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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이 입사한 A 컨설팅 회사는 다국적 기업으로 다양한 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상 활력팀’이란 괴상한 이름의 부서도 있었는데, 지훈이 원한 건 바로 크리에이티브한 일과 관련된 그 부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업 교육’이라는 뜻밖의 업무가 맡겨졌을 때, 지훈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를 가르친 경험이라면 대학생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잠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했던 게 전부였다. 수영이라면 개헤엄밖에 칠 줄 모르는데, 뭔가 대단한 행정 착오로 특별 해양구조대의 일원으로 차출돼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며칠 동안 결국 사표를 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매달 집세를 내야 했고, 대출받았던 대학 등록금도 상환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양원에 있는 형을 위해 저금을 해두어야 했다. 물론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는 건 간단치 않았다.
 그는 결국 회사의 선택을 증명하는 쪽으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저녁을 간단히 김밥이나 피자 같은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일도 잦아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유명 강사들의 동영상 파일을 보며 특유의 몸짓이나 강의 스타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컨설팅 교육 팀에서 받은 다양한 해외 자료들을 읽어보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야근이 계속됐지만 이런 생활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너, 네가 담당하고 있는 기업 교육이 얼마나 심층적인 건지 모르지? 그냥 자료 찾아 리포트 나눠주고, 강연하고 그런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교육이야말로 컨설팅의 기본이야.”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날, 최 부장이 술자리에서 지훈에게 말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게 저랑 잘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말은, 그러니까 모르는 걸 직접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초등학생이랑 대학생이 같은 문제를 두고 같은 판단을 내릴 것 같아?”
 “회사가 대학생이란 얘기예요?”
 “네가 초딩이란 얘기지. 회사가 사원의 사적인 경험까지 설계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고민을 회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길 절대 원치 않는 건 오히려 회사 쪽 입장이었다.
 “이봐, 이지훈. 회사는 괴물이야. 빅브라더라구. 누가 날 자르는지 누가 내 진로를 결정하는지 아무도 몰라. 널 내 라인에 집어넣기로 결심했으니 내가 재밌는 얘길 하나 해주지.”
 최 부장은 500시시 생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켜며 연달아 트림을 해댔다. 콧잔등 위엔 하얀 맥주 거품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느 기업이 특정 사원을 뽑아놓았을 땐, 다 그만 한 이유가 있으며 그의 미래는 어느 순간, 회사에 의해 정해진다는 건 최 부장의 논리였다. 아시아 시장을 성장의 동력으로 보고 그것에 주력하고 있는 모 선박 회사의 경우, 미래에 인도 법인을 키우기 위해 인도 전문가를 뽑았다. 흥미로운 건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이 인도 전문가로 키워질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남자는 계속 외국을 떠돌며 실질적인 업무 경험을 쌓는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영국, 다시 인도. 짧은 파견 기간이 끝나자 그는 인도의 델리나 뭄바이에 있는 현지 공장을 돌며 다시 일을 배운다. 석회질이 가득한 인도 현지 물을 마셔가며 설사와 배앓이를 하던 초창기와 다르게 그는 점점 인도의 물과 흙과 공기에 적응해간다. 물론 어떤 말을 하던,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일수록, “NO PROBLEM!”이라 외치는 인도인 특유의 정서에도 적응한다.
 계속해서 척박한 풍토의 나라를 떠돌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진력이 날 즈음, 남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나 독일의 베를린 같은 곳에서 회사가 제시한 파격적인 교육 연수의 혜택을 받기도 한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드는 회사 연수의 대가로 그가 지불해야 하는 건, 몇 년 동안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불허하겠다는 회사 측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청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회사의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흘러간다. 스물네 살 청년은 서른이 되고 곧 삼십 초반을 넘어서게 된다.
 “너,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외국으로 뺑이 돌리듯 돌려대는 거.”
 최 부장은 이제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심호흡을 하며 지훈을 바라봤다. 술을 들이켜며 계속 코를 벌름거리느라 그의 콧구멍에는 더 많은 공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봐봐. 일단 남자의 동선을 잘 살펴보면 회사가 그 남자를 잠시도 서울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단 공통점이 나와. 이유가 뭐겠어?”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서울 본사에서 일할 만큼 능력이 없어서?”
 “당신도 그런 생각이 들지? 근데 아니야. 그건 서울에서 한국 여자를 사귀지 말라는 소리야.”
 “얘기가 이상하게 튀는데요?”
 “왜냐!”
 최 부장은 잠시 지훈을 바라보더니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말 설고 물 설은 인도에서 뿌리박고 평생 살겠단 여자는 별로 없 거든. 인도가 뉴욕이나 파리도 아니고, 폼 안 나잖아? 게다가 한국 여자 뒤에는 한국 엄마들이 버티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딸 가진 엄마들이 좀 극성이야. 딸내미 인도 가서 산다면 카레 해 먹이면서 버선발로 반대하겠지. 카레는 내가 평생 질리게 해주마. 넌 인도 가지 마라! 걔랑 당장 찢어져!”
 “그러다 독신으로 늙어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설마 회사가 독신주의를 원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 회사는 나 같은 독신남을 정말로 싫어해. 외로워서 술 처마시고, 룸살롱 가서 헛돈 쓰고 지랄하는 애들을 회사라고 좋아하겠어? 돈 벌어오라고 꽥꽥 소리 지르는 와이프도 있고, 학교 보낼 애들도 주렁주렁 매달려야 홧김에 사표도 안 집어던지고 충성 복무하면서 암에 걸리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할 거 아냐?”
 “그러니까, 부장님 말의 요지가 뭐예요?”
 “아직도 모르겠어?”
 답답하다는 듯 최 부장이 지훈을 바라봤다.
 “인도 여자 사귀란 소리지 뭐야! 현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면 인도 문화를 깊숙이 알게 되고, 그럼 그 여자의 오랜 경험이 이 남자에게 이식되겠지. 힌두나 이슬람 문화를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부인이 인도인인 이 남자는 외국인이지만 인도 법인에서 벌어지는 직원들 사이의 갈등을 조율할 때도 인도적인 마인드로 접근할 수 있는 거야. 황당한 이유로 파업을 하거나, 더 황당한 이유로 배 째라고 웃통 벗고 사표 던지는 미치광이 인도 직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인도 시장을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제품을 만드는 데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거야. 한마디로 인도인 부인이 그 남자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는 거지. 이거야말로 완벽한 현지화 전략이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남자는 애초에 인도 법인의 사장으로 키워질 인재였다는 거야. 회사가 그 남자가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미리 다 설계해놨던 거라고. 어릴 적 잠시 뭄바이에서 살았다는 게 회사가 그를 선택한 중요한 요인이었지.”
 “이거 소설 같은데? 정말이에요?”
 “초딩이 머리 굴리지 말고 닥치고 일이나 하라는 소리야!”
 “근데 회사가 개인 메일을 체크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겨우 이메일만? 모르는 게 약이야.”
 “언젠 아는 게 힘이라더니.”
 “귀걸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야, 끝!”
 최 부장의 불콰한 얼굴을 보며 지훈은 앞에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거나한 그의 트림 소리는 시끄러운 가요에 묻혀 사라졌다. 
 그날 이후, 지훈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메일은 회사 랩톱 컴퓨터가 아닌 개인 노트북으로 썼다. 

 회사에선 컴퓨터로 개인적인 메신저나 쪽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공식적인 일과 비공식적인 것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회사에 입사한 지 삼 년 후,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이건 그저 비즈니스적인 판단일 뿐이에요”라고 잘라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놀랍고 급격한 변화였다.

 

 

(13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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