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밤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정은 어떤 모습일까
                                                                                                                                          - 에밀리 디킨슨



1부.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 

  

 
오전 일곱 시부터 주름 없이 다린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아침형 인간들일 것이고, 하루 네 시간의 수면만으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침대에서 어렵지 않게 일어날 사람 말이다. 혈색 좋은 얼굴에는 자신감과 미소가 넘치고, 이른 아침부터 서로의 눈을 맞췄다는 동지애로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수성가한 CEO, 정치인, 엘리트 관료들의 은밀한 식사 시간. 호텔의 레스토랑이 새벽부터 이런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건, 이들의 조찬 모임에는 비공식적인 행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조 단위 세금이 투입되는 정책을 결정하거나, 어느 가장의 모가지를 대량으로 자르는 일을 하면서도 밥을 남기는 사람은 없다. 굳이 성공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는 여유가 아침의 밥맛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넘치는 식욕이 강렬한 성욕과 직결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장소는 별 다섯 개짜리 특급 호텔과 비행기 일등석이다.

 사강은 직업상 이들을 자주 봐왔었다.

 그들은 비행기 안에서도 절대 잠들지 않는 부류로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대신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팔목에 찬 채 서류를 보거나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를 읽는다. 통화기금이나 개발협회, 금융공사 같은 이름을 단 국제기구의 고위급 간부, 미국계 거대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전무이사, ESPN 같은 채널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유명 운동선수들…….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말투나, 커피나 물이라고 말하는 대신 ‘더블 에스프레소’, ‘에비앙’이라고 짧게 끊어 구체적으로 말하는 성향, 오랜 시간의 비행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라는 것 외에도 그들은 넘치는 에너지와 돈을 무기로 많은 자식과 애인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 지구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강은 그런 사람들을 ‘기내에서 똑같은 면세품을 두 개씩 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균형의 미덕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명정대함은 이들에게 아내와 애인 모두를 오랫동안 소유할 수 있는 권력 이상의 것을 줄 것이다. 사강은 신중하게 고른 값비싼 선물이 죽어가는 인간관계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공이 인증된 수컷들에게 발견되는 이런 균형의 DNA가 어떻게 체내에 이식되는지에 대한 이론은 아직 들은 바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보고서를 쓴다면 사강은 첫 서문을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샤넬로 하죠.”

 화장품이나 스카프, 가방 역시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샤넬이다.

 그러나 브랜드 ‘샤넬’이 아닌 인간 ‘가브리엘 샤넬’은 오랫동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숨겨진 정부로 살아야 했다. 아내를 둔 남자의 애인들이 닥치는 대로 샤넬의 물건들을 사들이는 것은 수면 위에 잘 드러나지 않는 가브리엘의 무의식과 고뇌를 닮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었을 땐 샤넬이 촌스럽게만 보였어. 샤넬의 두꺼운 트위드 재킷이나 진주 목걸이가 꼭 할머니 옷장에서 막 훔쳐낸 것처럼 보였거든. 근데 나이가 들면서 늘 똑같아 보이던 옷이나 핸드백이 예뻐 보이더구나. 별일이지. 그 여자 옷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내가 샤넬의 클래식 2.55 백을 들게 되면, 그땐 나 역시 중년이 됐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지.”

 샤넬이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고, 권력 있는 남자들의 열정적인 정부였다는 사실을 처음 얘기해준 건 엄마였다. 엄마는 샤넬을 ‘스커트 길이 하나 줄인 것치곤 돈을 너무 많이 번 여자’였다고 말했다. 사강이 엄마에게 제일 먼저 배운 것도 턱을 살짝 치켜들고 상대방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샤넬처럼 냉정하고 단호히 말하는 법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왜 사랑하지 않아? 왜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거지?”

 그때 엄마의 상처 난 목에는 아빠가 선물한 샤넬의 실크 스카프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

 

 

 빈 거리를 버스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사강은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가라앉은 창가에 기대어 대형 광고판이 서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표정이 바뀌는 지점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그녀는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카펜터스의 노래를 들었다. 버스는 이태원 해밀턴 호텔 정류장을 지나며 커다란 배낭을 멘 외국인을 태웠다.

 개암나무 빛깔의 선명한 눈동자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걷기 열풍이 불던 때, 사강은 가슴에 교회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부착한 채 성지순례를 떠나는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여러 차례 탔었다. 그녀는 지중해의 햇볕에 그을린 스페인 남자들의 혈색을, 뜨거운 태양광선 아래서 잘 익은 올리브를 먹고 FC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의 극성팬으로 자라난 ‘카를로, 라울, 호세’라 불리는 스페인 남자들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쉽게 사랑에 빠지지만 금세 식어버리는 악동 기질, 짙은 눈썹을 씰룩이며 자신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특유의 몸짓이나 깊게 쪼개진 턱 사이의 굴곡에 대해서라면 말이다. 남자는 버스에 앉자마자 승객이었던 사강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사강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커다란 배낭을 바라봤다. 남자는 창가를 통해 전달되는 낯선 풍경에 매료된 듯 한동안 서울의 아침을 관찰하더니, 눈물이 고일 정도로 하품을 하며 품 안의 배낭을 베개 삼아 졸기 시작했다. 버스가 좌회전하자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목과 어깨도 부드럽게 꺾였다. 낡은 양철 컵이 매달린 남자의 검정색 배낭이 오른쪽으로 기울며 흔들렸다.

 오전 다섯 시 이십 분.

 피곤에 겨운 졸음이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FM 라디오와 함께 사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강은 서리가 옅게 낀 버스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차갑게 불어왔다. 사강은 새벽녘 한적한 도로 위 상점을 바라보았다. 흰 앞치마를 두른 남자들이 빵집 안으로 쉴 새 없이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건너편 4차선 도로 24시간 편의점 트럭은 물건이 가득 담긴 초록색 플라스틱 박스를 토해내고 있었다. 교차로에 잠시 멈춰서 있던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강은 24시간 편의점 옆 작은 카페 유리창에 적힌 짧은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갓 볶은 원두 커피가 단돈 900원


 

 0의 숫자를 가만히 세어보다가 사강은 문득 멍해졌다.

 그것은 서울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였다.

 저혈압 환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오슬로의 차고 무거운 공기 속을 막 뚫고 돌아온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1유로짜리 동전들을 만지작거렸다. 원두커피의 가격을 알리는 문구 밑에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추신처럼 다정한 말이 동봉되어 있었다.

 

 

 갓 구운 에그토스트 1,000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식빵이 그녀의 눈동자 아래에 잠시 정지해 있었다.

 

 

 갓 볶은

 갓 구운

 

 

 ‘갓’이란 부사 위로 아침에 만든 버터처럼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단지 1유로나 2유로짜리 동전 하나면 가능한 풍족한 식사였다. 오슬로에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문득 서울이 가진 아량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버스가 고가도로 위를 가뿐히 올라섰다.

 사강은 뻑뻑한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이른 봄의 냉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뺨 위로 불어왔다. 가방 속에서 어젯밤 잠들기 직전 맞추어놓았던 휴대전화의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강은 가방 안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마치 익숙한 일상이라도 되는 듯 눈으로 보지 않고 휴대전화 알람 기능을 간단히 껐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사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버스 문 앞에 서서 짧게 하차 버튼을 눌렀다. 버튼 음이 울렸다. 다시 버스의 손잡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FM 진행자의 목소리와 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듯 버스의 맥박이 라디오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카펜터스 특집의 마지막 곡입니다. 불멸의 히트곡. <TOP OF THE WORLD>입니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전주와 함께 카렌 카펜터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하늘의 꼭짓점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침을 여는 라디오의 주파수가 열린 창문 사이로 서울 곳곳을 넘쳐흘렀다. 사강의 눈에 하나둘, 문을 여는 카페와 상점들이 보였다. 딸깍, 자물쇠 열리는 묵직한 소리, 오랫동안 닫힌 가게 문을 열 때 나는 미어지는 쇳소리, 키를 꽂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때 나는 가벼운 진동음들처럼 서울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하철 입구에서 걸어 나왔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어떤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서울의 심박 수였다.

 

(2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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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mlb jerseys 2012.06.07 16: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신재민 실형 3년6월 선고 “청렴해야할 공무원이..” 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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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7.05 16: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5. ans 2012.10.11 20: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만화속세상만 있는 게 아니었네요! 감사히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