀의 동생 정미우가 ‘1995년에 생긴 태양계의 급격한 변화’라는 제목의 썰렁한 농담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태양계에서 금성이 사라진 거, 정말 놀라운 일 아냐?”
농담의 실체는 이러했다.
1995년에 금성이 LG로 바뀐 것이다.
집주인의 오래된 텔레비전은 1995년산으로, 지금은 황학동 고물상에서조차 찾기 힘든 ‘골드스타’ 마크가 붙어 있었다. 주인은 그 텔레비전을 사고 전세를 탈출해 이곳 은평구 불광동에 첫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는 좁아터진 서울 바닥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텔레비전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이런 선행은 절대로 없을 것이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미도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아저씨가 가져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학생 생각해서 텔레비전도 거저 줬으니 불편하겠지만 싱크대는 그냥 쓰는 게 좋겠어.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라고 말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는 탐욕스런 주인이었다.
골드스타.
한때 우리가 ‘금성’이라 불렀던 전자회사의 텔레비전 광고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

미도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골드스타 텔레비전을 ‘발로 차’ 일부러 고장 낸 것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기념품을 찾다가 텔레비전에 꽂혀 있던 그 안테나를 뽑아왔다. 어차피 고장 나면 절대 고칠 수 없는 옛날 물건이었다. 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그 안테나를 사용했다. 길이도 볼륨감도 적당했다.
순간의 선택은 정말로 정미도의 십 년을 좌우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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