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나 같은 남자를 생물학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많지 않다. 현정은 딱히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도, 호감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조 있는 여자라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오래된 연인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자학하듯 최악의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 것이다. 현정은 딜레마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 밖에 이별을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귀결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것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훈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놈일까? 아는 인간일까? 사내 연애? 학교 동창인 걸까? 당장 다음 달에 결혼 청첩장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빌어먹을, 어떤 얼굴로 청첩장의 신랑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들에게 쏟아질 동정과 위로의 시선들은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의문의 꼬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그에게 남겨졌다.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글자 없이 하얀 백지만 있는 책장을 펼쳐 든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는 외팔이 검객이 나오는 옛날 홍콩 영화를 보다가 맥주 얼룩이 남아 있는 패브릭 소파에서 졸았다. 낮에 꾸벅거리다 보니 밤에는 잠이 더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다가,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없는 휑한 사무실에 출근했다.
딱히 먹을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훈은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주말엔 파자마를 입은 채 세 가지 종류의 라면을 점심과 저녁으로 끓이고, 먹고, 설거지하고, 냄비와 그릇을 일일이 마른행주로 닦고, 냉장고 속을 정리해도 시간이 남았다. 일요일엔 짜파게티를 먹는 광고 속 모범 시민 같은 삶이 그에겐 전혀 즐겁지 않았다. 
라면 봉지를 버리려다가 지훈은 넘치기 직전인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그는 쓰레기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봉지 하나를 꺼냈다. 쓰레기통이 집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먹을 걸 찾는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 뒤에 적혀 있는 매뉴얼을 큰 소리로 읽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뻥끗하지 않은 입에선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순간 면을 먼저 넣어야 할지,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할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몇 시간 동안 온갖 라면카페를 뒤졌다. 그는 ‘365일 라면만 먹고 살고 싶은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긴 이름의 카페 회원으로 가입했다.
머릿속이 쓰레기통 속처럼 가득 차올랐다. 
지훈은 쓰레기통 속의 라면 봉지를 전부 꺼내, 쓰레기통 앞에 앉아 라면 봉지를 겹겹이 접기 시작했다. 그는 라면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스프 봉투 속에 작게 접은 라면 봉지를 집어넣었다. 네 개의 라면 봉지를 이렇게 처리하자 넘칠 것 같았던 쓰레기통의 부피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부피가 큰 라면 봉지는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건 현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럴 땐 혼자 있지 말고 무조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도 빌어먹을 현정이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 한 달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28일과 31일이 낀 달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헤어진 지 삼십 일째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지훈은 평소보다 자주 시계를 봤다.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남자가 멍청해 보인다는 평소 현정의 주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긴 했지만 깨어보면 꿈과 현실이 또렷이 분간되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일상을 두들겼다. 
“새로 나온 벤틀리 엔진 소리 들어봤어? 그 소릴 들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령 늦은 점심을 먹다가 지훈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현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정이 꼭 식판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네가 환장하는 폴 오스터가 이 제품으로 『뉴욕 3부작』의 초고를 썼대. 1974년에 친구한테 40달러를 주고 산 타자기라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니? 소리 한번 들어볼래? 권총 장전할 때 나는 상쾌한 소리가 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현정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잠시 자신의 청각에 진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고민했다.
“이 시계, 태엽 감는 소리 한번 들어봐.”
현정의 관심을 끈 것은 대부분 기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니콘이나 콘탁스의 카메라 셔터 소리나 막 출시된 스마트폰의 다이얼 터치 동작음, 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산 올림피아 타자기에서 나는 차갑고 묵직한 자판음 같은 것들로, 지훈에겐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 시끄러운 ‘소음들’이었다.
현정과 헤어진 지 백 일째 되던 날, 지훈은 박스 안에서 두꺼운 앨범 한 권을 꺼냈다. 앨범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앨범 속 사진을 매일 바라보았다.
사진을 태우는 건 대부분 버림받은 쪽이다.
사진을 태우기 위해 그것을 모으고, 라이터를 켜고, 쓰레기통 속에서 타들어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을 소각시키는 건 심장과 연결된 기억의 일부분을 잿더미로 덮어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지훈은 앨범 속 사진을 바라봤다. 새 롤러코스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에버랜드의 튤립 축제, 광릉의 수목원의 전나무 앞에서 찍은 B컷, 일산의 호수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타며 찍은 사진과 일본으로 떠났던 여행 사진들이 있었다. ‘현정 7세. 현정 12세. 현정 18세. 현정 23세. 현정 27세’로 기록된 사진 속의 현정은 볼이 빵빵한 꼬마 여자아이의 성장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성장 다큐멘터리 같았다. 
지훈은 자신의 입사 첫날, 회사 앞에서 현정과 어깨동무를 하며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의 감정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가지고 있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앨범 속의 사진들을 한 장씩 빼냈다. 그것을 하나씩 태워 없애는 것으로 지나간 일들을 재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훈은 사진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현정의 이마와 볼과 어깨가 서서히 불길 아래로 스러져갔다. 시간을 들여 한 장씩 태워버리면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는 사진을 태우고 남은 극소량의 재를 작은 유리병에 모아두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뼈와 살을 수습해 화장하고 남은 흔적 같았다. 잿가루를 모아둔 유리병을 보며 그는 매일 현정의 죽음을 애도했다.

*

지훈이 트위터에서 우연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을 본 건 그즈음이었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내일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처음에 지훈은 트위터를 무시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는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 일곱 시부터 아침을 먹는다는 발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바쁜 출근길, 회사 앞 단골 노점상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계란토스트 하나를 서서 먹는 정도였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그의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는 가게

그는 충동적으로 ‘기념품’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지훈은 이제 노트북을 바짝 끌어당기고 ‘서로의 상처를 교환한다’는 문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사진을 태우고 남은 재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현정이 준 첫 번째 선물을 떠올렸다.
여름방학 MT,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밤, 그들이 함께 바라보았던 강변의 밤하늘. 지훈은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던 그 밤의 정적을 기억해냈다. 모든 것이 잠든 밤, 그런 정적의 와중에 소름같이 돋아나던 귀뚜라미 소리가 정적을 더 두꺼운 장막처럼 만들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과 나무는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어둠 속에서 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연인들의 손은 터질 듯한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사랑해’란 말을 하기엔 모든 게 희미한 때였다. 지금의 현정이라면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라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사랑의 감정이 도파민과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호통치듯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몸이 간질거리는 수줍음 때문에 그들은 ‘사랑해’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스물 몇 살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었다. 
그는 옷장 속에 넣어뒀던 로모 카메라를 꺼냈다.
버릴 수도, 태울 수도, 누군가를 줘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한다는 건, 그것의 세세한 내막을 모를 때에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것이 실연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훈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없는 물건을 골라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실제 주인에게 그 물건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게 더 의미 없는 물건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지훈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만약 그것이 반지라면 끼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라면?
목에 걸지 않을 것이다.
음반이라면?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스턴트 참치 캔이라면 평생도록 먹지 않고 보관할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런 식의 연상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만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는 가족처럼, 그저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훈은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는 옷장과 누군가의 반지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가지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최초의 선물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현정과의 일을 고통에서 추억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실연을 빙자해 새벽까지 친구들을 붙잡아놓고 술을 퍼마시며 하소연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밤새 먹은 음식을 토해내며 스스로의 배설물을 확인하는 자학적인 방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형편없는 스토커로 떨어져 경찰 신세를 지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실연 때문에 여기저기 곯아 터진 상처가 전시된 갤러리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처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어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참가하고 싶습니다

지훈은 어느새 참가 의사를 밝히는 쪽지를 쓰고 있었다.

 

 

(17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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