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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13일.
 지훈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자동차 클랙슨을 연달아 누르며 C 전자 경주 연수원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직진으로 곧장 뻗어 있던 고속도로는 이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IC를 건너뛰고 직진해 달리면 서울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고 복잡해질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유턴은 불가능하다. 그저 앞으로 가거나, 멀리 다른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이대로 연수원까지 달려가 일 년 동안 지속됐던 C 전자의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내 교육 담당자와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다음 교육 일정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방향을 틀어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다. 서울로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C 전자와는 영원히 등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 때문인지 재채기가 났다. 코를 풀고 버린 휴지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볍게 날아갔다.
 지훈은 시계를 보다가 방향을 틀어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황당할 정도로 멍청한 결정이었는데, 그날은 갖은 방법을 써도 사람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 C 전자 연수원장과의 독대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 중 중요한 일부분 역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이라고 적힌 표지판 위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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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훈! 오늘 연수원장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우린 주말에 통화하기로 했잖아. 나 오늘 선생님들하고 회식이야. 들어가봐야 돼.”
 그가 전속력으로 연수원이 아닌 현정의 학교로 달려가 그녀를 만났을 때, 현정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삶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지훈에겐 불행히도 그 순간이 바로 그때 찾아왔다. 현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줄게”라고 말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입술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현정이 긴 침묵을 깼다.  
 지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말 헤어지고 싶어?”라고 질문하는 게 정현정이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그녀는 대답 대신 ‘반드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결혼하자고 말하면 “결혼하고 싶어?”라고 질문할 것이었고,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네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뭔데?”라고 반문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현정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현정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현정 사이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오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훈련된 협상 전문가처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곳까지 달려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고마워”란 얘길 듣는 순간, 그는 현정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의 한숨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겨울바람과는 다른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았다.

 

 겨우 오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현정은 질문을 포기했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을 무시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랑이란 끊임없는 질문’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아포리즘은 실종됐다. 현정은 대화의 문을 닫았다. 지훈은 대화를 이어나갈 어떤 구실도 찾지 못했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 눈비가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속도 그대로 온몸으로 그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운전 조심해.”
 그는 현정의 손등을 바라봤다. 벌에 쏘여 삼각형 모양의 흉터로 남은 손등에서 추억들이 윙윙대며 쏟아져 날렸다. 지훈의 얼굴 위로 잘 갈린 얼음 알갱이가 달라붙었다. 누군가 티스푼으로 얼음 빙수를 떠 자신의 뜨거운 눈동자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다.
 길을 달려오는 동안 마주쳤던 풍경들이 거꾸로 되돌아와 그를 흔들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12월에 개나리나 목련이 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려오던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지훈은 그녀에게 경부고속도로에서 본 길가의 꽃들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2월에 핀 벚꽃을 보았다고 얘기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어준단 말인가. 그것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 현정이란 자각이 지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것은 지훈이 생각했던 이별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도 가끔, 아주 가끔은, 현정과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차 안에서, 호텔에서, 그들이 숱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익숙한 침대 위에서. 이별의 장면 속엔 늘 축축한 눈물이 있었다. 짱짱한 하늘에 느닷없이 비구름이 몰려오고, 바짝 마른 빨래 위에 비가 떨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끝내 무표정했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이별엔 생략되어 있었다.
 두 시간 후, 서울 도심에 폭설이 내렸다.
 눈발이 점점 더 몰아치더니 무거운 몸체를 이기지 못한 듯 수직으로 낙하했다. 버스와 대중교통은 마비되었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걷기를 멈추었고, 고개를 수그린 채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하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차들은 운행을 포기했다. 정지된 자동차들의 무덤. 도시를 뒤덮던 날카로운 소음들은 진공의 눈 속에 파묻혀 가라앉고 있었다. 12월 서울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고요한 밤이었지만 지훈의 심장은 시속 150킬로미터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나’의 연속적인 타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길고 날렵한 총구를 정확히 겨누었다. 눈이 쏟아지는 도심의 네온 광고판에서 여름만 존재하는 괌 관광청의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그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신의 심장이 와장창, 유리처럼 깨지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 드류 베리모어는 모두 일곱 가지 통신 장비로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전화번호가 하나이던 시절이 그리워! 응답기 하나에 테이프도 하나!” 이 영화는 지훈이 현정과 함께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지훈이 현정에게 처음 이별을 통보받은 건 일주일 전, 월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네 번이나 들어야 했는데, ‘미안해. 잘 살아’로 끝나는 네 가지 종류의 이별 메시지였다.
 만약 어느 날, 각각의 통신 장비에 접속할 때마다 ‘헤어지자!’, ‘잘 살아!’,  ‘건강해야 돼!’, ‘행복하길 빌게!’, ‘넌 진짜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따위의 일곱 가지 버전의 이별 고해사를 듣는다면, 그가 누구라도 21세기적인 이별의 방식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묵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이 전송 방식과 전송음이 제각각인 네 가지 버전의 통신 기계들로 이별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곤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네 번 놀랐고, 네 번 분노했다. 네 번이라고 했지만 그건 매번 그에게 그전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 현정은 제일 먼저 이메일로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2. 현정은 페이스북에 그 사실을 올려놓았다.
3. 현정은 지훈의 트위터에도 이별 사실을 알렸다.
4. 그러고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이별의 메시지는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일관되게 도착해 있었다.
 사실 현정의 이별 메시지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과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마우스로 긁어서 복사해 올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현정은 네 번이나 같은 얘길 반복했다. 분명히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은 이 불길한 냄새가 결국 테스토스테론과 관련된 것이며, 그녀가 남긴 일관된 이별 메시지가 남긴 유일한 의미는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다른 남자가 생겼어!’라거나 ‘다른 놈이랑 잤어!’ 같은 고백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자명한 이유를 이제껏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현정은 실언한 게 아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16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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